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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 장편 연출 작품
,(1980년 이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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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1971) | 나를 더이상 괴롭히지 마라 (1971) | 둘째 어머니 (197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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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이후 제작 ▶ |
1. 소개
카지야마 토시유키 원작, 임권택 감독의 1979년 개봉작. 주연배우는 하명중, 한혜숙, 주선태, 독고성 등.임권택 감독의 걸작으로, 그의 작품 세계가 정립되기 시작한 기점으로 평가된다. 임권택 감독 또한 스스로 평가하기를, 이 시절, 서양영화, 특히 미국영화의 아류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개성을 담아내려는 노력을 해왔는데, 이 노력이 드러나기 시작한 작품이 '족보'라고 말했다. (관련 기사##)
2. 줄거리
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을 진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경기도청 총력1과에서 근무하던 일본 청년 다니(하명중 분)는 창씨개명을 설득하기 위해 설씨 집성촌[1]에 찾아가게 된다. [2] 다니는 자신이 만난 설씨 문중의 종손 설진영(주선태 분)이 창씨개명 설득을 거절하는 모습을 보고 그 강직한 면모에 감명을 받는다. 한편으로 설진영의 딸 옥순(한혜숙 분)에게도 끌리게 되고 설진영과 만나면서 조선인들의 족보와 혈통에 대한 정신에 감동해 자신의 본분과 조선인들의 족보와 혈통에 대한 정신을 존중하는것 사이에서 갈등한다.그러나 다니의 갈등과는 무관하게 일제는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설진영을 압박해나간다. 가장 먼저 딸 옥순의 약혼자를 헌병대에 끌고가 하지도 않은 독립운동 혐의를 뒤집어씌워 고문하고 지원병으로 입대해야만 풀어주겠다며 협박하여 그를 실성하게 만들어 파혼에 이르게 하고, 설진영의 아들과 손자들까지 압박을 가한다. 결국 견디다 못한 설진영은 면사무소로 가서 가족들의 이름을 모두 일본이름으로 바꾼다. 창씨개명을 한 후 표정이 한층 밝아진 손자들의 재롱을 본뒤 사랑방에 혼자 쓸쓸하게 남은 설진영은 족보의 마지막 장에 '자신의 무력함으로 인해 족보가 끊어져 설씨의 역사가 끊어졌으니 그 역사를 따라갈란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적은후 독약을 마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장면이 총력1과로 바뀌고, 다니는 과장에게 설진영의 사망소식을 전하자 마자, 과장이 "그런 비국민(非国民)이 죽은 소식을 내가 들어야 하나"고 말하고, 다니는 분노하여 "술집에서 여자 엉덩이나 만지는 니놈이 비국민이다!"라고 말하여 서로 싸움이 붙고, 다니는 옆에 있는 전화기를 들어 과장의 머리를 매우 세게 가격, 머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옆으로 굴러 쓰러져 사망한다.[3]다니는 설진영의 장례식에 가고 다니가 언덕에서 옥순과 함께 운구행렬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3. 뒷이야기
다니역의 하명중이 주인공인듯이 보이고 그래서 1978년 대종상에서 하명중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주긴 했지만, 주선태가 연기한 설진영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볼수 있다.강직하고 끝내 족보와 혈통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로 자결하는 그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다.[4]사실 카지야마 토시유키에게 허락을 구하고 영화를 만들어야 했겠지만, 저작권 개념이 부족한 시절이기도 했고 반일정서가 강했던 탓에 딱히 일본 원작자를 앞세울 필요를 느끼지도 못해서 무단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임권택 감독이 직접 카지야마에게 영화화에 대한 허락을 구해서 구두로 허락을 받았다라지만, 구두 허락과 실제 계약서까지 쓰고 하는 허락은 엄밀하게는 차이가 있다. 원작자 토시유키는 1975년에 사망했고, 이 영화가 만들어진건 1978년이다(...)
작중에서 창씨개명을 했다가 불경죄로 경찰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는 농부가 나오는데 그가 불경죄가 된 이유는 그가 바꾼 일본이름이 히로히토 덴노의 이름에 내 천(川)을 써서 히로히천이라고 바꾼탓(...) 순순히 일본이 원하는대로 해주지는 않았다는걸 은연중에 내보이는 에피소드인듯 하다.
이상하게도 네이버 영화, 다음 영화에서는 청소년 관람불가로 나와있다. 정작 영화를 보면 야한 대목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씨받이>때문에 이 영화도 그런 야한 영화가 아닌가라고 착각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확하진 않다.[5][6]
2010년 있었던 한국영상자료원의 임권택 전작전에서는, 오리지널 네거티브 한 권이 소실된 관계로 105분짜리 불완전판으로 상영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DVD로 출시되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과 임권택 감독이 직접 코멘터리를 담당했다. #[7]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KoreanFilm)에 이 영화가 업로드 되어 있으니 감상해보자.
설진영 노인이 다니의 개명 요구를 거절하는 뜻으로 하인을 시켜 다니를 배웅해줄 것을 지시하는데, 여기서 기차를 타러 병점까지 나가라는 말이 나온다. 극중 설 씨 집성촌은 수원 인근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영화 후반부에 창씨개명 신청을 하러가는 면사무소도 수원군 일왕면사무소로 나온다.[8]
4. 원작 관련
영화에서는 높으신 분 술자리에서 깽판치는 다니가 나오지만 원작에서는 창씨개명 강요 같은 일에 회의를 느낀 다니가 징병 연기를 포기하고 전쟁터로 나가는게 결말이다.참고로 이조잔영 등 카지야마 토시유키의 작품 대부분에서 조선과 일본의 화합이나 주인공간의 로맨스 등은 없다. 일본이 벌여놓은 일이 워낙 막장이라서 주인공들이 어떻게 속죄하려고 해도 그 죄는 갚을수 없다는 것이 결론, 이조잔영에서도 주인공과 기생과의 로맨스 대신에 기생은 떠나고[9] 남자 주인공은 헌병대에서 구타당하는 것[10]으로 결말을 맺는다.
[1] 많은 조선인 창씨개명자들이 자신의 성을 중간에 넣을수 있지만 설씨는 그런 거 없다[2] 원작에서는 설득하는데 요구조건이 다니의 징집연기였다(...) 역시 군대가는 것만큼 위협적인 것은 없다고 하지만 때가 때인지라[3] 사실 과장과의 이 격투씬은 다니의 환상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과장은 멀쩡하다.[4] 물론 설진영 자신도 오로지 성을 지키기 위해 총독부에 군량미를 몇 백섬이나 바친 일로 비난을 받은 이야기가 나올 정도니 민족감정 운운하기는 어려운 일. 실지로 단순히 성씨만을 지키고자 하는 것으로 볼수도 있다. 참고로 군량미 부분은 원작에는 없다[5] 단, DVD판 에서는 15세 관람가로 하향되었다.[6] 올레TV에서도 15세로 되어있다. Btv에는 아직도 19금으로 되어있다.[7]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대학생 시절 변두리 재개봉관에서 이 영화를 우연히 보고는 자신의 영화인생을 바꿔놓을만큼 충격을 받았으며, 그때부터 임권택빠가 되었다고 한다.[8] 일왕면은 지금의 수원시와 의왕시 일부에 해당한다.[9] 우연찮게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가 헌병 장교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여자는 3.1 운동때 아버지가 헌병에게 살해되었고 이후 기생으로 전락한 조선인[10] 아버지가 장교였기 때문에 높으신 분들도 그냥 없었던 걸로 처리할수 있는데 결국 자신이 처벌받는 것으로 속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