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요 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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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d164a,#FFC224> 부통령 후보 | 비고 | |||
공화당 | 조지 H. W. 부시 | 2위 | ||
댄 퀘일 | 낙선1 | |||
민주당 | 빌 클린턴 | 1위 | ||
앨 고어 | 당선 | |||
Ind | 무소속 | 로스 페로 | 3위 | |
제임스 스톡데일 | 낙선 | |||
1 현직 미국 정·부통령 | ||||
| }}}}}}}}}}}} |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요 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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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d164a,#FFC224> 부통령 후보 | 비고 | |||
민주당 | 빌 클린턴 | 1위 | ||
앨 고어 | 당선1 | |||
공화당 | 밥 돌 | 2위 | ||
잭 켐프 | 낙선 | |||
개혁당 | 로스 페로 | 3위 | ||
팻 쇼트 | 낙선 | |||
1 현직 미국 정·부통령 | ||||
| }}}}}}}}}}}} |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무소속 후보 | |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개혁당 후보 | |
<colbgcolor=#800080><colcolor=#ffffff> 로스 페로 Ross Perot | |
본명 | 헨리 로스 페로 Henry Ross Perot |
출생 | 1930년 6월 27일 |
미국 텍사스 주 텍사카나 | |
사망 | 2019년 7월 9일 (향년 89세) |
미국 텍사스 주 댈러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기업인, 정치인 |
학력 | 텍사카나 대학교 미국해군사관학교 (이학사) |
가족 | 배우자 마곳 버밍햄 자녀 5명[1]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1995년 이전)(1995~2000) (2000~2019)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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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사업가이자 정치인. 1992년과 1996년 대통령 선거에 나섰으나 각각 빌 클린턴에게 패배하였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제3지대 후보임에도 10% 이상의 득표를 확보한 마지막 인물이다. 2019년 7월 9일 항년 89세로 사망했다.2. 생애
텍사스 주 텍사카나에서 태어났으며, 1947~1949년 텍사카나 단과대학[2]에서 수학 후 아나폴리스의 미 해군사관학교에 편입, 미합중국 해군에서 1957년에 해군 대위로 전역했다.전역 후엔 주로 IT 산업에 종사했으며 IBM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다가 1962년에 나와 Electronic Data Systems(EDS)를 차렸는데, 대형 보험 회사들의 의료 청구를 처리하면서 주가도 크게 상승해 1984년 EDS를 제너럴 모터스에 매각한 이후 퇴사하였으며, 그 뒤에 스티브 잡스가 세운 NeXT에 출자하기도 했다. 1988년에는 페로 시스템즈라는 IT 기업을 창업했다.[3]
2.1. 정치 활동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의 유세 사진. 오른쪽 아래 구석의 백발의 남성은 페로의 러닝메이트였던 제임스 스톡데일이다. |
그러나 이 상승세는 얼마 가지 못했다. 특히 로스 페로의 과거 비리나 등을 부시 캠페인에서 공격하며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특히 NAACP에 와서 흑인들에게 “당신네들”이란 인종차별적 실언으로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또한 이때 캠페인 매니저와의 마찰도 발생했으며, 캠페인 자원봉사자들에게 충성의 맹세를 강요한단 논란까지 겹치며 지지율은 14%로 추락했다. 결국 1992년 7월, 더 큰 지지율 하락을 막기 위해 대통령 후보직에서 잠깐 사퇴하였다.[4]
1992년 10월, 국민들에게 자신의 경제정책을 설명해주고 싶단 이유로 후보직에 다시 입후보했다. 페로 캠페인은 대규모 선거팀 개편 후 마케팅 전략을 세웠는데, 로스 페로의 선거광고는 조지 H. W 부시의 낙수 효과의 실효성을 비난하며 민주당과 공화당의 양당제에 환멸을 느끼는 국민들을 잘 겨냥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부채와 군비경쟁에 피로를 느낀 국민들 역시 잡아내어 호평을 받았다.
또한 토론에서 경험이 없단 공격에 ”글쎄요. 저는 4조 달러 이상의 빚을 진 경험이 없습니다.“라고 한 방 먹이는 등 토론의 승자로 각인되며 선전했으나, 페로의 부통령 후보였던 제임스 스톡데일의 “내가 왜 여기 있지?“등의 횡설수설과 실언으로 딱히 주목을 받진 못하였다. 그리고 여론조사에서도 20% 지지율을 횡보하는 등 토론으로 인한 성과는 적었다.
양당제가 매우 뚜렷한 미국에서 무려 18.87%의 득표율을 보였으며, 선거인단은 1명도 확보하지 못했다. 그나마 선거인단 확보에 가장 근접했던 메인 2구에서도 약 33%의 득표율을 얻어 빌 클린턴에 5%차로 패했다. 메인 전체의 투표수를 합치면 당시 미 대선 2위였던 조지 H. W. 부시를 근소하게 앞서 메인 전체구에도 2위를 차지했다. 1995년 ‘개혁당’을 창설하고 1996년에 다시 대선에 도전하였지만, 이전보다 낮은 8.40%의 득표율로 다시 낙선했다.
로스 페로가 이후 공화당에 입당했으니 아무래도 보수 표를 많이 잠식했던 것으로 보이기 쉽고 실제로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에서는 '로스 페로가 부시 표를 대거 잠식해서 클린턴 승리에 일조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로스 페로는 클린턴과 부시의 표를 균등히 잠식했기에[5] 페로가 불출마했어도 1992년과 1996년 대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으리라고 볼 수도 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미국 개혁당에서 팻 뷰캐넌을 후보로 내놓았지만,[6] 이전보다 더욱 낮은(…) 득표율을 보였으며 미국 녹색당의 랄프 네이더에게 밀려 제4위로 추락했다. 로스 페로는 이 책임을 지고 개혁당을 떠났다.[7]
또한 그의 정치 및 경제적 행보에 비하면 덜 알려졌지만,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준 요인들 중에 하나는, 군사분야와 관계된 일화들이다. 가령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인해 자사 직원들이 고립되었을 때 구출한 전적이 있다. 또한 카터와 레이건에게서 백안시된 미 특수전 전력들을 위로한 인물이란 점이 위 선거 결과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2 - 1995 | 정계 입문 |
| 1995 - 2000 | 창당 |
| 2000 - 2019 | 입당 |
4.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992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743,821 (18.87%, 0명) | 낙선 (3위) | |
1996 | 미국 대통령 선거 | | 8,085,294 (8.40%, 0명) | 낙선 (3위) |
5. 여담
흔히 한국에는 중도 정치인으로 알려져있고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그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좌우 양쪽의 균형을 맞추는 중도가 아니라 기성 정치에서의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벗어난 포퓰리즘 성향의 비주류 정치인이었다. 그의 경력과 행보로 인해 오늘날 도널드 트럼프의 선배격으로 평가받고[8] 실제로 트럼프와는 서로의 정치행보를 지지했었다.[9] 심지어 첫 대선 출마가 사실상 처음으로 한 공식적인 정치 활동이랑 다를 바 없던 것도 비슷하다.2019년 4월 자료에 따르면 재산은 $ 4.1 Billion 으로 도널드 트럼프보다 1조가 더 많았다. 그 아들인 로스 페로 주니어도 2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는 1996~2000년까지 NBA 팀 댈러스 매버릭스도 소유했다.
대한민국 입양아 출신 미국공군사관학교 생도 출신이자, 골수이식 사연으로 잘 알려진 성덕 바우만이 공사 졸업 후 그의 회사에 취직해서 화제가 되었다.
어덜트 스윔에서 방영하는 미국의 애니메이션 스마일링 프렌즈 세계관에서는 1992년 당선되고 재선까지 성공한 것으로 나온다.
[1] 이중 아들 로스 주니어는 현재 부동산 사업을 하고 있다.[2] Texarkana Junior College[3] 페로 시스템즈는 2009년 Dell에 사실상 매각되었고 (다만 합병에는 실패했다.), Dell은 NTT에게 재매각했다.[4] 사퇴 당시에도 대선 다시 나가겠단 암시는 덤.[5] 페로를 뽑은 사람 중 38%/38%가 페로를 찍지 않았으면 부시/클린턴에게 투표했을 거라고 밝혔다고 한다. #[6] 이때 같이 경선 후보로 나온 사람 중 한 명이 도널드 트럼프(…). 당시 개혁당은 크게 미네소타 주지사이자 전직 레슬러 제시 벤투라가 이끄는 페로 파벌, 팻 뷰캐넌 등 새로 입당한 고보수주의자 파벌 2개 파벌로 나뉘어져있었는데, 트럼프가 벤투라의 지지를 받아 출마했었다. 하지만 벤투라가 탈당하면서 '개혁당은 팻 뷰캐넌, 데이비드 듀크같은 파시스트와 레노라 풀리아니(좌파 흑인 정치인)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했다'며 경선을중도 포기하고 탈당했다. 참고로 당시 트럼프는 보편적 의료보험을 지지하는 등 진보-개혁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7] 페로부터가 뷰캐넌이 아니라 공화당 조지 W. 부시를 지지했다.[8] 놀랍게도 트럼프의 정계 입문이 1999년 페로가 설립한 개혁당에 들어가 경선에 출마한 것이었다. 다만 극우 성향의 팻 뷰캐넌에 밀려 2000년 2월 경선 후보에서 사퇴하고는 어프렌티스로 유명 방송인으로 전향하게 된다.[9] 반세계화, 보호무역, NAFTA 반대. 이것을 트럼프보다 24년 전에 먼저 주장한 사람이 바로 로스 페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