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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5 23:44:19

강정구

파일:강정구.jpg

姜禎求
1945년 3월 18일 ~ ([age(1945-03-18)]세)

1. 개요2. 생애3. 사건사고
3.1. 만경대 필화사건3.2. 아내의 강용석 사과요구 사건3.3. 6.25 통일전쟁론에 따른 사법처리3.4. 6.25 전쟁, 천안함 등 역사왜곡
4. 논란
4.1. 사회학자로서 무책임4.2. 민족주의자로서 내로남불4.3. 사회 이슈에 대한 이념화
5. 관련 보도

1. 개요

대한민국종북 성향 사회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前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다.

독립유공자 강신혁(姜信赫)의 손자이다.

2. 생애

1945년 3월 18일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억만리 고연정마을의 농가에서 아버지 강정출(姜貞出)[1]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산고등학교(18회)[2]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가 1983년 템플 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85년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7년에는 동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1988년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해 한국사회론, 정치사회학 등을 강의했다. 그 뒤 2005년 "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한달 이내에 끝나고 통일이 달성됐을 것"이라는 내용의 '6.25 전쟁은 통일전쟁이었다'는 논쟁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찬양, 고무) 혐의를 받아 불구속 기소되었고[3], 2006년 2월 동국대학교 당국에 의해 교수직위가 해제되었다.

당시 파장을 일으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공산화됐을 것이라고 하지만, 46년 미 군정 여론조사 결과 공산·사회주의 지지세력이 77%였고 자본주의 지지는 겨우 14%였다. 공산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당시 조선사람 대부분이 원하는 것이면 응당 그 체제를 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4]

교수 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최소 2014년 이후로 꾸준히 통일뉴스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는데, 중국의 협조 없이는 통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바탕에서 비롯된 것인지 대다수는 중국의 발전상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과도하게 찬양하는 수준에 이른다. 2020년 말에도 항미원조 정신을 바탕으로 분발과 진취를 이루어야 한다는, 중국 언론사 봉황망의 부사장을 지낸 류칭동이 환구시보에 기재한 글을 그대로 번역하여 올리는 등 과거의 행보와 변함없는 모습을 이어가고 있다.# 2014년 통진당 해산 당시에는 이를 비판하는 등 진보 진영의 지식인을 자처하고 있지만, 워낙 급진적 주장을 펼치는 인물이라서 진보 진영 제도권에서도 거리를 두는 편이라서 언급 자체가 안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본인도 인정했던 반미주의자 행보가 친중까지 넘어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020년대 들어서도 한겨레신문 등의 매체에 기고문으로 미국의 우크라이나 전쟁 개입을 비난하고, 중국의 세계 패권을 예언하는 등 반미친중 행보를 적극적으로 이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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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건사고

3.1. 만경대 필화사건

2001년, 지난 6.15 합의에 따라 평양에서 개최된 광복절 축전에 참여했던 강정구 교수는 만경대 학원을 방문하여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라고 썼다. 이에 대해서 강 교수 본인은 "만경대 정신이라는 건 그야말로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들을 역사가 고평가하고, 그분들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까지도 챙겨주는 그 정신을 말한 것이다. '이게 확산이 되면 이제 모든 사람이 나랏일에도 힘쓰고 민족을 위해 힘쓰고 그러다 보면 평화 통일을 이룩하는 것도 빨라지지 않겠느냐'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라는 이유와 함께 즉흥적으로 썼다고 밝혔다. 이것이 보도되면서 남한으로 돌아오자마자 김포공항에서 구속되었고 대공분실에서 조사받은 후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이때는 검찰 측에서 해당 방명록의 이적성을 검토하느라 재판이 지연되다가 2005년 통일전쟁 칼럼으로 논란이 커지면서 더욱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동국대에서는 2001년 12월, 직위해제 심의에 들어갔으나 2002년 1월에 부결되었다.

3.2. 아내의 강용석 사과요구 사건

2005년 10월 14일 'KBS 심야토론'에서 한 패널이 한 발언에 대해 동국대 강정구 교수 부인 노모(57)씨가 생방송 도중 전화를 걸어 사과를 요구한 것을 두고 논란이 발생하였다. 그 날 밤 방송된 'KBS 심야토론'의 '강정구 교수 사법처리 논란' 편에서 패널 중 한 명으로 참여한 강용석 변호사[5]는 강 교수의 두 아들의 직업과 군 경력을 두고 비판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토론에서 변호사 강용석은 미국에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로펌(법률회사)에 다니는 강정구의 장남을 지목하며 "강 교수의 큰아들이 다니는 로펌은 강 교수의 시각에서 보면 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전파하는 첨병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고, 카투사에서 군복무한 둘째 아들에 대해서는 "'미국은 학살자'라면서 둘째 아들은 왜 카투사에 보냈느냐"며 따져 물었다. 이에 대해 강 교수의 부인 노씨는 제작진에게 전화를 걸어 "(강 변호사의 발언은) 명백한 인신공격"이라면서 "사과하지 않으면 소송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진행자 정관용 씨는 노씨의 사과 요구를 강 변호사에게 전했지만 강 변호사는 사과할 뜻이 없다고 밝혔다.

3.3. 6.25 통일전쟁론에 따른 사법처리

2005년, 6.25 전쟁은 김일성의 통일내전이었으며 미국만 아니었으면 1만명 이하의 피해로 끝났을 것인데 미국 때문에 피해가 커졌다고 미국이야 말로 6.25의 원수라고 미국을 비난하면서 광복 후 공산주의를 택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고 대단한 파문을 일으켰다. 보수 진영은 말할 것도 없고 진중권, 한홍구[6] 등 진보성향 측에서도 강정구의 견해를 크게 비판했으나 강정구는 이에 대한 비판을 얼치기라고 일축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보수단체가 강정구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소하면서 사법처리되었다.

2006년 5월 26일 법원은 강정구 교수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했다. 6·25 전쟁이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는 '6·25 통일전쟁론’을 편 데 대해 법원은 "북한의 대남 적화혁명론에 동조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주장에 해당한다. 자극적 표현으로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해칠 수 있는 선동적 표현을 한 데 대해 엄격한 사법적 판단이 필요하다."고 판결했다. 이에 대해 보수단체는 더 강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진보단체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면서 충돌을 빚었다. 2007년 11월 13일에 내려진 항소심에서도 법원은 같은 판결을 내렸다. 최종적으로 2010년 12월 대법원에서는 징역 및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지었다.

참고로 당시 수사를 지휘한 것이 다름아닌 황교안이다.

3.4. 6.25 전쟁, 천안함 등 역사왜곡

그리고 강정구는 줄곧 6.25 전쟁의 남침유도설을 주장해온 인물이다. 남침유도설은 1960년 제기되었지만 이미 그때 사장되었다. 이후 하지만 소련 문서 공개 이후 박명림의 연구로 북침설과 남침유도설은 완전 사장되었다. 즉, 이러한 강정구의 "6.25 통일전쟁론"은 근본적으로 기밀 해제된 미국과 러시아 등의 해외 문건으로 충분히 논파되어서 근거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사회학자의 왜곡된 역사관, 결과론적 대체 역사관에 가깝다.

2010년 동국대 고별 강연에서는 "천안함 사건화는 한국과 미국, 일본의 수구세력이 역사의 흐름을 역행시키려고 주도한 발악"이라며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사건으로 만든 것이기에 '사건화'라고 주장" 하기도 했는데, 이것 또한 북한을 미화한 남침유도설과 같은 맥락의 역사왜곡이다. 뿐만 아니라 이보다 앞선 2006년에는 서해교전에 대해서도 "우발적 사고"였다면서 북한은 계획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평택미군기지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급진적 주장에는 사회학자로서 근거가 필수적이나 강정구의 강연에는 주장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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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논란

상술한 바와 같이 강정구는 2000년대 내내 극렬 반미, 민족주의 발언으로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평양 방문 당시 방명록 논란부터 천안함까지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사회주의 미화 발언을 쏟아내면서 진보 진영에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당시 사회 분열상에 피로감을 느끼던 중도층에 자극적 언행과 독단적 역사 해석으로 파장을 일으켜 유권자들이 진보 진영에 등을 돌리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인물 중 하나이다.

4.1. 사회학자로서 무책임

"해방 후 남한 민중의 77%가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게 당연했다. 당시에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또 공산주의가 탄압받는 분위기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해도 사회주의라고 답했을 수도 있다. 그게 사회주의든 무정부주의든 조선 사람들이 원하는 식으로 했어야 한다는 게 내 시각이다."- “미·소 개입안했으면 여운형 집권했을 것”(한겨레신문)

이러한 주장은 사회학자로서 극도로 위험하고 무책임한 발언이다. 역사의 흐름에 있어서 민중의 여론조사로 국가체제를 선택한 국가는 인류사에 없었다.[7] 강정구는 사회학자로서 비현실적인 주장을 내세우며 역사를 비판하는데 불과했다.

4.2. 민족주의자로서 내로남불

상술한 항목에서 드러났듯이 강정구의 아들들이 미국에 거주하면서 로펌을 다니고, 미군 카투사를 제대했다는 사실은 본인도 인정한 바이다. 이러한 사실이 비판의 여지가 될 수는 없지만, 문제는 강정구가 극렬한 반미주의자라는데에 그 위선이 드러난다. 우리나라의 건국 과정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이후 현대사까지 거의 모든 역사에 미제국주의를 맹비난하는 그가 정작 자식들은 미국 사회의 주류로 성장시키고, 미군 부대에 자원근무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율배반적이다.

강정구는 이에 대해서 아들들이 미국 유학 과정에 자랐고, '내성적'이라는 이유를 밝히면서 "반미하는 사람이 미국의 은혜를 입었다"라는 인식에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논점회피로 반미주의자 가족이 가장 미국적인 체제에 속해 있던 것은 '은혜를 입는 것'이 아니라 '내로남불', 위선일뿐이다.[8][9]

4.3. 사회 이슈에 대한 이념화

강정구는 거의 모든 안보 이슈에 개입하여 극단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합당한 학자적인 근거나 논리는 전혀 없이 본인의 주장만 반복해 이제는 주류 언론 대부분이 기사화조차 하지 않는 형편이다. 사회 일반적인 주장이 아니라 극단적인 주장을 내세울 때에는 그 근거와 논리가 명확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예컨데 천안함 피격 사건에 대해서 '수구 세력이 이슈로 만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는데 해군함의 침몰과 47명의 장병이 희생된 참사가 이슈화되지 않는 나라는 이 세상에 없다. 이에 대해서 수구 세력 운운한 것은 비난을 위한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2006년에도 비슷하게 서해교전을 북한의 도발이 아닌 "우발적 사건"으로 치부했는데 여기에 대한 근거 역시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사회학자 출신으로 이념에 경도된 선악구도만 존재하는 상황 진단으로 사회 분열만 일으키는 인물이라는 평가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강정구의 주장은 시대와 이슈를 초월해서 북중(北中)은 절대선, 한미일(韓美日)은 절대악이라는 구도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편협함을 보인다. 명색이 사회학자로서 세상을 이차원적으로 보는 관점을 평생동안 대외에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5. 관련 보도



[1] 창씨명은 토모야마 테이슈츠(友山貞出).[2] 공교롭게도 조갑제와 동기동창이다.#[3] 본래는 구속기소될 상황이었으나 천정배 당시 법무부장관이 헌정사상 최초로 검찰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발동, 불구속수사를 명령해 구속은 피했다.[4] https://konas.net/article/article.asp?idx=7354&rep_idx=12844[5] 당시 변호사 겸 한나라당 마포구 을 당협위원장.[6] 김일성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논란이 있었으나 엄밀히 따지자면 종북주의자는 아니다.[7] 다만 해당 기사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해방 직후 지식인 계층에서 온건파 사회주의자 혹은 친미성향의 중간파인 여운형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8] 비슷한 사례로 자사고/특목고 폐지, 평등교육을 외치는 진보교육감들이 정작 자기 자녀들은 자사고에 보내거나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보냈다는게 드러나서 조롱거리가 된 적이 있다.[9] 덤으로 악명 높은 종북주의자들은 대놓고 미국 시민권을 가진 재미교포인 경우가 많다. 마치 종일 성향의 뉴라이트(종북과 뿌리가 같다) 인사들이 누구보다 일본을 혐오했던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찬양하는 것과 같은 모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