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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8:23:45

반공 영화

1. 시초2. 특징3. 전성기4. 몰락5. 작품성 있는 영화6. 관련 장르7. 목록
7.1. 외국 작품
8. 외부 링크

1. 시초

反共映畵
반공영화는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공산주의자가 탄압대상이었기 때문에 있었지만, 대한민국의 주집권층이 된 이승만 정권때부터 널리 만들어졌고, 전두환 정권기때까지 많이 만들어졌는데 당연히 괴작도 만들어졌다. 초기 반공영화 중에는 한형모(1917~1999)의 《성벽을 뚫고》,《운명의 손》이 있다. 이건 한국영상자료원에서도 DVD로 만들어줬다.

2. 특징

3. 전성기

잘나갈 때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영화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웬만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만큼 국가에서 탱크와 총기를 지원해서 실감나는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몇몇 반공영화/드라마에선 사실감을 살린다고 실탄 사격도 했다! 물론 사람에게 직접 한 건 아니고 사격훈련 장면같은 것에서 사용했다고 하지만, 《빨간 마후라》에서는 주인공 기체의 캐노피가 적탄에 깨지는 장면을 찍기 위해 실제 군 저격수가 실탄으로 캐노피를 깨트리는 위험한 촬영을 하기도 했었다.

이승만 때부터 반공예술인단이 있었다. 이 단체의 단장은 바로 악명높은 임화수. 이들은 반공정신을 고취시키고 국위선양을 한다는 명목으로 설립되었지만, 그런 거 없고 그냥 사실상 이승만 정권의 나팔수이자 전위대 역할을 했다. 일단 대장부터가[1] 이들은 '시민 위안의 밤'이라는 것을 열어놓고 이승만과 이기붕이 당선되도록 시민들을 선동했다. 이들을 주축으로 꽤 많은 반공영화가 제작되곤 했다. 아니, 당시에는 그냥 별 생각없이 다들 반공영화 한두 편은 찍던 시대였기 때문에.

반공영화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표현이 자유로웠다. 상기한 《운명의 손》은 한국 최초의 키스신이 등장한 영화였고, 의외로 다른 영화보다 반공영화는 섹스에 대한 묘사가 조금 더 열려있었다고 한다. 공산당은 이렇게 부도덕한 인간말종들이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명분으로 성교 장면이나 성고문 장면을 넣을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요즘 시대에 비하면 탈레반 수준 자유부인이 처음 나왔을때의 반응이나 군사정부 당시 많은 영화들이 사전검열로 가위질의 대상이 되었던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반공영화가 피해갈 수 없는 검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데올로기. 이만희 감독은 반공영화 《7인의 여포로》를 만들었지만 오히려 용공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다. 높으신 분들의 생각보다 반공의 묘사가 약했고 표현이 애매모호했다나... # 같은 방식의 용공논쟁은 이예춘이 나온 이강천 감독 영화 《피아골》에도 가해졌다. 인민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데에서 꼬투리를 잡힌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문제로 반공영화는 점점 더 북한군을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살인마로 그려야 했고, 반대급부로 폭력이나 성 묘사는 더더욱 노골적이 되어갔다. 그래서 훗날 반공영화를 보고 모방범죄가 일어나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자세한 사항은 이승복 어린이 문서의 내용을 참조. 그리고 당시 성애 묘사에 관대하지 않았던 한국영화의 사정상, 반공영화는 성묘사에 제법 관대했는데, 문제는 간혹 청소년들이 이러한 영화를 보는 것을 권장했다는 것이다.[2] 그래서 신문지상에서는 "반공영화는 벗기기 영화냐"라는 비판이 간혹 실리곤 했다. 심지어는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년대 초반까지 국민학교에서 소액의 돈을 받고(300원 정도) 학교에서 반공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업자가 장비를 가지고 학교마다 돌며 강당 등지에서 상영을 하고 학교는 이에 협조해주는 형식이었는데 문제는 사람 손가락 자르기나 온갖 고문, 예를 들면 이승복 사건을 다룬 영화라면 그 전에는 글로만 접했던 무장공비가 어린 소년의 입을 찢고 돌로 머리를 짓이기는 적나라한 묘사가 그대로 영상으로 나와 어린 국민학생들을 멘붕시키는 일이 허다했다는 것. 아이들의 비명이 울려퍼지고 눈물바다가 되는 건 당연하고 심지어는 토하는(!) 아이들까지 나오는 일은 예사였다. 지금도 30~40대 중에는 이때 본 영화가 트라우마가 됐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을 정도. 따라서 아이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영화상영을 한다면 매우 싫어했지만 모두 300원씩 내고 강제로 시청해야했다. 90년대 후반 보이스카우트 수련회 등에서 이승복 기념관을 방문해 시청하게 하기도 했다. 더러운 비리[3]

자매품으로 반공드라마가 있는데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실화극장 등이 있었으며, 전담 작가로는 중앙정보부 출신인 김동현이 있다. 1956년부터 TV방송이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1970년대 초반까지는 한국영화가 나름대로 전성기였던데다가 TV드라마는 영화출연에 비해서 출연료가 많이 낮았고,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비디오 테이프가 도입된 이후로도 한 동안 편집이 불가능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NG없이 찍어야하는 등 제작환경도 썩 좋지 않아서 영화배우들에게 별로 선호받지는 못했는데[4] 반공드라마는 안기부에서 전화 한통만 걸어오면 즉각적으로 출연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렇다.[5]톱스타들의 동원이 실시간으로 가능해서 인기가 많은 작품들도 다수 나왔으며, 이는 이승만 정권때부터 전두환 정권때까지 일관되게 진행되었다. 거기에다가 볼거리가 없었던 시절인지라 비록 특수효과같은것이 조잡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당대 기준으로는 볼만한 작품들도 꽤 선보였기도 했다. 방송은 영화보다도 정권의 직접적인 통제대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반공드라마는 1980년대까지도 상당수 제작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재가 천편일률적이게 된 것이나 지나친 선정성 및 폭력성 문제는 반공영화와 마찬가지가 되었고[6] 그로 인해 조잡한 작품들이 다수 나오며 인기가 식어갔다. 그나마 1980년대에 전우지금 평양에선이 반공드라마로 인기를 끌었지만 이것도 80년대 중반 이후로는 팍 식었고, 서울아시안게임에서의 중공참여와 서울올림픽에서의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의 참여 때문에 반공드라마의 제작은 줄어들어았으며 1987년 6.29 선언과 노동자 대투쟁 후 노조가 결성되고, 통일문제 얘기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1988년 <따뜻한 남쪽나라>와 1998년 <진달래꽃 필때까지>를 빼곤 찾아볼 수 없다.

과거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반공영화를 단체 관람하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 편이 적군을 격퇴하는 장면이 나오면 자동적으로 우레 같은 박수가 나왔다고 한다(...). 1960~197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전후 베이비붐 세대 어른들께 여쭤보면 이런 경험을 한 적이 한 두 번쯤은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은 반공영화의 리즈시절이었을 정도다.

심지어 대종상에 반공영화부문이 떡하니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966년 처음 제정된 "우수반공영화상"과 "반공영화 각본상"이 있었다. 그러나 반공영화는 늘 대부분 계몽영화가 그렇듯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영화제작자들은 반공영화를 장사가 안 된다는 이유로 만들기 꺼렸다. 결국 정부는 반공영화 제작 촉진을 위해 "반공영화 중 우수작으로 선정이 되면 해외 영화 수입 쿼터에서 우선적으로 배정을 해 주는 제도를 만들었다.[7] 그러나 이 제도는 1985년에 폐지되어 버린다. 그러자 반공영화가 1편도 제작이 안 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

대종상의 반공영화부문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폐지되었다.# 사실 안 그래도 제작편수가 줄고 사람들이 외면해서 점점 사장되는 장르였다(...). 1988년에는 노태우의 '7.7 선언'과 운동권에 의한 '북한 바로알기 운동' 등의 영향으로 전체 제작편수의 5퍼센트도 안되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상을 주는 게 더 웃기는 일이다. # 이후 반공영화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

대신 1980년대 후반 ~ 90년대 초반 NL운동권들이 '북한 바로알기 운동' 당시 북한 영화들을 대학가에서 음성적으로 소개했고, 1999년 <쉬리>와 <간첩 리철진> 등 반공영화 요소에서 벗어난 작품들이 나온 후 2000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교류의 영향으로 대니얼 고든의 <어떤나라>, 김명준의 <우리학교>와 같이 북한 내지 조총련 등을 바로 알고자 하는이라 쓰고 미화 의도를 담은 작품들이 버젓이 제작/수입되었다.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를 시초로 '북한군=악당'이란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난 작품들도 나왔다.

4. 몰락

사실 반공영화 자체가 국가가 주도하여 의도적으로 제작이 된 점이 있다. 물론 초기의 반공영화들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처럼 전쟁의 아픔에 반공을 잘 녹여낸 수작들로 출발했지만, 가면 갈수록 한정된 소재와 검열로 인해 반공영화는 그 한계가 뚜렷해서 발전을 못했다. 한국 영화계의 양판소 게다가 국가 주도로 반공영화기금을 조성하거나,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반공영화를 제작하여 상을 받으면 해외영화 수입 쿼터에서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게 하는 등 국가주도의 문화정책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대중선동을 위해 의도적으로 선전영화를 제작함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대중동원을 하여[8] 국가의 입맛대로 국가의 사상을 강요하기는 파시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공영화는 90년대 이후로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9] 물론, 90년대에도 가뭄에 콩나듯 간혹가다 제작이 되긴 했으나, 일단 너무도 재미가 없었다... 소재도 뻔했고, 세트장이나 특수효과도 그럭저럭이었고 영화 자체의 작품성이나 완성도도 너무 떨어졌었다. 90년대에는 차인표 주연의 《알바트로스》 같은 작품이 등장하긴 했으나 이것도 시망. 사실 이 작품은 당시 차인표, 이휘재군복무 중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놈의 강제동원 좀 안하면 덧나나 아 그럼 영화를 못 만들지 심지어 당시에는 이 영화를 보고 입장권을 제출하면 예비군 훈련의 일부를 면제해주기도 했다. # 그래도 노태우 정권만 해도 반공영화가 몰락하지는 않았다.

현재는 고전적인 반공영화는 등장하지 않고 《크로싱》 같은 탈북 난민들에 대한 영화나 북한의 수용소의 실상을 고발한 작품들에서 반공적 색채가 조금씩 나오고 있는 편이다. 현재 "북한 인권영화제"라는 곳에서 이런 영화들을 모아서 상영한다고 한다.[10]태양 아래》와 같이 외국인이 찍은 북한 비판 다큐멘터리영화도 수입되고 있다.

그렇게 고전적인 반공영화는 대중의 뇌리에서 점차 잊히는 듯했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포화속으로》의 개봉 등으로 반공영화가 다시 고개를 들더니,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는 고전적인 형태의 반공영화가 다시금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국제시장》과 《인천상륙작전》, 《연평해전》이다. 단 《국제시장》은 감독인 윤제균이 중립성을 지키려고 했었던데다 작품성 자체는 논란이 있긴 했어도 뒤의 두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인천상륙작전》은 그렇지 않았다. 《연평해전》은 시민 펀드로 제작비를 모았고 실제 북한의 도발을 영화로 만들었기 때문에 약간 다른 경우이지만 좌파 진영에서는 이것도 일종의 반공영화로 보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을 끝으로 이런 반공영화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휩쓸려 급격히 몰락했다. 이어 2017년 5월 10일자로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권이 교체되었기 때문에 이후에는 반공영화를 볼 수 없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2018년 11월에 《출국》이 개봉되었지만 흥행에 실패했고 2019년 9월에도 장사 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이 개봉되긴 했지만, 말그대로 흥행에 참패하면서 대중들의 반공영화를 보는 시각이 높아졌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하지만 2022년에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힘윤석열 후보가 당선되고 5년만에 정권이 교체되면서 향후 반공영화가 다시 부활할 가능성도 있다.

5. 작품성 있는 영화

이건 감독을 봐야 한다. 임권택이나 한형모, 이만희 등등. 절대로 배우를 보면 안 된다. 그 시절에는 신성일 같이 왕년에 잘나가던 배우들도 1년에 영화 100편을 찍는 시절이기 때문에 배우로 작품의 질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6. 관련 장르

당연히 영화뿐 아니라 문학, 애니메이션으로도 있었고 문학의 경우 일반적인 반공소설들도 있었지만, 아동을 대상으로 한 반공동화 및 논픽션 반공 교육 서적[11]도 있었다. 논픽션의 경우 대남도발 이야기라거나(이승복은 당연히 이쪽의 단골 메뉴다) 실제 북한에서 귀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김만철 일가 귀순사건도 책으로 여럿 나왔었다. 반공동화 및 논픽션 반공 서적의 경우 주로 5공 이전에 발간된 물건들이 1990년대까지만 해도 초중고 도서관 등에 많이 비치되었었으며 장르적 특성을 반공 영화와 일정정도 공유한다. 분명 아동대상의 반공교육서적임에도 인민군의 잔혹행위가 가감없이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12] 한편 어린이용 반공소설의 예를 들면 거품으로 변신할수 있는(?) 주인공 꼬맹이들이 북한에 침투해 인민군들을 농락하고 핍박받는 북한사람들을 돕는다는 내용의 연작소설 시리즈도 있었다.

이쪽 분야에서 유명한 작가의 예를 들면, 오세발이라는 작가가 있다. 이름이 조금 웃기지만 이는 필명으로, 원래는 오세련으로 피난민 출신 작가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김두한관련 논픽션을 써낸적이 있었으며 2004년 별세.

7. 목록

애니메이션은 반공 애니메이션 항목 참조.

7.1. 외국 작품

대부분이 미국만세를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8. 외부 링크


[1] 임화수는 반공예술인단장으로서 한국연예주식회사 사장,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 서울특별시극장협회 부회장, 한국무대예술원 최고심사위원 등의 직함도 가졌다.[2] 북한과 이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것이, 작곡가 윤이상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님을위한 교향시》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온다. 이 영화는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당시 광주의 상황을 황석영의 르포집을 토대로 재현했다. 이 르포집에 나와있던 내용 중 "군인이 술을 마시고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여대생들의 웃통을 벗겼다"라는 내용을 그대로 재현했다. 아마도 북한 영화중에 브라자가 나오는 유일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3] 90년대 초반 이후에도 이러한 업자들이 학교를 돌며 영화를 상영하긴 했지만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에 따라 잔혹한 내용의 반공영화보다는 저예산 SF영화 같이 아이들이 그나마 좋아할만한 영화로 상영물이 바뀌어갔다.[4]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인기있던 배우들 이야기이고 인기없는 배우들은 영화출연을 못하면 TV드라마라도 출연해서 밥벌이를 해야했던것은 마찬가지였다.[5] 사실 당시에는 정권의 눈에 잘못들어오면 일감이 끊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1960~70년대 영화계의 스타 신성일도 영화에만 전념했지만 반공드라마에는 여러편에 출연했다.[6] 당시 방송데 대해서 이런저런 칼질을 해대던 시절이었지만 하지만 그랬으면서 국산TV만화영화 제작 강제는 못했다 영화보다는 덜하기는 했어도 반공드라마에 대해서 심의가 온건하게 적용되었다.그러다보니 타 프로그램에서 나왔다면 난리가 날 장면들이 나와도 봐주는 경우가 많았다. 당대기준에서 수위가 센 장면들이 많이 나왔던 것은 덤이다.[7] 당시에는 돈이 있다고 해서 외국 영화를 맘대로 수입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자국 영화산업의 보호를 명목으로 외화 수입편수를 제한했고, 각 영화사마다 해외영화 수입 쿼터를 배정받았다. 이러면 공산주의 국가랑 별로 다를 바가 없잖아...[8] 제작지원+국가검열+관객동원이라는 방식이 비일비재했다.[9] 재미있는 점은 반공영화에서 북한까기 소재 가운데 하나로 등장한 북한의 비참한 생활상 운운하던 레퍼토리가 현실화 되던때가 1990년대라는 점이다. 체제경쟁이 진행되고 있었을때에는 북한이 아시아 공산국가 가운데서는 생활수준에 있어서 선두권이었고 중국이나 베트남, 라오스에 비해서 훨씬 잘살았는데 막상 남한이 민주화되어 반공영화를 만들지 않을 정도로 굳이 체제경쟁을 내세우지 않게 되자 북한의 경제가 파탄나게 되어서 북한주민들이 진짜로 비참한 생활을 겪게 된 것이다. 참고로 반공영화가 활발히 제작되었던 1960~80년대의 북한은 정치범 수용소같은곳을 제외하면 비참한 생활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편이었다. 차라리 1970년대~80년대 초반의 남한이 그때의 생활상에 좀 더 가까웠을 정도.[10] 그런데 이 곳에서는 위에서 말한 알바트로스를 상영한다고 한다(...)#[11] 군대 정훈서적의 아동판이라고도 볼수 있다.[12] 예를 들면 어떤 반공서적에서는 6.25 연간의 인민재판을 이야기할때 도끼를 들어서 재판대상의 머리를 장작패듯 찍어서 즉결처형했다는 묘사를 토씨도 안틀리고 하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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