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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28 17:09:55

역관


1. 개요2. 외국어 학습3. 유명한 역관

1. 개요

역관()은 고려조선 시대에 통역번역 업무를 담당하였던 관리를 말한다.

역관은 사대교린, 즉 외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조정의 대신들은 역학 또는 역관을 천하게 여기면서도 역관의 임무가 국가의 중대사임을 자주 강조하였다. 역관이 없는 부득이한 경우엔 한문을 이용해서 필담을 나눌 수도 있었지만 필담의 한계는 분명히 있어서 외국어 전문가인 역관의 중요성은 매우 컸다.

한국사에서는 고대부터 중국, 일본과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통역이 가능한 사람을 고용한 기록이 많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일본 승려 엔닌당나라 여행을 떠날 때 신라인 김정남을 통역관으로 고용한 기록이 있다. 일본인이 중국을 여행하는데 신라어 통역관을 데려간 것은 여행 목적지가 신라는 아니지만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신라 해안을 거치며 표착할 수도 있었던 데다가 당나라에 도착해서도 9세기 중국 해안 지대에는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신라방 커뮤니티가 깔려 있었는데 이들이 현대의 여행사처럼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다만, 전문적인 통역사는 육성하지 않아서 고구려, 신라, 백제는 모두 당나라의 역관에게 의존해 대화를 통역했다.

통역관을 국가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최초로 확인되는 기록은 태봉궁예가 904년에 설치한 사대(史臺)다. 그런데 904년 궁예의 관직 설치는 신라의 제도를 따르고 용어만 바꾼 것이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이 기록을 역으로 해석하면 적어도 통일 신라 때부터 역관을 양성하고 관리하는 국가 관청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에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전문 관청 영객전(領客典)이나 일본 사신을 영접하는 전문 관청 왜전(倭典)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영객전과 왜전의 구체적인 업무와 시스템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기관의 역할을 감안하면 여기서 일하는 관리가 역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통문관과 사역원을 통해 외국어 학습이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서민 출신이 임명되었으나 후기에는 양반 계급의 사람들도 통문관을 통해 학습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일종의 출세 지름길로 여겨지기도 했다. 조선 개국 공신인 조준의 증조부 조인규도 몽골어 열풍에 편승해 재상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어차피 이 시대에는 원나라가 한창 기세를 떨치고 있었고 그에 빌붙은 부원배, 권문세족 등이 잘나갔으니 몽골어 아는 사람은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조인규는 영세한 집안의 후예로 사실상 그의 대에서 가문이 다시 상류층에 편입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각고의 노력으로 몽골어 실력을 완벽하게 만들었는데 사신으로 온 그를 보고 쿠빌라이 칸이 "몽골어 잘한다. 굳이 중간에 통역(몽골어-중국어, 중국어-고려말 통역)을 둘 필요도 없겠네."라고 했다고 한다. 원나라 신하가 속국 고려의 풍속을 아예 몽골식으로 바꾸자며 칸에게 상주한 적이 있었는데 옆에 있던 조인규가 조리 있게 반박해 '불개토풍(不改土風, 기존의 풍습을 바꾸지 않는다)'이 유지됐다. 원나라에 30회나 사신으로 가 그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사역원과 승문원을 통해 외국어 학습을 장려하였다. 잡과 중의 하나로 역과가 있었는데 한학, 몽학, 왜학, 여진학(청학)의 네 종류가 있었다. 대부분의 합격자가 한학이었지만 소수어 직렬에서도 각각 2명 정도는 합격하였다. 합격자는 종7품에서 종9품의 품계를 받았고 후에 정3품 당하관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밀무역을 자주 행해서 품계보다 부유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례로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 나오는 거부 변씨의 모델이 된 변승업도 역관으로 있으면서 사무역으로 치부를 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역관들은 기술과 행정 실무뿐만 아니라 지식과 경제력에서도 양반 계층에 뒤지지 않았다. 조선은 역관과 사신단 인원들에게 경비를 많이 주지 않는 대신, 무역 활동을 허가해서 여기서 번 돈으로 경비를 충당하게끔 했다. 역관들은 공무역에 참여해 국가에서 허가한 가치의 재화를 거래해 합법적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개인적으로 사무역에 뛰어들기도 했다. 각 정부 기관에서 역관들에게 조직에서 필요한 물품의 조달을 의뢰하고 무역 대행 업무를 맡겼기 때문에 역관은 다방면에 걸쳐 합법과 탈법, 편법을 오가며 부를 쌓았다.

병자호란 이후, 조청관계가 안정화된 뒤부터는 청 조정에 출사한 조선계 역관들이 통역 업무를 맡아서 조선의 역관들은 업무 부담이 줄어들었으며 경제 성장과 무역 규모의 확대까지 겹쳐 역관은 본래의 역할보다는 상업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인이란 새로운 경쟁자가 치고 올라오면서 역관은 대청 무역의 주도권을 그들에게 내주고 말았다. 허나, 주도권을 내줬을 뿐이지 역관의 무역 활동이 위축된 것은 아니어서 다수의 역관들이 막대한 재산을 쌓아 위세를 누렸으며 이렇게 부를 쌓은 역관 중 일부는 중앙의 정치 투쟁에도 참여했다.[1]

부를 쌓은 역관들은 막대한 자본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역관들은 늘 중인으로 대우받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러면서도 외국의 진귀한 것을 많이 접하다보니 소위 '여항 문화'의 창달에도 큰 영향을 끼쳐 해외 각국에서 다양한 과학 기술과 문화를 접하고 이를 국내에 들여오기도 했다. 조선에의 천주교 전래 역시 청국을 드나들던 역관들에 의해 이뤄졌으고, 당시 학자들이 모여 천주학을 연구하다 천주교인이 되어버린 명례방(오늘날의 명동성당 부지) 역시 역관이었던 김범우 토마스의 저택이었으며,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역시 직무상 빈번하게 중국에 드나드는 역관들의 도움을 통해 이뤄졌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 역관들은 신분 해방을 위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고 근대화의 흐름도 주도적으로 이끌었는데 개화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오경석(吳慶錫)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유명한 희빈 장씨는 역관 집안 출신이다. 친아버지인 장형이 역관 출신이었고 장형이 일찍 죽은 뒤 후견인이 된 5촌 당숙 장현도 역관으로 활동하며 효종에게 큰 신임을 얻은 인물이었으며 장씨의 외할머니인 변씨도 전술한 변승업 가문 출신이다.

한국 사극에서는 주인공과 외국인 인물이 통역 없이도 곧잘 대화를 나누곤 해서[2] 자주 존재가 생략되는 비운의 존재다.

2. 외국어 학습

사역원에서는 당시의 4대 외국어한학, 왜학, 청학, 몽학을 가르쳤다. 당연히 제1외국어는 한학이었다. 우어청이라는 곳을 두어 이곳에서는 조선말의 사용을 금지하고 하루 종일 외국어로만 대화하도록 하였다. 비유하자면 오늘날 영어마을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위구르어도 중요시되어서 가르치기도 했다.

역관은 추천에 의해 심사를 받고 적격자로 판정받으면 사역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외국어 학습을 시작했다. 사역원에 들어갔다고 바로 역관이 되지는 않았다. 미친 듯이 외국어를 공부하여야 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하루 종일 외국어를 공부하고 매달 2일과 26일에 시험을 쳤다. 3개월에 한 번씩 기말고사에 해당하는 원시를 쳤다. 수련을 거친 뒤에는 잡과의 역과[3]에 응시해야 했다. 초시와 복시에 통과한 후에 역관이 될 수 있었다.

유명한 중국어 외국어 학습 교재로는 노걸대가 있었다. 고려 말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상으로는 세종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노걸대의 내용은 세 명의 고려 상인이 중국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중국어 학습을 꾀한 책이다. 상권과 하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권은 완전히 회화체로 되어있다.

노걸대는 다른 외국어로도 번역되었다. 번역된 책은 청어노걸대, 몽어노걸대 등으로 불렀다.

노걸대 다음으로 유명한 중국어 학습서로는 '박통사'(박씨 성을 가진 역관)가 있었다. 노걸대가 상인 중심의 비즈니스 회화에 가깝다면 박통사는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노걸대보다 고급 단계의 중국어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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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학습 교재로는 첩해신어인어대방이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강우성이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완성했다. 조선 초기에는 일본어를 다루지 않다가 나중에 개설되었기 때문에 일본어를 '신어(新語)' 또는 '신학(新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선 시대의 역과 시험 답안지를 살펴보면 첩해신어를 거의 다 외워서 그대로 쓸 수 있어야 합격이 가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 최고의 어학 달인으로 인정받는 조선 초기 문신 신숙주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 류큐어, 위구르어에 능통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구전으로 배우는 경로가 존재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신숙주뿐만 아니라 당시 고위 지식 계층은 중국어 정도는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 이전의 삼국시대 때는 많은 학생들이 당나라에 유학까지 가서 당나라에서 급제하여 벼슬을 받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외국어 능력이 높았다.

외국어 습득은 구전으로 배우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므로 아들, 조카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서 역관을 다수 배출한 역관가문이 생겨났다. 당연히 가문마다 잘하는 외국어가 달랐다. 우봉 김씨(牛峰 金氏)[4]와 천녕 현씨(川寧 玄氏)[5]는 일본어에 뛰어났던 가문이다. 밀양 변씨(密陽 卞氏)[6]몽골어여진어에 뛰어났던 가문이다. 해주 오씨(海州 吳氏)[7]인동 장씨(仁同 張氏)[8]중국어에 뛰어났던 가문이다. 이들 가문에선 구전으로 가르치는 것은 기본이었고, 집에 외국어로 된 서적이 가득했고, 가문의 어른들이 직접 집필한 역과시험 공략집도 있었고, 어릴 때부터 아버지나 친척의 수행원으로서 해외여행을 하며 원어민과 회화실습도 했다. 출발선이 너무 달랐기에 역관 명문가 자제들의 역과시험 합격은 사실상 예정된 것에 가까웠다.

3. 유명한 역관


[1]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장희빈을 후원한 역관 장현이다.[2] 이마저도 주인공은 분명 한국어 대사로, 외국인은 분명 외국어 대사로 말하는데도 막힘 없이 대화가 술술 진행된다. 아니면 외국인도 그냥 한국어 대사로 말하게 한다.[3] 3년에 한 번씩 열렸다.[4] 조선 시대에 95명의 역관을 배출했다.[5] 조선 시대에 99명의 역관을 배출했다.[6] 조선 시대에 무려 106명의 역관을 배출했다.[7] 조선 시대에 22명의 역관을 배출했다.[8] 조선 시대에 22명의 역관을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