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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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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3. 기록4. 분석5. 대중 매체에서6. 관련 문서

1. 개요

[ruby(公無渡河, ruby=공 무 도 하)] 임아 그 을 건너지 마오
[ruby(公竟渡河, ruby=공 경 도 하)] 임은 끝내 물을 건너셨네
[ruby(墮河而死, ruby=타 하 이 사)]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ruby(當奈公何, ruby=당 내 공 하)] 가신 임을 어찌할꼬
고조선 시대에 창작되어 기록상 현존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로, 공후인()이라고도 한다. 저자는 백수광부(白首狂夫)[1]아내이다.

2. 전개

물을 건너지 말라는 만류
물을 건너는 임
물에 빠져 임이 죽음
임을 잃은 슬픔과 체념

위와 같은 기승전결의 구조를 띠고 있다.
갈래고대 가요, 한역 시가, 서정시
성격개인적, 서정적, 애상적, 체념적
형식4언 4구체
제재물을 건너는 임
주제임을 여읜 슬픔
의의집단 가요에서 개인적 서정시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작품임.
문헌상으로는 가장 오래 된 서정 시가인 데다가 유일하게 전해지는 고조선의 시라 국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음.
슬픔, 체념, 안타까움, 원형적 심상을 지닌 소재로 민족의 보편적 정서노래함.

3. 기록

공후인은 중국 후한채옹(蔡邕, 133~192)이 엮은 《금조(琴操)》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진(晉)나라의 최표(崔豹)가 지은 《고금주(古今注)》와 조선 후기 한치윤의 《해동역사》,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어느 문헌이든 모두 목격자가 나루터에 지내는 사람이다. 또한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나온 이야기는 최표 고금주의 원문을 그대로 베껴 쓴 것이다.
箜篌引者, 朝鮮津卒霍里子高所作也. 子高晨刺船以濯, 有一征夫被髮提壺, 涉河而渡. 其妻追止之, 不及, 墮河而死. 乃呼天噓唏, 鼓箜篌而歌曰: "公無渡河. 公竟渡河. 公墮河而死, 當奈公何." 曲終, 自投河而死. 子高聞而悲之, 乃援琴而鼓之作箜篌引. 以象其聲, 所爲公無渡河曲也.
공후인은 조선뱃사공[2] 곽리자고(藿里子高)가 지었다. 자고가 새벽나룻배를 젓고 있을 때, 정부(征夫)[3] 한 사람이 머리는 흐트러지고 술병[壺]을 든 채 물을 건너려고 하고 있었다. 그 아내가 뒤쫓으며 막으려 했으나 미치지 못해 정부는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아내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공후를 타면서 노래부르길, "그대여 물을 건너지 마시오. 임은 끝내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죽으니, 임을 어찌할 것인가"[4]라고 했다. 그는 노래를 다 마친 뒤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 빠져 죽었다. 자고가 이를 듣고 슬피 여겨 금을 뜯으며 공후인을 지었다. 그 형상이 소리가 되니, 이른바 공무도하곡(公無渡河曲)이다.
채옹, 《금조》 中
《箜篌引》,朝鮮津卒霍里子高妻麗玉所作也。子高晨起,刺船而棹。有一白首狂夫,被髮提壺,亂流而渡。其妻隨呼止之,不及,遂墮河水死。於是援箜篌而鼓之,作《公無渡河》之歌。聲甚淒愴,曲終,自投河而死。霍里子高還,以其聲語妻麗玉,玉傷之,乃引箜篌而寫其聲,聞者莫不墮淚飲泣焉。麗玉以其聲傳鄰女麗容,名曰《箜篌引》焉。
공후인은 조선의 진졸(津卒) 곽리자고(藿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것이다. 자고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가는데, 흰 머리를 풀어헤친 한 남자(백수광부)가 술병[壺]을 들고 물살을 헤치며 강을 건너갔다. 그의 아내가 쫓아가며 그를 말렸으나, 미치지 못해 남자는 결국 물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 이에 아내는 공후(箜篌)를 가져와 타며 슬피 공무도하(公無渡河)를 지어 불렀는데, 그 소리가 매우 처량하였다. 노래가 끝나자 아내는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곽리자고가 집에 돌아와 아내 여옥(麗玉)에게 그가 본 부부의 슬픈 운명을 이야기하니 여옥이 슬퍼하며 공후인으로 그 소리를 재현했는데, 듣는 이들 중에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옥은 그 노래를 이웃 여인 여용(麗容)에게 전하였고, 이를 공후인이라 이름하였다.
최표, 《고금주》 中
이야기는 고조선 시대, 또는 아무리 늦어도 한사군이 존재하던 시대에 강가 마을 나루터에서 뱃사람(진졸)으로 일하는 곽리자고란 이름의 한 남성이 새벽부터 뱃일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서는 걸로 시작된다.

여느 날처럼 일을 나가던 곽리자고는 배를 몰려던 중, 한 백발의 광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남자는 술병을 든 채로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그러나 놀랄 새도 없이 광인의 아내가 남편을 말리는 모습을 본 곽리자고, 하지만 미친 남자는 아내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도리어 더욱 깊이 물 속에 들어가 결국 익사하고 말았다.

이를 본 아내는 한참 울다가 집으로 가서 공후를 가지고 온 뒤 이 공후를 타며 노래를 불렀고, 노래를 마친 후 남편의 뒤를 따라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이 모든 사건을 본 곽리자고는 남자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과 이 안타까운 사연을 보게 된 후의 착잡함에 휩싸여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가서 자신의 아내 여옥에게 모든 사연을 전해주었고, 여옥은 이에 안타까워하며 공후를 꺼내 연주하며 남편이 전해들은 노래를 불렀는데 얼마나 안타까운 노래인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노래에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이후, 여옥은 이웃에 사는 여용이란 여성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주었고 노래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4. 분석

〈공후인〉의 저자와 연대에 관한 이와 같은 전승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시의 내용이 매우 단순한 편이라 아마도 매우 오래된 민요를 시로 옮겼을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한국 역사상 기록으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시이자 고조선의 유일한 시라 한국 문학에서 가치가 높지만, 일각에서는 고조선의 시라고 하기엔 너무 중국 문학같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곽리자고, 여옥 등 배경 설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한국 삼국시대고유어 계통 인명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중국 시가 아니겠냐는 의견도 있다. 열하일기, 해동역사 등에서 한사군낙랑군 조선현을 장소로 기재하거나, 곽리자고가 조선인임을 밝히는 등 한국의 시가임을 계속 명시하고 있지만, 열하일기와 해동역사는 고금주에 비해 성립연대가 너무 늦기 때문에 독립적인 근거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국 측 기록인 채옹과 최표의 원문에서 곽리자고가 '조선' 진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본 작품이 처음 문증되는 《금조》의 편찬 시기는 한사군의 성립으로부터 불과 20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신빙성이 높다.[5] 또한 이름이 언뜻 한문식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한국사에도 과거 특이한 복성이 다수 존재했으며, 발음을 단순 음차하거나 뜻을 번역하여 쓴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 특히 곽리자고의 성씨인 '곽리(藿里)'는 만력제 시기의 《만성통보(萬姓統譜)》에서 고구려계 성씨로 소개되므로, 비록 후대의 기록이긴 하나 고조선과의 연관성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다. 때문에 크게 논쟁거리로 삼아지진 않고, 중국 민요와 연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연구는 있다.

백수광부와 그의 아내, 그리고 배경 설화의 서사에 대한 해석은 매우 분분한데, 보통 을 건너는 백수광부는 고조선의 제사장인 무부로 해석한다. 신내림을 받고 황홀경 속에서 신성성을 보여주기 위해 무당작두를 타듯 물에 들어갔으나 결국 빠져 죽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백수광부가 들고 있는 동이를 술동이로 해석, 황홀경에 들어가기 위해 을 마셨다는 주장까지 있다.

정병욱은 백수광부를 디오니소스와 같은 주신(酒神)으로 보고 그의 아내를 님프와 같은 음악으로 보아 신화적인 시가로 보기도 했다. 7차 교육과정에서는 대부분의 중·고등학생용 자습서와 참고서가 이 해설을 실었다. 그러나 시와 배경 설화의 내용이 워낙 단편적이라 이와 같은 해석들은 명확한 근거가 부족하다. 다만 역설적으로 단편적이라 상상의 여지가 있어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었고, 위의 해석 외에도 여러 해석들이 분분하다.

한편 이 노래를 중국의 노래로 보는 논문[6]도 나온 바 있다. 이 논문은 중국의 여러 자전들을 살펴보고, 광부가 미치광이가 아닌 '남편'일 가능성을 찾아냈다. 따라서 '백수광부'는 머리가 하얀 미치광이가 아니라 나이가 지긋한 남편이 된다.[7] 또한 '호(壺)'는 술병이 아니라 강을 헤엄쳐 건너는 포(匏)와 같은 종류의 부환(浮環), 즉 요즘의 부력구나 구명조끼 같은 도구일 것이라 추정했는데, 이를 통해 기존의 신내림을 위해 술에 취한 것이라는 등의 신화적 문맥의 해석을 지양하고 이 작품이 민중들이 현실적 고난을 헤쳐 나가는 속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노래였을 것으로 파악하였다.[8] 특히 이 논문은 자전에 나타난 '호(壺)'의 주석을 통해 예로부터 남편이 호(壺)를 가지고 강을 건널 때 공무도하의 노래를 불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진의 위치는 낙랑군의 치소인 조선현, 즉 평양 부근일 것이며 백수광부가 건너는 강은 대동강일 것으로 추정된다. 곽리자고가 조선인인지, 한족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여옥이 이웃 여용에게 이 노래를 가르친 것으로 보아 여옥과 여용은 현지인인 조선인으로 봐야 할 것이다.

즉, 〈공무도하가〉를 한국의 고대 가요로 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현대인 관점의 중국적인 색채가 꼭 중국의 것이라고 볼 수는 없듯이 말이다. 오히려 중국 쪽에 이런 노래가 전해지고 기록된 것은 한국의 노래가 그만큼 널리 전파되어 있었던 증거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

이 작품은 이후 중국 시가나 설화에 등장하는 불의의 익사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었다. 파생작도 많았는데, 여기서 광부에 해당하는 인물은 고래(), 바다뱀(蛟龍), 악어(黿鼉) 등의 수중 생물에게 끌려가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원문의 은 '해야 하다', 는 '어떻게 대처하리'라는 뜻을 지닌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 '~을 어찌하리'로 체념하는 식의 마무리는 신라 후기의 처용가에도 등장할 정도로 한국 고전문학에서 유서 깊은 운문 형식이다. 제2구의 '竟'(경)이 '終'(종)으로, 제3구의 '墮河'(타하)가 '公墮'(공타)나 '公淹'(공엄)으로, 제4구의 '當'(당)이 '將'(장)으로 기록된 이본도 있다.

5. 대중 매체에서

6. 관련 문서



[1] 이 백수광부라는 말은 특정한 이름이 아니다. 한자 뜻대로 머리가 하얀 (늙은) 미친 남자.[2] 정확히는 진졸(津卒), 즉 나루터를 운영하는 군졸을 가리킨다.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진은 '鎭' 자를 쓴다.[3] 고전 중국어에서 '나그네' 혹은 '원정을 간 군사'로 해석되는 표현이다.[4] 참고로 본문에 수록된 시는 흔히 알려진 형식과 달리 4언 절구로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제3구가 '公墮河而死(공타하이사)'로 다섯 글자이기 때문.[5] 《고금주》의 경우에도 비록 집필 시기가 서진 시대라 고조선과 거리가 있다고는 하나, 중국의 시였다면 굳이 조선인의 작품임을 밝혀 작성할 이유가 없다.[6] 김영수의 논문(한국시가학회, 한국시가연구). 다만 이러한 주장은 같은 학회에서도 더 최근에 고조선의 노래로 보는 논문이 나오는 등 합의된 정설은 아니다.[7] 백수광부가 단순히 미치광이가 아닌 남편이라는 해석은 꽤 예전부터 존재했으며 교육과정에도 그렇게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다.[8] 즉, 가난한 늙은이가 바로 옆에 있는 뱃사공을 부를 돈도 없어 항아리를 타고 강을 건너려다 안타깝게 익사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었다면 뱃사공이 착잡해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9] 광증의 경우 본인의 병 때문에 온 것이라기보단 강에 도달했을 때 마주한 상황(고조선군 대다수의 전멸)이 하도 감당 안 되는 비참한 상황인 데다, 그가 거기에 큰 자책감을 느꼈기에(직업이 고조선군의 책사에 친척 포지션이었는데, 연나라군이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맹공을 감행해서 고조선군 대다수의 전멸이라는 상황까지 간 것) 정신이 견디지 못하고 멘탈붕괴를 해서 강에 뛰어들어가는 것이 광증처럼 표현된 것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