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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5 08:09:45

이승현(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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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ea2><colcolor=#fff> 이승현
李勝鉉
파일:htm_2008111001481230003600-001.jpg
출생 1961년 11월 26일 ([age(1961-11-26)]세)
서울특별시
종교 개신교
학력 경복고등학교
직업 배우
데뷔 1967년 영화 《육체의 길

1. 개요2. 일생3. 활동 내역
3.1. 영화3.2. 드라마3.3. 연극3.4. MC3.5. 음반
4.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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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배우.

6살이던 1966년 아역배우로 영화에 등장하기 시작해서, 1970년대 청춘영화의 대명사인 '얄개 시리즈'에서 주인공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1976년 고교얄개를 시작으로 <얄개행진곡> <대학얄개> 등에 출연했다. 1973년 청룡영화제 장려상, 1974년 제13회 대종상 영화제 특별상, 1977년 제13회 백상예술대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2. 일생

1961년에 2대 독자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사업 때문에 일본으로 많이 나가서 서울 을지로에서 어머니 이학원(1933~2019)[1]과 단 둘이 살았다.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로부터 동생을 시장가서 사오라고 졸랐을 정도로 외로이 자랐지만, 4세 때에는 어머니의 약국이 있는 광희동 로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거나 어머니가 불공을 드릴 때 절에서 스님의 목탁 소리에 맞춰 트위스트를 추는 등 비범한 모습을 보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재동'으로 불렸다고 한다.

6살 때이던 1966년, 어머니의 친구가 운영하던 충무로의 한 여관에 놀러갔다가 조긍하 감독의 눈에 띄어 영화 <육체의 길>에서 김승호의 오줌싸개 막내아들 역으로 출연하면서 아역 배우로 연기 생활을 시작하였다. NG 없이 연기를 척척 해내면서 당대 영화의 아역 상당수를 사실상 독차지했다. 특히 1968년작 영화 <속 팔도사나이>에서는 천연덕스러운 사투리를 구사하여 인기를 끌었다.

1970년 TBC 아역탤런트로 특채되어 <비둘기가족>에서 박병호의 아들 역으로 나와 TV 브라운관에도 얼굴을 알렸다. 같은 시기 <코미디스폿트>에선 배우 김희갑과 찰떡궁합이었으며 MBC <세상만사>에서도 코미디언 심철호, 아역배우 박정은 등과도 같이 출연했다. 사투리 실력 외에 노래 실력도 뛰어나 쇼와 연극 등지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또 만능 스포츠맨으로서 축구선수 황재만과 박병철과도 친분을 맺었다.

1972년 이만희 감독의 영화 <0시>에서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본인의 목소리를 녹음한 아역 배우가 되었고, 1974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울지 않으리>에선 전쟁고아 재남 역으로 열연하여 아역으로서 처음으로 대종상 특별상을 받았다. 1976년 TBC 주말연속극 <결혼행진곡>에서 개구쟁이 막내아들 역을 맡아 호평을 받았고, 1977년 <고교얄개>에서 악동 나두수 역을 맡아 이덕화에 이은 '하이틴 영화' 신화를 이어나갔다. 고교 시절 '얄개 시리즈'에만 24편이나 출연했으며, <꺼꾸리와 장다리>, <소년 홍길동> 등지의 어린이 드라마에서는 초등학생 역으로 나와 어린이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얄개 시리즈 중에는 역시 아역으로 슈퍼스타였던 김정훈과 함께 나온 영화 고교 우량아도 있었다. 둘은 같은 61년생에 활동 시기가 비슷했으나 김정훈은 거의 영화에서만 활동했고 같이 나온 경우가 거의 없다. 초등학생 때까지 아역으로의 인기는 김정훈이 넘사벽, 청소년 배우 때는 이승현이 높았다. 둘 다 성인 배우로는 실패. 하이틴물에서 한 세대 위인 이덕화임예진과 같이 나온 적이 많은데, 이승현은 강주희와 함께 나온 일이 많다.

1980년대 들어 영화 트렌드가 호스티스 등 성인영화로 바뀌면서,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 역으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여 <대학 얄개> 등지에도 출연했지만 이미지 탈피에 실패하고, 1986년 2월 캐나다유학을 떠나면서 연예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한국에 있던 어머니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레스토랑 접시닦이, 청소부, 막노동 등을 전전하다가, 1993년 10월 필리핀으로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1995년에 결혼했다. 같은 해 4월 27일 MBC <그사람 그후>에서 근황이 나와 재조명되기도 했다.

1997년 장영일 감독의 영화 <스커트 속의 드라마>로 은막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2000년에 배우 성인성과 함께 대한영화사를 차렸으나, 사기당해 망하고 자살까지 생각한 바 있었다. 2002년에는 KBS 2TV 인간극장 '얄개는 울지 않는다' 편에 나왔는데, 목회자를 원하는 아내와 뜻이 달라 별거하고 고시원에서 혼자 어렵게 살면서 다시 영화에 도전하려는 이야기가 나와 과거 얄개를 기억하는 중년 시청자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관련 글은 여기.

<인간극장> 출연 이후 팬클럽이 생기고 '얄개 이승현 살리기 운동본부'까지 생겼으나 연예계 복귀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2004년 4월 6일, KBS1 <이것이 인생이다> '얄개는 두 번 울지 않는다' 편에서 아내, 아들과 같이 출연했지만 2010년 이혼 후 2019년 다른 여자와 재혼했다.

2013년 KBS 2TV의 아침 토크쇼 프로그램 여유만만에 나와서 여러 편의 영화나 뮤지컬에 참여하고 지인의 회사에서 홍보이사로 일하기도 하는 등 다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KBS2 연예가 중계 2019년 8월 30일 방송분에서는, 충남 조치원에서 재혼한 아내와 함께 파전집을 운영하면서 간간이 배우로 활동한다고 근황을 공개했다. 2020년 4월 1일 TV CHOSUN <인생다큐 마이웨이>에서도 근황이 나왔다.

3. 활동 내역

3.1. 영화

3.2. 드라마

3.3. 연극

3.4. MC

3.5. 음반

4. 참고 자료



[1] 약대 출신으로, 결혼 전에는 외자청장 비서와 경무대 사무직원으로 근무했다.[2] 정부 홍보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