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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인

재미교포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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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미주 한인 이민의 배경: 미국 이민법의 변화2.2. 이민 1세대의 역사2.3. 이민 2세대의 역사2.4. 하와이 거주 한인의 역사
2.4.1. 1900년대 초 하와이의 사회 분위기2.4.2.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들2.4.3. 하와이 거주 한인을 향한 인종차별2.4.4. 하와이 거주 한인과 타 인종간의 인종관계
2.4.4.1. 유색인종 차별의 기본 논리
2.4.5. 미국/하와이 여성 이민
3. 범주4. 한국 혈통과 관련된 정체성
4.1. 정체성 관련 재미한인의 고충4.2. 한국과의 문화 갈등4.3. 정치 성향4.4. 대한민국 이외 국가 출신
5. 유명 인물
5.1. 정치인
5.1.1. 현역 연방상원&하원의원
5.2. 공무원5.3. 기업인5.4. 문학, 예술, 디자인5.5. 음악5.6. 군사 분야
5.6.1. 장성급 장교
5.7. 체육계5.8. e스포츠5.9. 과학, IT, 교육계5.10. (연예계) 가수5.11. (연예계) 배우5.12. 기타
6. 가상 인물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1. 개요

한국계 미국인(韓國系 美國人 / Korean American[1])은 한국계 미국 시민권자(U.S. Citizen)를 말한다. Korean American(s)을 부르는 다른 호칭으로는 재미교포(동포)가 있다. 단, 재미교포(동포)는 미국에 체류 중인 한국인(한인) 전체를 포괄하는 뜻이 될 수 있다. 한국계 미국인은 재미교포의 최대 집단 중 하나로, 한국 혈통 미국 시민권자만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렇듯 Korean American은 태어난 장소에 관계 없이 조상 중에 한국인이 한 명이라도 있고, 미국 시민권 단일국적 또는 미국과 타국의 복수국적을 동시에 보유한 사람을 의미한다.

한편 260만명에 이르는 재미교포는, 한반도를 제외하고 외국에서 가장 큰 한국계 집단이자, 대한민국의 설립과 한강의 기적민단 재일교포들과 함께 가장 많이 기여한 그룹이다. 또한 80-90% 정도 친한 한국계인 일본[2]의 재외동포들과 달리 99% 대한민국 출신자가 차지하고 있는 대형 한인(韓人) 사회이기도 하다.[3] # 2024년부터 미국의 화폐에도 한국계 미국인이 존재한다. 한국계 첫 미국 화폐 인물

한국 여권(만)을 가진 미국 영주권자는 미국 시민권이 없으므로 한국계 미국인이 아니다. 그들은 영주권을 가졌을 뿐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국민에 해당한다. 출입국시 미국 여권을 사용할 수 있어야 미국 시민권자에 해당된다.

재미동포는 사전적으로 미국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한민족의 사람을 말하고, 법률적으로 개별 법령의 입법목적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폭 넓게는 국적불문 한민족의 혈통을 가지고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을 말하고,[4] 폭을 좁혀 대상을 구체화한 경우에는 부모의 어느 한쪽 또는 조부모의 어느 한쪽이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사람을 말한다. 한국계 미국인 조상의 출신국가는 대한민국이 99% 이상으로 가장 많고, 일부는 북한, 일본,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권 국가의 국적 출신인 경우도 극소수로 있다.[5]

외교부에서 발간하는 재외동포 현황에 따르면 2021년 미국에 거주 중인 재미동포는 2,633,777명이었다. 참고로 이 수치에는 미국 시민권자뿐 아니라 미국에 거주 중인 대한민국 국민(재외국민)이 포함되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미국 국적의 미국 시민권자 동포는 1,529,855명, 한국 국적의 재외국민은 1,103,922명[6]이다. 같은 시기인 2021년 미 통계청은 인구 및 가구 조사 자료에서 한국계 미국인의 수를 1,469,854명으로 제시했다. 미 통계청이 제시한 자료는 하나의 인종 정체성(One Race)을 가졌다고 응답한 경우만 집계되었다. 즉 다른 민족 커뮤니티와 통혼 등의 이유로 하나 이상의 인종 정체성을 지녔다고 답한 경우는 제외되어 있다. 추가로 한국계 미국인 중 약 1,011,589명이 한국 태생이다. 2023년 이후부터는 외교부 산하에 재외동포청이 신설되어 해당 업무를 담당하며, 2,615,419명으로 비슷한 수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이 가장 많은 주는 캘리포니아주이며[7] 캘리포니아주에 558,338명이 산다. 그 다음으로 뉴욕주, 텍사스주, 뉴저지주, 버지니아주 순서이다.

2. 역사

한국계 미국인의 역사는 유구하다. 한국인이 미국으로 이민한 최초의 기록은 1885년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 몇명이 조선 시대 고종 때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망명한 것이다. 서재필은 1890년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딴 한인'이 된다.[8] 이후 구한말 대한제국은 빈민층의 해외 이민을 적극 장려했다. 주한미국공사 알렌의 요청을 받은 고종이 직접 칙령을 내려 국가가 부양할 수 없는 빈민들을 이민시켰다. 1903년 1월 13일 102명 한국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을 갔고, 바로 그 해에 미국 본토에서 출생한 첫 한국계 미국인이 태어났다. 국가 정책으로 이민을 장려했으므로 어떤 요건도 필요없이 그저 맨몸으로 이민가고 싶다고 하면 모든 것이 OK.

2.1. 미주 한인 이민의 배경: 미국 이민법의 변화

미국의 이민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이민법이 당시 미국의 대외 또는 대내적인 정치적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이 이민법에 의해 유입되는 사람들의 형태를 규정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 역시 미국의 이민정책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9]

미국은 독립 후, 1790년 최초의 이민법은 국적법(Nationality Act)을 통해 시민권을 부여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규정하였는데 이것은 백인 자유인(free white person)으로 한정하였다 남북전쟁(1861-1865)중이던 1862년, 공화당 중심의 의회는 전쟁의 불씨가 되었던 흑인노예를 대체할 목적으로 남부의 농장주들이 중국인 노동자들을 들여오는 것을 금지하는 중국인 금지법(Act to prohibit the "coolies trade")을 시도했으나년 이민법은 결국 계약노동자(indentured servitude)가 입국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는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의 남부 주들에 대한 "흑인노예 해방선언"을 뒤이은 조치였으며, 실제로 남북전쟁 이후, 1868년 "벌링게임 조약"(Burlingame Treaty)과 함께 중국이민자들에 대한 문호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10]

사실 중국인들은 1848년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이후 대륙횡단열차를 건설하기 위한 노동자들로 들어왔으며, 처음 미국에 입국한 중국인 이민자들은 서부의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철도 건설과 금광 개발을 위한 건설 노동, 주방, 세탁 등의 일에 종사했다. 그러나 중국인 이민자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음에도 무역상, 정치인, 그리고 선교사들이 전한 중국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점점 커졌으며, 1870년 공황과 함께 시작된 경제적 어려움으로 미국정부는 구체적으로 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 1882)을 시행하였다. 이것은 최초로 특정 국가를 이민에서 배제하는 법이었으며, 10여년 이상 지속되거나 연장되었다. 1900년대 초까지 중국인들의 입국에 대해서는 많은 제한을 가하였다.

1898년 미국으로 병합되어 2년 후 주로 편입된 하와이에서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을 경영하던 농장주들은 값싼 노동력을 찾던 중, 이민법으로 인해 중국 광저우로부터 노동자들이 더 이상 미국영토로 들어 올 수 없는 사정에 직면해서, 이들을 대신할 사람들에 대한 이민을 추진하였다. 당시 일본인 노동자들은 1885년부터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에 한국인보다 먼저 들어왔지만, 일본인 노동자들의 연대로 인해 노동 임금은 올라갈 수밖에 없었고, 이에 더 싼 노임으로 들여올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한국인이었다.

1901년 한국은 전국적인 극심한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고종은 기근으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긴급하지 않은 토목 공사를 중단하고, 식량정책을 강구할 것과 곡식을 도입하는데 면세를 명령하였다. 아울러 구휼을 담당할 혜민원을 설치하여, 직접 하사금을 내고 조정대신들과 일반 관리도 월급의 일정부분을 의연금으로 전달했으나, 전국적인 굶주림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이때 미국 공사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Allen)이 고종에게 이민을 제안하였다.

알렌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협회를 대신하여 1902년 한국 정부(대한제국)와 이민 조약을 맺었고, 한국 정부는 궁내부 산하에 수민원을 설치하여 이민 업무를 보게 하면서, 하와이로의 집단이주가 시작되었다.1905년 이민금지령이 있기까지 1903년부터 1905년까지 하와이로 65척의 배로 7,226명(또는 7.394명)이 이민을 가게 되었다.[11]

2.2. 이민 1세대의 역사

이들은 주로 이민귀화법(1964년)이 시행되기 이전에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말한다. 즉, 이민 1세대는 일제 강점기의 척박한 정치적, 경제적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더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1세대 이민의 모빌리티는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이주라고 할 수 있다.[12] 한국의 역사적, 정치 적 상황으로 인해 도피하듯이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의 물결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쟁고아의 입양과 미군과 결혼한 여성들의 결혼이주(또는 "전쟁신부"(War Bride))로 이어진다.

(추가로, 1924년의 이민법은 아시아인의 미국 이민을 금지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 당시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아시아인들은 시민권을 신청할 수 없었다. 아시아계에 대한 차별법이라는 관점에서 미국 이민법 연구[13]에 따르면 미국 시민권은 아시아 이민자들을 국가 정치 영역 안으로 마지못해 포함시키면서도 자신들의 본토로 돌아가야 맞는 존재로 주변화 시켜 규정해 왔다고 밝혔다.)

1세대에 해당 되는 결혼 이주민은 전쟁과 가난, 비극의 땅으로서의 고향을 등지고 미국 땅에 왔지만 새로운 땅에서도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하고 정체성이 파편화된 존재로 살아간다. 이들 중 대다수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미군의 아내를 위해 시행된 1946년의 "전쟁 신부법"(War Bride Act)에 따라 한국인이지만 미국으로의 입국을 가능했던 경우에 해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군사기지와 군사시설 안으로 거주지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한인 공동체나 미국인 공동체로부터 소외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14]

데이비드 황(David Hwang)의 작품 제목이기도 하며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한 "배에서 방금 내린"(fresh off the boat)[15]라는 표현은 갓 이민 온 1세대 이민을 비하시켜서 부르는 표현으로, 작품 속 노라의 남편과 딸의 무의식의 저변에는 한국인으로서의 흔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미국에 전혀 정착하지 못한 노라에 대한 창피함이 숨어 있다. 작품 속에서는 "타락한 여자들의 교회"(The Church of Fallen Women)라고 농담 삼아 불렀다고 하면서, 이들이 타락한 것은 아니고 대부분 초라한 모습(frumpy)이라고 묘사함으로써 이들을 낮춰 보는 필자의 시각을 드러내었다. 한국 전 이후의 불우한 경제 상황에서 미군 기지 근처의 바에서 일을 하다가 미군과 결혼하여 이주한 국제 결혼 여성들은 한국에서도 "양색시"라는 비하적 표현을 들을 뿐 아니라 미국에 와서는 시댁 식구들의 불인정이나 무시로 인해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다. 대개 낮은 학력을 가진 이들이 미국에서 영어를 유창하게 하여서 직장을 갖거나 사회 진출을 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들이 기댈 곳은 남편 밖에 없었으나 전시 상황의 군부대라는 특수 환경에서 로맨틱한 감정으로 맺어 졌던 커플들에게는 남편이 미국의 현실에 눈을 뜨면서 아내를 학대하거나 아내와 이혼하는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또한 이들이 자녀를 키우면서 그들에게서 사랑과 희망을 발견할 것을 기대하지만 이 작품[16]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혼혈로 태어난 자녀들은 사춘기를 지나게 되면 이국 태생의 어머니에 대해 창피함을 느끼게 되고 혼혈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의 디아스포라는 물리적인 장소 상실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마음 붙일 곳 없는 유목의 생활이며 숨통이 트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같은 처지의 여성들과의 대화와 유대 뿐이었다.

결혼 이주 여성과 비슷한 수준으로 이민 1세대를 대표하는 부류에는 입양 고아가 있다. 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영아나 유아 시절에 미국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향으로부터 완전히 뿌리 뽑힌 인물들이다. 자신을 낳아준 고국에 대한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백인부모의 손에 양육되면서 백인의 문화와 정체성을 수용하도록 교육받지만 남의 옷을 걸친것 같은 혼란을 겪는다. 그 혼란은 성년이 되면서 더욱 커지고 외모와 사고방식의 괴리로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전쟁과 식민의 경험을 몸소 겪었던 1세대는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서라기보다 시대적 상황에 내몰려 디아스포라의 길로 나섰기 때문에 어떤 다른 세대보다 미국에 뿌리를 내리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언어적 능력의 부재와 고립과 단절로 인해 가족들과도 유리된 채 같은 처지의 이민자들과의 유대감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위 영상은 최근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노인들의 삶의 만족도가 크게 낮다는 조사 결과를 입증하는 사례이다. 이들은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모범적인 소수 인종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본인의 어려움을 잘 표하지 않아 우울증이나 고립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2.3. 이민 2세대의 역사

그러나 대부분의 한인 이민자들은 1965년 미국이민법의 개정 이후 경제, 교육, 정치 등의 이유로 미국에 대거 몰려오기 시작했다. [17] 하트 셀러 법(Hart-Celler Act)로 더 잘 알려진 1965년에 개정된 이민국적법 (Immigration and Naturalization Act)은 미국 이민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이전에는 국가별로 이민을 허용하는 쿼터가 정해져 있었고, 그 쿼터는 유럽국가에 압도적으로 편중되어 있었지만 이 법 개정으로 인해 쿼터 시스템이 철폐되되었다. 대신 가족의 재결합과 이민자의 기술을 기준으로 우선순위제도를 채택하여 아시아계 이민은 전문가와 숙련노동자 등 취업이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중 영주권자들은 미국에서의 5년의 영주기간이 지난 후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시민권을 얻은 후에는 가족들을 초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1960년대, 70년대에 전문 기술 자격증을 가진 이들, 주로 의사, 약사, 간호사, 의료 기술자, 과학자 등이 핵가족 단위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18]

이들은 이주 후에도 가족구성원이 유지됨으로써 경제적 적응이 용이했고 대졸, 전문직, 화이트칼라 직종 출신의 이민자들은 주로 미국에서의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이민을 결심하였다.[19] 자녀를 명문대학에 진학시켜 의사와 변호사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미국에 온 이민자들은 미국 사회에서 발 붙이고 사는 것이 녹록치 않은 것[20]을 깨닫고 자녀들 또한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미국 학생들에게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부부간의, 부모 자식 간의 의사소통이 소원해지고 갈등의 골은 이들을 역기능적인 가정으로 이끄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전문 기술 자격증을 가진 이민자의 수는 극히 작아졌으며, 가족 초청에 의한 한국인의 이민이 미국 이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21] 또한, 이들의 사회 부적응은 현재 LA, 뉴욕, 시카고를 중심으로 코리아타운이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2세대 이민자들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한국에서 고학력이면서 미국에서의 더 나은 삶과 자식들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해주기 위해 이민을 왔지만 비록 한국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미국의 직장이나 생활 현장에서 의사소통이 잘 될 수 있을만큼 유창한 영어는 아니며 그것 때문에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을 당했다. 또한 이들은 미국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데 필요한 자격증과 면허증을 취득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이들 중 대부분은 한국에서 하던 전문직을 버리고 소규모 자영업에 종사하는 등 하향적 사회이동을 하여 신분적으로 낮아지게 되었다.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완벽한 영어를 하며 미국적인 정체성을 추구하는 자녀들조차 부모의 사회적 부적응과 한국적인 기대감으로 인해 고통 받았다.[22]

2.4. 하와이 거주 한인의 역사

2.4.1. 1900년대 초 하와이의 사회 분위기

1900년, 하와이는 인종 및 경제 계급으로 구분된 사회였다. 토지, 경제, 정부를 지배했던 최상층은 서유럽인의 후손인 29000명의 백인(haole[A])이었다. 이들은 설탕의 생산, 운반과 관련된 다섯 회사인 빅5(big5)의 관리직과 주정부의 관료직을 차지하며 하와이의 경제와 정치 체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반면 최하층은 토지를 거의 소유하지 못하고 낮은 임금을 받으며, 정치에는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76,000명의 일본인과 27,000명의 중국인이 자리잡고 있었다.

1920년, 일본인은 농장 노동력의 70%를 차지한 반면, 대부분의 중국인은 백인들 즉, 'haole'(하울리)[A]들이 소유한 사탕수수 농장을 떠나 도시 지역에 살았다. 이에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농장의 방대한 일본인 노동력이 노조를 형성하여 높은 임금을 요구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때문에 농장 관리인들은 농장에 분리-지배 방책(divide-and-rule tactic)[B]을 쓰기 위해 일본인이 아닌 다른 민족을 들여오고자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03년부터 1905년 사이에 사탕수수 농장에는 약 7,000여명의 한인이 이주해오게 되었다. 농장주들은 한인들의 노동 이민을 통해 농장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게 유지하고, 노동 폭동을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대한제국에서 하와이로 보낸 노동이민자는 1903년 1,133명, 1904년 3,434명, 1905년 2,659명 등 모두 7,226명에 달했으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후 해외 노동이민을 전면 중단시키는 이민금지령을 내리게 하였다. 일본은 일찍부터 하와이에 이민자를 보내 이때 당시 이미 6만명의 일본인이 하와이로 이민한 상태였다. 그런데 새로 유입되는 조선인들로 인해 기득권을 침해받을 위기에 처하자 일본 정부가 대한제국에 압력을 행사해 이민을 좌절시킨 것이다. 이민금지령이 반포되던 바로 다음 날 정부 부처 사이에 손발이 맞지 않았던지 대한제국 정부 외부에서 1,000여명의 이민자들에게 여권을 발급해줘 멕시코로 이민시킨 일이 있었다. 이민 브로커가 개입되어 있었고, 이민자들은 멕시코 농장주들이 돈을 많이 낸 순서대로 사갔다는 것은 나중에 알려졌다.

2.4.2.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들

이때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을 간 한인들이 모여 이민의 중심지는 하와이가 되었다. 다른 장소는 상기되었듯 샌프란시스코가 있는데, 굵직한 인물들이 거주 목적으로 왔다간 곳으로 유명하다.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등이 있다. 다만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에 단기 거주를 하였고 대부분의 여생을 미국 동부와 하와이에서 지냈으며, 안창호 독립운동가의 경우 하와이와 로스앤젤레스 인근 도시인 리버사이드에서의 생활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안창호 선생의 아호인 도산(島山)이 하와이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26]

1910년대와 1920년대가 되어서야 한인들과 다른 아시아인들은 도시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도시화가 됨에 따라 여러 인종들 간에 상호작용이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백인들은 한인들이 미국화되어 가고 있다고 여겼다. 도시지역에 있는 한인들은 점점 공민의식을 지니게 되었고, 한인들의 활동은 생각할 수 잇는 모든 사회적 스펙트럼과 연결되었다. 일반적으로 그 활동들은 서양 문화에 기초한 것이어서 대부분 미국인들 사이에 사회적으로 인기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1. 한국 보이스카웃 연맹(Korean Boy Scout Troop) [27]
2. 대한인국민회(KNA)
3. 한인 청년 기독교인 협회(the Korean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28]

한인과 미국인 간의 인종관계에서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중요한 단체는 대한인국민회(KNA)였는데, 가혹한 미국 법률체계와 한인사회 간의 완충기 역할을 감당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가난한 한인들을 위해 변호사를 고용했고, 한인들이 연루된 범죄를 조사하고, 재판관행을 개선할 것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1911년 대한인국민회는 법정이 지명한 한국어 통역자의 통역기술이 불충분하다고 여기고, 지방법원 판사와 경찰에게 탄원서를 보내서 그 통역자를 해임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중한민중동맹(Sino-Korean Peoples' League)와 같은 다른 단체들 뿐만 아니라 대한인국민회도 여러 회의에 참석하여 협의사항 등을 공표하면서 미국 정부에 한국의 주권을 인정해 달라고 호소함으로써 한국 독립을 위해서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은 하와이와 미국 내의 훨씬 방대한 시민사회의 한 부분이 되었고, 더 중요하게는 미국화된 소수민이라는 한국인의 이미지에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한인 청년 기독교인 협회(the Korean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29]는 한인들에게 유리한 홍보를 제공하는 도구가 되었다. 1914년에 설립된 이 기관은 실직자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주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며 한인들 사이에 기독교적 가치를 확장시킴으로써,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활동하였다. 또한 160명이 규칙적으로 출석하며, 일주일에 네 번씩 열리는 야간학교를 지원했고, 타이거 클럽(Tiger Club)이라 불리는 성경공부 단체를 후원했다.

2.4.3. 하와이 거주 한인을 향한 인종차별

1932년까지 하와이의 인종간의 비율은 크게 변화했다. 1909년과 1931년 사이에 112,828명의 필리핀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하와이에 도착한 것이 그 변화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하와이의 380,507명의 거주민 가운데 일본인이 146,189명, 필리핀인이 65,515명, 중국인이 27,235명, '하울리'[A] 23,000명, 그리고 약 7,000여명의 한인들이 있었다.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하울리'들은 계속적으로 하와이 섬의 경제적, 정치적인 기반을 지배했고, 이 권한을 다른 민족들을 정복하는 데 사용하였다.

백인들은 아시아 사람들을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겼으며, 아시아계 하와이 거주민들에 대해 차별대우를 하였다. 그러나 하와이의 인종차별은 미 본토에서 일어났던 인종차별에 비하면 그렇게 노골적인 것은 아니었다.[31] 하나의 아시아계로서 한인들은 다른 인종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차별대우를 받았다. 사실상 1930년까지 혹은 그후까지도 '하울리'[A]들은 아시아 민족들을 거의 분류해서 보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1910년 한일합방에 의해 한인들이 일본의 신민이 되었고, 하와이 한인들은 본국을 떠나서까지 자신들이 일본의 신민으로 지칭되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하지만 한인들을 지배하는 일본의 식민지적 태도는 하와이로 옮겨왔고, 한인들은 제2전선에 있는 일본인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2.4.4. 하와이 거주 한인과 타 인종간의 인종관계

위에서 언급한 한인 차별의 사회 분위기에 따라 1903년부터 1913년까지 한인과 백인간의 인종관계는 '하울리'의 인종차별이 공개적이고 노골적이었기 때문에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물리적으로도 대부분의 한인들은 사탕수수 농장에, '하울리'[A]들은 도시 중심지에 있었기 때문에 두 인종간의 접촉이 매우 적었다. [34] 이렇게 정기적인 접촉이 결여됨으로써 인종에 관한 자의적인 풍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하울리'들은 이전에 중국인, 일본인과의 인종관계에서 겪었던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한인들에 대한 견해를 형성하였다. 이에 반해 한인들은 백인들과의 접촉 경험을 직접 구전으로 후대에게 전했다고 한다.

1903년에서 1910년대 후반까지 한인들에 대한 '하울리'[A]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미개하고 야만적이다.
2. 무지하다.[36]
3. 한인들과 나머지 소수민들은 지역사회에 위협적인 존재이다.
4. 한인들은 범죄를 저지르는 소수 민족이다. [37]
5.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 충성을 바치는 급진적인 민족주의자이다.

특히, 5번째 이미지와 관련하여, 한인들의 민족주의는 1905년 한국이 일본의 보호령이 되고 1910년에 합병된 후에 더욱 고조되어 고정화되었다. 1920년대까지 '하울리'[A]들은 한인들의 민족주의 활동을 급진주의적이자 무정부주의적이라고 분류하였다. 그 결과 한인들의 민족주의 활동은 한인사회에 오명을 씌우게 되었다. 이 이미지는 한 때 하와이 주민이었던 장인환이 1908년 3월 23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정부에 친일파 고문 노릇을 하던 더럼 W. 스티븐스를 암살했을 때 보편화되었다. 장인환더럼 W. 스티븐스가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옹호했기 때문에 그를 죽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여러 신문에서는 하와이 한인들이 그 음모를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더럼 W.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하와이에서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무정부주의자라는 한인들의 이미지는 1909년 한국의 전 일본 총영사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 후에 더 강렬해졌다. 여러 한인들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일어난 일은 그의 교활함에 딱 맞는 보상이며, 우리 조국을 훔친 데 대한 정당한 처벌이다"라고 언급하면서 암살을 높이 샀다. 미국사회에서 암살은 테러행위이고 그것을 지지하는 이들은 무정부주의라고 여겼다.

또한 백인들이 한인들을 전형화할 때 한인들이 기독교 소수민족이라는 긍정적인 요소도 있었다. 많은 '하울리'[A]들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미국화를 위한 중요한 첫 단계라고 간주하였다.
1906년에 하와이 한인들의 1/3이 기독교인들이라고 추정한 바가 있는데, 수 년 동안 감리교회는 백인들과 한인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상호작용한 유일한 접촉점이었다. 한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향상된 인종관계를 잠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비기독교도인 중국인과 일본인들은 전 지역사회의 토대로 하는 이러한 향상된 인종관계가 부족하였다. (백인들은 신도(Shintoism)와 불교는 미국적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한인들이 주로 한인교회에 출석했고, 일반 한인 기독교인은 백인 기독교인들과 정기적으로 상호작용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 접속의 중요성은 경감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하울리와의 공통성은 긴 안목으로 볼 때 한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고 한다.[40]
2.4.4.1. 유색인종 차별의 기본 논리
특히, 1900년대의 초기 20년 동안은 미국에서 인종에 대한 편견이 매우 높았다. 이 시기에 하와이의 인종간 상호작용은 본토의 흐름에 따랐는데, 본토에서는 백인들이 유색인종들에게 사회, 경제적으로 자신들의 종속적인 역할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하와이의 엘리트 미국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41]을 받아들였다.

사회진화론에 따르면 가장 강하고 가장 능력이 있는 인종이 가장 발전된 나라에 사는 반면, 열등한 인종은 후진국에서 산다고 보았다. 한인들에 대한 초기 인종차별은 서양인들이 한국을 아시아에서 가장 약한 나라 중 하나라고 여겼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열등한 인종이라고 생각했다고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사회진화론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오리엔탈리즘, 인종관계가 힘에 근거하며 지배세력은 자신들의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약한 세력을 제한하는 데 그 권력을 사용한다는 논조]에 기반한 인종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숫적으로 우세한 아시아인들을 사회적으로 경시하고 비정치화하기 위해 모순적인 내용으로 '유색인종'을 전형화하였다.

예를 들면, 한인들은 아이같으나 위험한 존재이고, 여자같이 나약하나 성적으로 위협적인 존재이며, 조직적으로 일할 능력이 없으나 국제적인 음모를 꾀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이러한 용어는 한인들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백인들이 심리적으로 한인들을 멀리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또한 이를 통해 백인 엘리트들은 하와이의 정치적, 사회적 기관에 대한 지배권을 독점하려 했다.

2.4.5. 미국/하와이 여성 이민

하와이 초기 여성 이민은 사기성 국제결혼이 많았다. 일명 사진결혼.[42] 예를 들어 사진만 보고 왔더니 남자가 젊어서 이민 올 때 찍은 사진이고 실제 나이는 아버지뻘. 반대로 예쁜 사진을 보고 결혼하기로 했는데 실제로 하와이에 온 신부는 생판 다르게 생긴 추녀… 알고 보니 자기 사진이 없어 옆집 사는 다른 여자의 사진을 보낸 거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다보니 결혼 만족도는 낮았으나 교육열은 타 민족에 비해 월등히 높아, 2세들의 문맹률은 0.1%대로 낮았다고 한다.[43] 1910년부터 1924년까지 14년 동안 1,056명의 처녀가 이런 식으로 하와이로 이민을 갔고, 1924년 아시아인배제법[44]이 통과되면서 중단되었다. 한미수교 몇 주년 기념 기사처럼 용기와 개척정신으로 온 게 아니고, 요새 같으면 PD수첩이나 추적60분에 고발될 만한 사건이다.

아시아인배제법이 시행된 1924년부터 완전 폐지된 1965년 사이에는 전쟁난민, 고아, 입양아, 미국인과의 결혼으로만 이민이 가능했다. 특히, 1927년 미국의 전쟁신부법이 개정되면서, 미군의 배우자에 한해 아시아인이 미국에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미군과 결혼하여 이주하는 여성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 A very weighty objective opinion can be added that very likely it will be difficult for George Kim (Enl) to find American, White girl for a spouse, because of existing racial barriers in America.” (“Application for Permission to Marry”(1949.2.12.), RG 338, Records of USAFIK, Lt. Gen. John R. Hodge Official File, 1944-48, Entry 11070, Box 69, A.G. 014.36, Marriages.)


"미국에 존재하는 인종주의의 장벽(racial barriers)으로 인하여, 조지 김(사병)이 자신의 배우자로 미국인이면서 백인 여성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는 매우 진중하고 객관적인 의견도 있습니다."[45]

1949년 2월 12일 주한미군 내에 제출된 결혼허가신청에 대한 군목의 추천서의 한 대목이다. 이 추천서에서 주한미군의 군목 미첼 필립(Mitchell W. Phillips)은 주한미군의 일반사병이었던 조지 김(George Kim)이 한국계 미국인이라서 미국 내에서는 결혼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에 한인 여성 임원규(Won Kyu Lim)와의 결혼을 승인해야한다고 표현했다. 당시 1947년 미군의 인종적 부적격 아내(racially inadmissible wives)를 포용하는 수정 법안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미군의 외국인 아내를 염두에 둔 제한적인 법으로써 인종문제를 부각시켰다.

반면에 1945-48년 미군정 시기에는 미군 아내에 한해 특별비자를 내주었기 때문에 하와이 한인 2세들은 미군부대로 지원하여 한국에 나가 결혼해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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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표는 1948년에 제출된 것으로 확인되는 주한미군의 38건의 혼인보고서 중 한인 여성과 결혼하겠다고 결혼 허가 신청을 한 한국계 미국인 9명의 인적 정보이다. 위 표를 살펴보면 미군이 한인 여성과 결혼한 경우는 38건 중 총 9건(약 26%)이다. 이 9건 중 8건이 한인 출신들의 결혼, 즉 동일 종족의 결혼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결혼은 인종(종족) 간 결혼의 사례는 거의 보이지 않고, 주로 동일 종족의 결혼의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반면 1949년 초부터는 한인 여성-백인의 혼인 허가신청이 보이지만 승인되지 않거나, 허가를 받지 않고 혼인하여 출산까지 하는 사례가 발견된다. [47]

이처럼 많은 한국계 미국인 남성들은 한국에 미군으로서 근무하는 기간동안 한인여성을 만나 결혼하였고, 미군과 한인 여성의 초기 결혼 형태는 한국계 미국인이 미국의 인종주의적 장벽을 넘지 못한 채 그 아래에서 대안으로서 찾은 동일 종족의 결혼 형태였다.

2차대전이나 한국 전쟁 이후 전쟁 신부나 주한미군과의 결혼 등으로 나가는 경우가 특히 많았는데, 인식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5.16 쿠데타 이후 미국 교민 사회에서도 "대학생 → 사랑해서 결혼파"와, "양공주 → 눈맞아서 파"끼리 대립이 무척 심했다고 한다. 당연히 채 장군은 이 사람들을 화해시켰다고.

이후에는 취업이민이 붐을 이뤄, 초기에는 기능직 이민이, 1990~2010년대에는 고학력 취업이민이 절정에 달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로는 이민자 수가 점차 감소했는데[48] 이민을 위한 이민이 아닌 적성에 따른 취업과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떠나는 결혼이민 등의 사유로 변화하였고, 자녀교육을 위해 이민하는 경우는 여전하였다. 코로나19 이후로는 고학력자의 취업이민이 많이 늘어났다.[49] 그러다보니 과거 1950~1970년대 이민세대와 1990~2020년대 이민세대간에 이질감이 존재하기도 하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과거 세대가 퇴진하고 새로운 세대가 주역으로 등장하여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50]

아무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민자 수가 늘어나면서 안정적인 동포 생활이 시작되었고 재미동포 이민의 중심지도 점차 하와이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각지로 퍼지기 시작했다. 도시에 코리안타운을 구성하고 한국계 정치인들[51]이 나올 만큼 재미교포의 세력을 확보하고 한국도 나름대로 발전하여 한국 유학생이 유학갈 때 도움을 받기도 하고 기중 뜻이 있는 교포는 모국의 문화를 찾으러 한글을 배우기도 하고 한국에 방문하기도 하는 경우도 있으니 나름대로 좋은 것이고 성공한 것이다. 120년전에 이민 칙령을 내걸었던 고종이나 하와이행 미국 상선을 타던 이민자들은 미래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가졌을지 알 방도는 없다.

3. 범주

미국인들끼리는 Korean American을 일상 대화에서 그냥 Korean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물론 실제 한국인이란 의미기도 하면서 "한국계"란 의미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다른 인종의 경우에도 Irish, Scottish 이런 식으로 아일랜드계 미국인, 스코틀랜드계 미국인과 실제 그 국가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를 혼용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이민의 역사가 짧은 민족이나 소수민족을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민족의 용광로(melting pot)라 불리는 미국에서도 민족에 따른 구분이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용광로라는 개념은 예전 이야기이고, 문화적 모자이크(cultural mosaic) 또는 샐러드 그릇(salad bowl)이라는 개념으로 바뀐 지가 한참 됐다. 민족의 용광로는 혈통과 문화가 이리저리 뒤섞인 백인 미국인들에게만 통하는 얘기이지, 자신들의 출신이 어디인지 명확히 알고 있고 아직까지 인종간 통혼이 그리 빈번하지 않은 비백인 미국인들이 백인계 미국인들과 함께 살고 있는 현재에는 오히려 샐러드 그릇이나 문화적 모자이크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다만 백인끼리 문화가 섞였듯, 아시아계 사이에선 각자의 문화가 용광로 같이 섞였다고 할 수는 있다. 특히 아시아계 이민의 역사가 길어 3세, 4세, 5세 이민자가 흔한 하와이나 캘리포니아의 경우, 여러 문화권의 동양계 아이들이 '동양계 미국인'(Asian American)이라는 정체성 아래 다같이 어울리며 융합된 문화를 공유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만큼 동양계 사이의 통혼도 흔한데, 특히 부모님께서 1세대 이민자거나 1세대 이민자가 주로 사는 동네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동양계 이민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동부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도 동양계로서 다 같이 공유하는 정체성이 있고 통혼도 더러 있으나, 'XX계 미국인/캐나다인/호주인/뉴질랜드인'의 정체성이 더 강하고 문화가 섞이는 경향이 적기 때문에 용광로보다는 모자이크 성향이 여전히 더 강하다.

재미동포는 가장 큰 해외 교민 사회다. 2번째는 재중동포, 3번째는 재일동포.[52] 2019년 미국의 통계 기준으로 약 1,908,000명 수준.[53]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파악하는 한국계 미국인은 시민권자 기준으로 2019년에 2,546,982명으로 대한민국 제3 도시인 대구광역시 인구에 육박한다. 외교부가 파악하는 미국 소재 한국인 영주권자는 464,154명으로 여기까지가 재미교포. 이외 미국에 거주 중인 한국인은 일반 체류자 512,938명 유학생 105,616명 수준이다. 한국계 미국인은 소득 수준이 매우 빠르게 성장하는 집단 중 하나다. 2019년 기준 한국계 미국인의 가계 소득은 72,000$로 미국 평균인 68,700$보다 높았고, 아시아계 미국인의 평균인 85,800$보다는 낮았다. 다만 한국계 미국인의 가계 소득이 아시아계 미국인 평균보다 낮은 이유는 인도계 미국인(약 12만$)과 대만계 미국인(약 10만$)의 매우 높은 가계 소득 때문이고, 아시아계 미국인에 속하는 집단간 순위로 보면 중위권은 된다. 물론 미국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상위권에 속한다.[54]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게,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재미교포들이 전부 고학력에 중산층은 아니다.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재미교포들이 한국에 오거나 언론에 노출되어 재미교포 = 중산층의 스테레오타입으로 보이는 것일 뿐, 일용직에 종사하거나 마트캐셔로 일하는 서민층도 적지 않으며, 고국의 친척을 보러 한국에 오는 것도 힘든 팍팍한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계 미국인의 가계 소득은 미국 평균보다 높지만, 아시아계 미국인 평균보다 낮은 것에 대해 잘못 오해하여 폄훼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전술했듯, 인도계 미국인대만계 미국인의 가계 소득이 월등히 높기에 평균이 매우 높게 형성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9년 기준 아시아계 미국인의 평균 가계 소득을 넘는 집단은 인도계 미국인, 대만계 미국인, 필리핀계 미국인뿐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계 미국인이 인도계 미국인, 대만계 미국인, 필리핀계 미국인 등보다 가계 소득이 낮은지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도 있는데, 간단한 문제이다. 각자 이민의 역사가 다르고, 배경이 다르고,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도계 미국인은 애초에 인도에서 고학력이었거나 고소득층이었던 사람이 매우 많다. 그리고 인도는 영어권 국가이다. 또한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였고, 영어권 국가이기 때문에 정국이 불안정한 개발도상국 특성상 고소득층의 미국 이민 열풍이 매우 거셌다.

한국계 이민 1, 2세대는 초기 정착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거나 세탁소나 슈퍼 등 작은 자영업을 운영하는 등 시작부터 어려웠다고 볼 수 있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어서 미국 사회의 주류로 활동하기 어려웠다. 불과 20세기 초부터 이민의 역사가 시작됐고,[55] 1962년 이민법 개정으로 대거 이민자가 유입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다른 아시아계에 비해서 이민의 역사가 짧다.

또한 남아시아계, 동남아계 등에 비해 확실히 대가족 단위가 적다. 위에 첨부된 자료는 household, 즉 가계당 수입을 측정한 것이므로, 가족구성원 중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인원이 많을 수록 그 수치가 올라갈 수 밖에 없다. 대개 핵가족 위주로 구성되어있는 한국계 이민자 가정은 이 측정에서 불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민 사회의 형태나 특성 따른 차이가 원인일 수 있다. 예컨데, 일본계 이민자들은 그 이민의 역사가 매우 길어 미국 주류사회에 동화된 경우가 많고, 중국계 이민자들은 차이나타운이 너무 발달되어 있어 그 안에서 안정적인 경제활동이 가능하다. 인도인이나 필리핀인의 경우는 본래부터 영어를 수월하게 구사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으므로 주류사회에 적응 및 편입이 용이하다. 하지만 한국인 이민자들은 1세대의 경우 언어문제로 주류사회 편입이 굉장히 힘들고, 역사가 짧아 언어 문제가 없는 2세, 3세의 비율이 적으며, 그렇다고 한인타운이 차이나타운처럼 독립적인 거대경제를 꾸릴정도로 완연하지도 않다. 즉, 한인사회의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처지가 낮은 소득으로 드러난 것일 수 있다는 관점이다.

한편, 한국계 미국인은 다른 집단보다 현금을 다루는 개인사업자(자영업)의 비중이 월등히 높기에 탈세가 원인이라는 이유도 있다. 전문직과 달리 개인 사업자는 본인이 직접 소득을 신고하게 되어있고 현금 수입은 100% 정확하게 보고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한 한국계 미국인은 개신교 신자가 많고, 대부분이 한인교회를 찾으며, 이들 한국계가 한인교회에 하는 각종 헌금, 특히 한인교회만의 특징인 십일조 헌금이 소득 통계의 허점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56] [57] 그러나 소득측정은 당연히 지출 내역에 상관 없이 발생 시점에 바로 산출되므로 교회 헌금을 냈다고 소득이 적게 잡힐 리는 없다. 교회 헌금을 위해 따로 탈세를 한 게 아닌 이상 가능성은 적다.

4. 한국 혈통과 관련된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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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에서 한국계 미국인이 큰 업적을 이루어내거나 명성을 얻으면 당연히 한국계 미국인으로 소개한다. 단, 보통 이민 2세대나 3세대 동포인데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성인이 된 후에 이민을 가서 어렵게 생활하며 정착한 이민 1세대는 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더라도 한국인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뚜렷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나서 쭉 생활한 이민 2세대나 3세대는 부모가 적극적으로 한국어한국 문화에 대한 교육을 하지 않는 이상 한국교포라는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58] 현재 국적포기자의 상당수가 이쪽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보내는 아동이 많던 시절 미국으로 입양된 경우도 10%에 달한다 한다.[출처][60]

체감상 부모의 교육이나 미국 내 거주하는 위치가 한국계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전술한 것 처럼 부모가 가정에서 한국어한국 문화를 안 가르치고, 거주하는 곳도 한인들의 비율이 적은 미국 중서부나 다양한 몇몇 지역들일 경우 앞서 말한 검은머리 외국인이 될 확률이 높지만,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나성구라는 별명을 가진 LA를 중심으로 한 서부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주, 다양한 지역들과 텍사스와 조지아 주, 그리고 동부의 버지니아와 뉴저지 주, 뉴욕의 퀸스 등 한국인 거주민 비율이 높은 곳 출신의 재미교포 2세들은 워낙 주변에서 한국인을 흔하게 만나고, 한글 학교 등을 통해 한국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다 보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보다 뚜렷하고 한국 문화에도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61] 이는 비단 한국계 미국인뿐만 아니라 중국계, 인도계, 베트남계 등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일본계 미국인은 제외라는 서술이 있었으나, 당연하지만 이쪽도 케바케다. 일단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도 하와이에서는 큰 탄압이 없었기에 일본계 정체성을 유지한 경우도 많았고, 미국에 협조하면서도 일본계 정체성을 잃지는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민온 일본계 미국인 또한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들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외모 때문에 생활에서 편견 섞인 시선을 받게 되거나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있어 자신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는 2010년대 이후 미국 내의 아시아계 인구수 급증과 그들의 사회 진출 증가로 인해 아시아계 미국인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며 줄어들고 있긴 하나 아직은 이러한 편견이 조금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이민 2세대인 릴라 리 (Lela Lee)의 <앵그리 리틀 걸>이라는 만화로도 알 수 있는데, 주인공인 '킴'이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너는 참 영어를 잘 하는구나!"하면서 칭찬을 해주는 것에 대해 "나는 미국인이라고!"라며 불평을 하는 것이 한 사례이다.[62][63]

한국인이 재미교포에게 가지는 가장 큰 고정관념은 재미교포들은 한국과 큰 접점을 갖지 않는 경우가 더 많고 외모만 한국인이고 정체성은 미국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20세기까지의 재미교포들이 지금보다도 더 그런 생각을 하며 행동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독재정권이 들어선 후진국이었으며, 재미교포들은 그런 상황에서 한국을 떠난 이들이 다수였기에 더욱 한국과의 인연에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경우가 존재했다. 이미 2000년대 초엽에 들어선 먼나라 이웃나라같은 아동용 책에서도 다룰 정도로 한국내에선 상당히 퍼진 고정관념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재미교포가 한국인 또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한국 문화를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뿌리 자체가 미국으로 건너온 영국인 이민자들로부터 만들어졌고 현재의 미국인들이 자신들을 영국인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유럽계 백인 이민자한테만 해당하는 내용이고 동양계나 히스패닉계, 아프리카계 등 비 백인계 이민자들이 겪는 현실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유럽계 이민 2세들은 미국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백인들이 자신들과 생김새도 같고 문화적 유사점도 많기에 미국에 동화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으며, 2세대로만 내려가도 모국의 언어와 문화를 거의 잃어버리고 웬만해서는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이런 케이스를 민족으로서의 미국인이라고 한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재미교포 2세대, 혹은 3세대들은 아무리 미국에서 태어나고 정착해 오래 살아도 초등학교, 심하게는 유치원 때부터 히스패닉, 흑인, 동양인과 같은 비백인을 대상으로 암암리에 자행되는 인종차별과 소외에 신물이 나서, 자신이 백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뚜렷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들 중 성인이 되어 재미교포로서 한국계를 포함한 아시안들의 미국 내 권리와 위상 강화를 위해서 힘쓰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최근에 미국 내 아시안 인구수가 급증하며 점점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그리고 모국인 한국과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64] 젊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고국방문단을 만들어 한국 방문을 하거나,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어한국 문화를 배우려 수학하기도 하는 등이 그 예시이다.[65] 심지어 한국 군대에 자원입대하는 미국 시민권자 또는 미국 영주권자도 가끔 나온다.[66] 특히 한국에서 활동하고 한국인과 결혼하는 한국계 미국인들도 많다. 재미교포 2세들의 대다수가 한국어보다 영어가 유창하여 한국인들과 의사소통할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많은 오해가 있는 듯 하다. 주 거주지가 미국인지라 언어 및 문화의 차이야 어쩔 수 없는 요인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우리와 관계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일부러 거리감을 둘 필요도 없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또한 강요할 필요도 없다. 양자택일보다는 조화롭게 대한민국 국익에 부합하게 한국계 미국인 인재를 활용하면 된다.[67]

4.1. 정체성 관련 재미한인의 고충

관찰에 의하면 대부분의 미주한인 2세들은 '고통스러운' 자기 정체성을 경험한다고 한다.
이중화 과정이다. 즉, 두 세계(한국과 미국)로 갈라진, 양 갈래로 갈라진 길에 서서 동으로 가야 할지 서로 가야 할지 모르는 이 과정은 고통스러운 것이고, 화나는 것이며, 앞으로도 끊임없을 것 같다. 어린시절의 나의 세계는 비한국계 미국인 또래들의 세계와 몹시 달랐다. 나는 내 친구들처럼 미국 땅에서 태어났다. 나는 그들과 함께 학교에 갔고, 또 그들과 놀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여러모로 달랐다. 집에서 나의 가족은 피넛 버터와 젤리를 먹지 않았고, 저녁 식사 때 에그 스크램블을 먹지 않았으며, 토마토 수프나 마카로니 치즈 등을 잔뜩 쌓아 놓지도 않았다. 어릴 때 나는 가족과 학교에 관하여 내 또래 아이들과 다른 가치에 놓여 있었다. 나는 서로 다른 가치 체계의 산물이었다. 코리안 아메리칸 2세로서 어디가 고향 땅인가 하는 질문이 늘 나를 괴롭혔다. 내가 태어난 곳은 미국이다. 그러나 내 마음속 한구석은 늘 한국에 가 있다.[68]
2세들은 주류사회로부터 '타자'로 인식되면서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경험하는 순간 많은 2세들은 부모의 모국에 대해 매우 '수치감'을 느끼기도 한다. 어렸을 때 배운 한국말은 가족 내에서 부모와의 의사소통을 위해서만 쓸 뿐이고 공공장소에서는 한국말을 아예 모르는 것처럼 굴기도 한다.

모국에 대한 수치심과 부정적인 경험은 중국계나 일본계 이민의 후손들과 비교할 때 더욱 커지는 경우가 있다. 즉, 동아시아의 국가 중에서 중국은 문명의 기원지로, 일본은 근대문명과 경제 기적을 이룬 강대국으로 인식되지만 한국은 그들 나라의 속국 혹은 아류로 간주될 때 그들의 수치심이 더욱 증폭되는 것이다. '한국을 대변하는 독특한 문명이 있는가?'하는 질문에 그들은 매우 곤혹스러워 한다.
중국계 미국인 친구가 도대체 너의 부모의 나라에 오리지낼리티(originality)가 있느냐고 물을 때마다 할 말이 없다. 수업시간에 배운 한국의 역사, 음악, 미술 등을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중국에 없는 것이 없는 것 같고, 모든 게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생각을 한다. 이름도 한문을 쓰지 않는가? 일본계 친구들은 우리를 늘 얕보는 것 같다. 일본 자동차인 도요타나 닛산 등은 베스트 퀄리티로 인정받는 반면, 현대 자동차는 못사는 흑인들이나 히스패닉 애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다.
이러한 자기 방어적 수치감은 직접,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인종차별에 의해 가속화되기도 한다.

이민자들의 미국 문화 수용과 이문화 적응에 대한 선행 연구[69]에서는 한국계/아시아계 미국인의 미국 문화 수용과 관련하여 4가지 정체성 적응(identity adjustment) 유형을 제시하였다.
파일:4types.png
위 표에서 제시된 것과 같이 각 유형은 다음과 같다. 동화(assimilation),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 주변화 (marginality), 두 문화 통합(bicultural integration)이다. [70] 이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이민자들이 미국 문화에 사회 문화적 적응을 하는 모습과 경향을 설명하고 있다.

동양의 영향을 받은 한국 문화와 서양의 영향을 받은 미국 문화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고, 이러한 문화의 차이는 가족의 삶에 뚜렷한 영향을 미친다. 일부 연구[71]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이민자 사회는 현재 한국의 전통적 사회 구조와 표준(norms)이 붕괴되고 아직 명확하게 구별된 서양의 표준으로 대체되지 않은 전이(transition)의 단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해당 연구가 미국에 있는 모든 한국계 미국인 이민자들의 경험을 대변하지는 못하겠지만, 유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계 미국인 이민자들이 미국 주류 사회 적응 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여준다.

재외한인의 이주가 1910년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로 100여 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미국에는 약 200만 명의 한국계 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재미한인들은 미국 사회에서 양적으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소수민족이다. 이러한 성과는 이민 1세대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1.5세대와 2세대들이 미국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 속에서 이민세대들의 정체성 혼란은 재미한인 사회가 해결해야 할 숙원사업이다. [72]

2007년 조승희(범죄자) 총격 사건,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은 재외 한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여러 언론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던 김명화 하버드대 교수는 2013년 보스턴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상담을 17여 년간 해오고 있지만, 조승희(범죄자)보다 더 심각한 학생을 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민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정체성(Identity) 혼란과 이민 자녀들의 낮은 자존감(Self-esteem)을 들었다. 그에 의하면 한국 남성이 타 아시아계 남성에 비해 우울장애 수치가 크게 높았고, 한인 여자 아이들은 타 아시아계에 비해 가장 낮은 자존감 수치를 기록했다. 이처럼 재외한인사회에서는 개인의 정체성과 자존감뿐만 아니라 민족정체성(Ethnic identity)과 집단자존감(Collective self-esteem)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73]

일부 연구에 따르면, 재미한인 중 영주권자는 시민권자에 비해 민족정체성이 더 높음을 확인하였다. 일반적으로 국적이 한국인 영주권자들은 시민권자들보다 자기가 속한 집단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고, 시민권자일수록 자녀의 족외혼(미국인과의 결혼)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 신분상태에 따라 민족정체성에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는 연구[74]도 존재했다. 또한, 일반적으로 이중적 귀속감을 갖고 있는 재외 한인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모국에 대해 아예 무관심하거나, 반대로 모국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재해석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림하려는 상반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고 한다. [75] 집단 자존감의 향상은 재미한인들의 모국과의 교류와 협력을 촉진시킬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4.2. 한국과의 문화 갈등

한국계 미국인들은 한국인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일부는 미국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었고, 일부는 한국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또 일부는 한국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다. 일부는 완전히 한국에 다시 동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본토 한국인들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차이를 느끼는 한국계 미국인들도 많다. 이러한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의 변화와 세대의 교체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1세대는 1950~1970년대와 1990년대 이후에 도착한 세대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주로 낮은 소득과 문화수준을 가진 이민자였고, 후자는 고학력자 위주의 취업이민자[76]들이거나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들이었다. 전자는 한국에서 오는 방문객들이 부유하고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신들이 알던 한국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괴리감을 느낄 수 있다. 반대로 후자와 한국인들은 1세대가 과거에 갇혀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강남이 논밭일 때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들로 한국이 가루세제도 없이 살고 있는 줄 안다"는 고전을 아직까지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서 미국에 파견가는 한국인들 중 미국으로 이사짐을 보낼 때 요즘도 추가로 정수기, 양말, 고추장, 라면 같은 것을 넣기도 한다. 이러한 갈등과 괴리는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계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세대간 이질감이 존재한다. 새로운 세대는 과거 세대가 한인회 등을 중심으로 보수적이고 과거에 고립된 삶을 사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정치관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한인이라는 이름아래 모여있으면 오히려 갈등만 야기할 뿐이어서, 한인회 등은 오래 전부터 젊은 세대들이 참여하지 않는 노인기구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나 1950~1970년대 이민한 세대는 현재 나이가 이미 80~100살을 넘겼다. 즉, 과거에 갇혀 살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중 아직도 활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또한, 한국과 미국 사이의 정보와 문화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한국인들과 한국계 미국인들 사이의 인식도 변화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양쪽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고, 유튜브,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등의 플랫폼을 통해 영화, 드라마, 쇼, 뉴스 등의 콘텐츠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 또한, 아이폰, 구글, 삼성, LG, 테슬라 등의 기업들이 양쪽에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며, 기술과 자본의 융합을 이루고 있다. 한국에 가루세제가 있는지, 미국에 양말이 있는지는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면 몇초면 알수 있는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과거에 존재했던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사이의 갈등은 점차 해소되고 있는 문제이다. 새로운 세대들은 이질감보다는 공감과 협력을 추구하며, 양쪽의 장점을 배우고 인정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4.3. 정치 성향

재미동포 중 미국 시민권자로서 투표권을 보유하고 있는 인구는 250만 명 가량으로 미국 전체 인구의 1% 정도라 정치적 영향력은 보통이다. 캘리포니아주, 뉴욕주, 텍사스주, 뉴저지주, 버지니아주, 워싱턴주, 일리노이주, 조지아주, 메릴랜드주에 132만 명(66%)이 몰려 살고 있다. 상기한 주들은 레드 스테이트인 텍사스주, 공화당 우위 경합주인 조지아주, 민주당 우위 경합주인 버지니아주를 빼면 전부 블루 스테이트이다. 레드 스테이트와 블루 스테이트 문서 참조.

베트남계쿠바계처럼 출신국정치적 상황으로 인한 반공주의 성향도 꽤 있고, 여기에 복음주의 성향이 강한 한인교회의 영향력으로 아시아계 미국인들 중에서도 보수 성향이 강했었다. 물론 이는 연령차가 있어서 한국계 정치인 중에서는 70년대 이전에 태어난 한국계 정치인들은 공화당 소속이 많고, 70년대 이후에 태어난 한국계 정치인들은 민주당 소속이 더 많다.[77]

다만 현재는 한인교회의 영향력도 예전만 못해서[78]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1980-1990년대생 2세-3세 한국계들이 성인이 된 뒤로 크게 달라졌다. 2012년 대선결과를 보면 한국계는 민주당 버락 오바마 후보 78% vs 공화당 밋 롬니 후보 20%로 민주당에게 몰표를 줬다. 8페이지 참조 2016년의 설문조사에도 62%의 한국계 미국인이 공화당을 부정적으로(unfavorably) 받아들이며, 특히 도널드 트럼프에 적대적(adverse)인 시선이라는 결과가 나왔다.[79]

2020년 선거에서도 조 바이든 57%, 도널드 트럼프 26%로 나타나고 있어 민주당 성향이 강하다. #

4.4. 대한민국 이외 국가 출신

일부 탈북자들이 미국에 망명하면서 미국 국적을 취득하는 경우가 나오고 있다. 2004년부터 해당 망명이 법적 지원을 받았는데 아직 규모는 매우 적다. 조선 국적이나 일본 국적의 재일동포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경우도 있고, 러시아·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 등 구소련 국가 국적을 가진 동포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경우도 있으며, 조선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 수가 많지 않다. 다 합쳐서 0.1% 이하에 불과하다. 중국 국적이라 인구가 많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조선족도 인구감소를 겪고 있어 앞으로도 늘어날 일은 없다. 또한 그들은 중국인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중국계 미국인이다.

5. 유명 인물

모든 한국계 미국인을 다 쓸 수는 없고, 폭을 좁혀 한국인이라면 알만한 유명 한국계 미국인 중에 미국 국적을 가진 한국계 미국인을 주로 기재했다.(이중국적 포함) 정확한 목록은 영문위키를 참고.

5.1. 정치인

5.1.1. 현역 연방상원&하원의원

5.2. 공무원

5.3. 기업인

5.4. 문학, 예술, 디자인

5.5. 음악

5.6. 군사 분야

미군에는 수많은 한국계 미국인(한민족 혈통의 미국 시민권자, 영주권자, 이중국적자, 한국 국적자)들이 복무하고 있다. 현재 소장까지 배출한 상태. 일본계 미국인에릭 신세키 대장을 배출하고 만주족도 소장을 배출한 것에 비하면 커뮤니티의 역사가 짧아 아직 중장 이상은 배출하지 못했다. 일본계와 중국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상당수가 참전했다. 중국계는 12,000명에서 2만명이 참전한 걸로 추정되며 일본계는 한 명 밖에 태평양 전선에 못 갔지만 유럽 전선에 꽤 상당수가 참전했으며 약 33,000명 수준으로 추정한다. 한국계도 일본계랑 도매금으로 같이 갔다. 한국계는 일본에 식민지로 있단 이유로 일본계의 비공인 집단으로 기존의 일본계와 동급으로 취급되다가 1943년에 미국에서 적성국에서 벗어나 일본계와 완전히 분리했다. 2차 대전 동안 한국계 100여명이 미군으로 참전했다.

밑에 서술된 것 이 외에도 현재 수 많은 한국계가 복무 중

5.6.1. 장성급 장교

5.7. 체육계

야구선수 한정으로 유독 한국계를 강조한다. 이는 다른 것보다 WBC의 국대 출전 조건 때문으로, 국적 조건이 관대하여 가족 중에 해당 국적이 있을 경우 본인이 직접 선택할 수 있다. 즉, WBC 대표팀을 소집할 때 대한민국 대표팀으로 차출할 수 있기 때문에 알면 좋다라는 의미에서 강조하는 것이다.[87]

5.8. e스포츠

5.9. 과학, IT, 교육계

5.10. (연예계) 가수

5.11. (연예계) 배우

5.12. 기타

6. 가상 인물

한국인 캐릭터도 참고. 이쪽은 확실하게 국적이 미국인 경우만 기재한다. 미국 드라마 등지에서는 심심찮게 보이는 캐릭터들로 한국계 배우가 많이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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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메리칸(Komerican)이라고도 한다.[2] 일본은 재일 한국인이 90% 이상을 차지하지만, 10% 정도인 8만명을 조총련이 차지한다. 다만 과거와 달리 민단에 비해서 조총련 세력이 많이 죽었다. 원래는 북한의 재일교포 지원 등으로 인해 조총련이 앞섰는데 북한의 경제력 최빈국 전락과 한일수교 이후 많은 재일교포들이 조선적 대신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기에 북한에 더 이상 동조하지 않는 재일교포가 늘었고 그 결과 상당수가 대한민국의 편에 서게 되었다.[3] 물론 미국 재미교포도 백인 등 타 미국인 사회에 완전 동화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다른 한인사회에 비해 재미교포의 한국에 대한 애정, 애국심 등은 한인 2-3세 이후까지도 잘 이어져 가는 편이다. 미국과 한국이 혈맹 관계인 것도 작용한다. 애초에 생김새가 같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미국에서의 동화 난이도 자체가 훨씬 높다.[4] 이는 현대의 북한 출신이나 일본의 조선적, 고려인 등은 물론이고 역사상의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조선 출신이 조상이라도 Korean American에 포함된다는 뜻이다.[5] 북한 출신 한국계 미국인은 1953년 정전 이후 수백명 수준에 그치며, 중국 출신 한국계 미국인 역시 수백명 이하고, 일본에서 넘어온 경우도 극히 적다. 따라서 한국계 미국인=대한민국 출신 미국인이라는 공식이 사실상 성립한다. 그러므로 Korean이라고 했을 때 North or South라는 질문은 장난이 아니고서야 어느 정도 비상식적이라고 미국에서 말할 수 있다. # #[6] 영주권자 434,458명, 일반체류자 626,005명, 유학생 43,459명[7] 미국 다른 지역에도 한인들이 많이 늘어나서 비슷비슷해졌다는 말도 나오는데 이는 개인의 단편적인 시각으로, 전체적으로 보면 여전히 캘리포니아(특히 남부 캘리포니아, 남가주 지역)의 대한민국 출신의 한국계 인구수를 따라올 수 있는 지역은 미국뿐만 아니라 한반도 외 한인들이 살고 있는 전세계 어디에도 없다.[8] In 1890, he became the first Korean immigrant to acquire United States citizenship.#[9] 성미애, 이소영.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계 이민자의 생활의례 및 한국인 정체성" 가정과삶의질연구 34, no.3 (2016) : 45-64.의 내용에 근거하였음[10] 박창훈. "미주한인교회의 이민공동체 형성과 지역사회봉사활동: 뉴욕한빛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역사신학논총 40(2022) : 362-398.doi: http://dx.doi.org/10.26427/JHT.40.8의 내용에 근거하였음[11] 흥미로운 사실은 처음 하와이에 입국한 이민자 중의 절반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다.[12] 이형식. "한국계 미국인 디아스포라의 세대별 양상: 성 노, 줄리아 조, 미아 정의 작품을 중심으로" 현대영미드라마 33, no.1 (2020) : 153-182.의 내용에 근거하였음[13] Lowe. L. (1996). Immigrant Acts: On Asian American cultural politics. Durham & London: Duke UP.의 내용에 근거하였음[14] 박창훈. "미주한인교회의 이민공동체 형성과 지역사회봉사활동: 뉴욕한빛교회의 사례를 중심으로" 역사신학논총 40(2022) : 362-398.doi: http://dx.doi.org/10.26427/JHT.40.8의 내용에 근거하였음[15] 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A0%88%EC%8B%9C_%EC%98%A4%ED%94%84_%EB%8D%94_%EB%B3%B4%ED%8A%B8[16] 이전에 언급하였던 데이비드 황의 "배에서 방금 내린"(fresh off the boat)를 의미한다.[17] 다음 내용은 김왕배. (2003). 미주 한인 후예들의 민족주의-민족정체성 형성을 중심으로. 현상과인식, 27(1·2), 55-75.의 내용을 인용하였다.[18] 성미애, 이소영.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계 이민자의 생활의례 및 한국인 정체성" 가정과삶의질연구 34, no.3 (2016) : 45-64.의 내용에 근거하였음[19] 허성태․임영언. 글로벌 디아스포라와 세계의 한민족. 서울: 북코리아, 2016의 내용을 참고하였다.[20] 주로 이들의 고충은 언어 문제와 외형상의 차이로 백인 문화에 흡수되지 못한 점이 가장 컸다.[21] Lee, J. (2002). Korean in American immigration history. Journal of Cultural and Historical Geography, 14(1), 109-122.의 내용에 근거하였음[22]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사춘기 시절부터 인종적 감수성이 예민해지면서 주변의 차별과 무시를 폭력이나 고립 등 부정적인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경향도 보였다고 한다.[A] 백인을 뜻하는 하와이 용어[A] [B] 분할통치, 지배층의 지배기술 중 하나로, 한 사람이나 특정 집단 등이 통치를 함에 있어서 피지배자들을 분열시키거나 서로 적대하게 만들어 통치를 용이하게 하는 수법[26] Brandon Palmer. "하와이의 한인과 미국인 간의 관계(1903~1945)."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4 (2005): 169.0-240.0.의 내용에 근거하였음[27] 보이스카우트, 유명한 한인 복싱선수 월터 조(Walter Cho)가 여러 해 동안 보이스카웃 대장으로 활동하였다.[28] YMCA[29] YMCA[A] [31]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공식적인 법률은 없었기 때문이다.[A] [A] [34] 일반적으로 두 인종간의 접촉은 농장과 교회에만 제한되었다고 한다.[A] [36] 이는 미국법에 대해 무지한 한인들과 관련된 것이다. 십중팔구 '하울리'들은 한인들에게 미국의 문화나 관습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한인들은 직접 재판이나 실수를 통해 미국의 법률체계를 익혀야만 했다.[37] 한인과 미국인 간의 인종관계에 가장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 대표적인 인물: 이요극, 전덕순[A] [A] [40] 위 내용은 Brandon Palmer. "하와이의 한인과 미국인 간의 관계(1903~1945)."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4 (2005): 169.0-240.0.의 내용에 근거하였음[41] 사회진화론, 인종은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고,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신념[42] 영어로는 '우편주문 신부'...(Mail-Order Bride) 또는 사진신부(Picture Bride)라고 부르며, 요즘도 외국에서 한국의 동남아 신부 등을 부를 때 이 표현을 쓰기도 한다.[43] 1930년대 하와이 청소년들의 평균 문맹률은 3.1%였고, 중국계 0.7%, 일본계 0.5%, 한국계 0.1% 였다.[44] Immigration Act of 1924. 북서유럽 출신을 제외한 유럽계 이민을 제한하고(National Origins Act), 아시아인 이민을 금지하는 법령(Asian Exclusion Act). 아시아인 배제법은 1952년에 폐지되었고, 이민법에서 인종차별 조항이 폐지된 것은 1965년의 일이다.[45] 송하연. "인종주의의 장벽 아래에서 결혼하기: 해방 이후 주한미군 내 한국계 미국인 남성과 한인 여성의 결혼" 한국문화연구 42(2022) : 349-395.doi: 10.17792/kcs.2022.42..349[46] 하와이 출신의 경우 한국계 미국인이 아예 결혼을 목적으로 자원입대하기도 했다.[47] 송하연. "인종주의의 장벽 아래에서 결혼하기: 해방 이후 주한미군 내 한국계 미국인 남성과 한인 여성의 결혼" 한국문화연구 42(2022) : 349-395.doi: 10.17792/kcs.2022.42..349의 내용에 근거하였음[48] 법무부 외국인 통계월보[49] NIW라고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되는 석박사 이상의 인재의 경우 취업을 하지 않고도 본인 스스로 이민청원을 할수 있다. 미 국무부 비자 통계.# 기술직이나 학사학위 전문직 이민은 줄었고, 석박사 이상 고학력자 이민자 수가 1위로 높아졌다.[50] 아래 기술된 한국과의 문화적 갈등 참조[51] Jay Kim (김창준) 하원의원, Cindy Ryu 하원의원 등이 있다.[52] 일본에 귀화한 재일교포와 동포는 400만 이상에 육박한다고 하는데 공식통계상으로는 한국계 미국인이 제일 큰 커뮤니티가 맞다.[53] 다만 이는 한국계 혈통만이 아니라 다른 혈통이 섞인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통혼 때문에 중국계와 일본계 혈통을 지닌 한국계들이 등장한다.[54] # #[55] 다만 대부분의 아시아계 미국인들도 자본이 있는채로 넘어온 것이 아닌 아메리칸 드림을 바라보며 무일푼으로 온 경우가 많다.[56] IRS가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는 곳 중에 하나가 바로 종교에 관련된 부분이다.[57] 위 통계와 동일 년도에 나온 미주 한인교회에 관한 칼럼, 한국인 개신교도들이 얼마나 많은 헌금을 하는지 알 수 있다.[58] 실제로 1.5세대(한국에서 태어나 어느 정도 한국에서 성장해오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 그곳에서 생애전반을 보낸 세대)까지만 가도 부모들이 하루빨리 현지적응 및 생활터전 마련을 위해 생업외에 부업을 하는 경우가 많고 이렇다보니 자녀들은 한국어 대신 영어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경우가 대다수고 그래서 1.5세대들 가운데도 중학생 이전에 온 이들의 경우 한국어보다 영어를 더 쉽게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출처] 영문 위백 A 2010 book about Korean adoption said that Korean adoptees comprise about ten percent of the total Korean American population according to an estimate in a 2010 book about South Korean adoption.[60]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 아동은 총 11만여 명에 달한다.[61] 다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이는 한 국가의 민족국적이 일치하는 대한민국과 그렇지 않은 다민족국가 미국의 사고방식의 차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에게는 한민족=한국인이지만, 미국에서는 미국 출생이라면 한민족=미국인이며, 기타 소수민족=미국인이다.[62] 동아시아인 같은 외모를 보고서 영어를 못할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생각보다 영어를 잘한다는 뜻이다.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Your English is very good!"은 칭찬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이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인종차별적 편견과 자신은 영어가 모국어이니 남의 영어 실력을 평가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문장이다. 이 사람이 영국계 미국인이 아니라면 피차 같은 입장.[63] 하지만 이 예시는 코리안-아메리칸이라는 걸 부정하는 예시는 아니다. 코리안-아메리칸, 즉 자신을 한국인이 아닌 한국계 미국인으로만 정체화하는 사람도 '동아시아계이기 때문에 영어를 못하고 미국인이 아닐 것이다'는 인종차별적인 편견을 마주하면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64]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는 재미교포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들이 미국 내에 여러 곳 포진해 있는데, LA를 중심으로 한 한미연합회 Korean American Coalition, 워싱턴 D.C.의 Korean American Council, 뉴욕의 Korean American Communify Foundation 등이다.[65] 배우 팀 강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기도 했다.[66] 2010년부터 선천적인 이중국적자는 한국에서 군복무를 하고,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하는 조건 하에 이중국적을 허용하도록 대한민국 국적법이 개정되었다. 영주권자의 경우에도 한국 군복무로 인하여 미국을 방문하지 못해서 영주권을 상실당하지 않도록 법적인 조치를 취해 돕도록 개정되었다.[67] 재일조총련이나 공산당 등 체제나 이념갈등 요소가 없기 때문에 완전히 편하게 융합이 가능하다. 실제로 정재계에 진출하는 한국계 외국인은 십중팔구 한국계 미국인이다.[68] 김왕배. "미주 한인 후예들의 민족주의:민족정체성 형성을 중심으로" 현상과 인식 27, no.1/2 (2003) : 55-75.에서 인용[69] Kim, L. & Kim, G. (1998). Searching for and defining a Korean American identity in a multicultural society. In Y. Song & A. Moon (Eds.), Korean American women: From tradition to modern feminism (pp.115-125).Westport, CT: Praeger Publishers.[70] 해당 논문에서는 4가지의 정체성 적응 유형은 개념적인 패러다임의 형태로 실제로 4가지 정체성 적응 유형 중 개인에게 한 가지만 확연하게 들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71] Min, P. & Song, Y. (1998). Demographic characteristics and trends of post-1965 Korean immigrant women and men. In Y. Song & A. Moon (Eds.), Korean American women: From tradition to modern feminism(pp.45-63). Westport, CT: Praeger Publishers.의 내용에 근거하였음[72] 김성주, 김범준. 2011.새로운 정체성 'Korean-American'에 관한 비교연구. 한국정치외교사논집, 제33집 제1호, pp.197-233.에 근거하였음[73] 이석인, 조지연. "한국계 미국인의 민족정체성과 집단자존감에 관한 연구" 국제지역연구 18, no.4 (2014) : 341-358. 에 근거하였음[74] 안용흔. 2013.재미동포의 민족정체성의 현실과 과제, 민족연구, 제8권 제1호, pp.104-119.의 내용에 근거하였음[75] 김왕배. 2003.미주 한인 후예들의 민족주의: 민족정체성 형성을 중심으로. <현상과 인식> 봄/여름, pp.55-77.의 내용에 근거하였음[76] 1990년대에 의사등 고학력자들 사이에 영주권 취득 붐이 일었고, 최근에도 석사 이상 고학력자들의 NIW 영주권 취득붐이 일어 이민적체가 심화되고 있다.[77] 다만 1990년대 이전만해도 양당의 스펙트럼이 지금과는 꽤 다르고 더 복잡했기에 공화당=보수, 민주당=진보로 단순화 하기에는 좀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는 점 역시 참고할 필요는 있다.[78] 이미 20여년 전부터 젊은층이 조용히 한인교회를 탈주(silent exodus)하기 시작했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며 미국의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한인교회도 젊은층의 유입을 위해 노력을 안한 건 아니다만… 현실은 젊은 2-3세대 한국계 미국인이 고등학교나 대학교 졸업이후에도 차라리 미국교회에 다니면 다녔지 한인교회에 다니는 것은 암묵적으로 주류사회에 진입하지 못한 루저 취급한다. 그리고 새로운 한국계 이민자의 수도 엄청 줄어서, 더더욱 신규 유입을 기대하기가 힘들다. 센서스에 나타난 한국계 이민자는 연간 2만명 수준으로,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편이다. 그래서 2010년대 들어서 한인교회는 젊은층은 사실상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노인들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요즘 미국의 젊은 세대들은 인종에 상관없이 종교와 거리가 멀어지는 세속화 현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한인 청년층도 예외가 아니라 한인교회의 영향력을 떨어트리는데에 한몫했다.[79] The Korean-American Vote: Looking to the 2016 Presidential Election and Beyond[80] 원래 성은 박이었는데 공화당 전국위원인 숀 스틸과 결혼하여 성이 바뀌었다.[81] 결혼 전 이름은 최영옥이었다. 결혼하고 나서 김씨로 성이 바뀐 것.[82] 미국 국적이지만 한국에 거주하기 때문에, 이 경우는 조상 중에 한국인이 있고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계 미국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상 중에 미국 국적자가 있고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계 한국인도 아니다. 이 경우는 엄밀히 미국 국적의 한국인에 해당한다. 따라서 한국계 미국인 영문위키의 유명인물 항목에는 등재되지 않았다.[83] 원래는 주씨인데 그의 부친이 영어가 서툴렀던 관계로 출생신고 과정에서 잘못 기록된 것이 그대로 이름이 되었다 한다.[84] 미군은 학위가 없어도 3년 이상 복무한 사병에게 장교 지원 자격을 준다.[85] 한국계를 통틀어서 최초의 장성 진급이었다.[86] 미 서부의 20개 주의 의무 군무를 관할함.[87] 어디까지나 선수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기에 발탁을 거절할 수도 있다.[88] 원래는 한국 이름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같은 게임팀 팀원인 황현이 지어준 것이라고. 본인도 좋아하는지 한국 유저를 만났을 때 이 이름으로 소개하는 편.[89] 이는 출생 자체를 미국에서 하여 한국 문화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고 부모님 역시 미국 사회에 적응시키기 위해 따로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90] 부친 서두수는 위 하워드 고 부친 고광림과 아는 사이이기도 하다.[91] 노벨상은 살아있는 사람만 수상하는 것이 원칙이다.[92] 보통 톰슨 로이터에서 거론되는 인물 중 대다수는 수 년 뒤에 실제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경우가 많다.[93] 한국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모모랜드 멤버이자 리드보컬리스트 가수라 영문위키의 미국계 한국인 & 황백혼혈 인물 항목에도 등재되어 있다.[94] 영문위키의 한국계 미국인 유명인물 항목에는 미등재[95] 한국명이 본명에 없거나 미들네임에 들어있는 대부분의 한국계 미국인들과는 달리. 퍼스트네임이 한국 이름인 '한솔'이다. 이중국적이므로 최한솔 역시 본명.[96] 영문위키의 한국계 미국인 유명인물 항목에는 미등재[97] 영문위키의 한국계 미국인 유명인물 항목에는 미등재[98] 이때문인지 영문위키의 한국계 미국인 유명인물 항목에는 미등재되었다.[99] 사실 Sueng보다 Seung이 더 적절한 표기이지만, 스티브 유 본인의 여권에 저렇게 표기되어 있다. 오타가 아니므로 Seung으로 수정하지 말 것.[100] 한국명 정수연은 집에서 지어준 사실상 아명일 뿐, 공식적으로 쓰이는 이름이 아니라고 한다.[101] 누나 정리아는 한국과 미국의 복수국적이다.[102] 아르헨티나는 국적 포기를 절대 할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가 없다.[103] 2018년 4월 4일(미국 현지시간 기준) 사망하였다.[104] 기선이 아니라 카이슨이라고 읽는다. 이는 부모의 성씨인 K와 Y의 이니셜에서 따온 뒤 그분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son을 붙인 것이다.[105] 정작 짐 모리타는 일본계 미국인 게 함정[106] 미국 LA를 중심으로 푸드트럭 체인점인 Kogi를 흥행시켰다.[107] 아버지가 한국인, 어머니가 일본인이다.[108] 2009년 중국북한 접경 지대에서 취재하다가, 북한의 국경을 넘어 억류되었었다.[109] 뉴욕의 맨해튼에서 한식당인 단지한잔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중 단지는 한식당으로선 최초로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을 받았고, 뉴욕 시가 선정한 '뉴욕의 10대 식당' 중의 하나로 뽑히기도 했다. 현재는 마스터셰프 코리아의 심사위원도 맡고 있다. 여담으로 이 사람은 본래 의사를 지망하여 UC 버클리의학전문대학원을 다녔으나, 이를 도중에 때려치우고(!!!) 셰프로 전직했던 전력이 있다.[110] 장지수가 아닌 꽈뚜룹 기준[111] 원작 소설 한정. 영화판에서는 배우부터 백인을 기용하는 등, 한국계로서의 설정이 없어져 버렸다.[112] 취소선을 친 이유는 조선에선 노비 신분, 그러니까 사람이 아닌 재산으로 취급되었고, 미국인이 되어서야 사람으로 대접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적으로는 처음부터 미국인이었던 것이다.[113] 주인이 자기 부모를 때려죽이는 꼴을 보고 모국 조선에 대해 환멸을 느껴서 미국 해군 군함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가서 귀화했다는 설정이다. 덕분에 그는 작중에서 동양계로서는 최초로 미합중국 해병대의 장교(!)까지 된 것으로 나온다.[114] 데릭 조의 부하형사[115] 원작 빅 히어로 6에선 일본계.[116] 배우인 브라이언 티의 어머니 한국인이다.[117] 애니메이션판 한정. 애니메이션에서 성우가 한국계 배우라서 인종이 변경되었다.[118] 엄마인 김주영의 경우 제니퍼라는 영어 이름이 있지만 확실하진 않다.[119] 등장인물중 한국계 교포도 있지만 대다수가 미국국적을 가지고있는 한국계 미국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