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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6.25 전쟁 당시 학도의용군, 전투경찰, 대한민국 국군 복장을 재현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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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경찰관의 전투복. 전투를 위해 경찰용 철모도 지급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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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경찰 참전용사 영결식은 대한민국 국군 의장대가 아닌 참전용사의 후배인 경찰의장대[1]가 주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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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70주년 유해봉환식 때 배치된 치안국 부대기 |
1. 개요
전투경찰은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대한민국 국군과 함께 일선 전투에 참전했거나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하는 적 유격대를 포착, 섬멸하기 위해 전투에 참전했던 대한민국 경찰공무원 및 보조 인원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표현이다.이들은 행정상 치안국 소속으로 내무부 직원이었고, 일부는 경우에 따라 국방부 산하의 대한민국 육군 혹은 유엔군사령부의 미 육군 부대에 배속돼 작전했다.
2. 상세
비록 창군기엔 잠시 국방경비대에 비해 피복과 장비 등이 좋았지만 금방 역전된 이래, 전쟁 초기 빈약한 무장과 보급, 조선인민군 육군의 파죽지세와도 같은 남하와 같은 악조건 하에 주로 지연전을 펼쳤다.당시에는 전차와 중화기로 무장한 북한군에게 대한민국 육군도 속수무책이었으니 볼트액션식 99식 소총이 주무장이었던 당시 경찰은 말할 것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 이들은 자의나 타의로 적이 점령한 지역에 남아 함께 남은 국군과 함께 북한군을 상대로 처절하게 유격전을 펼쳤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대한민국 국군과 함께 후퇴한 경찰들은 전쟁 초기 최후의 보루를 지키던 전투인 다부동 전투에도 약 15,000명이 참전하여 작전 성공에 뒷받침했다.
그 뒤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해 고립된 적들이 아군측 후방지역에서 유격전을 펼치자 이들을 포착하고 섬멸할 목적으로 정식으로 창설되어 빨치산 토벌 작전을 펼쳤다. 토벌 작전에 동원된 이들은 전술한 인원과는 다른 전투경찰대로 정식 편입됐다.
이들의 특징은 오로지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한 조직이므로, 대민 업무 및 치안유지가 목적인 일반 경찰과는 다른 조직 내의 조직이었고 자체적인 민간인의 지원, 선발 과정이 있었다는 점이다. 일단 전투경찰대에 배속되면 육군으로의 징병이 유예되었다. 또한 시간이 흐른 뒤, 임시 계급을 받거나 아예 계급도 없는 민간인 신분이던 대원들도 휴전 이후 정식으로 경찰공무원으로 임용되는 특혜를 받았다.
1967년 창설한 전투경찰순경도 초기에는 매우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후에 '지원제 전투경찰'이라고 불리게 되는 전투경찰순경의 초기 형태가 그렇다. 전투경찰순경에 지원해 배속되면 일반 군복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시행 몇 년 뒤 차출제로 바뀌었다.
3. 보급
병기의 경우, 일본군의 99식 소총이 주력이었으며 전쟁 후기에는 M1 개런드와 M1 카빈, M1911도 사용했다. 전쟁 초기에도 그랬지만 후기 빨치산 토벌 때도 보급은 형편 없어서 북한군이나 빨치산에게 중화기를 노획하여 썼다.피복의 경우 직원 출신으로 차출된 경우는 경찰 근무복에 무장만 한 모습이 많았으나, 이후 육상 전투에 걸맞게 국군이나 미군에게 지원받거나 자체 조달한 국방색 전투복류 위주로 바뀌어, 일반적인 경찰과 구분되는 복장을 했다. 다만 여기저기서 닥치는 대로 조달받다 보니 피복의 통일성이 육군만큼이나 떨어졌다.
식사도 보급이 없다시피 하여 작전 인접 지역 주민들에게 조달 받았으니 사실상 모든 것이 자체 조달이었다. 얼마나 사정이 심했는지 지나가던 육군이 '거지부대'라고 놀렸다는 참전 전투경찰의 증언이 있다. 창군기 국방경비대원들을 경찰들이 단추를 달아 계급장을 대신한 것을 보고 비웃고, 총기류도 경찰이 훨씬 좋았던 시절과 정반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