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배우에 대한 내용은 이우태(배우)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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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泰
1922년 11월 25일 ~ 1997년 3월 6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소설가, 언론인, 정치인. 본명은 이우태(李愚兌)로 이태는 필명이다. 빨치산 기자 출신으로 이후 전향하였다.2. 생애
1922년 11월 25일 충청북도 제천군(현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에서 국민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 이석영(李錫永)씨와 어머니 김진수(金振秀)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청주제1공립중학교(12회)[1] 졸업 후 일본 육군에 징집되어 1년간 일본이 점령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수마트라 섬에서 근무했다. 여기서 다른 일본 육군들에 비해 정말 꿀 빨며 근무했었는데, 스스로도 멧돼지를 사냥해서 바비큐를 해먹거나, 원주민들이 코끼리가 나타나서 작물을 망친다고 신고하면 이를 격퇴하기 위해 교전을 벌인 것이 전부라고 한다.[2]
해방 후 귀국했고, 곧 상경해 3년제인 국학대학[3] 전문부 국어국문학과를 2년만에 졸업하고 1년제 '조선신문학원(朝鮮新聞學院)'을 졸업한다. 이때 '민주학생동맹'(민학)과 관계하며 처음 좌익을 접하게 된다. 하지만 민학에서는 활동이 별로 없었고, 그보다는 극심한 사회 부조리와 우익 청년단의 횡포, 그리고 가혹한 경찰의 탄압이 그에게 좌파를 신선하게 여기도록 해주었다. 이건 그의 책 저변에 깔린 사상으로 좌익은 우익의 탄압으로 생겼으며, 멀쩡한 사람도 한 번 끌려가면 좌경화되고 두 번 끌려가면 진짜 빨갱이가 된다고.
이후 1948년부터 8개월간 서울신문에서 정치부와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였고, 합동통신사로 옮겨 사회부 기자로 문교부, 구매처, 보건부에 출입하였다.
서울이 함락당한 다음날 6월 29일, 평양의 조선중앙통신사에서 내려보낸 요원들이 서울 시내 3개 통신사(합동.고려.공립)의 기자들을 소집하여, 조선중앙통신사에 소속하게 한다. 이우태는 '여자 의용군 위생대'를 따라가 대전 지사에서 근무하다가 전주 지사로 부임하여 광주 지사와 협력하면서 이런저런 취재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긴급 보고(9월 20일에 미군이 군산 앞바다의 오식도에 상륙)가 뒤늦게 전달되면서, 9월 28일 조선로동당 전북도당의 명령으로 전주 지사의 직원들은 전주시에서 철수했으며 9월 30일 순창군의 엽운산(여분산)으로 입산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조선로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 대원, 즉 빨치산이 된다. 그야말로 출근길이 부역하는 길이였고, 얼떨결에 빨치산이 된 케이스이다.
여기서 그는 40명 규모의 독립4중대에 배치받아 일본군 경험을 살린다며 14명 규모의 소대장을 이끌게 된다.[4] 이때부터 17개월간 빨치산 생활을 하게 된다. 독립4중대는 곧 독수리병단 내 유일한 중대로 이동하게 되고, 이우태는 이때를 회문산 시절이라고 칭한다. 이 때 같은 중대에 기술서기로 있던 시인 지망생 김웅을 만나 서로 문학적인 교감을 깊게 나누게 되는데, 나중에 출간하는 단편집 <천왕봉>과 유고집 <시인을 어디로 갔는가>에서 주인공이 바로 그이다.
곧이어 함께 입산한 전주지사의 직원들이 그의 소환을 청원하여, 조선중앙통신을 수신하고 기관지를 발행하는 통신과로 옮겨서 이른바 '빨치산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회문산 사령부가 토벌군의 진격으로 갑자기 해체되어 더 이상 조선중앙통신을 수신하지 못하게 되자 보급부대인 27부대에서 문화부 중대장을 하게되는데, 여기서 빨치산 1/3을 죽게 했다는 재귀열병에 걸려 환자트(환자 비밀 아지트)로 이송되어 죽다 살아나게 된다.
한편 남부군이 지리산 자락인 민주지산까지 내려와 6개 도당 위원장 회의를 열었는데, 이과정에서 남부군 병력 보충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에 전북도당에서 재귀열병에 걸렸다가 회복중인 환자 60명을 남부군을 보내게 되었는데, 전북도당 입장에서는 무기 없는 비전투병력을 해소하고, 남부군에서는 무장은 풍부했지만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상호간에 Win-Win이였다.
이에 전북도당의 60명은 이전에 어떤 직위에 있었든 관계 없이 평대원으로 남부군으로 보충 되는데, 이태는 남부군 승리사단 서울연대 소속이 된다. 여기서 남부군과 함께 전투를 벌이다가 부상을 입고 두번째로 환자트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 같은 환자 신분인 승리사단 정치위원인 이봉각을 만나게 된다.[5] 이봉각은 기자 출신이 평대원으로 있는 것은 낭비라고 하여, 환자트에서 회복된 이후 그를 승리사단 정치부 소속의 기자로 끌어주게 된다. 이태는 이곳에서 "지리산 승리의 길"이라는 이름의 신문을 발행하려고 노력하지만, 인쇄장비와 종이 부족으로 결국 원고 단계에서 실패하고 그 원고 마저 분실하며 완벽한 잉여로 지내게 된다. 그러나 정치부원이라는 이름 덕분에 다른 부대원들이 막사도 만들어 주고, 땔나무도 채워주는등 각종 사역에서 면제되어 스스로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할 정도로 나름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또한 이봉각의 보증으로 이태를 '화선입당'이라는 이름으로 정식으로 로동당원이 될 수 있다. 그동한 남한 출신의 비당원이라고 느꼈던 설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이태가 합류할 무렵 승리사단은 81사단으로 바뀌었고, 그해 말 군경의 1차대토벌 작전으로 작살이 나서 81사단은 불과 4개월 만에 김지회 부대라는 이름으로 격하되었다. 이당시 남부군은 100명 이하로 축소 되었을 정도로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던 시기였다. 이태는 대원 2명과 함께 정찰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겁도 나고 하여 주변에서 며칠 노닥거리다가 어영부영 돌아온다. 알고보니 군경의 대토벌작전은 거의 끝나서 군부대는 이미 철수했고, 남부군도 본거지인 지리산 중심으로 돌아가 버렸다. 땡땡이 치던 이들 3인조 정찰대는 졸지에 산중고아가 되어 버린 채 산을 배회하다가, 여기서 이태마저 혼자 낙오되어 1952년 3월 19일 5시 50분 지리산 기슭에서 전투경찰에게 체포된다. 소설 <남부군>도 여기서 끝난다.
기자 출신이라는 경력을 살려서 문서 작성을 잘해 경찰들에게 이쁨을 받고 전투경찰 연대 본부를 따라 다니게 된다. 이 과정에서 토벌대 부사령관인 이성우 경무관과, 중학교 6년 선배이자 형 이우익의 친구인 또 한명의 토벌대 고위간부를 만나게 된다. 이들 덕분에 이후 남원수용소로 가서 6개월간 수용후 도민증을 받고 방면된다. 이태의 유고집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에 실린 단편 <지리산이여 안녕>이 바로 이때를 다루고 있다. 다른 빨치산의 경우 이태의 표현에 의하면 "첫번째 줄은 사형, 두번째 줄 무기, 세번째 줄은 징역 10년"을 받는 상황이였기 때문에 수용소에서 재판까지 받았으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로동당원에 정치부 지도원이였던 경력 때문에 좋은 대접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이였다. 위에서 나온 김웅은 전향을 거부하고 징역 15년, 이봉각은 전향을 했다가 취소하며 징역 5년을 받았다. 빨치산 참모장 출신이 방면되고, 초모사업을 통해 빨치산을 따라간 농민이 사형을 받는등 혼란스러운 상황이였다.
수소문 끝에 당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용두동에 살고 있던 부모와 만날 수 있게 되었으나 불과 한 달만에 대한민국 육군에서 징집영장이 나와 한군두를 시전하게 된다. 참호도 파고 포탄도 나르고 하였으나 몸이 워낙 쇠약해 군의관에 의해 한 달만에 귀향조치 된다. 집으로 다시 돌아온 뒤에는 아버지와 함께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에서 연탄가게를 열어 그걸로 먹고 산다.
1953년 초 조인제씨와 약혼을 하고 같은 해 5월 10일 결혼하게 된다. 결혼 후에도 사건이 터질 때마다 과거의 경력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불려가 조사 받고 고문 당했다. 위에서 언급한 이봉각의 보증 서줬다가, 이봉각이 노동자 파업에 참여할 때 코치해주다가 수배된 사건 때문에 또다시 경찰에게 끌려가기도 하였다.
결혼과 함께 연탄장사를 그만두고 연탄회사에 번개탄 원료인 숯가루를 납품하였는데, 그 연탄공장의 사주가 바로 훗날 국회부의장을 역임하게 되는 정해영 제3대 국회의원이었다. 이후 대한석탄공사 과장으로 일하다가 형 이우익의 권고로 세계일주 여행을 다녀온 정 의원의 여행기를 대필해 주게 된다. 조선일보에 10일간 연재됐던 이 여행기의 반응이 좋아, 1957년부터 정해영 의원의 스피치 라이터가 되었고 윤보선의 글을 대신 써주기도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 16번 후보로 공천받았으나 14번까지만 당선되었다. 하지만 1964년 한일굴욕외교에 반대하는 6.3 항쟁이 일어났고, 윤보선과 정해영이 항의의 뜻으로 사퇴하는 바람에 1965년 9월 16일 의원직을 승계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후 약 3년간 교통체신위원회에서 의정활동을 한다.
국회의원 임기가 끝난 이후로는 20년간 특별히 하는 것 없이 백수로 지내게 된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북도 제천군-단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해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어차피 다음해에는 대한민국 국회가 해산되는 10월 유신이 일어나기도 하고.
1975년 5월 교통사고를 당해 8개월간 입원해 있을 때 '내가 입을 다물면 그들은 영영 잊혀진다."라는 생각을 하였고, 퇴원 즉시 남부군을 쓰기 시작하여 원고지 1800매 분량에 원고를 1년만에 탈고한다. 그러나 때는 아직 서슬퍼런 유신 시절. 빨치산 소설 따위가 출판될 만한 세상이 아니었다.
가끔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기웃거리기도 했는데, 이때 출판사를 통해 원고가 이병주의 손에 들어가 대하소설 <지리산>이 탄생하였다. 이태도 <지리산>에서 비중있는 조연격으로 나오기는 하는데 이태는 참고만 하라고 했지 내용을 갖다 쓰라고 한적이 없다고 주장하여 표절 시비로 이어진다. 한편 이 원고는 빨치산 자료수집하던 조정래의 손에도 들어가서 태백산맥이라는 한국 문학 최고의 베스트 셀러로 탄생하게 된다. 다만 조정래는 그야말로 참고자료로만 사용하여 상호간에 표절문제는 없었다[6].
이윽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유신이 끝나면서, 세상이 바뀌는 듯 했지만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암흑 시절은 계속 되었고, 야당 당원 신분이였던 이태는 정치규제 인물이 되었다. 군사정권의 지속적인 야당 탄압을 우회하기 위해 김영삼은 1981년 6월 9일 민주산악회를 만들게 되었고, 이태도 관여하여 총산악대장과 부회장을 맡았으며 헌장, 노래까지 지었다. 민주산악회에 대한 자세한 글은 리그베다 위키 참조
이후 1988년 7월 11일 대망의 <남부군>이 발행된다. 간행되자 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무려 50만부나 팔렸다. 남부군이 빨치산 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남부군을 기점으로 수많은 빨치산 문학이 쏟아지게 된다.
몇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위에서 언급한 김웅의 경우 리어카 끌며 고물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빨치산 소설이 흥행한다는 소리를 듣고 아들에게 한권 사오라고 했다. 책을 읽다보니 이태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 보는데, 이런 내밀한 글을 쓸수 있는 것은 이우태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소설 속에는 이태의 독수리병단 시절 문학청년 김영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행적이 나와있는게 아닌가. 이에 출판사에 이태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였지만, 작가를 보호하기 위해 출판사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에 김영은 전화번호부에 있는 이우태라는 사람에게 마구 전화 하다가 마지막 번호에서 이태의 딸이 전화를 받게 된다. 결국 서로 죽은 줄만 알었던 두사람은 만나게 되고, 빨치산도 글을 쓸수 있다는데 용기를 얻은 김웅은 각종 언론과 인터뷰도 하고 '빨치산 철창수첩'이라는 작품을 내는 등 문학 활동을 하게 된다.[7] 이에 <남부군>의 이태, <빨치산의 딸>의 정지아와 함께 3인 공동 단편집 출판을 하려고 하였지만 김웅은 스스로 연락을 끊고 정지아는 필화사건으로 코렁탕을 먹으러 갔는지 역시 연락이 안되어 결국 이태 혼자 <천왕봉>이라는 빨치산 문학 단편집을 낸다. 이후 김웅은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작품을 쓸려고 하다가 15년의 오랜 수감기간 상한 몸뚱아리 때문에 죽게 된다.
<빨치산의 딸>의 탄생 역시 소설 남부군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설 남부군에는 등장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이태는 이책을 읽자 마자 2권의 주인공 이옥자가 자신이 남부군으로 전속되었을 때 자신을 돌보아준 남부군 정치지도원 이옥남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역시 전화통화를 하려고 했지만 출판사에서 알려주지 않아(아직 정지아가 코렁탕 먹기 전이였다.) 전화번호부를 뒤져 전화하다가 겨우 정지아와 연락이 되고, 그녀를 통해 그녀의 엄마인 이옥남을 만나 오랜만에 남부군 출신자끼리 회포를 풀게 된다. 이 모임에는 위에서 언급한 김웅도 참석하게 된다. 이후 이태는 자신의 책인 <남부군>을 보완하기 위해서 자신이 남부군에 속하기 전과 귀순 이후의 남부군을 다룬 <여순병란>이라는 책을 내게 되는데, 이책의 제1참고 문헌이 <빨치산의 딸>이며 제1증언자가 정지아의 아빠 정운창으로 되어 있다. 정운창은 14연대 반란때 전남도당 산하 구례군당 소속으로, 반란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고 이후 14연대가 이현상의 지도로 빨치산으로 변신할 때 전남도당의 지시로 이를 도왔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이러한 관계를 모르는 강정구 성공회대 교수는, <남부군>을 나약하고 감상적인 전향자의 책이라며 깎아내렸고, <빨치산의 딸>을 높이 평가하였다.[8] 참고로 정지아의 아빠 엄마 둘 다 교도소에서 전향서를 썼다.
<이여자, 이숙의>를 지은 이숙의의 경우. 그녀는 경북도당 위원장 박종근의 아내이다. 독일에서 살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남부군이 인기를 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한권 구해 읽어 짧게나마 박종근의 행적을 알게 된다. 그녀는 박종근과 6개월의 짧은 신혼 생활을 한 것 외에는 박종근의 빨치산 행적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소설 <남부군>에서 박종근의 사망 일자에 대한 두가지 설을 언급 하는데, 그녀의 자서전을 보면 그녀도 박종근의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소설 <남부군>을 통해 이제는 그동안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를 해도 되겠다고 생각이 들어 <이여자, 이숙의(빨치산의 아내, 무명옷 입은 선생님)>를 출판하게 된다. 빨치산 도당 위원장의 아내라는 어마어마한 제목과 달리 내용은 박종근의 어머니... 그러니까 시어머니와의 고부갈등만 실려 있다.
<녹슬은 해방구>의 광고 카피가 “남부군과 태백산맥을 덮으시면서 왠지 허전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제 2부가 펼쳐진다”이다. 출판사의 홍보전략이겠지만, 정작 작가 권운상은 빨치산 활동은 커녕 교도소 생활하다가 잠시 비전향장기수를 만나본 것이 전부인 인물이다. 내용상으로 남부군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권운상은 열렬한 주사파 이기도 하니 글 성향상 2부가 될 수 없다.
그외에도 빨치산 문학중에서 남부군의 영향을 안받은 책은 전혀 없다시피 하다. 대부분의 책 서문에 남부군을 전향한 자의 책이라고 까면서 시작하거나, 아니면 내용 중에서 남부군을 인용하거나 어느부분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그정도로 빨치산 문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이태 역할은 안성기, 이태의 로맨스 상대인 박민자는 최진실이라는 초호화 캐스팅이 이루어 졌다. 남부군 책 내용과 작가의 성향에 대해서는 남부군 항목 참조.
이후 남부군의 성공을 바탕으로 각종 창작 활동을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김영을 추모하기 위한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를 집필하고 '저자의 말'을 쓰려고 하는 단계에서 1997년 3월 6일 오후 7시 10분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자택에서 급환으로 별세했다.
부인 조인제(趙仁濟)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3. 저서
59년 <한글공문편람>전투경찰의 포로 시절, 그들의 문서 작성을 도와준 경험을 바탕으로 공문은 이렇게 쓰면 된다는 내용으로 집필
88년 <남부군>
90년 <이현상(남부군 비극의 사령관)>
90년 <기다림>
암담했던 시절 틈틈히 써 모았던 자전적 에세이와 신문, 잡지에 기고했던 회상기들 가운데 기록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추린 수필집.
94년 <여순병란>
역사적 사실을 증언과 체험 등을 통해 소설 형식으로 실록소설
94년 <천왕봉>
97년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63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 [[민정당|]] | 1,870,976 (20.1%) | 승계 (16번) | 초선 [9]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충북 제천군·단양군) | [[신민당(1967년)|]] | 19,490표 (23.02%) | 낙선 (3위) |
[1] 現 청주고등학교[2] 정황 상 이마무라 히토시의 부대에서 근무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지 원주민들이 일본군에게 와서 이런 부탁을 할 정도면 매우 우호적인 상황이었던 것.[3] 우석대학교의 전신, 우석대학교는 후에 고려대학교에 흡수된다.[4] 14명이면 1개반급 규모인데 빨치산 초기에는 병력이 워낙 풍부하기 때문에 이런 일개 기자에게 소대장직을 맡기게 되고 소대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나마 빨치산 중반으로 넘어가면 이보다 적은 병력으로 대대라고 칭하게 된다.[5] 이봉각과의 인연은 이후 수십년간 이어지게 되는데 이때는 빨치산 시절에는 이봉각이 이태의 가장 든든한 빽이 되어 준다. 귀순한 이후에는 이태는 그냥저냥 살아가는데 이봉각은 부상을 입어 생활고에 시달린다. 그바람에 이태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받게 된다. 결국 데모를 지도했다는 이유로 이봉각이 경찰의 수배를 받고 도망가자, 전세금 보증인이였던 이태가 대신 끌려가서 고문 당하며 시달리게 된다.[6] 조정래의 경우 "태백산맥은 이태의 남부군에 빚진 바 크다"는 평론가들의 주장에 대해 이태의 원고가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 것은 분명 사실이나, 오히려 이태의 원고를 읽은 후 기존에 써 둔 원고중에서 내용이 겹치는 관계로 수정해야 했던 부분도 적지 않다며 무분별하게 표절이나 아류작으로 몰아가는 평론가들에 대한 불쾌감을 표시한 바 있다.[7] 김웅에게 쏟아진 언론의 관심은 오로지 이태와 남부군 덕분이지 스스로의 필력은 많이 부족하였다.[8] 강정구는 해당 인물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대책없는 종북주의자로 터무니없는 발언을 많이 해서 민주당계나 진보진영에서 오래전에 손절한 사람이다.[9] 전임자 정해영 탈당 후 의원직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