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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02년 |
이름 | 임권택 |
분야 | 영화 |
금관문화훈장(1등급) | |
연도 | 1989년 |
이름 | 임권택 |
분야 | 영화 |
보관문화훈장(3등급) |
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6년 |
이름 | 임권택 |
분야 |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
체육훈장 맹호장(2등급)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임권택 林權澤 | Im Kwon-taek | |
출생 | 1934년 12월 8일 ([age(1934-12-08)]세)[2] |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면 단광리 (現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 | |
본적 | 전라남도 장성군 남면 삼태리[3] |
본관 | 나주 임씨 (羅州 林氏)[4]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아버지 임종영(1913 ~ 1966)[5] 어머니 전주 이씨(1912 ~ ?) |
배우자 채령(1951년생, 1979년 결혼)[6] 장남 임동준(1980년생)[7] 차남 임동재(1981년생)[8] | |
학력 | 월평국민학교[9] (졸업) 장성중학교 (졸업) 광주숭일고등학교 (중퇴) |
직업 | 영화감독, 각본가 |
데뷔 | 1962년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 |
활동 | 1962년 - 2015년 |
종교 | 천주교 (세례명: 바오로)[10] |
훈장 | 금관문화훈장 (2002년 수훈) |
보관문화훈장 (1989년 수훈) | |
체육훈장 맹호장 (2016년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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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각본가, 제작자.〈서편제〉로 한국 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하고, 〈춘향뎐〉으로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에 진출하며, 〈취화선〉으로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본상(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오랜 기간에 걸쳐 한국 영화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2. 생애
1934년[13]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면(現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의 소지주 가정에서 아버지 임종영(林鍾英)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만수(李萬秀)의 딸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는 소지주였으며 부친 임종영은 교사로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삼촌의 영향으로 8.15 광복 이후 좌익 활동에 입문하여 1950년 6.25 전쟁을 전후하여 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했고, 고모부와 고종사촌들도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삼촌은 토벌대에 잡혀 8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후 6.25 전쟁 때 총살 당했고 부친은 건강이 나빠져 하산 후 자수했다.임권택 자신과 남동생은 남면의 할아버지 집으로 맡겨져 광주숭일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위와 같은 일들 때문에 가세가 기울고 '빨치산 가족'이라는 낙인을 이기지 못한 탓에 18세 때 가출한 후 부산으로 가서 부두 및 시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군화 장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휴전 후 군화 중개사들이 '신생영화사'를 차렸고 1955년 임권택은 신생영화사 측의 제안에 따라 상경하여 〈장화홍련전〉(감독 정창화)의 스탭으로 들어가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소품부, 연출부를 거쳐 1960년 〈햇빛 쏟아지는 벌판〉을 시초로 조감독에 올랐고, 해당 영화를 만든 한흥영화사 사장 최관두가 임권택이 조감독으로서 만든 〈햇빛 쏟아지는 벌판〉 등의 예고편을 보면서 임권택에게 연출 제안을 했고, 그 길로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 데뷔했다.
초기에는 멜로, 액션, 무협, 스릴러, 코미디 등 여러 장르를 섭렵하다 1973년 〈잡초〉를 시초로 진지한 장르를 처음 구사했고, 1997년, 제8회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상 예술, 문화상을 수상했다. 2015년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주최하는 단체인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AMPAS)의 감독 지부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3. 작품 특징
〈길소뜸〉을 보면, 남자 주인공(신성일)이 옛 연인(김지미)을 만나고 와서 잠자리에 드는 장면이 있다. 그 옆에서 남자 주인공의 눈먼 아내가 묻는다.
"당신, 그 여자 만났죠?" / "아, 참, 그 사람..."
임 감독은 장면을 끊지 않고 길게 끄는 롱테이크로 이를 찍었는데, 이에 관해 정성일 비평가는 뒤통수를 후려맞는 듯한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ㅡ "제가 책에서 읽은 롱테이크 미학은 인물들 표정을 길게 잡아 교감을 보여주고 어쩌고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아내는 화면에 안 잡히고 남자는 아내에게 등만 보여요. 제가 임 감독님께 물었어요. '이걸 롱테이크로 찍은 이유는 뭡니까?' 그러니 감독님이 그랬어요. '한국 사람의 염치죠. 부끄러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 그래서 그렇게 찍었어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웠어요. 내가 아는 지식이란 게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나는 영화만 봤지, 영화가 삶을 찍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거예요."
ㅡ 정성일과 《한겨레》 인터뷰 中 [14]
"당신, 그 여자 만났죠?" / "아, 참, 그 사람..."
임 감독은 장면을 끊지 않고 길게 끄는 롱테이크로 이를 찍었는데, 이에 관해 정성일 비평가는 뒤통수를 후려맞는 듯한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ㅡ "제가 책에서 읽은 롱테이크 미학은 인물들 표정을 길게 잡아 교감을 보여주고 어쩌고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아내는 화면에 안 잡히고 남자는 아내에게 등만 보여요. 제가 임 감독님께 물었어요. '이걸 롱테이크로 찍은 이유는 뭡니까?' 그러니 감독님이 그랬어요. '한국 사람의 염치죠. 부끄러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 그래서 그렇게 찍었어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웠어요. 내가 아는 지식이란 게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나는 영화만 봤지, 영화가 삶을 찍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거예요."
ㅡ 정성일과 《한겨레》 인터뷰 中 [14]
고백하자면, 나는 임권택의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이상할 정도로 불편했다. 서구 영화로 훈련받은 나에게 임권택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그런데도 그 불편하고 어색한 것이 온전한 한 편의 영화로서 스스로 성립한다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중략) 임권택은 나와 마찬가지로 서구 영화에서 시작하였지만, 그는 어느 순간 서구 영화의 모든 규칙과 문법들이 한국을 담아내는 데 불편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의 예술은 거기서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 진화했고, 영화를 서구 영화에 기대서 문법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점점 외면한 만큼, 한국이라는 내면의 체계를 향해 점점 문을 열어간 사람이다. 임권택은 자꾸만 질문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의 개입을 통해서 임권택 영화가 만들어내는, 혹은 기대어 있는 더 커다란 체계를 본다. 그렇게 임권택은 서구적 모더니티에 매료된 김기영·신상옥·유현목·이만희가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 그것은 쇼트(shot)와 씬(scene)을 이어가는 매듭으로서의 한국인의 예(禮)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그 안에서 생각해야만 한다고 여긴다. 그의 이미지가 지리적이고, 자기의 영토를 지니고 있으며, 그 영토의 역사 안에 있는 것은 단지 등장인물만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를 이끄는 쇼트와 씬 안으로도 예(禮)가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ㅡ 정성일, 임권택과의 대담집 서문 中 [15]
전술하듯 1962년에 데뷔한 이후 초기 10여년 동안 멜로, 뮤지컬, 무협, 액션, 코미디, 스릴러 등 잡다한 장르를 총망라하며 미국, 홍콩 영화들을 모사/초월하고자 했으며, 1970년대까지는 주로 반공, 반일 영화가 많았다. 생계와 흥행을 위해 잡다한 저예산 반공·반일 영화를 양산하던 가운데, 1970년대 초에 우연히 해외 영화제에 참가하려 난생 처음 외국을 나갔다가, 한국어가 단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 풍경에 충격을 받고, 자신이 주목해야 할 것은 외국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그의 예술은 거기서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 진화했고, 영화를 서구 영화에 기대서 문법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점점 외면한 만큼, 한국이라는 내면의 체계를 향해 점점 문을 열어간 사람이다. 임권택은 자꾸만 질문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의 개입을 통해서 임권택 영화가 만들어내는, 혹은 기대어 있는 더 커다란 체계를 본다. 그렇게 임권택은 서구적 모더니티에 매료된 김기영·신상옥·유현목·이만희가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 그것은 쇼트(shot)와 씬(scene)을 이어가는 매듭으로서의 한국인의 예(禮)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그 안에서 생각해야만 한다고 여긴다. 그의 이미지가 지리적이고, 자기의 영토를 지니고 있으며, 그 영토의 역사 안에 있는 것은 단지 등장인물만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를 이끄는 쇼트와 씬 안으로도 예(禮)가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ㅡ 정성일, 임권택과의 대담집 서문 中 [15]
그렇게 1979년 〈족보〉를 전후하여 임권택 감독은 변질된 유교로 대표되는 한국의 역사적 전통, 한국 현대사의 여러 비극에서 비롯된 한(恨) 등의 주제를 탐구해 나갔다. 1986년 영화법 개정으로 규제가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강수연이 출연한 〈씨받이〉라는 영화를 만들며 한국을 대표하는 문예영화·예술영화 감독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1989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만들면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이라는 든든한 파트너를 만나서는 경력의 최전성기에 접어들었다.
작품마다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며 다채롭게 경력을 채운지라, 경력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된 특색이 없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도 1980년대 이후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롱테이크(ex.〈서편제〉의 3분 롱테이크)나 플래시백(과거로 회상) 등의 기법 등을 자주 사용하며, 이미지와 소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는 특징을 보인다. 한편, 최근 한국영화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성애를 묘사한다는 특징도 보이는데, 이는 1980년대 3S 정책을 통과한 많은 영화감독의 공통점인지라 임권택만의 특징으로 꼽기는 어렵다.
몇몇 작품들은 소설가 이청준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데, 이 두 사람은 사적으로도 매우 친한 관계였다고 한다. 또한 철학자 김용옥과도 친분이 깊어, 몇몇 영화의 각본 구성을 김용옥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정성일 평론가 오디오파일#
3.1. 흑역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한 인터뷰에 의하면 자신이 벌어먹고자 1960년대에 마구잡이로 찍어 만든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물론 당시는 반공 영화가 국책사업이었다.)2007년도 인터뷰에서도 그랬다.Q:초반에 만드신 50여편에 대해선 여전히 부정적이세요?(질문자)
A:당연히. 그때도 고통스러웠고 지금도 고통스러워요. 데뷔작부터 시작해서 그 50여편 중에 내가 쓴 시나리오로 찍은 영화는 한편도 없어요.(임권택)
A:당연히. 그때도 고통스러웠고 지금도 고통스러워요. 데뷔작부터 시작해서 그 50여편 중에 내가 쓴 시나리오로 찍은 영화는 한편도 없어요.(임권택)
워낙 다작을 해서인지 한 인터뷰에서 웃지 못할 일화를 밝힌 적이 있다.
Q: 정말 많은 영화를 만드셨는데, 본인 작품을 다 기억하시는가?
A: 전에 부인이 거실에서 흘러간 영화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같이 봤는데 너무 재미가 없더라. 대체 어떤 놈이 이런 재미없는 걸 만든 거야? 했는데 엔딩 크레딧 보니 내 작품이더라.
물론 이 발언은 반쯤 농담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한다. 감독이 자기가 만든 영화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다. 게다가 그는 영향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 영화는 안 본다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재미없는 영화를 끝까지 보고서 크레딧까지 확인했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는 1960년대 작품을 자신의 필모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완곡하게 하고 있을 뿐이다.
A: 전에 부인이 거실에서 흘러간 영화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같이 봤는데 너무 재미가 없더라. 대체 어떤 놈이 이런 재미없는 걸 만든 거야? 했는데 엔딩 크레딧 보니 내 작품이더라.
물론 이 발언은 반쯤 농담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한다. 감독이 자기가 만든 영화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다. 게다가 그는 영향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 영화는 안 본다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재미없는 영화를 끝까지 보고서 크레딧까지 확인했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는 1960년대 작품을 자신의 필모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완곡하게 하고 있을 뿐이다.
데뷔 초기인 1960~1970년대에는 양산형 반공물, 반일물만 100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1년에 몇 편씩 만들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는 지금보다 한참 떨어졌던 대한민국 영화를 보호하고 무분별한 해외 영화 수입을 막기 위해, 영화법을 재정해 영화배급사를 20개로 한정하고 이 회사들이 국산영화 4편을 만들어야 해외영화 1편을 수입할 수 있었다.[16] 당시 기술력, 기획력, 인프라 등 모든 면에서 떨어졌던 대한민국 영화업계는 국산영화는 대충 저예산으로 만들고 수입영화를 흥행시켜 국산영화 제작비까지 회수하는 전략을 썼는데, 이런 환경상 1950년대 임화수 시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반공, 반일 전쟁영화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17] 그런 양산형 국산영화를 찍어내던 게 바로 임권택 감독. 임권택은 정식으로 영화에 대한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전혀 없고, 영화 스탭부터 시작해서 조연출을 거쳐 감독이 된 이후 다작으로 영화를 워낙 많이 만들다 보니 지금의 연출 능력이 생겼다고 술회한 바 있다. 많이 만들면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어보면서 스스로 배운 셈이다.
이러한 영화들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해선 임권택 가족의 내력도 간과할 수 없는데,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서중석 저)>와 2014년 정성일 칼럼 등을 종합해 보면 전술하듯 임권택의 선친이 좌익 활동을 했던 적이 있어서 연좌제 대상에 올랐던 적 있었던 터라 임권택은 "나도 반공영화를 만들 줄 아는 사람으로 봤으면 한다"라는 자기방어적 차원에서 했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렇기에 하길종 등처럼 유신 체제의 영화 통제에 저항하지 못하고 순응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래도 시대적 한계를 감안해 보면 감독이 감독이니만큼 특출난 부분도 많기 때문에 현대 들어서 연구자들의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다만 본인은 이런 재평가 자체도 꽤나 껄끄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4. 필모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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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 장편 연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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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아 잘 있거라 (1962) | 전쟁과 노인 (1962) | 망부석 (1963) | |
남자는 안 팔려 (1963) | 신문고 (1963) | 욕망의 결산 (196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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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눈섭이 긴 여자 (1970) | 밤차로 온 사나이 (1970) | 비검 (197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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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이후 제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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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 장편 연출 작품
,(1980년 이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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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코 (1980) | 복부인 (1980) | 만다라 (1981) | |
우상의 눈물 (1981) | 아벤고 공수군단 (1982) | 안개마을 (1982) | |
오염된 자식들 (1982) | 나비품에서 울었다 (1983) | 불의 딸 (1983) | |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1984) | 길소뜸 (1985) | 티켓 (1986) | |
씨받이 (1986) | 연산일기 (1987) | 아다다 (1987) | |
아제 아제 바라아제 (1989) | 장군의 아들 (1990) | 장군의 아들 2 (1991) | |
개벽 (1991) | 장군의 아들 3 (1992) | 서편제 (1993) |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창(노는계집 창) (1997) | |
춘향뎐 (2000) | 취화선 (2002) | 하류인생 (2004) | |
천년학 (2007) | 달빛 길어올리기 (2011) | 화장 (20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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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이전 제작 |
여기 소개된 것들은 어디까지나 일부다.
-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년
만주 웨스턴으로,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
놀랍게도 독립군과 일본군이 스키 타면서 총격전을 하는 장면 때문에 인기를 몰았다(...). 훗날 개봉한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스키 총격전이 연상되는 부분.[18] 왠지 훗날 회고에 의하면 늘 부끄러웠다며 후회했다고 하신다.
- 증언/1973년
반공 영화. 전쟁이 일어나 연인인 신일룡과 김창숙은 서로 헤어져야 하는데, 둘 다 전쟁의 참혹함[19]을 알게 되고 결말부에 서로 만난다. 1970년대 국군 현용장비들이 대거 출연한다.
까메오로 문오장과 최불암이 나오는 게 포인트. 아벤고 공수군단과 낙동강은 흐르는가와 함께 일본 전쟁 영화 매니아들에게 숨겨진 걸작으로 평가돼서 일본에서 해적판 DVD가 3부작으로 묶여서 나왔다.
- 울지 않으리/1974년
조흔파의 고교얄개 주연인 이승현이 나오는 반공 영화로, 놀랍게도 어린이가 사람들을 죽인다(...). 수류탄 던져서 죽이거나, 권총으로 쏘는 장면 등. 당시 신문에는 증언에 이은 스펙터클한 영화라고 한다. 하긴 어린이가 사람을 총질하거나, 수류탄 던져서 죽이는 건 확실히 스펙터클하긴 하다(...). 그런데 인민군 앞잡이 아들을 주인공(이승현)이 받아들이는 건 감독 자신의 과거가 반영되어서 이랬으면 어떨까?가 반영된 것 같다. 마치 미국에서 나중에 나온 레드 던이 생각나게 되는 대목이다. 실제 레드던 리메이크에서는 북한군이 적으로 나온다(!). 하지만 레드 던은 고등학생이 북한군을 상대하고, 여기서는 초등학생이 살인을 하는 거라서 당연히 문제가 된다.
-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년
- 족보/1978년
- 가깝고도 먼 길/1978년
어린이들이 휴전선을 넘다가 피격당해 사망한다는 충격적인 내용. 어린이가 총에 맞아 살해된다는 충격적인 결말 때문에 짤려서 방영되기도 했다. 로드 무비로 작품 내의 다른 공간(집이라든가)은 대부분 플래시백으로, 주인공들의 회상이다.
- 짝코/1980년
김희라, 최윤석 주연의 영화. 1950년대 경찰 송기열은 짝코라는 공비 대장을 생포했다가 이송 중 놓치고 온갖 비난과 좌절 끝에 짝코를 찾으러 다니다 결국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파멸한다. 나이먹어서 1980년대 행려병자 수용소에서 어제의 원수 짝코를 찾아서 고향으로 이송하는 로드 무비. 결국 이념의 허무성을 고발하는 진정한 현시창 영화.
- 아벤고 공수군단/1982년
비구니/1984년
김지미 주연으로 제작되던 영화였는데, 영화 내용에 실제 불교에 종사하는 비구니들이 집단 항의를 한데다가 촬영하던 필름 원본까지 소실되어서 미완성작이 되어버렸다. 네이버 뉴스 아카이브에서 "김지미 비구니 제작금지"로 검색하면 당시 관련 기사가 3건이 있다. 이 영화를 위해 김지미가 삭발까지 했으나, 영화가 엎어졌으니(...)... 제작된지 33년 뒤인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필름복원분을 CGV 전주고사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1984년
- 길소뜸/1985년
베를린 영화제 본선 초청작 2호로, 이산가족에 대한 이야기.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소재로 쓰기도 했다. 헤어진 아들을 찾으려는 어머니가 주제로, 그러나 해피 엔딩이 아닌, 눈물을 짜내는 마무리가 아닌 현실적인 마무리가 더더욱 돋보인다.
- 씨받이/1986년
베니스 영화제 본선 초청작 1호로, 조선시대판 대리모 문제를 다룬 영화. 강수연에게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1992년에 남기남이 씨내리라는 영화로 베꼈다. 극장 개봉도 했고 DVD로도 나왔다. 참고로 씨내리에는 변희봉 옹이 나온다.
-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년
모스크바 영화제 본선 초청작으로, 1981년에 개봉한 만다라와 함께 임권택 감독이 만든 불교적 배경의 영화. 강수연이 주연을 맡았고, 그 외에 유인촌이 조연으로 출연했다. 씨받이로 베네치아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강수연은 이 작품으로 1990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두 번째로 해외 영화제를 수상하였다.
- 장군의 아들/1990년
김두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간 예술 영화, 작가주의 영화 제작만 고집했던 임권택에게 이태원 사장이 쉬어가라는 의미로 메가폰을 쥐어주었다. 처음에는 기성 배우들을 캐스팅 하려고 하였으나, 모험삼아 새 얼굴로 캐스팅 해보자고 했는데... 이게 신의 한 수가 되었을 줄이야... 당시 단성사에 개봉하여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거두면서 흥행으론 그다지 성공하지 못하던 임권택 영화나 단골 제작자인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을 놀라게 했다. 30년이 된 지금도 '대표적인 배우 오디션' 하면 바로 떠오르는 영화이며, 대규모 오디션을 통해 걸출한 뉴페이스들을 많이 탄생시켰는데, 주인공 김두한 역할을 맡은 박상민과 악역 하야시 역할의 신현준을 포함하여 김승우, 이일재, 김해곤(감독 겸 배우) 등등. 이 배우들은 199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배우 세대교체를 이뤄내기도 했고, 3편까지 만들어졌다. 서편제의 100만 기록에 기폭제가 되었다.
- 개벽/1991년
동학혁명 당시 최시형과 당시 이야기를 그린 영화. 최시형에 이덕화, 전봉준에 김명곤, 최시형 부인에 이혜영이 캐스팅되었다. 하지만 전봉준은 과격파로 묘사되었다고 비판받은 적이 있다. 도올 김용옥이 시나리오를 썼다. 시나리오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덕화의 사극 연기의 최고봉으로 평가되며 작품적으론 꽤 호평을 받았으나, 흥행은 참패했다. 제작사 중 하나인 춘우영화사는 문을 닫아버렸고, 공동 제작을 맡던 임권택 영화를 많이 만들던 태흥영화사도 타격을 꽤 받았다.
- 서편제/1993년
소설가 이청준이 5부 구성으로 쓴 단편 연작 소설 "남도사람"의 1부 "서편제"와 2부 "소리의 빛"을 원작으로 하여 제작된 영화이다.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 송화의 예술혼과 파란만장한 일생을 다룬 영화. 임권택 감독의 수많은 대표작들 중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영화 중 하나이다.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서울 100만 관객 돌파라는 희대의 대기록도 세웠다.[20]
제작 당시 이태원 사장이 장군의 아들 2(1992)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개벽의 대참패로 인한 부담도 씻으면서 "어디 흥행은 개의치 않고 마음껏 만들고 싶은 걸로 만들어보세요!"라며 부담을 안 주고 제작비[21]를 대주었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던 이 영화가 임권택 영화 사상 최고 대박을 거두면서 감독 본인과 사장을 놀라게 했었다. 물론 당시 중고등학교에서의 교육목적의 단체관람 유행도 한 몫을 했다.
상해 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이 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온 올리버 스톤이 오정해에게 추파를 던지다가 무시당한 일이 있었다. - 태백산맥/1994년
소설가 조정래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145분(2시간 25분)짜리 영화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담아냈으나... 당시 극심했던 레드 컴플렉스로 인해 우파 단체들이 영화를 상영중지하라는 소동을 벌이는 등 개봉 전후로 말이 많았던 작품이다. 서울 관객 25만 관객을 동원했고, 연극판에서 실력을 쌓고 있었던 김갑수가 이 영화로 대종상 남우주연상과 청룡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스타덤에 오르기도 하였다.
- 축제/1996년
이청준의 원작을 바탕으로 팔순의 노모의 장례 과정에서 벌어지는 가족간의 갈등과 화해를 담은 영화다. 그 동안 임권택 감독의 영화의 단골 주연들이었던 안성기, 오정해, 정경순이 출연했고, 그 동안 고전적인 여인상을 연기한 오정해가 이 영화에서는 술집 작부 역할로 파격 변신한 영화였다.
- 창(노는계집 창)/1997년
1970년대 산업화의 뒷전에 밀린 소외 계층의 삶을 그린 영화로, 어쩔 수 없이 몸을 팔아 생활을 해야 했던 한 여인의 삶을 그렸다. 추석연휴 중에 개봉하여 한석규의 접속과 신현준의 마리아와 여인숙과 함께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22] 1996년 음주운전 혐의로 배우로써의 위신이 크게 떨어진 신은경이 이 영화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인기스타상을 수상하면서 재기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 춘향뎐/2000년
칸 경쟁부문 초청작 1호로, 서편제를 찍으면서 판소리 영화라도 한편 찍어볼까 하고 농담처럼 얘기했던 게 사실이 되어 버렸다. 제목은 춘향전이지만, 실제로는 판소리 춘향가의 뮤직비디오에 가까운 코미디스런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최초로 실제 설정과 맞는 나이의 신인 배우 이효정과 조승우가 각각 춘향/몽룡 역을 맡아서 화제가 되었다.[23] 조승우는 오디션을 거쳐 몽룡 역으로 데뷔했고, 이후 스타가 되었다. 반면 춘향 역으로 데뷔한 이효정은 별다른 후속작 없이 완전히 묻혔고... 현재는 일반인으로 지낸다.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영화다.
- 취화선/2002년
칸 경쟁부문 초청작 2호로, 임권택 감독에게 칸 영화제 감독상[24]을 안긴 작품. 흥행은 아쉬웠으나, 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칸 영화제 심사위원이던 샤론 스톤이 무척 좋아하는 영화라고 한다. 더불어 장승업 역할을 한 최민식의 모습은 아햏햏 열풍에 연루되어 패러디되기도 했다.
덤으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각본을 도올 김용옥이 썼다는 점.[25]
- 하류인생/2004년
베니스 영화제 초청작 2호로, 4년 전에 춘향뎐으로 데뷔했던 조승우를 다시 불러들여서 함께 호흡을 맞춘 조폭 영화로 당시 시대의 변화나 시대상을 잘 읽어내는 등 뛰어난 작품성으로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임권택의 평생의 파트너인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의 자전적인 내용과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적절히 섞었다. 다만 10부작 미니시리즈에 해당할 이야기들을 한번에 넣어서 이야기가 방방 뜨는 게 문제. 참고로 자신의 영화 증언의 포스터가 나오기도 한다.
- 천년학/2007년
칸 비경쟁부문 작품으로, 오정해, 조재현 주연. 서편제의 페러럴 월드 겸 후속편 격의 영화이자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서편제의 뒷이야기인 이청준의 "남도사람" 3부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다. 작품성 있는 영화라는 평가였지만, 흥행은 하지 못했다. 김규철 대신 조재현이 남주인공으로 나왔고, 서편제에 비해서 남주인공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더 많이 들어갔다.[26]
- 달빛 길어올리기/2011년
박중훈, 강수연 주연. 한지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한다. 2010년에 개봉된다고 알려졌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1년 뒤인 2011년으로 미뤄졌다. 결국 2011년 어찌어찌 개봉했지만, 소리소문없이 개봉한데다 흥행도 실패해서 개봉한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개봉은 둘째치고 영화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하다.
- 화장/2015년
안성기, 김호정, 김규리(舊 김민선) 주연. 김훈이 쓴 동명의 단편소설이 원작이다. 아내와 젊은 여자, 그 사이에 놓인 한 남자 이야기로, 본래는 2014년에 제작되고 개봉 예정이었지만, 2015년으로 미뤄져 2015년 4월 9일에 뒤늦게 개봉하였다. 일단 임권택 감독 본인 피셜로는 마지막 영화라고 한다. #
5. 수상
<rowcolor=#fff> 연도 | 영화제/시상식 | 부문 | 작품 |
1976 | 제12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감독상 | 왕십리 |
1977 | 제13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감독상 | 낙동강은 흐르는가 |
1978 | 제17회 대종상 | 감독상 | 족보 |
1981 | 제20회 대종상 | 감독상 | 만다라 |
1983 | 제19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감독상 | 안개마을 |
1986 | 제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감독상 | 길소뜸 |
제25회 대종상 | 감독상 | 티켓 | |
1987 | 제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감독상 | |
제32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 씨받이 | |
제26회 대종상 | 감독상 | 연산일기 | |
1991 | 제2회 춘사국제영화제 | 감독상 | 개벽 |
제12회 청룡영화상 | 감독상 | ||
1993 | 제1회 상하이국제영화제 | 감독상 | 서편제 |
제1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감독상 | ||
제4회 춘사국제영화제 | 감독상 | ||
제14회 청룡영화상 | 대상 | ||
제31회 대종상 | 감독상 | ||
1996 | 제17회 청룡영화상 | 감독상 | 축제 |
1997 | 제33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감독상 | |
2000 | 제36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감독상 | 춘향뎐 |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 | 넷팩상 | ||
제45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 심사위원특별상 | ||
2002 | 제23회 청룡영화상 | 감독상 | 취화선 |
제55회 칸 영화제 | 감독상 | ||
2005 | 제5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 명예 황금곰상 | |
2007 | 제10회 디렉터스컷 어워즈 | 감독들이 뽑은 최고의 감독상 | 천년학 |
2015 | 제9회 아시안 필름 어워즈 | 공로상 | |
2016 | 제21회 춘사국제영화제 | 공로상 | |
제3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공로영화인상 | ||
2021 |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
국내 3대 영화상인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대종상영화제에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으며, 총 13회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는 대한민국 영화감독 중 최다 기록으로, 2위 기록인 6회 수상과는 무려 더블스코어 이상의 차이. 또한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에 걸쳐 감독상을 수상한 유일한 감독이다.
1993년 프랑스 문화원에서 동양인 감독으로서 2번째로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첫번째로 수상받은 이가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였으며, 1990년 한국영화 월간지 로드쇼에서 구로사와와 인터뷰를 할때도 한국인 감독으로 잘 알고 영화를 꾸준히 본다고 한 게 임권택이었다.[27]
2002년 7월 문화예술분야 최고등급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5년 2월 12일 베를린 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명예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참고로 경쟁부문 수상작에게 주는 황금곰상은 도금한 것이지만, 이 명예 황금곰상은 100% 순금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임권택이 황금곰상을 들고 있는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크기도 상당히 크다. 베를린 영화제 측에서 상을 주면서 만약 팔거라면 우리한테 되팔라고 농담을 했었다고.. 현재 이 황금곰상은 부산의 임권택영화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아다다는 1988년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21년 10월 6일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했다.
6. 논란 및 사건 사고
6.1.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개막식 망작 연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개막식 총감독을 맡았으나 그간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망작을 연출하고 말았다는 것이 중평이다. 본인은 예산(200억 원)이 부족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 들여다 보면 돈이 부족하진 않았을 것 같은 퀄리티였다.6.2.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 배우에게 노출신 강요
미성년자를 포함해 출연자 강제 노출신 촬영 전적 때문에 21세기 들어 문제시된 케이스가 여럿 존재한다.6.2.1. 당시 미성년자 이상아(길소뜸)
가장 공론화된 케이스는 1986년 영화 길소뜸으로, 촬영 당시 13~14세 즉 중학교 2학년였던 이상아에게 강제로 전라노출신(뒷모습)을 촬영하게 한 사실이 세바퀴를 통해 밝혀졌다. 처음에는 그런 걸 촬영할 리가 있겠느냐며 이상아 배우와 배우의 어머니를 속이며 촬영에 들어갔으나 이후 촬영이 진행되어 이상아의 보호자들이 모두 사라진 이후 남성 스태프들이 그녀를 둘러싸며 전라노출신을 찍는다고 놀렸고, 이에 사실을 알게 된 이상아가 이를 거부하자 "전라 베드신 안 찍으면 찍은 장면 다 물어내야 된다"라고 협박하여 미성년자 베드신 및 누드 노출씬을 찍었다. 관련기사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세간은 물론 네티즌들에게 강한 비판을 받았다.6.2.2. 당시 미성년자 이효정(춘향전)
길소뜸 케이스는 영화계 여성 출연자 부당대우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생긴 이후에 폭로되어서 논란이 컸지만 2000년 영화 춘향뎐은 조금 애매한 입지에 있다. 당사자가 당시 일 이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하다가 일찍 은퇴해버렸고 이미 제작 당시 논란을 예술성으로 잠재워버리고 완성한 탓에 일사부재리적 느낌으로 다시 죄를 묻는 움직임이 적었기 때문이다. 다만 논란 자체는 존재했고 당시 주연으로 출연한 배우 이효정은 영화 촬영 당시 16세 미성년자였는데 영화 상에서 베드신과 노출신 분량이 있어서 해당 씬을 촬영 당시 많이 힘들어 했다고 밝힌 바가 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영화라기 보다는 길소뜸 케이스의 보조 증거로 많이 활용되는 정도다.6.2.3. 안소영
1986년 영화 티켓은 길소뜸이나 춘향뎐처럼 예술 영화로 포장되던 작품이라기 보다는 전형적인 호스티스 영화에 해당해 메스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이 작품 역시 배우의 후일담 때문에 논란의 케이스로 기록되었다. 주연 중 하나로 출연했던 배우 안소영은 애마부인 등 에로영화 출연 이후 힘든 시기를 겪다 임권택이 자신을 예뻐해주자 자신을 배우로 생각해주는 사람을 만나 좋았다고 회고 했다. 그러나 티켓에서 역시 임권택이 베드씬을 위해 벗어야 한다고 말했고 그래서 임권택 앞에서 엉엉 울었다며 "어떻게 감독님마저 날 벗기려고 하냐"고 해 배우 김지미가 해당 씬을 대신하며 베드씬을 면했다고 한다.6.2.4. 김호정
상술한 사례들은 모두 20세기 구시대 케이스로서 '어르신 왜 그러셨어요' 정도로라도 넘어갈 수 있었다면, 21세기 들어 2014년에 촬영한 마지막 영화 화장에서 마저 사전미협의 노출 강요 논란이 있었다. 배우 김호정의 성기 노출 장면이 사전 합의 없이 현장 결정으로 촬영되었던 것이 드러나며 다시금 논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김호정 본인은 당황했지만 요청에 따라 담담히 촬영했다며 회고했으나, 이미 임권택이 사전고지 없이 노출씬을 촬영하는 행태가 알려진 이후였기 때문에 논란이 이어지게 되었다.[28]6.2.5. 여담
이런 논란의 여파로 인해 본인이 연출을 은퇴한 후에도 녹차의 중력 같은 다큐멘터리가 나올 정도로 기본적으로는 영화계의 존경받는 감독으로 남아있지만 상술 논란의 영향으로 공개적으로 존경을 표하기는 어렵게 됐고, 대중들 사이의 유명세도 많이 사그라들었다. 완벽한 예술적인 영화를 찍는 감독이라기 보다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고용 감독으로서 엄청난 다작을 하다가 개중에 예술적 성취를 인정받는 영화들이 나왔던 것인데, 21세기에 들어 예술 영화를 찍는 영화계 큰 어른이라는 이미지만 받아들였던 대중에게는 논란이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대중의 반응이 이렇다보니 영화인은 물론 영화 애호가들도 아제 아제 바라아제, 서편제, 취화선 등 영화에 대한 언급이 아니고서는 개인으로서의 임권택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다소 꺼리고 있다. 당연하지만 알고리즘의 영향을 많이 받는 구글에도 관련 검색어로 논란 사실이 쉽게 뜬다.7. 참고 자료
- 저서
- 나의 선택, 나의 길(공저) - 산하. 1998.
- 도서
-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전 2권) - 현실문화연구. 2003.
- 칼럼/링크
[1] 제14회 시상식부터 대상 신설[2] 호적상으로는 1936년 5월 2일생([age(1936-05-02)]세)이다.[3] 나주 임씨 집성촌이다.[4] 장수공파 30세손 ○택(○澤), ○순(○淳) 항렬.(족보)[5] 林鍾英, 1913.2.8. ~ 1966.4.12.(족보)[6] 1951년생 배우. 임권택과는 1973년 혼인 신고를 한 후 1979년에 결혼식을 올렸다.[7] 영화 프로듀서다.[8] 예명은 권현상이며 배우로 활동 중이다.[9] 現 월평초등학교[10] 2012년에 세례를 받았다.[11] 중앙일보 인터뷰 中[12]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 임권택·정성일 대담, 현실문화연구, 2003, p.16 / 가독성을 고려해 윤문됨.[13] 네이버 프로필은 호적상 생년인 1936년생으로 기재되었다.[14] 인터뷰 원문[15]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 임권택·정성일 대담, 현실문화연구, 2003, p.16~17 / 가독성을 고려해 윤문됨.[16] 출처 -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의 2004년 인터뷰.[17] 이때의 전쟁영화는 말그대로 진짜 전쟁통인 것처럼 찍었다. 특수기술 따위가 있을리 없어 전쟁 영화에서 벌어지는 전투 장면 대부분은 진짜 실탄과 폭탄을 썼고, 그로 인해 사람이 다치는 것은 예사일이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독고영재의 사례#.[18] 후에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에서도 패러디(...)되었다.[19] 다만 근본적으로 반공 영화이기 때문에 인민군만나쁘고, 국민방위군 사건 같은 건 일절 나오지 않는다.[20] 당시 한국에서 개봉했던 영화 중에서도 가장 많은 관객수를 기록했던 영화는 1979년 작인 성룡 주연의 홍콩 무협영화 취권이었다. 당시 서울 98만 관객을 동원했다고... 참고로 1990년 엄청난 대박이던 영화인 서울 92만 관객이 본 사랑과 영혼 같은 영화와 견줘도 얼마나 대박인지 알 수 있을 듯. 다만 사랑과 영혼은 전국 350만 관객이 보면서 전국 관객 200만 정도로 추정되는 서편제가 좀 더 낮다.[21] 그래서 임권택도 제작비를 그리 많이 들지 않게 찍었다고 한다.[22] 하지만 상영 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고, 접속은 롱런하고 호평이 많았던 반면, 이 영화는 특히 여성 관객들에게 반응이 좋지 않았다.[23] 당시에 이효정은 16세로 미성년자였는데, 길소뜸과 달리 짧지만 이건 직접 노출하고 나름 베드신도 소화했다.[24] 펀치 드렁크 러브의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과 공동수상했다.[25] 김용옥은 위에 언급한 개벽과 장군의 아들의 각본에도 참여했는데, 여기에 얽힌 비화도 꽤 있다.[26] 서편제에서는 오정해의 한 관련 이야기에 치중해서 김규철의 고민이 많이 줄어들었다. 여기서는 완전히 현시창.[27] 구로사와는 임권택 영화에서 베스트 3을 꼽으면서 만다라, 씨받이, 아벤고 공수군단을 언급했다.[28] 노출 장면 촬영과 관련해 강제 논란이 이는 이유 자체가 배우는 현장에서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입지에 있다는 것을 감안한 논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