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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19 13:41:08

십이대영자

파일:단군표준영정.png
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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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구성 및 특징3. 기타4. 관련 문서5. 참고 항목

1. 개요

十二臺營子

중국랴오닝차오양시 서남 지역에서 발견된 무덤의 이름이자 넒은 뜻으로는 기원전 9세기 당시 해당 지역과 요서 지역에서 형성된 문화를 이르는 단어이다. 고조선 역시 십이대영자 문화가 전파된 권역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추정되기에 한국사와도 연관되는 문화이다.

2. 구성 및 특징

1958년 발굴 당시 무덤 셋을 발견했으나 둘은 파손되었다는 이유로 하나만 발굴했다. 여기서 비파형 동검, 잔무늬거울청동기 시대와의 연관을 유추하게 하는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다. 특히 비파형 동검은 십이대영자 유적 뿐만이 아닌 한반도 전역에 걸쳐 발굴되며 한국의 청동기 문화를 대표하는 위상을 가지고 있기에, 고조선이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했다는[1] 주장의 고고학적 근거가 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1980년대 이전만 해도 기원전 10세기 경 혹은 이전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에서 탄생한 하가점 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의 하위로 보는 관점, 춘추전국시대 당시 반도로 이주한 동호족이 전파했다는 두 관점이 힘을 얻었지만, 1990~2000년대 들어서 고고학적 성과가 더 누적된 결과 하가점 상층 문화는 산융 혹은 동호가 유력하고, 십이대영자 문화는 하가점 상층 문화와 상당한 교류를 했으나 별개 문화 유형임이 분명해졌다.[2]

한편, 세분화 하면 기원전 9세기 전반의 십이대영자 문화를 "왕팔개자 단계", 기원전 8~7세기는 "십이대영자 단계", 기원전 6~4세기는 "남동구-정가와자 단계"로 나누기도 한다. 학계에선 이중 요서에서 요동으로 넘어와 요동의 산성자유형을 동화 혹은 정복시켜 성립된 정가와자 유형고조선 국가가 성립된 직접적 기원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이전 단계에 이미 고조선이 국가 단계에 들어섰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조선/역사 항목도 참조. 다만 정가와자 문화가 성립된 이후로도 요서지역의 십이대영자 문화는 남동구 유형(주가촌 유형)으로 계승되어 연나라 침공 이전까지 정가와자 유형과 공존하면서 서로 관계를 이어나갔고, 이중 연맹체계를 지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팔개자 단계까지는 춘추 시대 연나라와 우호적인 교류도 한 것도 드러나지만 점차 동쪽으로 물러났는데,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서는 하가점 상층 문화권과 함께 춘추 시대 연나라에게 대대적인 반격을 하여 이 흐름을 뒤집은 것으로 드러난다. 즉 연나라가 서주 성립 초반부터 그때까지 약 이백 여년 획득한 요서 일대 영역을 십이대영자 문화권 및 하가점 상층 문화에게 모조리 잃어버린 것. 기원전 8세기 무렵 연나라가 서북쪽에서 적족 세력에게 강한 압박을 받게 된 나머지 동북쪽 십이대영자-하가점 상층 연합 세력을 대처할 여력이 확 줄어버린 게 원인으로 짐작된다.

얼마나 타격이 막심했던지 연나라는 이후 춘추 시대 말기인 기원전 5세기까지 요서 일대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연나라가 춘추 시대 말기부터 다른 강대국들을 본받아 체제를 일신한 후 기원전 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다시 동진하자 추세는 반전된다. 이때부터는 연나라가 아닌 다른 토착 문화권들이 요서에서 밀려나는 추이가 돌이킬 수 없게 되며, 요서에 있던 남동구 유형은 어쩌는 수 없이 연나라의 간접 지배 아래 들어가면서 동대장자 유형으로 한동안 존속하지만 그뿐이었다. 십이대영자 문화권은 정가와자로 발달하여 연나라에게 맞서게 되지만, 이것은 정말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연나라가 춘추말~진개의 동진 이전 백 년 동안 전진한 영역이, 그전 건국기 연나라가 서주~춘추 시대 초기까지 이백 년 동안 동진하다가 다름아닌 십이대영자 - 하가점상층 문화권의 협공에 잃은 영역의 거의 2~3배에 달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3. 기타

고고학적으로 보면 십이대영자는 문헌상 전하는 기자조선설에서 기자조선후로 책봉된 기원전 11세기보다 2~3세기 이후에 성립된 문화이다. 즉, 아직 고고학적으로 고조선으로 추정되는 문화는 단군조선은커녕 기자조선대까지도 기원이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문헌상 기록들과는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청주 한씨 족보에 따르면 당시 고조선 군주는 의양왕(誼襄王)이라고 하나 족보는 후대의 창작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게 학계의 정설이라 21세기 현재 정사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4. 관련 문서

5. 참고 항목


[1] 물론 주변국과 교류는 당연히 있었다.[2] 한편 십이대영자 문화의 전신이자 기원전 15세기부터 등장하는 위영자문화는 요서 지방에 남은 하가점 하층문화인 일부, 요동 지역 고대산문화, 북쪽의 유목 문화가 합쳐진 걸로 보지만 이는 정황 추측으로서, 특히 하가점 하층 문화와는 공백기가 무려 400~500년인지라 연속성은 상당히 의문시된다. 국내 학자들은 유력한 추측으로 제안하지만 확고한 증거는 없음 또한 인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