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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9 21:46:07

선우휘

파일:조선일보 제호.svg 주필
최석채
(1965~1971)
선우휘
(1971~1980)
신동호
(1985~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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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선우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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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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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선우휘
鮮于煇
파일:seonuhwi.jpg
이름선우휘(鮮于煇)
출생1922년 1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남산동[1]
(현 평안북도 정주시 성남동)
사망1986년 6월 12일 (향년 64세)
부산직할시 동구 초량동 세호장 여관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태원 선우씨
학력경성사범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주요 경력인천중학교 교사
한국일보 논설위원
조선일보 주필
자녀아들 선우정
첫 작품귀신 (1955)
마지막 작품올림픽 (1984)
1. 개요2. 일생3. 작품 목록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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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후 소설가 겸 언론인. 손창섭, 오상원과 함께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특유의 실향민 정서와 반공, 휴머니즘성향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일생

1922년 1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남산동(현 정주시 성남동)에서 선우억(鮮于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향인 지명관의 회고에 따르면 인근에서 유명한 수재였다고 한다. 부모들이 애들을 나무랄 때 '휘를 보라'고 했을 정도라니.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 본과에 진학한다. 1943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향하여 구성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해방 이후 1946년 월남하여 동향 정주 출신 방응모가 경영하고 있던 조선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기자 생활을 시작했지만 기자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미국 유학을 꿈꾸며 퇴직한다. 하지만 미국행은 여의치 않았고, 호구지책으로 인천중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1949년 정훈장교 시험에 합격해 임관한다. 6.25전쟁 기간에 잠시 최전선 유격부대에 몸담기도 했으나 군생활 대부분은 정훈 병과에서 보냈다. 최종 계급은 대령. 한국문학사에선 보기 드문 군인 출신 문인으로, 그 뒤로는 통역장교 복무중에 <광장>등을 집필한 최인훈을 들 수 있다.

1955년 <귀신>을 신세계에 발표해 문단에 진출했고, 1956년 <ONE WAY>, <테러리스트>를 발표했다. 1957년 <불꽃>, <똥개>, <거울>을 발표하고 <불꽃>으로 제2회 동인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동인문학상 시상식에 육군 정복을 갖춰입고 참석한 일화가 유명하며 당시 육군참모차장이었던 장도영 중장이 방문해 격려하기도 했다. 동인문학상 수상 후 예편, 인천중학교 교사와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조선일보에 재입사한다.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선우휘는 편집국장, 주필, 논설 고문 등을 지내며 그 파트너로 활동한다. 방우영의 양할아버지이자 조선일보 창업주인 방응모는 선우휘와 같은 정주 출신으로 실향민으로 고향에 대한 애착이 절절했던 선우휘는 조선일보에 진즉부터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2] 1.4 후퇴 때 조선일보 시설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것은 당시 군 정훈장교였던 선우휘가 손을 쓴 덕 이었다. 그는 상부의 방화 지시에 불복하고 조선일보 시설을 그대로 뒀다. 인민군에게 넘어 가서 악용 되는 일을 막기 위해 윤전기를 불 태우라고 지시 받았으나 일제 강압으로 폐간될 때 사원들이 이 윤전기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는 계초 방응모 선생 얘기가 생각나면서 (역대 사장인) 이상재, 안재홍, 조만식 선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는 그는 윤전기 대신 활자판만 뒤엎었다.

철저한 반공 성향이었으나 우익에게도 마냥 우호적이진 않았다. 대표작 '불꽃'을 비롯해 '희극배우', '노다지' 등 그의 작품 전반에선 해방이후의 우익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둘 다 맘에 안들지만, 좌익이 더 나쁘기 때문에 덜 나쁜 우익을 택할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임하던 1964년 11월, 30대 중반 젊은 기자 리영희는 중립국들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안을 제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는데, 중앙정보부에선 해당 기사가 남한 단독가입을 추진하던 정부 정책에 배치된다며 선우휘와 리영희를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시켰다. 선우휘는 법원의 구속적부심으로 5일 후 석방됐고 리영희는 구속만기로 27일 만에 석방됐다. 리영희를 석방하는 대가로 선우휘는 자신의 편집국장직을 내놓았다. 선우휘가 자신의 편집국장직을 내놓으면서까지 리영희의 석방을 위해 뛰었던 이유는 리영희도 평북 삭주 태생의 실향민이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지만 그 이상으로 그의 행동을 규정한 뿌리는 지역주의 였다.

1965년 서울대 법대 교수였던 양호민(사상계 주간 겸임)이 한일협정에 반대하다 정치교수로 낙인찍혀 해직됐을 때, 조선일보로 데려오도록 애썼고,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수장될 뻔하다가 서울에 버려진 김대중을 두고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조속한 진상조사 및 규명을 해야 한다"는 사설을 1면에 실었다.[3] 이로 인해 중정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으나 친동생 선우연박정희의 심복(대통령비서실 소속 비서관)이라서 목숨은 건졌다. 선우휘 관련 사진을 보면 이때 중정에 끌려가서 초췌해진 모습이 꼭 나온다.[4]

저런 일화만 보면 강직한 언론인인 듯 싶지만, 독재정권을 방관, 혹은 은근히 협조적이었던 모습도 보였다.

편집국장시절 선우휘는 국제부장이었던 진보적 성향의 리영희를 조사부장으로 "강등"시켰고, 리영희에게 베트남 전쟁에 취재를 가서 국군찬양기사를 쓰라고 했으나, 리영희는 "양심상 정부찬양기사는 쓰지 못하겠다"고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선우휘는 리영희에게 노골적으로 사직을 강요했다. 리영희는 결국 조선일보를 그만두었다.

조선일보 해직기자들에 대한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는데, 아주 어이없는 답변을 늘어놓았다. 이때 그는 "왜 후배기자들에게 가만히 있느냐고 말했냐"는 해직기자 쪽 변호사의 질문에 자유언론수호선언이 “옳은 일이니까 해야 한다기보다는, '조선일보의 체면을 위해 남이 하는 만큼은 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이어 그는 "조선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실천을 위해 기자협회 분회의 회보를 발간하였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신문제작을 하는 일도 벅찬데 그런 것까지 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라고 말했다. 변호인이 다시 “들어가야 할 기사가 빠지든 깎이든 기자는 기사만 써내라 이 말인가”라고 질문하자 선우휘는 “그렇다”라고 명쾌하게 답변했다. 변호인이 선우휘의 글을 인용하여 “언론이 병들어 빈사상태”에 놓여도 “모든 것을 사장에게 맡기고 가만 있어야 하는가”라고 되묻자 선우휘는 “물론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변호인도 할 말을 잃은 듯 증언녹취록은 여기서 끝나고 있다. 아마 지명관이나 방동규와는 달리 이들 해직기자들과는 친분이 없었던 모양이다.

다만 선우휘는 태생이 태생인지라 "휴전선 이북의 김일성 도당이 있는 한 반공이 최우선"이라는 사상을 가졌고 이를 위해 남한의 군부독재를 합리화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70-1980년대에는 심한 비난을 받았다. 10월 유신대한민국 제5공화국도 옹호했으니. 조선일보에 게재되던 선우휘 칼럼은 나중에 후배 김대중 칼럼보다 훨씬 더 친여적으로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래도 나름 운동권 후배들과 재야인사들을 감싸주려는 노력도 했다. 예를 들어 지명관 교수가 1970~1980년대 일본 《세카이》지에 가명으로 체제비판적 칼럼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할 때 "너 나쁜 짓 하는 거 알고 있다"며 에둘러 활동을 그만둘 것을 권유했지만, 그의 신변을 걱정해서 안기부 직원에게는 저자의 정체에 대해 철저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재야 인사인 함석헌백기완의 뒤를 봐주기도 했으며, 방배추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방동규 씨와 끝까지 친분을 유지한 사람이 그다. 여기서 함석헌과 백기완은 선우휘와 정반대의 정치지향을 가진 재야인사였지만 선우휘가 이들을 보호하려고 한 것은 결국은 지역주의로 귀착된다. 함석헌(평안북도), 백기완(황해도), 방동규(개성), 지명관(평안남도)은 모두 실향민이었고, 선우휘는 이들의 정치적 입장이 본인과는 정반대지만, 지역주의적 입장에서 감싼 것이다. 하지만 5공시절 선우휘의 컬럼을 보면, 이들보다 더 온건했던 양김씨(김대중, 김영삼)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음을 알 수 있으니, 선우휘의 행동에 지역주의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성향이 성향이라 그런지 4컷만화 밑과 기사 한가운데에 광고를 넣자는 광고부장의 주장에 반대하여 격렬히 논쟁하다가 사장이 하라고 시키는 바람에 깨갱한 적이 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985년부터 1986년 3월까지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으며, 그 해 6월 12일에 KBS 6.25 전쟁 특집 다큐멘터리 <살아있는 전쟁>의 리포터 겸 나레이션으로 현장 방문 도중 부산직할시 동구 초량동 세호장 여관에서 뇌일혈타계하였다.

3. 작품 목록

4. 여담

사내에서 일본통 기자로 활동해서인지 덕력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에는 아키하바라모에에 관해서 투고한 기사도 있을 정도니... 참고로 아버지의 성향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12] 선우정 칼럼을 보면 기본적으로 민주당계 정당 정부에 대해 꽤나 비판적인 서술이나 주제가 많다.


[1] #[2] 선우휘의 장편 노다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일제 때부터 정주 사람들은 조선일보를 '우리네 신문'이라고 일컬어왔다. 금광왕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정주 출신 계초 방응모가 인계 맡아 비로소 사세를 확립시키고, 정주 태생 춘원이 함께 일한 신문으로 정주 사람들 자랑거리였던 것이다."[3] 사설을 실은 후 선우휘는 부인에게 대신해 사표를 방우영 사장에게 제출하고 제자처럼 아끼던 조선일보 안양지국장의 집으로 피신했다.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편지를 보내 선우주필의 해임을 걸고 자신에게 사태를 맡겨달라는 제안을 걸었다. 다행히 정보부장이 갈리는 바람에 없던 일로 넘어갔다.[4] 그래도 박정희는 선우휘의 기개는 높게 샀던 모양인지, 선우휘에게 청와대 감사원장 자리를 권했다. 선우휘는 그 권유에 일본하이쿠 한 토막을 인용해서 대답했다. "들에 핀 꽃이 아름답다 해서 집안에 옮겨 심으면 아름다울 리 있겠습니까?"[5] 이를테면 나중에 북한 장교가 되는 연호가 중일전쟁에 끌려갔다 탈영할 때 강간을 저지른다는 이야기. 원작에선 탈영하여 중국인 마을로 향하던 주인공이 지나가던 중국인 처녀를 보고 순간적인 욕정에 휩싸였다 대검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찔러 진정하는 내용이 있을 뿐 이다.[6] 전우 시즌2에서 용감한 국군 장교로 나온 강민호가 연호 역할로 등장한다.[7] 단 선우휘는 서북청년단 자체는 대단히 싫어해서 거리를 항상 두었다.[8] 오리 똥이 자신이 기르는 배나무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곡식도 못 심는 돌밭을 사육장으로 빌려주는 것을 거부했지만, 배나무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실상 텃세에 가깝다.[9] 땅주인은 대령이 온 것에 처음엔 놀랐지만 재차 강경하게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대령과 땅주인 모두 6.25 전쟁 참전용사인 것과, 땅주인이 모셨던 군대 상관이 대령의 지인인 게 밝혀지면서 좋게 해결된다.[10] 2019년 기준으로 사회부장직과 편집국 부국장직을 겸하며 2020년 3월 인사에서 뉴스총괄에디터(부국장)으로 전보.[11] 선우정 국장은 연세대 사학과 출신[12] 편집국장 취임 후 가진 기자협회보 인터뷰에서 시간이 갈수록 이전에 읽은 아버지 칼럼이나 소설이 제가 글 쓰는 데 엄청나게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느낀다. 초년병 기자 때는 그렇게 영향을 많이 안 받았는데, 나이를 먹으며 보수적으로 돼 가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때 아버지가 썼던 글, 논조 등이 점점 더 이해, 공감이 되고 영향도 많이 받는 것 같다.”며 밝힌 바 있다.[13] 2012년 4월 25일자 MBC 예능 황금어장 - 라디오스타에서 선우재덕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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