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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14:28:16

열하일기

<colbgcolor=#AA8443><colcolor=#fff> 열하일기
熱河日記
파일:열하일기.jpg
기록 1780년 (정조 4)
편저 박지원
권수 26권 10책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2. 내용
2.1. 청나라 사람들과의 필담
3. 번역4. 여담
4.1. 윤가전의 문자옥
5. 구성6.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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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조 4년(1780) 연암 박지원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여행기. 당시 박지원은 공식적인 벼슬이 없는 평범한 선비였음에도 사절단으로 갈 수 있었는데, 당시 사절단의 수장인 정사가 삼종형(8촌 지간)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조부마로, 영조가 가장 총애한 딸인 화평옹주의 남편이다.

박지원은 박명원의 자제 군관(일종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절단에 합류했다. 당시에는 사신들이 자신을 호위할 군관을 지정할 수 있었는데 정사는 4명을, 부사는 3명, 서장관은 1명을 고를 수 있었다. 잘 알고 지내던 무관을 지명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친척들 가운데 전도 유망한 선비를 지명해도 되었기에 8촌동생을 데려간 것. 이들은 공식 사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활동의 제약이 적어서, 중국 선비들과 교류하거나 유람을 하거나 서적 등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본디 목적지는 연경(燕京)[1]이었으나 당시 건륭제가 열하[2]피서 산장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열하까지 여정이 계속되었다. 여름의 베이징은 너무 덥기 때문에[3] 장성 너머 북쪽에 황제 전용 여름 별장인 피서 산장이 있다.[4] 황제를 따라 열하까지 간 덕에 <열하일기>란 제목이 붙여졌다.

원래 조선 사신단은 건륭제가 연경에 없다는 소식을 듣자 그냥 연경에서 구색만 맞추고 돌아가려 했지만, 아직 조선 사신은 한 명도 가본 적이 없다는 말에 결국 열하까지 갔다 왔다. 일정이 촉박해 상당히 하드코어한 여행을 해야 했다. 이때의 고생은 박지원의 산문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5]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6]에 생생하게 실렸다.

박지원이 직접 집필한 초고본은 행계잡록(杏溪雜錄)을 비롯한 문집으로 남았는데, 이 초고본을 단국대학교에서 소장했다. 그 외의 필사본과 근대 이후의 인쇄본 등이 전국에 산재했다.

열하일기는 생전에 출간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전하다가 1932년에야 연암집으로 활자화되었다. 초고본부터 문체반정과 같은 당시의 정치적 이유로 너무 적나라한 표현 등은 삭제되거나 표현을 달리하였고, 지동설이나 천주교에 관한 언급은 문단째 삭제되었다가 나중에 나온 필사본에는 다시 복원되기도 하고 필사가에 따라 원문에 없는 명에 대한 극존칭을 더하거나 문체를 제각각으로 바꾸는 등 정본이 없어 아쉽다.

2. 내용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열하일기.

상당히 해학적인 묘사가 많다. 야간에 숙소에서 나가는 게 금지된 상황에서 하인에게 "나 찾으면 뒷간 갔다고 말해라!!"고 시킨 뒤에 밤새도록 놀다 새벽에야 돌아오는 장면(성경잡지 7월 11일), 비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하자 벌어진 도박판을 싹 쓸어버린 일(도강록 7월 2일), 사신단이 아래에 언급할 판첸 라마의 접견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 옆에서 '일이 꼬이면 귀양가겠는데... 잘 됐다! 귀양 가면 중국 여기저기 구경하겠네!' 같은 생각을 하는 이야기(태학유관록 8월 10일), 잠시 쉬고 있던 숙소에서 아름답게 노래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 부리나케 가봤더니 험상궂게 생긴 아줌마가 앉아있어 기겁하는 얘기(도강록 7월 1일) 등, 여러모로 웃기는 구절이 많다.

길을 가다가 본 가게들의 간판 문구가 마음에 들어서 친분을 쌓은 다른 상인들의 휘호에 그 문구를 써줬다가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 박지원이 본 문구는 기상새설(欺霜賽雪, 직역하면 '서리를 속이고 눈과 내기하다')로, 박지원은 이를 보고 '마음이 깨끗하여 서리같고 눈보다 더 희다'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 문구의 진짜 뜻은 '눈처럼 하얀 국수'였다. 조선에서 온 문인이 그럴듯한 글을 하나 써 준다기에 기대를 했는데 정작 써 준 글이라는 게 국수집 간판이었으니 청나라 상인들이 이상하게 여긴 것도 당연하다.[7] 나중에야 '서릿발처럼 가느다랗고 눈처럼 하얀 국수'를 뜻하는 간판이라는걸 알고는 무안해져서 '나도 아는데 그냥 써봤다' 라고 둘러댔다.

또 말을 타고 가는 도중에 졸다가 깨고는 그 사이 하인이 낙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다음번에 신기한 게 보이면 주저하지 말고 나를 깨우라."고 채근대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성경잡지 7월 12일)[8], 심지어 박지원이 어느 주점에 들어갔다가 현대로 치면 조폭들이 자주 드나드는 엄한 곳이라는 걸 뒤늦게 눈치채고 처음 나온 작은 술잔을 치워 버리곤 큰 그릇에 담긴 독주를 데우지도 않은 채 그대로 원샷하는 호기를 부렸다. 그러자 주점에 있던 사내들이 "어이쿠 어르신!!" 하며 술을 대접하고 설설 기는 장면도 있다.(태학유관록 8월 11일) 원문에서는 "술집에 몽골인과 회회인(위구르)[9] 패거리들이 앉아 있었다. 오랑캐들의 모습이 더럽고 사나워 주점에 올라온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술을 시킨 뒤라 그냥 앉았다"라고 나온다.

박지원 항목에 나와 있는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박지원은 거구에 부리부리한 눈 등으로 딱 봐도 비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양반들이 일삼던 험한 음주풍토가 북방 유목민족들에게는 사내의 호방함과 건강함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했으니까 설설 기는 게 이해될 법하다. 게다가 하필 당시 조선의 임금부터 맥주 피쳐에 증류식 소주를 가득 붓고 원샷하라고 강요해댄 걸로 악명높은 정조였으니. 물론 박지원도 속으론 꽤 겁을 냈다고 솔직하게 토로한다. 중국술에 대한 체험담도 있다. 독한 것 같지만 마시고 일어서면 모두 깬다고.

박지원의 실학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명작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벌레가 우글거릴 수밖에 없는 초가집에서 살았는데, 청나라의 경우 일반 백성도 벽돌로 2층 집을 지어 튼튼해서 문만 닫으면 금고가 되어 도둑도 방지한다는 감탄이 있다. 당시 박지원이 받았을 컬쳐쇼크를 엿볼 수 있다. 대부분 청나라의 좋은 점을 들면서 아직도 상공업적으로 낙후된 조선의 모습을 비판하는 장면이 있다. 고대의 우수한 기술도 이어받지 못하여 결함투성이로 전락한 조선 후기 온돌의 현실을 지적하고, 이로 인한 낭비와 비합리성을 대차게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실용적 학문과 기술의 연구에 소홀했던 당시 시대상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허나 이 부분은 박지원이 한반도의 지형과 토질에 대해 무지했던 것으로, 한반도에서 양질의 벽돌을 찍어낼만한 토양 자체가 흔치 않았고, 수레 또한 일부러 쓰지 않는 게 아니라 험준한 산악지형이 많아 보부상 등의 인력 운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전 국토를 갈아엎을만한 토목공사를 벌일 인력도 예산도 전무했다.[10]

또한 아직도 자신들을 명나라의 후계로 자처하며 실학을 멸시하고 북벌론이라는 허상에 빠져 있는 당시 조선 사대부를 비판하는 부분이 많다. 특히 관내정사나 이제묘기(夷齊廟記)[11] 등에서 이러한 비판을 엿볼 수 있다.

조선 뿐만 아니라 한족 여성들의 전족 같은 불합리한 풍습과, 청나라에 대한 아부로 점철된 한족 지식인들의 현실 역시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모습은 <호질>에서 범[12]과 그에 아첨하는 선비 북곽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조선의 소중화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중화주의의 허상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는 것이다. 사실 (고전적인 의미의)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것은 오랑캐이며 되려 중화에 비판적인 내용인 것.

또한 전체적으로 한족보다 만주족에 호의적인 시선이 깔려 있다. 예를 들면 한족에게 사기당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한 참외를 파는 노파가 '아까 동이 사람들이 참외를 사갔는데 처음 몇 개는 돈을 내고 먹더니 갑자기 맘대로 집어가고는 내 얼굴에 참외를 집어던지면서 때렸다' 라고 울면서 하소연하자 불쌍해져서 하인과 마부까지 없는 돈을 털어 참외를 샀는데, 알고보니 그 노파는 원래 거기서 그러면서 장사하고 살고 있었다는걸 알게 되는 장면이 있다. 그 외에 청나라인들조차도 되놈이란 단어를 알고 있었다는 장면도 있다. 한밤중에 기척이 느껴져서 밖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청나라 병사(갑군)가 "'도이노음'이요(擣伊鹵音爾么)"라고 대답하는데, 이건 "되놈"을 한자로 음차한 것. 한편으로는 한족 관료들과 만주족 정부 인물들에 대한 알력도 다루고 있는데, 한족 대신들이 만주족 관료들을 욕하는 모습도 상세히 그려놓았다.

박지원의 코끼리 구경[13]이나 마술 관람 등도 재미있는 부분. 데이빗 커퍼필드 귀싸대기를 날릴 마술들 20개가 소개되어 있다.[14] 심지어는 티베트법황(판첸 라마)을 만난 이야기까지 실려 있다. 당시 건륭제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조선 사신단을 기쁘게 맞이한 건륭제는 조선 사신단에게 법황을 소개해 주었다. 법황은 달라이 라마 바로 아래 지위인 판첸 라마만주어로는 판천 어르더니(班禪 額爾德尼, pancen erdeni)[15]라고 하였다. 작중에서는 주로 '활불(活佛, 살아있는 부처)'이라고 표현된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활불은 조선 사신단을 만나보고 불상 등 여러 선물을 주었는데, 사신(양반)들은 더럽다고 역관에게 준다. 그러나 역관들도 역시 이것을 쓸 수 없다며, 팔아서 은 70냥을 만들어 마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마부들조차도 '이것으론 술 한 잔도 사 마시고 싶지 않다.'면서 받지 않으려 했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이 어떤 식으로 고착화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처음엔 활불과의 면담 자체도 어떻게 천한 중놈과 만날 수 있냐며 고집을 피우다가 "그러다가 황상께서 열받으시면 큰일난다"는 판단에 형식적으로 만난 것. 또한 황제 및 법황에게 절을 해야할 순서가 오자, 조선 사신단은 숭유억불에 대해 말하면서 법황에게 절을 못하겠다고 버틴다. 이에 건륭제는 분노하였고 조선 사신단은 최소 유형이거나 잘못하면 사형당할 수 있겠다며 벌벌 떨었으나 수도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조선 사신단에게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는 정도로 황제가 기분이 상했음을 알려주는 선에서 끝났다.

박지원조차도 여기엔 "우리 나라에선 원래 선비로서 불교와 한번 인연이 있고 보면 평생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이 장하긴 하지."라고 했다. 조선의 숭유억불 사상은 현대인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했던 것이다.

물론 사신단이 그저 숭유억불을 하는 유학자라 그런 것은 아니고 만약 여기서 판첸 라마에게 절을 했다는 것이 조선에 알려지면 유생들 사이에서 승려에게 절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벼슬길이 끊어지는것은 물론 심하면 파직을 당하거나 유생 사회에서 조롱거리가 되어 크나큰 오명을 써야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선비가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해서 압력에 굴복하는 것은 절개가 없다고 공격받고, 사회적으로도 매장당할 수 있는 행위라 단순한 절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즉 사신들은 눈치가 없어서 건륭제 비위를 거스른 것이 아니라 조선 내에서의 평판과 건륭제에 대한 입장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양쪽 모두 거스르지 않기 위해, 즉 건륭제가 노골적으로 화내지 않는 한도 내에서 불교와의 관계를 피하기 위해 최선의 방도를 취한 것이다.

현대까지 남았으면 국보로 지정되고도 남았을 법황이 선물한 불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은데, 조선에 그대로 가져가면 유생들에게 비난받을 것이 뻔하고, 그렇다고 청나라 황제가 존대하는 자가 준 선물을 함부로 다루면 황제가 어떻게 화를 낼지 모르니 사신단이 알아서 몰래 처리한 모양이다. 일성록에는 정조와 박명원이 사행길에 대한 대화를 하면서, 황제가 줬다는 불상에 대해서 언급한다. 정조가 불상의 처분에 대해 묻자, 박명원은 "평안북도 영변의 모 절에 봉안했다"고 답한다. 이 불상이 판첸 라마가 선물로 준 그 불상인지, 아니면 판첸 라마의 것과는 별도로 건륭제가 따로 하사한 불상인지는 불분명하다. 보통 사신들이 중국에서 불상을 받으면 상술한 이유로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 돌아가는 길에 절에 봉안하거나, 나무 상자 등에 넣어 압록강에서 황해로 띄워보낸단 얘기가 전해지는데 전자였던 모양이다.

박지원은 여기서 중국 인사들과 만나 며칠에 걸쳐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필담으로. 음악, 예절, 역사, 문헌고증, 시문, 과학(지동설도 있다.)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필담을 교환한다.

박지원과 일행이 만주 벌판을 바라보며 읊은 단상 '통곡할 만한 자리'(호곡장론好哭場論이라는 제목)는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려있기도 하다.

박지원의 작품 중 호질이나 허생전은 원래 열하일기에 실려있는 작품이다. 각각 관내정사(關內程史)와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실려 있다. 박지원은 필화(검열)를 피하기 위해 호질의 경우는 '이거 내가 쓴 거 아니고 중국 여관 벽에 있던 거 베껴옴'이라고 둘러대고, 허생전같은 경우는 윤영이라는 가상의 이야기꾼[16]이 해주었던 변승업 이야기의 딸림 이야기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박지원의 창작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정설.

그 당시 사람들의 (현대와 많이 다른) 가치관을 알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가만히 지나가던 몽골 사신단 하인을 조선 마부가 갑자기 급습해서 파운딩을 하고 흙을 먹인다거나. 이유는 '심심해서'. 그래 놓고 조선 측이나 몽골 측이나 서로 웃으며 잘만 제 갈 길 간다. 중국인들이 길거리에 잔뜩 늘어서서 "조선에서 왔다고요? 청심환 하나만 주세요."라고 하도 졸라대서 조선 사신단은 가짜 청심환을 잔뜩 준비해 갔다는 장면이 있다. 진짜는 높으신 분들뇌물.

다른 일화도 있다. 박지원은 중국에서 중국인들과 골동품에 관해 필담을 하면서 나중에 덧붙인 말에, '대개 중국 골동품은 그 연대와 시기를 아주 교묘하게 속이는 것들이 많아, 어수룩한 사람은 물론이고 좀 안다 하는 사람도 사기를 당해 비싼 값을 주고 사기 십상이다'라고 하며 리스트를 적어주었다. 물론 이 리스트도 열하일기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당대의 유명한 번화가인 연경의 유리창(琉璃廠)에 대한 묘사도 나온다. 유리창은 단순한 번화가가 아니라 세계 각지의 서적과 그림, 골동품들이 돌아다니는 문화의 거리여서 청나라를 방문하는 사절단이 반드시 방문하는 곳이기도 했다. 현대에도 이 유리창 거리가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배청 사상이 강했던 유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연호 대신 청나라 건륭제의 연호로 날짜를 표기한 것. 명나라에 매달려있던 많은 유생들이 박지원을 비판하였으나, 박지원은 "이미 망한 지가 100년도 넘은 명나라 연호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라며 이들의 비판을 씹었다.[17]

단 박지원의 말처럼 조선은 수레도 못끌고 바퀴도 못 만들었다는 국가로 오해하는 것은 금물이다. 조선은 엄연히 수레를 굴렸고 함경도에서는 수레이용이 활발했다.[18] 당장 조선왕조실록만 뒤져보아도 알수 있다.

다만 조선의 수레는 청나라 수레만큼 기술적으로 발전하지 않아서 험한 길에서 사용하기도 어렵고, 무게 중량도 청나라 수레보다 적었을 뿐이다. 수레라고 무시하면 안된다. 바퀴의 크기와 무게, 수레의 형태 등에 따라서 성능에 큰 차이가 난다. 당연히 박지원이 조선이 수레 못 쓴다고 깐 건 아니고, 박지원이 원했던 것은 바퀴와 수레를 적극적으로 개량 및 도입함과 동시에 도로 정비로 체계적인 운송 환경을 구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열하일기에 쓰인 것을 현대인이 보면 잘못된 방식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

2.1. 청나라 사람들과의 필담

사실 열하일기의 절반 이상은 경개록, 황교문답, 망양록, 심세편, 곡정필담, 동란섭필 등 청나라 관료, 학인들과의 필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는 이 필담의 대부분이 유학, 특히 주자학적 사고관을 바탕으로 한 학술적, 시사적인 내용이라는 것. 이로 인해 오늘날 일반 대중이 읽는 축약본 열하일기에는 이 내용들이 빠져 있거나 일부분만 발췌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분량에서 알 수 있듯이 어찌보면 박지원으로서는 기행문 부분보다도 필담 부분에 더 공을 들였다고도 할 수 있는데, 시대가 흘러 후세인들이 접하기 어려워진 탓에 다소 아쉬울 수 밖에 없다. 사실 내용을 줄여 싣고자 해도 줄여 싣는 편역자부터 주자학에 대해 높은 수준의 지식과 이해도를 갖춰야 할 것을 요구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다.

예를 들어 '망양록' 부분은 제목에서 암시되듯이[19] 분량이 매우 방대한데, 전부 전통 동양 악률과 음악 이야기라서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때문에 시중에 팔리는 대부분의 열하일기 축약본에는 빠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필담 부분에서 박지원은 단순한 질문 정도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장황하게 떠드는 것은 대체로 청나라 사람들이라는 것. 이는 박지원이 훗날 책 잡힐 일을 피하기 위해 자체 편집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치적, 사상적 색채가 옅은 천문학이나 음률학, 조정에서도 문제삼지 않을 불교 흉보기 등의 분야에서는 박지원이 신나게 떠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유독 문제가 될 부분에서는 박지원은 침묵하고 청나라 사람들만 떠든다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 특히 반청, 반주자학적인 발언을 한 거인 '왕곡정'의 경우, 필담 부분에서의 묘사와 박지원이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열하일기 말미에 수록한 잡록 부분에서의 묘사가 크게 다르다. 사실상 그냥 오다가다 만난 왕곡정을 박지원이 자신의 페르소나로 활용하여 평소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펼친 것으로 짐작된다. 예를 들면, 왕곡정이 신나게 주자학을 비판하여 박지원이 너무 심하지 않냐는 뜻으로 일부러 어리숙한 질문을 날리는데, 이때 왕곡정이 정색하며 '주자 뒤에 태어난 사람은 다 백치란 말이오?'[20]라고 되묻는다. 당연하지만 박지원이 직접 자신의 생각이라고 하기에 껄끄러워 왕곡정이 한 얘기마냥 꾸며 놓은 것이다. 과연 여러모로 비범한 인물이었다.

3. 번역

최초의 번역은 역사학자 김성칠(1913-1951)이 1948년 ~ 1950년 내놓은 번역본인데, 김성칠이 도중에 피살[21]되어 3분의 1 가량만 번역되었다. 1955년 ~ 1957년 북한에서 리상호에 의해 첫 완역본이 발간되었으며, 1966년 ~ 1973년 이가원의 <국역 열하일기>와 1982년 ~ 1984년 윤재영의 박영문고본 완역 등이 주요한 번역으로 꼽힌다. 2009년 기존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김혈조의 완역본이 출간되었다.

4. 여담

하마터면 잿더미로 사라질 뻔한 적이 있었다. 삼종손(三從孫, 육촌 형제의 손자) 박남수가 책을 불태우려다가 다른 식구들과 친척들이 막아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는 박남수가 무식해서 그런 게 아니라 열하일기에서 조선을 풍자하고 비난하는 내용이 자칫하면 집안을 거덜낼 수 있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대한 비하적인 평가 때문에 현대에는 일부 사람들이 조선을 비판할 때 사용되기도 하는데 "조선은 빈민국이었고 중국과 일본은 전통적 부국이었다"라는 주장을 펼 때 악용당하는 책이기도 하다. 다만 이는 진짜로 조선이 답도 없는 나라였다기보다는 중국과 비교서술하며 작성된 부분이라는 점과 책에서 주장하고자하는 바를 위해 의도적으로 더해졌음을 감안해야한다. 이는 비슷한 시기의 저서인 박제가의 북학의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사신단은 상대국의 상황을 본국에 전달하는 스파이 역할도 했기 때문에 중국 측에서는 정보 노출을 막기 위해 사신단 일행이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어느 정도 이동에 제약을 두었고 그래서 조선은 청에 대해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알았다고 한다. 당장 에피소드 중에 청나라 갑군이 스스로를 되놈이라 칭했던 사건도, 청나라 측이 사신단이 잠에 들면 매일 인원을 체크하고 있었단 것을 입증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호기심이 많은 박지원은 밤마다 숙소를 몰래 빠져나와 뒷골목을 누비고 다녔고, 그 덕분에 단편적으로만 알아왔던 청의 다양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 내에서는 청을 오랑캐로만 치부하고 하찮게 여기는 풍조가 팽배했는데, 박지원이 열하일기로 조선이 몰랐던 청의 발전된 모습을 소개하자 수많은 학자들과 선비들도 충격을 받았고, 오랑캐라도 배울 것은 배우자는 풍조가 생겼다. 게다가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박지원의 맛깔난 글솜씨 덕분에 열하일기는 지식인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어 수많은 선비들이 필사해갔다고 한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구어체 한문으로 썼는데, 당시 임금 정조가 문체반정을 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원래 조선에서는 성리학 경전에서 사용하던 고문체 위주였는데 정조시대 들어서서 다양한 문체가 유행하였고 열하일기가 그 선두주자였다. 문체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나아가 국가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고 여겨서 정조는 조선시대 문학 탄압인 문체반정을 일으켰다. 박지원에게도 고문체로 반성문을 제출하라고 했지만 박지원은 자신의 죄가 너무 크다고 해서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정작 정조 본인은 개인적인 편지에서 자신이 금지한 여러 언어적 필체와 형식들을 다 구사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쓴 지 10년 후에 건륭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러 열하로 간 예조판서 서호수의 연행기를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다. 서호수는 외국어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의 밑에서 자랐던데다 관상감 제조를 지낸 천문학자이기도 했으며, 정치적으로도 영조 때 말을 잘못 했다가 해남으로 유배를 당한 전력이 있을 정도로 평범한 선비였던 박지원보다도 훨씬 힙스터 기질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사람은 북경에서 열하로 가는 길을 내몽골 투메드부를 거쳐가며 몽골, 그리고 옛 원나라와 관련된 기록도 상당히 많이 남겼다. 그리고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역관이 간단한 만주어로 황제에게 답하자 황제가 유달리 기뻐했다' 전한 기록과도 비교할 수 있는 '역관들의 청학, 몽학이 허접해서 개쪽이 될까봐 황제 앞에서 그냥 한어 역관만 데려왔다고 둘러댔더니 황제가 아쉬워했다'는 기록으로 조선 사대부들의 우물 안 개구리급 대외인식에 대해서도 꼬집고 있다.[22]

최인훈도 동명의 작품을 썼는데, 노골적으로 이승만 정부를 풍자하는 소설이다.

4.1. 윤가전의 문자옥

한편 박지원과 친분을 쌓고 열하일기 안에서도 필담이 상세하게 기록된 인물 중 가장 거물급 인사는, 70세의 전 대리시경(大理寺卿) 윤가전(尹嘉銓)[23]이란 인물이었다. 짧은 기간임에도 박지원과 매우 두터운 교분을 나눠, 열하일기 곳곳에 박지원을 아끼고 후하게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작별할 때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했다. 또한, 박지원에 따르면 북경에 돌아와 당대 중국 명사들에게 묻자 이 사람을 백거이에 비하고 있다더라고 전할 정도로 거물급 명사 중 명사였는데...

박지원이 열하에서 돌아온 바로 이듬해 1781년에 건륭제문자의 옥[24]에 걸려들어 교수형을 당했다. 사실 열하일기 속에 기록된 윤가전은 박식하면서도[25] 다정하고 소탈한 위인[26]이긴 한데, 어딘가 주책스럽고 공명심을 내세우는 면모도 있긴 하다.[27]

그래서일까, 이듬해에 지나치게 오버한 나머지 건륭제의 분노를 샀으니, 자기 아버지[28]에게 시호를 내리고 문묘에 올려달라고 상소한 것. 특히 건륭이 이 문제로 극대노한 까닭은, 청조가 들어선지 150년 동안 만주 - 한족 이중 정치 체제 속에서 문묘에 오른 자가 전무했는데 자식이 직접 자기 아버지를 문묘에 추증해달라 요구한 것이 매우 건방지게 여겨졌기 때문.[29] 또, 윤가전의 상소문에서 윤가전이 자기 자신을 고희(古稀)(칠십 세)로 지칭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황제 본인이 고희를 맞아 "내가 고희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윤가전 또한 건방지게 황제와 같은 표현을 썼다는 것.

이를 괘씸하게 느낀 건륭제는 윤가전의 집을 수색하라고 명했고, 조사관들은 그의 장서와 그가 쓴 글들을 샅샅이 뒤져 황제나 황실을 모욕한다고 해석될 만한 문장 130개를 찾아냈다.[30] 이것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윤가전이 쓴 모든 글들은 수집되어 폐기되었다.[31]

사실 윤가전은 건륭과 동갑의 나이로 무탈하게 고희에 이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인지, 황제가 본인을 아낀다거나 동갑내기 친구로 생각한다고 이방인인 조선인 박지원에게까지 자랑을 내비추기도 했고, 박지원에게 적어준 시의 말미에 '윤가전 70세'라고 서명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부분이 꼬투리 잡힐 줄은 몰랐을 테니 윤가전 입장에선 그야말로 날벼락. 그래도 딴에는 한때 아꼈던 사람이라고 건륭이 막판에 형을 낮춰 그 가족은 방면해주고 처벌 수위는 능지형에서 교형으로 감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기를 보면 살짝 운이 나쁘기도 했다. 왜냐하면 문자옥은 불과 다음해인 1782년부터 가라앉기 시작하기 때문.

5. 구성

열하일기의 구성(김혈조[32] 번역본 기준)[33]

6. 외부 링크



[1] 오늘날의 베이징.[2] 허베이성 청더.[3] 수도 베이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몽골족 같은 북방민족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래서 이들을 억누르기 위한 목적도 있다.[4] 실제로 산장에 가보면 상당히 크고 아름답다. 베이징의 자금성이 웅장하다면, 피서 산장 역시 중국 스케일이기 때문에 크긴 한데 나름 정원과 나무에 아기자기한 면이 있고 궁전보다는 이화원의 느낌에 가깝다. 현대에도 현지 중국인들이 여름에 많이 와서 노닐고 있다. 허베이성 북부의 지급시인 청더에 남은 그 이궁과 티베트 불교 사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5] 말 그대로 하룻밤에 강을 9번 건넜다는 뜻이데, 여기서 아홉은 숫자 그대로가 아니라 많다는 상징이다.[6] 고북구는 장성이 지나는 마을의 이름이다. 박지원은 야밤에 장성을 지나며 술로 먹을 갈아 '박지원 지나감'이라고 썼다고 한다. 구한 말의 뛰어난 한학자이자, 1900년에 연암집을 발간한 김택영이 이 글을 가리키며 "조선 5000년 이래 최고의 명문장"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7] 현대로 치면 캘리그라피로 유명한 해외 아티스트의 한글 작품을 받았는데 거기에 "롯데리아"라고 적힌 격. 의미를 잘못 해석했다는 점을 따지면 빙수 브랜드 설빙을 보고 한자어 '눈과 얼음(雪氷)'으로 해석해 버린 것이나 소주 브랜드 참이슬처음처럼, 음료 아침햇살 등을 브랜드인 줄 모르고 원래 의미로 해석해 버린 것과도 같다. 박지원은 나중에야 설명을 듣고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고 두번째로 지어 줄 때는 고사에서 맞는 것을 찾아 지어줘 체면치레를 했다.[8] 낙타와는 영 인연이 없어서, 이후에도 낙타 떼가 짐을 짊어지고 우르르 몰려갔다는 말을 듣고 자기 혼자만 못봤다고 억울해한다. 결국 조선으로 돌아갈 때에나 낙타를 보는데 성공했다.[9] 박지원은 이들 회회인들이 합밀에서 왔다고 기록하였다.[10] 사실 조선은 유교적 덕치주의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세율을 낮게 유지하고 요역과 노역도 줄였으며 잔혹한 형벌도 가능한 피했던 나라였다. 즉 작은 정부였던 것인데, 그런 만큼 국가가 나서서 뭔가 큰 공사를 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물론 조선 후기쯤 가면 내수사가 변질되고 삼정의 문란 등으로 백성의 부담이 가중되는 등 혼란에 빠지지만, 그 때에도 평소 세율이 60~70%에 달하던 옆나라 일본의 농민들에 비하면 상황이 비슷하거나 더 나은 편이었을 정도다.[11] 충절의 상징이라 일컬어지는 백이와 숙제의 사당 관람기[12] 짐승으로서 중국과 조선 지식인 입장에서의 청나라를 은유함.[13] 박지원은 그 당시 황제의 진상품으로 나온 침팬지나, 타조의 모습도 상세히 적어놓았다.[14] 하루 공연을 끝내는 마지막 마술에서 마술사가 일부러 실수를 하면서 트릭을 노출시켜서 이것이 어떤 마법이나 도술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주지시키고 끝내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15] 번역하면 '존귀하신 판첸 라마 님' 정도 된다.[16] 윤영이란 이 이야기꾼도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애매하게 서술해놨다.[17] 조선에서는 병자호란 이후 반청 감정 때문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숭정 연호를 알음알음 사용했다. 세월이 갈수록 그냥 청나라 연호를 사용한 이들도 많아졌지만, 고지식하게 숭정 연호를 고집하는 유학자들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있었다. 숭정 연호로 연도를 보통 4가지 방법으로 표현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숭정 문서로. 도강록 서두에 "어째서 후삼경자(後三庚子)라 했는가."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후삼경자'란 숭정기원후 세 번째 경자년(1780)이란 뜻.[18] https://m.blog.naver.com/lord2345/50133189397[19] 제목부터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양(羊)고기를 차려놓은 것을 잊어버리고(망忘) 다 식어버렸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20] 즉, 너무 주자학이 교조화되어 그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후세인들을 비판한 것.[21] 석주명 박사처럼 지금까지도 왜 죽었는지 모른다. 김성칠은 인공 치하에도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왕이었는데, 고향 경상북도 영천시로 부친 제사를 지내러 가던 길에 괴한에게 총에 맞아 피살되었다. 당시에는 알다시피 6.25 전쟁 와중이라 강도에게 대충 살해되었다는 투로 처리되었다. 다른 얘기에는 전란 와중에 미쳐버린 사람의 총을 맞고 살해당했다고 한다.[22] 정조의 총신이였던 서명선의 형 서명응의 아들(훗날 백부 서명익 집안에 양자로 들어간다)이자 임원경제지의 저자 서유구의 아버지이다.[23] 열하일기에서는 대체로 윤형산(尹亨山)으로 적었는데 형산은 그의 자(字)이다.[24] 서책이나 시구 등에 나온 문구나 단어를 이유로 탄압하는 공포정치의 일환. 복명사상가를 거르기 위한 목적이었다.[25] 특히 열하일기 중 망양록 부분이 윤가전과 박지원이 나눈 음률과 역사에 대한 방대한 내용이다.[26] 고관대작이면서도 아무 벼슬이 없는 박지원과 신분을 개의치 않고 교류하였으며, 직접 자필시를 적어주거나 헤어지면서도 손을 잡고 울면서 박지원에게 건강을 지키라며 신신당부하는 등 박지원을 챙겨주는 내용이 곳곳에 기록되었다.[27] 박지원이 윤가전의 인물됨을 직접 평가하진 않았으나, 좋게 좋게 적는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은 윤가전의 일화를 기록하여 윤가전에게 허영심이 있음을 은근히 내비췄다. 지방관으로 재직하던 당시 백성들이 선정비를 지어주지 않자 윤가전 본인이 남몰래 비석을 세웠다가 망신을 당했다는 일화이다.[28] 윤회일(尹会一)이라는 인물로 나름 당대 명성을 떨친 관료이자 학자이다.[29] 건륭제는 통치가 말년으로 갈수록 긴장이 풀려 나태해진 것과는 별개로,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임을 독차지해서인지 국가경영을 잘 해내던 청년~중년기에도 인간적으로는 꾸준히 독선적이고 권위적이었다. 예를 들어 원로대신인 장정옥은 강희 시절부터 고생하고 옹정 연간에 하드코어한 군기처 노동까지 견뎌내었기에 옹정제가 크게 신임하여 '너 죽으면 태묘에 배향해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해주었다. 어느날 건륭제에게 장정옥이 "저 죽을 날도 머지 않았는데 태묘 갈 수 있죠?" 물었다가 '어디서 선황의 유지 운운하며 김칫국부터 들이키느냐' 하는 건륭제의 불쾌한 대답만을 들어야 했다. 건륭제는 이후 다시 허락해줬다가도 "야 니가 그러고도 태묘에 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같은 투로 거절하는 등 밀당을 벌였다. 어느새 장정옥은 일가족의 안위까지 걱정해야 할 지경이 되니 건강은 나락으로... 결국 강건성세의 손꼽히는 권신이자 명신임에도 장정옥은 태묘 배향을 확언받지 못함에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고향에서 세상을 하직했는데, 막상 죽으니 안쓰러운지 건륭제는 그제서야 장정옥을 태묘에 배향해 주었다. (이 일화는 연희공략에서도 소개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옹정제의 총신이자 고명대신이었지만 말년에 장정옥과의 암투로 분란을 일으켰던 시린기오로 오르타이는 장정옥과 마찬가지로 선제에게 약조받아 태묘에 배향되었음에도 사후에 조카들이 호중조 사건에 연루되어 가문이 박살나면서 태묘에서 쫓겨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30] 그런데 정말 모욕적인 문장일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건륭제 시기에 문자의 옥은 황제 꼴리는 대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하도 황제 꼴리는 대로 이뤄졌기에 황제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숙청할 때 문자옥을 악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심덕잠은 건륭제가 총애하던 문인으로 건륭제의 시를 수정하거나 대필해주곤 했다. 그런데 심덕잠은 생전에 자신의 시집을 출간하며 자신이 수정하거나 대필한 건륭제의 시까지 실어버렸다. 이게 꼴보기 싫었던 건륭제는 심덕잠의 시집을 샅샅이 뒤져보다가 "바르지 않은 색이 붉은 색(朱)을 빼앗고, 다른 종자가 또 왕이라고 칭한다."라는 구절을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한 것을 비난했다고 해석하여 죽은 심덕잠을 부관참시했다.[31] 다만 정치색이나 저자의 주관이 적혀있지 않은 극소수의 저작이 오늘날까지 남아있긴하다.[32] 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 출신으로 박지원 저작 전문가이다.[33] 명작이니만큼 번역본이 많은데, 2009년에 김혈조 교수가 새 번역본을 발간하였다. 기본적으로 박영철본을 따르되, 부분마다 다른 판본을 참고한 것이 있다. 괄호 안은 원 제목이다.[34] 정확히 어디인지는 불분명하다.[35] 나중에 참고하기 위하여 간단히 적어둠, 또는 그런 기록을 뜻하는 우리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