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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7 |
이름 | 조정래 |
분야 | 소설가 |
은관문화훈장(2등급) |
조정래의 수상 내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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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7회 현대문학상 수상 | ||||||||||||||||||||||||||||||||||||||||||||||||||||||||||||||||||||||||||||||||||||||||||||||||||||||||||||||||||||||||||||||||||||||||||||||||||||||||||||||||||||||||||||
김용운 (1981) | → | 조정래 유형의 땅 (1982) | → | 윤흥길 (1983) | |||||||||||||||||||||||||||||||||||||||||||||||||||||||||||||||||||||||||||||||||||||||||||||||||||||||||||||||||||||||||||||||||||||||||||||||||||||||||||||||||||||||||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수상 |
조정래 趙廷來|Jo Jung-rae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출생 | 1943년 8월 17일 ([age(1943-08-17)]세) | ||
전라남도 순천군 쌍암면 죽학리 선암사 (現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선암사) | |||
본관 | 함안 조씨 (咸安 趙氏) | ||
데뷔작 | 누명(1970) | ||
직업 | 소설가 | ||
소속 정당 | |||
수훈 | 은관문화훈장(2017년 수상)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학력 | 벌교초등학교 (졸업) 광주서중학교 (졸업) 보성고등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 / 학사) | |
부모님 | 아버지 조종현, 어머니 박성순 | ||
배우자 | 김초혜(1967년 결혼) [시인] | ||
자녀 | 아들 조도현 | ||
종교 | 불교 (법명: 인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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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저는 성장해갈수록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증오를 느꼈고, 가엾고 억울하게 당하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일이 제 가슴에 정면으로 부딪쳐와 통증을 일으키고는 했습니다. 그건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었고, 누가 말린다고 그렇게 안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 그것이 작가의식일 것입니다.(조정래, '황홀한 글감옥'에서)"
"이 세상의 모든 노동은 치열한 것을 요구할 뿐 감상적 기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노동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로 행. 불행이 갈립니다. 저는 그 숨 막히는 노동의 세월을 ‘글감옥’이라 표현했고, 그 노동을 하고 있을 때 가장 행복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조정래, '황홀한 글감옥'에서)"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1943년 8월 17일 전라남도 승주군 쌍암면 죽학리(現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에서 출생이며, 종교는 불교, 법명은 인천이다. 등단작은 '누명'. 대표작은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2], 정글만리, 천년의 질문, 풀꽃도 꽃이다 등이 있다.
2. 생애
1943년 8월 17일, 선암사에서 아버지 조종현과 어머니 박성순의 4남 4녀 중 넷째로 출생했다. 당시 일제는 불교황국화 정책에 따라 승려들의 결혼을 정책적으로 장려했다. 덧붙여 선암사는 현대에도 대처승 제도를 인정하는 태고종의 종찰이다. 아버지 조종현은 선암사 부주지 출신의 승려로 본명은 조용제로, 종현은 법명이다.호는 철운이다. 해방 후 절 사유지를 소작인들에게 무상분배하자고 주장했다가 사형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부친에 대한 이미지와 일화는 소설 태백산맥의 법일스님으로 구현된다. 이 일로 인해 결국 조종현은 환속해서 고등학교 국어교사 및 시조시인으로 활동하다가 1989년 별세했다. 만해 한용운과 함께 불교청년회에 가담해 활동했고 불교 학생 사상기관지인 ‘회광(回光)’의 주간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1929년에 '조선일보'에 동요를. 1930년 '동아일보'에 시조를 발표하며 시조 창작에도 힘을 쏟았다.어렸을 때 조정래 작가는 아버지인 조종현을 따라다니며 아버지가 흥얼거리던 시조를 읊게 되었다고 하며 그 과정에서 조금씩 시에 대한 매력을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시조에 대해 배울 때에는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다 아는 내용이었다고. 청년 시절엔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스님이 될 뻔했다고 한다.
1948년 순천에서 여순반란사건을 겪고, 1950년 충남 논산에서 6.25를 맞는데, 이는 작가의 유년시절의 기억을 지배하고, 그의 작가정신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53년 작은 아버지들이 살고 있는 벌교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이때의 생생한 기억들이 훗날 태백산맥을 써내려가는 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문재가 있어, 이 무렵 최초의 자작문집을 만들었고 글짓기에서 전교 1등상을 받기도 한다.
초등학교 6학년 사회생활 시간에 일제 시대를 배우다가 안중근, 유관순, 청산리대첩밖에 없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무엇을 했길래 책에 이것밖에 안 나오냐고" 질문했더니, 당시 선생님은 "건방진 놈, 담에 크면 알게 된다"고 말했다고 작가가 회고한다.
이후 광주에서 광주서중학교[3] 3년을 보내게 되었는데, 중학교 졸업 후 상경하여 아버지가 전근한 서울 보성고등학교(52회)에 입학하였고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4]를 졸업했다. 보성고등학교 시절, 1학년 체력검사에서 2천 미터 달리기에서 1등을 하는 바람에 등산반에 특별 스카우트 되기도. 그런 인연으로 오랫동안 등산을 즐겼다. 놀랍게도 보성고 3학년 때는 역도반에 들어 활동했는데 당시 아버지가 보성고 문예반 교사였기에 일부러 운동반으로 배돌았다고 한다. 당시 턱걸이를 60번쯤 할 정도로 강건한 체력이었는데, 어쩌면 그때의 단단한 체력으로 현재까지 필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고 회고한다. 본래 동국대 국문과를 지망할 당시 조정래 작가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국어교사로 일하였으며 교사 재직 중 등단하여 여러 편의 소설 작품을 내놓았다.
50년을 훌쩍 넘긴 작가의 삶을 두고, 흔히 '작가정신의 승리'라고 표현하곤 한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뒤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광주를 방문했다. 이 때의 광주는 흡사 죽은 도시 같았다고 한다. 심지어 건물에 들어가자 벽 곳곳에 들러붙은 핏자국과 머리카락 등을 보고 큰 충격을 먹었다고, 이후 1983년 9월부터 원고지 1만5천 매 예정으로 '현대문학'에 태백산맥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989년 태백산맥 제4부를'한국문학' 1월호부터 연재 시작하여 11월호까지 완결하였다. 이에 제4부도 3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함으로써 전 10권을 완간하기에 이른다. 태백산맥 완결을 고대하며 투병하시던 아버지의 별세를 소설을 쓰다가 전화로 연락을 받게 되는데, 소설의 완결까지 단 1회분 반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다. 이러한 작가의 놀라운 집념과 몰두 속에 탄생한 태백산맥은 '80년대의 '금단'을 깬 대표소설 ('한겨레신문'), 신문 문학 담당기자와 문학평론가 39인이 뽑은 '80년대 최고의 작품' 1위, 현역 작가와 평론가 50인이 뽑은 '한국 최고의 소설('시사저널', 전국 대학생 1650명이 뽑은 '가장 감명 깊은 책' 1위('중앙일보') 등의 놀라운 기록을 세운다.
조정래 작가는 흔히 대하소설 3부작으로 불리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전 32권을 쓰며 마흔에서 예순까지, 무려 20년의 인생을 전적으로 문학에 바쳤다. 한마디로 몸과 정신을 모두 갈어넣은 경지다. 작가 스스로도 20년 '글감옥'에서 출옥했다고 회고할 정도다. 너무 오래 앉아 있어 온갖 '직업병'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심지어 탈장까지 겪었다고.
"위궤양도 재발하지 않고 오른쪽 어깨도 흔들면 가늘게 띠극, 띠극 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마비 증상을 보이지는 않아 『한강』은 별 탈 없이 끝내게 되나 보다 했다. 그런데 후반부를 쓰고 있던 어느 날 아침 무심결에 손이 아랫배로 갔다. 손이 닿은 부위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의사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탈장이 되었다고 했다. 그건 다름 아니라 너무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장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장을 막고 있던 막이 ‘아이고, 나는 더 못 견디겠다’ 하고 백기를 들어버린 것이다. 수술을 하면 그 통증 때문에 두 달은 글을 쓸 수 없다고 해서 7개월 동안 탈장을 앓으며 『한강』을 끝냈다. 이 글까지 마치면 바로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을 참이다."(한강 10권, <한강을 마치며> 중에서)
1973년에 '월간문학' 편집장, 1976년 '소설문예' 발행인이 되었고 1978년 '민예사' 대표를 맡았다. 1984년에 '한국문학'을 인수하고 주간으로 일했고 1997년 동국대 국문과 석좌교수가 되었다.
3. 문학적 업적
1970년 등단한 이래 약 50여년간 조정래 작가는 오로지 문학에만 헌신해 온 삶 그 자체였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그의 문학관처럼 엄혹한 시대적, 역사적, 실존적 상황 속에서 고뇌하는 인간 군상과 사회의 부조리를 다수의 작품을 통해 형상화해냈다. 조정래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태백산맥에 대해 소설가 김훈은 "나는 '태백산맥'의 거대함을 사랑하기보다, 그 구체성을 사랑한다. 구체성이라는 것은, 삶과 역사에 대한 직접성이다. 이데올로기는 삶에 대한 직접성을 확보함으로써만 역사 앞에 순결할 수 있다."고 평하기도 하였다.작가정신의 결집체라 할 수 있는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20세기 한국 현대사 3부작'으로 1천5백만부 돌파라는 한국출판사상 초유의 기록을 수립했다.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1982년 중편「인간의 문」으로 대한민국문학상, 중편「유형의 땅」으로 현대문학상, 1988년 성옥문화상을 수상했다. 1991년 <태백산맥>으로 단재문학상, 1998년 제1회 노신(魯迅)문학상을 수상했다. 2003년 만해대상과 제1회 동리문학상,「미로 더듬기」로 현대불교문학상, 2013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제33회‘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을 수상(문학부문)했다. 2014년 제1회 심훈문학대상, 2015년 제2회 이승휴문화상 문학상 수상했다. 2017년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4. 논란과 비판
4.1. 정치적 논란
조정래는 태백산맥을 집필한 이후 보수 관련 단체나 인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야 했는데 대표적으로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태백산맥을 이적 표현물이라고 국보법 위반으로 고소하기도 했다.4.1.1. 일본 유학생 친일파 및 단죄 발언
"반민특위는 반드시 민족정기를 위하여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부활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150, 160만 헤아리는 친일파들을 전부 단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질서가 서지 않고는 이 나라의 미래는 없습니다.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되어 버립니다. 민족 반역자가 됩니다._ 그들을 일본의 죄악에 대해서 편들고 왜곡하는, 역사를 왜곡하는 그자들을 징벌하는 새로운 법을 만드는 운동이 지금 전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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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왜구라고 부르는...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되어 버립니다. 민족 반역자가 됩니다._ 그들을 일본의 죄악에 대해서 편들고 왜곡하는, 역사를 왜곡하는 그자들을 징벌하는 새로운 법을 만드는 운동이 지금 전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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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2일, 조정래는 서울 중구 세종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된 등단 50주년 기자 간담회에서 "일본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친일파가 된다."는 식의 발언과 함께 "반민특위를 부활시켜야 하며, 이러한 150만 명의 친일파들을 징벌하는 법을 만들어 단죄해야 한다."는 발언을 해서 논란을 빚었다. #
하지만 조정래의 이러한 주장은 극단적이고 말이 안 되는 쇼비니즘적 주장이다. 당장 독립운동가 및 독립유공자들 중에도 일본에서 유학한 사람들이 꽤나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윤동주[5], 지청천, 송진우, 안재홍[6],김병로[7], 이인[8]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검색해보면 일본 유학 경력이 있는 사람이 결코 적지 않다. 애초에 150 ~ 160만명이 토착왜국라는 주장은 어떤 근거가 있는지 상세하게 말하지 못했다.
이에 과거 야당인 자유한국당의 민경욱 전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의 딸인 문다혜를 두고 "일본에서도 극우 성향으로 유명한 고쿠시칸대학에 유학했다."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이에 좌파 성향의 언론인 오마이뉴스는 "일본에 유학했다고 다 친일이라는 논리는 잘못이다." 는 논조로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같은 날 이 사례를 들며 조정래의 발언을 비판했다. 그는 "일본 유학 하면 곧 친일파라니, (문다혜는) 곧 조정래 선생이 설치하라는 반민특위에 회부돼 민족반역자로 처단당하겠네요."라고 반박하면서, 이 정도면 광기라고 해야 한다. 시대착오적 민족주의 안에 잠재된 극우적 경향이 주책없이 발현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 이후 민주당 측에서 박진영 민주당 상근부대변인이 이례적으로 논평을 냈는데 "이론도 없고 소신도 없는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예의마저 없다", "명색이 학자이자 교수 출신이면서 이론과 학설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느냐"거나 진중권의 말이 계속 기사화되니까 자기 세상같냐며 언제까지 가는지 지켜보겠다며 인신공격성 비난을 늘어놓다 마지막에는 예형의 길을 걷고자 하면 그리 가라며 사실상 협박성의 악담을 퍼부었다.[9] 참고로 민주당과 관련 인사들은 박근혜의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밝혀졌을 때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었다. 진중권은 "너희 세상인데 왜 나한테 성을 내냐", "거기다 조정래를 비판했는데 왜 민주당에서 성명을 내냐, 이게 공당이 할 짓거리냐"고 반론했다. 그러자 박진영은 진중권은 지식인이 아니며(?)[10] 조정래는 사회 원로라는 식으로 또다시 논란의 소지가 있는 말을 했다.# 참고로 박진영은 홍영표가 군인 출신 의원들을 상대로 쿠데타 세력이라고 비난하자[11] 흔한 재밌는 발언이라고 무리하게 옹호한 바가 있는 사람이다.# 진중권의 말을 왜 재밌는 발언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는지는 의문이다.
이후 조정래는 토착왜구가 주어이고 조중동이 자신의 발언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진중권에게 무례 사과 않하면 고소한다고 경고했다.#1 그러나 이미 인터넷에 퍼져버린 조정래 본인의 육성을 들어보면 왜곡이라 보기 힘들다. # 육성을 들어보면 전부 다 처벌하자는 의견이 확실하다. 진중권은 조정래의 반박에 논리적으로 재반박을 했고[12] 조정래는 진중권을 고소하지 못했다. 조정래가 진중권을 고소하지 못한 것이 결국 진중권이 맞아다는 정황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논란이 되자 조정래는 자신의 입장을 내놓았다.
"분명히 거기서 토착왜구라 불리는 사람들하고 엄격하게 분명하게 그 범위를 제한하고 한정했습니다. 일본 유학을 갔다 와서 변한 사람도 있지만 더 민족의식이 강화되고 더 비판적으로 변한 사람이 많죠. 그런데 어찌 신문이 그렇게 음해를 하고 모략을 할 수 있습니까. 신문은 시대가 어떻게 변해도 진실을 말하는 게 신문입니다."
##
추가 입장을 통해서 조정래는 해당 발언이 나오게 된 경위는 반일종족주의의 저자 이영훈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격앙된 상태에서 나온 발언으로 본래 자신이 하려던 말의 일본에 유학을 간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아래는 당시 인터뷰 내용의 본문이다.
"첫 번째 질문 이영훈 사람이 뒤에서 저를 많이 욕했는데. 그는 한 마디로 말하면 신종 매국노이고 민족 반역자입니다. 그의 말 다 거짓말입니다. 저는 태백산맥에 500가지가 넘도록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해서 고발당했습니다. 11년 조사받고 나서 완전 무혐의가 됐습니다. 그 경험 때문에 아리랑은 더군다나 더 철저하게 자료 조사해서 썼습니다. 제가 쓴 역사적 자료는 객관적인 것입니다. 국가편찬위원회에서 다양한 직관, 진보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쓴 책을 중심으로 해서 명확한 자료입니다.그 자료를 그렇게 명확하게 쓴 이유는 우리의 수난이 얼마나 처절하고, 일본 놈들이 얼마나 잔혹했는가를 입증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 사실은 명확한 것이고, 그 역사 사실들을 짊어지고 가는 주인공들은 전부 제가 만들어 낸 허구 인물들입니다. 그것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구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역사냐' 하고 묻지 마시고, 2번, 3번 읽어보시면 그것이 명확하게 질문이 될 것입니다.
지금 저의 주장은 반민특위는 반드시 민족정기를 위하여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부활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150만, 60만 하는 친일파들을 전부 단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질서가 되지 않고는 이 나라의 미래는 없습니다.
두 번째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돼 버립니다. 민족 반역자가 됩니다. 그들을 일본의 죄악에 대해서 편들고, 왜곡하는, 역사를 왜곡하는 그자들을 증발하는 새로운 법을 만드는 운동이 지금 전개되고 있습니다. 제가 적극 나서려고 합니다. 아리랑을 쓴 작가로서 이것은 사회적, 역사적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법으로 다스려야 됩니다. 그런 자들은.
조정래 '일본유학=친일파' 발언 원문을 보니/조현호 기자/머니투데이/2020-10-15
지금 저의 주장은 반민특위는 반드시 민족정기를 위하여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부활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150만, 60만 하는 친일파들을 전부 단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질서가 되지 않고는 이 나라의 미래는 없습니다.
두 번째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돼 버립니다. 민족 반역자가 됩니다. 그들을 일본의 죄악에 대해서 편들고, 왜곡하는, 역사를 왜곡하는 그자들을 증발하는 새로운 법을 만드는 운동이 지금 전개되고 있습니다. 제가 적극 나서려고 합니다. 아리랑을 쓴 작가로서 이것은 사회적, 역사적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법으로 다스려야 됩니다. 그런 자들은.
조정래 '일본유학=친일파' 발언 원문을 보니/조현호 기자/머니투데이/2020-10-15
이후에 독서신문 인터뷰에서 이 사건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토착 왜구라고 불리는 자들은 다 일본 유학을 갔다 와서 변절을 했다’고 말했더니 <조선일보>가 ‘토착 왜구’ 주어를 싹 빼고 술어만 실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일본 유학을 다녀와서 다 친일파가 되어 버렸다’라고 얘기한 게 되어 버렸다. 진중권은 상대할 필요를 못 느낀다. 진보에서 보수로 돌아서는 건 지식인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진보 진영에서 다 털어먹었으니 이제 출세를 위해 보수를 택한 지식인 기회주의자다.”
박용채 독서신문 편집주간과 대담
박용채 독서신문 편집주간과 대담
이후 독서신문의 인터뷰에서 정신을 못차리고 조중동이 자신의 발언을 왜곡했다고 주장하며 진중권 보수로 전향한 기회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편협한 관점이다. 조정래는 민족주의=진보라고 생각하는데 일반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는 보수 취급 받는다. 전세계적 기준으로 진중권이 오히려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괜히 김누리(교수)가 수구가 보수를 사칭하고 보수가 진보를 사칭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13] 김누리 교수의 판단으로는 새정치민주연합[14]의 역사와 민족 문제에 있어서나, 경제, 노동, 복지 정책에 있어서나 그들은 서구의 보수정당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그렇기에 민주당 정치인들이 조정래를 변호하는 이유도 조정래가 실제로는 보수이기 때문이라고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진중권이 조정래를 극우 취급한 것은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다.
4.2. 문학에 대한 비판
1인칭 서술을 극도로 혐오하는 것도 비판 지점이다. 친일파 단죄 발언에 묻혀서 제대로 조명되지는 않았지만, 친일파 발언과 함께 "1인칭 소설을 쓰는 작가는 불구"라고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는 1인칭으로는 (자신이 지향하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등장과 사회 비판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당장 위에서도 언급한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만 봐도 훌륭한 반례가 될 수 있다.5. 제32대 국무총리 박태준과의 관계
그는 1990년대 중반에 쓴 "한강"에서부터 포철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를 서술했다. 2007년에는 (이 해는 박태준의 팔순 해이기도 했다) 신채호, 김구, 안중근, 한용운과 함께 15권으로 예정된 자신의 아동용 위인전의 위인으로 박태준을 선정했다.박태준은 "민족주의자, 그것도 투철한 민족주의자"라며 몇차례 조정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994년 태백산맥 이적성 고소에도 친분이 있는 몇몇 보수들과 달리 반대 의견을 표했다. 또한 2000년대 들어서는 태백산맥 기념관 등의 사업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조정래 또한 "박태준이라는 인물은 한국 사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에요. 우리 근현대사에서 그처럼 뒷모습이 깨끗한 기업인이 있었나요"라든지, "모르는 사람들은 박태준 회장을 개발독재의 주역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개발독재의 주역은 독재로 인해 권력을 누리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독재를 행사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거예요. 박 회장은 순수한 기업인일 뿐이었어요."라고 말하는 등의 긍정적 평가를 했다. # 관련기사 1 # 관련기사 2
6. 여담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등장인물의 이름 한 가지 빼고 전혀 겹치지 않는다. 유일하게 하나 겹치는데 이건 작가도 모르고 있다가 독자가 알려주었다("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강’에 비중있게 등장하는 허진이라는 이름이 ‘아리랑’에 한 줄 스쳐 지나간 걸 어느 독자가 지적해줬습니다."). #자신의 사후에 자손들이 자신의 작품으로 자손만대에 먹고 살 거라면서 아들과 며느리에게 태백산맥을 원고지에다가 일일이 손으로 베껴쓰게 한 일도 유명하다. 그리고 며느리는 한 달 정도 만의 기간에 1권을 끝냈다! 작가 본인이 날림으로 쓴게 아닌가 검사해봤지만 깨끗하게 완성해놨다고.
2024년 현재에도 컴퓨터를 쓰지 않고 항상 육필(肉筆)을 고집, 일일이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쓴다. 그러지 아니하면 글에 혼이 담기지 않는 기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오탈자가 생기면 그 장은 찢어버리고 새로 쓴다고 한다. 마치 영혼이 더럽혀진 느낌이라고.
워낙 집필한 분량이 많아서 소설 원고를 쌓아놓으면 사람의 키보다 높고 소설에 등장한 인물만 수백 명에 달한다. 더군다나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한 명만 빼고 다 다르니, 이름 짓는 것만 해도 고생이었다고 회고한다.
벌교읍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조정래의 대표작인 태백산맥이 순천 옆동네인 벌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라 태백산맥의 배경지를 답사하려는 사람들이 벌교를 많이 방문하게 되었다. 사실 원래 벌교 주민들은 태백산맥 타령하는 방문객들을 처음엔 별로 안 좋아했으며 태백산맥 때문에 외지인들 눈에 벌교가 빨갱이 동네로 보인다고 작가를 비난하기도 했는데 언제부턴가 태백산맥을 통해 증가한 관광 수요에 호응해 태백산맥 문학관도 건립하고 현부자집, 보성여관 등을 복원하는 등 태백산맥 문학기행을 주제로 읍내를 단장했다. 또한 벌교 인근 해역에서 생산되는 꼬막도 같이 유명세를 타면서 그 유명한 '꼬막정식'이 생겨났고 벌교 꼬막을 수산물 지리적 표시제 1호로 등록했다. 꼬막은 원래 '고막'이 표준어였는데 태백산맥에 '꼬막'이라고 쓴 것이 널리 퍼져서 표준어가 '꼬막'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공처가로 유명하다. 공처가를 넘어서 경처가를 자처한다. 신혼 때부터 부부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맞벌이 교사로 일했는데, 그러면 당연히 집안 일도 절반씩 분배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정래가 가사 노동을 도맡아 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본인이 쓴 원고의 첫 독자도 사모님이고, 유명한 시인이기도 한 사모님의 지적 사항을 100% 수용하는 편이라고 한다.
2016년, 한국의 교육 문제를 다룬 장편소설 《풀꽃도 꽃이다》를 출간한다. 그리고 나향욱의 개돼지 발언에 대해 '국민의 99.9%가 개와 돼지라면 그는 진딧물이나 기생충이다.'라는 말로 일축했다.
2019년, 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대한민국 사회의 격변을 다룬 천년의 질문이라는 신작을 탈고했다. 여기에는 최순실 게이트의 발각과 격랑의 정치사 속에 있었던 나는 꼼수다의 멤버 주진우와 김어준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도 등장한다고 한다. 전 3권의 조정래 작품치고는 짧은 소설이며, 오디오북으로도 발간되었다.
2009 개정 교육과정, 2015 개정 교육과정 해냄에듀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대표 저자로 참여했다.
광주 동구청 강연에서, 조국 등 정치인을 공개 지지했다. 그리고 현재는 조국혁신당에 입당하여 조국혁신당 당직까지 보유하고 있다.
7. 대표작
8. 강연
- 제270회 동구아카데미(2024.04.12(금) 14:00~16:00)
9.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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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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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위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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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내대표 | 황운하 | 원내수석부대표 | 정춘생 | |
원내부대표 | 강경숙 · 김재원 · 신장식 | |||
원내대변인 | 신장식 | }}}}}}}}}}}}}}} |
[시인] [2] 이들은 모두 대하소설이라는 점에서 조정래는 대한민국 대하소설의 대가라고 부를 수 있다.[3] 6년제 광주서중이었다가 광주서중과 광주일고로 분리됐고 중학교 평준화 정책에 따라 광주서중은 폐교됐다. 광주-전남 지역의 엘리트들이 모인 중-고교였다.[4] 62학번으로, 성우 김종성과 동기.[5] 일본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서 수학했었다.[6] 감찰위원장으로 활동했다.[7] 초대 대법원장[8] 초대 법무부장관[9] 예형은 권력자들을 조롱하다가 처형당했다. 일각에서는 단순 지지자 모임도 아니고 공당에서 이런 과격한 논평을 내도 되는지에 대해 비판이 일었고 진중권은 지금 협박하는거냐며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10] 참고로 진중권은 대학 교수 출신이다.[11] 현장에 있던 신원식 의원과 한기호 의원은 5.16 당시 각각 중학생(...)과 사관생도(...)였다. 무슨 재주로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건지 의문.[12] 애초에 토착왜구가 주어가 되면 이상한 문장이 된다.[13] 김누리 교수는 수구(국민의 힘)을 청산 대상으로 생각하고 보수(더불어민주당)의 시대적 사명은 좋은 보수를 자임함으로써 가짜 보수를 퇴장시키고, 자신의 왼쪽에 진짜 진보의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4] 더불어민주당의 예전 이름.[15] 제5공화국 종식과 민주화가 채 열 살도 되기 전에 완수되어 조정래가 생각하는 역사 체험과 상처가 없을 남희성 작가의 달빛조각사만 해도 총 58권으로, 작품성은 논외로 두더라도 그 대단하고 우월한 역사 체험을 지닌 조정래의 대표작 태백산맥보다 길다는 점에서 반박할 가치조차 없다.[16] 1989년 단행본 완간되었다.2016년 현재 누적 판매부수가 850만부를 넘었다. 2019년에는 대하시리즈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합계 1500만부를 돌파했다.[17] 1995년 단행본 완간되었다.[18] 2002년 단행본 완간되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세 작품은 한국 근현대사 삼부작으로 엮인다.[19] 원래 오 하느님으로 출판되었다가 개정판에서 제목이 바뀌었다. 내용은 노르망디의 한국인을 다룬 것으로, 초판 '오 하느님'을 기준으로 영화 마이웨이보다 4년 빨랐으며 개정판 출간을 기준으로 해도 2년 정도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