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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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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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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보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1997년
이름 김기영
분야 영화
보관문화훈장(3등급)

{{{#white 역대}}} 파일:bluedragonfilmawards_logo.png
파일:bluedragonawards3.png
감독상
제7회
(1970년)
제8회
(1971년)
제9회
(1972년)
최하원
(독 짓는 늙은이)
김기영
(화녀)
김효천
(소장수)

파일:백상예술대상로고(1).png
파일:baeksangartsawards4.png
영화부문 감독상
제8회
(1972년)
제9회
(1973년)
제10회
(1974년)
신상옥
(전쟁과 인간)
김기영
(충녀)
이원세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

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파일:daejongawards.png
한국최우수영화상 감독상
우수국산영화상
(1960년)
제1회 한국최우수영화상
(1961년)
제1회 대종상
(1962년)
유현목
(구름은 흘러도)
김기영
(하녀)
신상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
김기영
金綺泳 | Kim Ki-young
파일:김기영 감독.jpg
출생 1919년 10월 10일[1]
경기도 경성부 교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사망 1998년 2월 5일 (향년 78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 자택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80cm 이상[2]
가족 아버지 김석진, 어머니 한진초
배우자 김유봉 (1928년 10월 13일[3] ~ 1998년 2월 5일[4])
장남 김동원 (1952년생)
차남 김동양 (1958년생)
학력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중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 / 학사)
종교 불교
직업 영화감독, 각본가
데뷔 1955년 영화 <죽엄의 상자>
훈장 보관문화훈장 (1997년 수훈)
1. 개요2. 생애3. 작품 특징4. 필모그래피5. 여담
5.1. 기묘한 죽음
6. 참고 자료7. 수상 경력8. 어록/김기영에 대한 말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제작자, 편집자.

2. 생애

1919년 경성부 교동에서 태어났지만 소학교 3학년 재학 중 평양으로 이사를 하면서 평양에서 자라온 그에게 평양은 제2의 고향이었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으로 올라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고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교토에서 요리사로 일하며 고학했다.[5] 1942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944년 장기 무단결석으로 퇴학당했다.[6]

광복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가 1950년 졸업했다.[7] 연극부에서 연출을 맡던 중 평양에서 헨리크 입센의 유령을 공연했다. 공연은 기성 연극 수준을 뛰어넘는 가작이라는 극찬을 들었고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에서 연극이나 영화의 검열을 담당하는 관계자로부터 모스크바 유학 제의를 받기까지 했었는데, 거절하고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하였고, 이때 부인과 결혼하였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부인 김유봉도 1950년에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전문부를 졸업한 치과 의사였는데, 대학 시절 연극부 활동을 같이 했었다고 한다.

이후 주한미국공보원에 스카우트 되어 <나는 트럭이다>, <수병의 일기> 등의 문화 영화, 홍보 영화를 만들다가 미 공보원의 지원으로 장편 극영화 <죽엄의 상자>를 1955년에 완성했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상업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시절 영화 필름이 그러듯이 초창기 영화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필름이 남아있는 첫 상업 영화 <양산도>는 필름의 훼손이 심해 결말부 부분이 아예 사라져 버렸고, 데뷔작인 <죽엄의 상자> 같은 경우 그 필름이 뒤늦게 발견되었지만, 사운드 네거티브 필름이 아예 소실 되었다.

당대의 흥행 감독이자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예술성으로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던 대표적인 감독이었지만 점점 대중들에게 외면 받아, 1990년대 초반 쯤에는 거의 잊혔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영화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던 박찬욱, 봉준호, 임상수, 류승완 등의 후배 감독들과 여러 신진 영화 평론가들이 적극적으로 그의 작품을 재조명하고 연구한 덕에 다시 빛을 발하게 되었다.

김기영은 하녀의 새로운 리메이크작인 악녀를 기획하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집안에서의 화재로 부부 모두 사망하게 되었다. 부부가 사망했을 때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김기영 회고전이 열리기 며칠 전이었다고 한다.

2018년 11월 CGV 아트하우스 명동씨네라이브러리에 헌정관이 설립되었다. 임권택, 안성기, 박찬욱에 이어 네 번째이며, 사망한 인물 중에서는 첫 번째다.

3. 작품 특징

김기영의 영화는 전체적으로 남성미를 강조하던 당시 시대상과는 사뭇 다른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하며,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 부인에게 의지하는 남성상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이와 반대로 여성들은 강인하고 노동에 적극적으로 종사하며, 개인적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하녀의 역할로서 외부에서 침입한 여성은 계급적 욕망을 위해 집안의 본처와 충돌하며, 본처는 중산층의 삶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동 계급의 여성과 대립하는 내용이 '하녀 시리즈'의 기본 구조다. '이어도'에서도 남성은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으며, 경제 활동 뿐만 아니라 자신과 공동체의 운명까지 여성들이 모두 결정한다.

하녀 시리즈부터 김기영의 영화에는 쥐, 계단, 담배, 독약 등이 주요하게 쓰이는데 특히 쥐가 자주 등장한다. 김기영의 광팬인 봉준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히치콕에게 가 있다면, 김기영에게는 쥐가 있다"고(...) 참고로 영화 촬영 중에 윤여정, 이은심 같은 여배우들이 직접 쥐를 잡고, 때리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쥐에 맞기까지 한다. 이 경험 때문에 화녀에 출연했던 윤여정은 당시 "촬영만 끝나봐라, 이 감독 내가 다신 말이나 거나 봐라" 하고 이를 갈았다고 한다. 물론 그래놓고 윤여정은 다음작 충녀에 또 출연했다.(...)

김기영의 영화들은 전체적으로 묘한 에로티시즘이 풍기는데, 그러면서도 굉장히 기괴하다. 충녀에서의 알사탕 위에서의 정사씬도 그렇고. 충녀가 시체스 영화제와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을 때, 현지 관객들도 하수도 장면을 보고 경악을 했다고 한다. '이어도'에서의 시체와의 섹스신도 그랬다. 이게 국내 방영 및 극장 개봉당시 검열에 의해 잘려나갔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일본 NHK-bs 2 방영 당시 이 장면이 그대로 실리면서, 이 버전을 녹화한 것이 고가로 팔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다행히 영화사에서 원본 필름을 소장하고 있었던 터라, 이후 삭제 장면 없이 그대로 디지털로 복원될 수 있었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에서는 심지어 '뻥튀기 과자' 위에서의 정사씬까지 등장한다.

김기영을 알리는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는 하녀 시리즈의 계단을 내려오는 남자가 붙잡은 여자의 머리가 계단 층계 하나하나에 부딪히는 장면. 특이한 것은 이런 기괴한 장면을 스스로 찍으면서도 그걸 싫어했다는 것이다.

영화에 그때의 시대 상황과 현실을 집어넣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10대의 반항'이라는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만든 적도 있다. 또한 세계적인 문화 트렌드를 읽어내는 능력도 뛰어나서 그의 작품들을 보면 당시의 트렌드를 알 수 있다.[8] 놀라운 점은 그런 트렌드를 단순히 따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트렌드를 자신의 영화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완전히 자기화시켰다는 점이다.

또 하나 독특한 점은, 자신의 영화를 여러번 반복해서 리메이크 했다는 점이다. 김기영의 초기 히트작인 하녀는 당대의 흥행 영화이면서도 동시에 작품성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본인도 하녀 시리즈에 애착이 있었던 터라,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여 반복해서 리메이크 했다.

4. 필모그래피

김기영 감독 장편 연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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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width=200><bgcolor=#FFF,#191919> [[죽엄의 상자|[[파일:죽엄의상자.png|width=13%]]]] ||<width=200><bgcolor=#E2D497,#191919> [[양산도|[[파일:양산도.png|width=14%]]]] ||<width=200> [[봉선화(영화)|[[파일:봉선화(김기영).png|width=90%]]]] ||
||<bgcolor=#FFF> {{{#000 죽엄의 상자 (1955)}}} ||<bgcolor=#E2D497> {{{#CC4122 양산도(1955)}}} || {{{#F01617 봉선화 (1956)}}} ||
||<width=200><bgcolor=#C0B07E,#191919>  [[여성전선|[[파일:여성전선.png|width=15%]]]] ||<width=200><bgcolor=#EBE1C6,#191919> [[황혼열차|[[파일:황혼열차.png|width=13%]]]] ||<width=200> [[초설|[[파일:초설.png|width=85%]]]] ||
||<bgcolor=#C0B07E> {{{#C53B1A 여성전선 (1957)}}} ||<bgcolor=#EBE1C6> {{{#D1512C 황혼열차 (1957)}}} || {{{#FFF 초설 (1958)}}} ||
||<width=200> [[슬픈 목가|[[파일:슬픈목가.png|width=100%]]]] ||<width=200><bgcolor=#587A2D,#191919> [[10대의 반항|[[파일:10대의반항.png|width=13%]]]] ||<width=200><bgcolor=#85B07B,#191919> [[하녀(1960)|[[파일:하녀(김기영).png|width=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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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color=#DCCFA5> {{{#508446 현해탄은 알고 있다 (1961)}}} ||<bgcolor=#FFF> {{{#253C42 고려장 (1963)}}} ||<bgcolor=#D7CB99> {{{#C5444F 아스팔트 (1964)}}} ||
||<width=200><bgcolor=#D9C7A3,#191919>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파일:병사는죽어서말한다.png|width=100%]]]] ||<width=200><bgcolor=#383A2C,#191919> [[여(영화)|[[파일:여(김기영).png|width=45%]]]] ||<width=200> [[렌의 애가|[[파일:렌의애가.png|width=100%]]]] ||
||<bgcolor=#D9C7A3> {{{#2D3D33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 (1966)}}} ||<bgcolor=#383A2C> {{{#E1B3A6 여 (1968)}}} || {{{#FFF 렌의 애가 (1969)}}} ||
||<width=200><bgcolor=#373C36> [[미녀 홍낭자|[[파일:미녀홍낭자.png|width=95%]]]] ||<width=200> [[화녀|[[파일:화녀.png|width=90%]]]] ||<width=200><bgcolor=#FFFFFF,#191919> [[충녀|[[파일:충녀.png|width=95%]]]] ||
||<bgcolor=#373C36> {{{#!html <span style="text-shadow: 1px 0px #52A3C0, 0px 1px #52A3C0, -1px 0px #52A3C0, 0px -1px #52A3C0, 1px 1px #52A3C0, 1px -1px #52A3C0, -1px -1px #52A3C0, -1px 1px #52A3C0; color:#D4BF52"> 미녀</span>}}} {{{#D4BF52 홍낭자 (1969)}}} || {{{#FFF 화녀 (1970)}}} ||<bgcolor=#FFFFFF> {{{#000 충녀 (1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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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ml <span style="text-shadow: 1px 0px #FFF, 0px 1px #FFF, -1px 0px #FFF, 0px -1px #FFF, 1px 1px #FFF, 1px -1px #FFF, -1px -1px #FFF, -1px 1px #FFF; color:#008480"> 이어도 (1977)</span>}}} ||<bgcolor=#BB3927> {{{#FFF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1978)}}} ||<bgcolor=#D6CEB2> {{{#5E4D49 흙 (1978)}}} ||
||<width=200><bgcolor=#D4D3B7,#191919> [[수녀(영화)|[[파일:수녀(김기영).png|width=90%]]]] ||<width=200><bgcolor=#CFC8AC,#191919> [[느미|[[파일:느미.png|width=100%]]]] ||<width=200><bgcolor=#E7DED9,#191919> [[반금련(영화)|[[파일:반금련.png|width=100%]]]] ||
||<bgcolor=#D4D3B7> {{{#BE0402 수녀 (1979)}}} ||<bgcolor=#CFC8AC> {{{#C54F5F 느미 (1979)}}} ||<bgcolor=#E7DED9> {{{#BC1D31 반금련 (1981)}}} ||
||<width=200><bgcolor=#2D3661,#191919> [[화녀 '82|[[파일:화녀82.png|width=85%]]]] ||<width=200><bgcolor=#C03683,#191919> [[자유처녀|[[파일:자유처녀.png|width=100%]]]] ||<width=200> [[바보사냥|[[파일:바보사냥.png|width=100%]]]] ||
||<bgcolor=#2D3661> {{{#AF3753 화녀}}} {{{#D19AA0 '}}}{{{#8BB9B7 82}}} {{{#D19AA0 (1982)}}} ||<bgcolor=#C03683> {{{#1E256F 자유처녀 (1982)}}} || {{{#!html <span style="text-shadow: 1px 0px #FFF, 0px 1px #FFF, -1px 0px #FFF, 0px -1px #FFF, 1px 1px #FFF, 1px -1px #FFF, -1px -1px #FFF, -1px 1px #FFF; color:#AF1829"> 바보사냥 (1984)</span>}}} ||
||<width=200><bgcolor=#151424,#191919> [[육식동물(영화)|[[파일:육식동물.png|width=100%]]]] ||<width=200> [[죽어도 좋은 경험|[[파일:죽어도좋은경험천사여악녀가되라.png|width=100%]]]] ||<|2> [[김기영(1919)|[[파일:김기영서명.png|width=25%]]]] ||
||<bgcolor=#151424> {{{#!html <span style="text-shadow: 1px 0px #FFF, 0px 1px #FFF, -1px 0px #FFF, 0px -1px #FFF, 1px 1px #FFF, 1px -1px #FFF, -1px -1px #FFF, -1px 1px #FFF; color:#EE241A"> 육식동물 (1984)</span>}}} || {{{#B797C8 죽어도 좋은 경험}}}{{{#FFF (천사여 악녀가 되라) (1990)}}} ||
||<-3><height=20><bgcolor=#181818> '''[[https://www.kmdb.or.kr/db/per/00004686/filmo#divFilmo|{{{#ffffff {{{+1 상세정보 링크 열기}}}}}}]]''' ||

김기영은 총 32편의 장편 영화를 연출했다. 이 문서에 소개된 영화는 김기영 연출작의 극히 일부분이다.

5. 여담

자네한테만 말해주지. 그건 말이야, 주인공이 아무리 쌍권총을 들고 설쳐대도 나쁜 놈들이 쏘는 총은 하나도 안 맞잖아. 그건 게임 같은 거거든. 바로 그거야. 요즘 애들은 게임을 좋아한다. 그 영화는 게임처럼 찍었어. 그래서 손님이 드는 거야. 쉿,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게. 비밀이니까. 우하하핫...! #

5.1. 기묘한 죽음

김기영의 아들 김동원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기영의 죽음에 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영화처럼 기묘한 죽음과 또다른 유작들

누가 봐도 기묘한 죽음이었다. 김기영 감독 부부는 1998년 2월 5일 새벽, 명륜동 집[13] 화재사건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까지 미공개 작품이었던 그의 영화 <죽어도 좋은 경험>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 부부가 화재로 죽는 것이었다. ‘그로테스크’, ‘괴짜’. 1960년대 신문에 실린 영화 인상평부터 김 감독을 따라다니던 말이었다. 그가 전에 기거하던 주자동 양옥집은 귀신이 나오는 흉가라서 싸게 구입해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들 동원씨는 “처음에 살던 젊은이가 철조망에 목이 걸려 죽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앞서 인용한 <전설의 낙인>에 따르면 대학로의 집은 이미 두 차례나 노부부가 죽었는데, 대들보가 무너지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한날 한시에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새벽 2시에 달려갔다. 잿더미가 내 키보다 높게 쌓였다.” 아들 동원씨는 집이 화재로 전소된 후 ‘기이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잿더미 속에서 비닐에 싸인 문서가 발견되었다. ‘동원아 보거라’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유서였다. “너무 놀랐다. 유서 첫 마디는 ‘내가 이 한옥을 사지 말자고 했는데 네 엄마가 우겨서 샀다’는 책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그 다음이 이것이다. ‘내가 공중에 떠서 우리집 마당을 내려다 보는데 아마도 내가 죽은 모양이다. 네(동원씨)가 마당에 삼발이를 치고 땅을 파고 있는 것이 보인다.’” 김 감독이 묘사하고 있는 모습이 마당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았던 것이다.

[단독]고 김기영 감독 유작 시나리오 ‘생존자’ 찾았다

6. 참고 자료

7. 수상 경력

8. 어록/김기영에 대한 말

인간의 본능을 해부하면 검은 피가 난다. 그것이 욕망이다.[15]
김기영
단 한 마디로 괴인(怪人), 그 이전에 아무도 그렇게 영화를 만들지 않았고 그 이후에 누구도 그렇게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정성일
그 분은 정말 기인이셨어요.
윤여정, JTBC 뉴스룸 문화 초대석에서
이 상을 제 첫 영화의 감독이자, 천재적인 김기영 감독님에게도 바칩니다. 저는 그와 첫 영화를 만들었어요. 현재 살아계셨다면 제 수상을 무척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하셨을 거예요.
윤여정,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수상소감

[1] 이효인 영화평론가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 1922년생이라고 주장했다.[2] 김기영의 조감독으로 활동한 유지형은 김기영이 6척이 넘는 키와 거구의 몸집을 가졌다고 얘기한 바 있다.[3] 출처[4] 김기영과 같은 날 자택에서 화재로 사망했다.[5] 어느 자전적인 글에서 이 시기 "교토의 대학 의학부에서 공부"했다고 서술하였으나, 또 다른 기록에서는 "문화 방랑자"의 생활을 했다고 하는 등 이 시기 이력이 확실하지 않다.[6] 김청강, 김기영 감독의 제국체험과 식민지적 무의식, 동아시아문화연구 제93집, 125~126, 2023.5[7] 1950년 치과대학을 졸업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는데, 앞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다니다 중퇴한 사실과 혼동된 듯 하다. 또 부인 김유봉이 같은 해 치과대학을 졸업한 사실, 같은 해 치과대학을 졸업한 동명이인 김기영(金基永, 한자가 다르다)이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혼동을 부추긴 듯 하다.[8] 1970년대, 호스티스물이 유행하자 그런 요소들을 집어넣은 화녀, 충녀와 청춘물이 유행하자 그런 코드를 집어넣은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가 대표적.[9] 사후 비디오로 출시된 적은 있다.[10] 이 내용은 박찬욱이 신인 감독 겸 영화 평론가 시절, 정은임의 영화음악 라디오 프로그램에 고정 패널로 출연할 때 김기영에 대한 팬심을 밝히며 증언했던 것들이다. 1995년 3월 1일 방송분.[11] 다만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김기영에게 영향을 준 감독으로 루이스 부뉘엘이 언급되곤 한다. 실제로 부뉘엘의 작풍은 김기영의 그것과 유사하다.[12] 전날 세트 촬영을 하다가 떨어져 팔이 부러졌다며 붕대는 감고 하얀 고무신을 신었으며 빗질 안 한 머리에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고.[13] 현재위치는 종로구 혜화로 45[14] 작품상은 제작자가 수상하는데, 《고려장》은 김기영 감독이 제작했다.[15] 그가 평생동안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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