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군 (1990) North Korean Partisan In South Korea | |
장르 | 전쟁 |
감독 | 정지영 |
각본 | 장선우 |
원작 | 이태의 《남부군》 |
출연 | 안성기, 최민수, 최진실, 이혜영, 강태기 |
제작사 | 남 프로덕션 |
배급사 | 남 프로덕션 |
촬영 기간 | - |
개봉일 | 1990년 6월 2일 |
상영 시간 | 157분 |
총 관객수 | 약 37만명(서울) |
상영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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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얀전쟁, 부러진 화살, 남영동1985의 정지영 감독이 연출을 맡은 1990년작 영화.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하였다.안성기(이태), 최민수(김영), 최진실(박민자), 이혜영(김희숙), 강태기(최 소대장) 주연으로 트위스트 김(황대용), 조형기(맹봉), 독고영재(이봉각), 임창정(전세용)등이 조연을 맡았다.
이는 2005년 출시된 남부군 DVD 코멘터리에서 감독이 직접한 말이다(촬영이 길어지자 동원된 예비군이 화가 나 총을 버리고 그냥 집에 가버렸는데 가짜 총이면 버리고 가면 그만이지만 진짜총이라 눈밭에서 총을 찾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단, 당시 한국에서 소련제 모신나강이나 따발총(PPSh-41)의 공포탄을 구할 수 없었는지 영화에서 발사되는 총은 M1소총과 M1919기관총. 공랭식인 M1919기관총을 수랭식인 M1917처럼 개조한 기관총 등 전부 30-06탄을 사용하는 총이다. 빨치산들도 M1 개런드 소총을 많이 사용했고 성능이 우수하고 탄약을 노획해서 사용할 수 있기에 가장 선호하는 무기였으나 전원 M1 개런드로 무장할 수는 없었다. 전쟁 후기로 가면 따발총이나 모신나강은 탄약이 고갈되면서 자연 도태되고, M1 개런드 소총이나 M1 카빈 소총으로 교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실제로 원작자는 초기에는 조잡한 구조의 따발총을 사용해서 고장 문제로 고생하다가 M1 개런드를 얻어 교환했다.
원작을 충실히 옮겼고 안성기의 처절한 몸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당시 비평이나 흥행면에서 화제를 낳았다. 1990년(더 정확히는 1989년에 촬영을 거의 마쳤다.) 당시에는 엄청난 제작비인 14억원[2]으로 만들었는데 서울 관객 37만 관객으로 그해 한국영화 흥행 2위(1위는 장군의 아들이 거둔 서울관객 68만)를 거두며 흥행도 성공하였으며 비디오 판권비도 거액인 1억원[3]을 주고 삼성그룹 계열인 스타맥스에서 낸 비디오도 성공했다. 명절에 TV에서도 여러 번 방영했다.
한국 영상자료원 유튜브에서 무료로 공개 중이다. 2020년 6월 25일, 4K 복원본을 유튜브에 공개하였다. #
2. 예고편
3. 시놉시스
1950년, 이태(안성기)는 종군기자로 전북 전주에 파견되어 '조선 노동당 유격대'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전세의 변화로 남부군의 부대가 개편되자 그는 빨치산에 합류해 전투활동을 기록해 나간다. 북으로부터 버림받고 남쪽 토벌대에게 쫓기면서 이태는 부상을 당하고 박민자(최진실)가 그를 간호한다. 두 사람은 사랑을 느끼지만 이태의 본대 복귀 명령으로 이별하게 된다. 한겨울에 악담봉 전투에 참여한 이태는 그곳에서 동족 간의 전쟁을 비난하던 시인 김영(최민수)을 만나게 된다. 또한 계속되는 전투로 남부군은 지리산으로 쫓겨 들어간다. 이태는 정식 당원이 되지만 휴전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대원들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추위와 굶주림에 쫓기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생존의 고통과 땅에 떨어진 사기로 발악 같은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이태는 대열에서 낙오하고 눈 속을 헤매다가 토벌군의 포로가 된다. |
4. 등장인물
- 이태 (안성기)
- 김영 (최민수)
- 박민자 (최진실)
- 김희숙 (이혜영)
- 최 소대장 (강태기)
- 황대용 (트위스트 김)
- 맹봉 (조형기)
- 이봉각 (독고영재)
- 흰나리 (신윤정)
- 허기호 (김금일)
- 왜가리 (문창근)
- 성만석 (나기수)
- 마동무 (임대호)[4]
- 전세용 (임창정)[5]
- [ 단역 펼치기ㆍ접기 ]
- * 하동무 (박홍근)
5. 줄거리
이태는 북한군 점령하 전주에서 종군기자로 근무하던 중, 인천 상륙 작전으로 국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어 전주가 함락될 위험에 처하자 순창군 엽운산으로 철수한다. 이 과정에서 문학도인 김영을 만나게 되었고, 부대 편성 과정에서 이태는 과거 학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가 총을 쏘아보았다는 경력이 인정[8]되어 2소대 소대장으로, 김영은 그의 휘하로 편입된다. 국군과의 전투 도중, 총알에 빗맞은 것 때문에 염증이 생겨서 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간호병 박민자를 만나게 되어 그와 애틋한 관계가 되기도 하나, 이도 잠시. 박민자는 본부로, 본인 역시 소대원을 이끌고 전투에 계속 참여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영과도 흩어지게 되었다.[9]
흩어진 부대들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국군과 경찰에 쫓기고, 추위와 배고픔[10]에 시달리면서 피폐해져간다. 이 과정에서 황대용은 남편이 떠나 아내만 남은 집에서 태극기를 발견하고는 경찰 가족으로 몰아 강간해버리고, 결국 동료 빨치산들에게 반동으로 몰려 자결을 강요받게 된다. 게다가 1951년에 빨치산에 유행하던 재귀열병[11]의 영향으로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한채 나무의 수액을 따먹거나 꽃잎을 따먹는 등의 갖은 고생을 해가며 유격전을 이어나간다. 그러나 본부중대에 있던 박민자로부터 해열제(아스피린)를 받아서 낫게 된 이태는 김영과 더불어 상승부대라 일컫는 이봉각 휘하의 부대로 옮기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정부군에게 원한이 있는 김희숙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의 성과를 격려하기 위하여 직접 찾아온 전설적인 빨치산 지도자 이현상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눈여겨본 정치요원들에게 스카웃되어 정식으로 본부의 정치요원으로 선발된다.
그러나 국군의 대대적인 토벌로 인해 본대는 결국 와해되어 흩어지게 되었고, 집결지를 향해 고단한 행군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정치부 요원들 사이에서도 사상분열과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나오기 시작한다.[12] 후미의 행렬과 선을 잇기 위하여 본대에서 떨어저 나온 이태와 김영은 낙오자 한 명과 간호병 한 명, 그리고 동상에 걸린 동료와 함께 고단한 행군 끝에 한 화전민의 가옥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 와중에 동상에 걸린 빨치산의 다리는 악화되었고, 결국 그를 살리기 위해 이태는 민가의 도끼로 다리를 잘라내는 수술(...)을 감행했고, 그 참상이 벌어진 직후 낙오병과 간호병은 낮에 국군이 비행기로 뿌린 전향 권유 전단을 보다가 전향을 결심하고 새벽에 몰래 떠난다.
전향자들이 위치를 알려줘서 군경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이태와 김영은 동상에 걸려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된 동료에게 전향해서 살아남으라고 말하면서 전향서를 쥐어주고 도망친다. 그 동료는 포위한 한국군 앞에서 수류탄 한 발을 들고 저항하다가 포기하여 수류탄을 버리려 하지만, 손이 떨린 나머지 실수로 안전핀이 빠져서 그만 죽고 만다. 김영은 이태와 함께 도망치다던 중, 이들을 발견한 경찰의 총격으로 다리에 부상을 당하여 눈길에 미끄러졌고, 결국 포로로 붙잡힌다. 홀로 남게 된 이태는 나무껍질을 먹어가면서 도망치다가, 신발도 다 헤어져 발이 동상에 시달리는 고통에 이제 꿈도 희망도 없다고 포기하고 총부리를 턱에 겨누며 자살하려던 중, 우연히 남부군 동료들이 나뭇가지를 꺾어서 선 표시를 해놓은 것을 발견하고 자살할 생각을 때려치고 기뻐하면서 동료들의 흔적을 따라간다. 그러나 이태가 발견한 것은 눈밭에 피를 뿌리며 전멸해 있는 남부군(보면 국군 시체도 보이지만)의 즐비한 시체들이었다. 이태의 절망에 가득찬 절규를 마지막으로, 결국 이태는 봄에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는 자막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6. 평가
"빨치산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국방군은 무기력한 바보로 만든 용공영화"
"강철 같은 이념으로 뭉친 빨치산을 나약하고 감상적인 인간군으로 왜곡시킨 교묘한 반공영화"[13]
빨치산 미화라고 딴지를 거는 이들이 있는데[14] 영화나 보고 그런 말 나오는지 궁금하다.
정작 이 영화 원작인 남부군 책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종북주의자들에게는 피꺼솟 할만한 내용들이 득실 거린다. 빨치산 문서에서 소개된 상당수의 종북적인 빨치산 서적에서 입에 게거품을 물고 이 책을 비난한다. 가장 대표적인 비난이 "나약한 감상주의자"가 쓴 책이라는 것이다. 이는 영화에서도 통용되어 강철같은 신념의 빨치산을 너무 나약하게 그렸다고 비난한다. 다시 말하자면 결코 종북적이며 친북적인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북한과 김일성을 까는 영화이다.
원작이 친남로당 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긴 하지만 김일성은 휴전 협상에서 빨치산들을 데려가지도 않고 동지들을 버린 인간 말종이라고 비난하고 있다.[17]
7. 여담
- 워낙 대작이고 배우들이 고생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라서 신인들이 대거 출연했는데, 특히 정지영 감독의 후배를 자처한[18] 배병수가 키운 신인들이 대거 출연한다.[19] 최민수[20], 독고영재, 최진실 등과 배병수 사단은 아니지만 빨치산 여전사로 나오는 이혜영, 조형기, 트위스트 김과 아역으로 나오는 임창정[21] 외 등등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참고로 본작이 임창정의 공식 데뷔작이다.
- 각본을 맡은 게 바로 장선우 감독이다. 영화감독으로서도 당시 인정을 받았지만 2000년대 와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으로 모든 걸 날려버렸다.
- 촬영감독은 유영길이 맡았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유작으로 1998년 1월 향년 만 61세로 별세했다.
- 음악을 맡은 신병하(1947~2005)는 나중에 정지영 감독 영화 하얀전쟁 음악도 맡았다.
- 이 영화에서 임창정의 '날 닮은 너'에서처럼 '겁이'를 '겁시'로 발음하는 그의 특유의 발음을 들을 수 있다. 임창정(전세용 역)의 대사 중에 "겁씨나서 수류탄 핀을 뽑을 수가 없었서라."라는 사투리 대사가 그것이다.
||해당 구간
- 배우를 갈아서 만든 영화로 한겨울에 촬영했는데, 영화 중후반부에 누더기를 걸친 배우들이 눈덮인 지리산을 종주하고 홀로 고립된 이태(안성기)가 대한민국 국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얼음물 속으로 숨는 장면까지 나온다. 참고로 당시 영화잡지 로드쇼에 나와 인터뷰한 안성기는 물속에 들어가니 온 몸에 감각이 없어지고 몸이 굳어져서 정말이지 그대로 빠져죽는지 알았다고 회고했다. 물론 촬영 현장에선 두툼한 모포나 여러가지를 준비하고 만일을 대비하여 의료팀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겨우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당연히 촬영팀들이 달려와 물기를 씻기고 모포를 덮어주고 근처에 히터를 켜둔 차량으로 들어갔다고.
- 2014년 4월 26일, 일본 시부야의 업링크라는 극장에서 공개되었다. 전체 타이틀은 남부군 ~사랑과 환상의 파르티잔~
- 여담으로 촬영종료를 하루 남기고 정지영 감독이 체포되어 촬영이 중단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 직배에 반대하여 영화관에 뱀을 풀었던 사건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감독이 체포된 것. 정지영 감독은 하루만 기다려달라고 했으나 기각되어서 유치장에 끌려갔다가 결국 보석으로 풀려나고 나서 영화를 마저 찍었다. 일각에선 빨치산 다룬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을 방해하려는 정권의 음모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정지영 감독 본인부터 당시 정부가 촬영을 막고 싶었다면 아예 촬영 못하게 하는 방법도 많았다면서 의혹을 일축했다.
- 탈북자인 김용은 한국와서 이걸 보고 감명받았다고 한다. 북한에서 그냥 남한 내 자발적이었으나 한계로 사라진 제2전선(이라고 북한에서 부른다고)에 대하여 이렇게 상세하게 이야기한 건 처음 봤다고. 그 이전에도 이후로도 이 영화 이상으로 빨치산을 그려낸 영화는 없었다.
[1] 애초에 사격 장면만 봐도 대부분 슬라이드 후퇴와 탄피 배출까지 되는 프롭건이고, 결말부에서 주인공 이태가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 등에서 클로즈업되는 개런드 소총을 보면 도저히 일개 소품팀이 나무 깎고 철판 접어다 붙여서 만들 퀄리티가 아니다. 다만 개런드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M1 카빈 등 개런드와 중기관총을 외의 나머지 총기들은 전부 모형이며, 그래서 탄피 배출이나 재장전 등이 묘사되지 않는다. 4K 리마스터링이 되기 전까지는 이런 디테일까진 식별하기 힘든 화질인 VHS, DVD와 그 립버전만 주로 퍼져있는 점, 개런드와 기관총 외에는 전부 모형인게 티나는 점 등 때문에 나무 깎은 모형총이라는 낭설이 더 쉽게 퍼진 듯 하다.[2] 참고로 당시 한국 영화 평균 제작비가 2억~3억 원 남짓이었다.[3] 당시 한국 영화 사상 첫 1억원 비디오 판권비였다.[4] 술을 좋아하는 나사풀린 빨치산. 결국 술 때문에 국군과의 교전 도중 전사했다.[5] 위 마동무의 그 사건 때문에 함께 전사했다. 여기서도 겁이 나를 겁씨 나로 발음하는 장면이 나온다.[6] 황대용 역을 맡은 트위스트 김의 실제 딸이다.[uncredited] [8] 사실 당 상층부에서는 아무리 강제로 끌려갔다가고는 하지만 일본군 경력이 있었던 이태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이는 작중 간부의 대사에서도 언급된다. 하지만 정규군들이 북으로 달아나거나 국군에게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 총을 쏠 사람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빨치산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9] 김영은 나중에 재귀열 치료를 위하여 모여있던 곳에서 극적으로 상봉하게 되었고, 이후 영화 종반까지 함께 하게 된다.[10] 한 빨치산이 늦게 민가에 도착하는데 다른 빨치산들은 서둘러 밥을 먹은 다음이라 그는 먹을게 없었다. 뭐 먹을게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그나마 감나무에 달린 감을 허겁지겁 먹는다. 그래도 이 장면때만 해도 그럭저럭 견딜만했으나 나중에 먹을 게 없어서 눈을 퍼먹으며 겨우 버틸 지경. 극중 전멸한 빨치산 부대원들이 얼어버린 시체를 발견할때 그들 손에 남은 맨밥부터 얼른 허겁지겁 먹는 장면이 배고픔을 처절하게 잘 나타내고 있다. 원작에선 손에 남은게 아니라 입가에 붙은 쌀알까지 떼먹는다[11] 고열로 시달리다 결국 죽게 되는 일종의 전염병. 실제로 이태의 수기에는 빨치산이 이 열병으로 거의 1,000명 넘게 죽어나가던 이야기가 들어있다.[12] 영화 중반, 이태가 정치부에 가입하면서 입당원서를 쓴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인민군과 UN군의 협상 소식이 들려온다. 이 때 여성 정치부원은 당연하다는듯이 "우리는 국제법상 어엿한 교전단체이니, 휴전 이후 당연히 이북으로 가게 될 것이며, 인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서는 정치부원들 중에서도 "왜 지원이 없는가", "우리는 희망이 없는 것 아닌가"라는 주제로 작은 논쟁이 벌어지며, 급기야 "조국의 해방은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외세에 의해 강제로 이뤄진 것"이라는 사상이 의심되는 말까지 나오며 상황에 가망이 없어진다.[13] 세계일보 90년 8월 2일 19면, "이념에 희생된 이땅의 젊은이들을 표출"에서 발췌[14] 이를테면 한국논단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얼마안돼 MBC에서 이걸 재방영하자 아첨을 하려고 친북영화 틀어줬다고 징징거렸다. 우습게도 이 책자에 글을 여럿 기고하던 일본 극우 언론인 구로다 가쓰히로는 이 영화를 보고 빨치산 미화가 아닌 수작으로 상당히 호평했다...물론 한국논단에서 그런 글을 쓰지 않았지만.[15] 실제 탈북자들의 상당수는 북한에선 빨치산 혹은 남부군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일성 신격화가 진행되면서, 곁가지에 해당하는 남로당 계열의 행적은 완전히 말살되었기 때문이다.[16] 1990년 영화지 로드쇼 기사에서는 대종상영화제 당시 관계자들이 이 영화 작품성이 있는데 상주면 뭐라고 할테니.....라고 말을 흐렸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17] 당시 정부에서는 인력과 장비를 소모하며 계속해서 빨치산 토벌을 하는 것이 무의미한 낭비라고 판단하고, 휴전협상 기간동안 여러차례 무사귀환을 보장할테니 이들을 데려가라고 제안했지만 북한협상단은 묵묵부답이었다. 포로교환에 합의한 뒤에도 수만명에 달하는 국군포로들을 강제로 억류시킬 정도로 심각한 노동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북한이 끝내 이들을 외면한 것은 남로당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김일성의 권력욕심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8] 정지영 감독은 고려대학교 불문과 출신인데 배병수는 친분을 과시하기 위해서 자신도 고려대학교 후배행세를 했다. 그러나 그 배병수는 비극적이게도 이 영화가 개봉되고 4년 뒤 자신의 부하직원에게 살해당했다.[19] 이런 배병수 사단의 신인 동원은 정지영 감독의 후속작에서도 계속 이어진다.[20] 터프가이가 아닌 문약한 인텔리 연기를 볼수 있다.[21] 임창정은 이후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어린 빨치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22] 원작에서 500명의 빨치산이 지리산 계곡에서 실제로 목욕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