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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6:27:50

기형도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기형도
奇亨度[훈음]|Ki Hyoung-do
파일:1200px-기형도.jpg
출생 1960년 3월 13일[2]
경기도 옹진군 송림면 연평리 392번지
(現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 연평리)
출신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사망 1989년 3월 7일 (향년 28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의동 파고다극장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행주 기씨 (幸州 奇氏)[3]
가족 아버지 기우민[4], 어머니 장옥순
형 기만도, 기웅도 누나 기세도, 기애도, 기향도, 기순도
학력 서울시흥국민학교[5] (졸업)
신림중학교 (졸업)[수석졸업]
중앙고등학교 (졸업)[수석졸업]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8] (정치외교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방위병)
종교 천주교 (세례명: 그레고리오)
등단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안개' 당선

1. 개요2. 생애3. 작품4. 특징5. 대중매체6. 기념 사업7. 동성애자 루머
7.1. 의혹 제기 측의 주장7.2. 지인들의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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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입속의 검은 잎 - 詩作 메모
기형도 산문집을 읽다. 짧은 여행의 기록. 느낌이 많다. 스물 아홉에 신춘문예 당선이라니.[9] 그럴 만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관심사에 목매다는 것이니까. 다른 이들보다 좀 나은 것은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시를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스물아홉 살, 어느 삼류 극장에 앉아 조용히 숨을 거둔, 그 짧은 여행의 마지막 눈빛은 어떠했을까.
김광석

대한민국시인, 언론인.

2. 생애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메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1960년 3월 13일, 경기도(현 인천광역시) 옹진군 송림면 연평리 392번지의 피난민 가정에서 3남 4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10]

유년 시절인 1965년에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 701-6호)로 이사하였다. 특히 대표 시 <안개>는 소하동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였다고 한다.

서울시흥초등학교, 서울신림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거쳐[11] 1979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후 문학 동아리인 연세 문학회[12]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경기도 안양시의 모 부대[13]에서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14] 대학교 4학년 때인 1984년 10월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 일했다.

시집 출간을 앞두고 있었으나 1989년 3월 7일 새벽 4시,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파고다극장에서 소주 한병을 든 채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15]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당시 만 28세로, 생일을 엿새 앞두고 있었다. 그렇게 "입속의 검은 잎"은 데뷔 이후 첫 시집이자 유고작으로 남았다.

그는 천주교 수원교구 안성추모공원[16]에 묻혔다.

뇌졸중은 일종의 가족력으로, 그의 아버지가 이로 인해 쓰러진 것에 대해 자신도 그럴 것이라는 비관적인 사고를 생전에 가졌다고 한다. 이 기사에 따르면 고혈압도 있었다고.

3. 작품

4. 특징

그는 독특한 색채의 시를 많이 썼는데, 전반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의 시가 주를 이룬다. 당시의 정치적 색채가 짙은 민중시, 노동시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한 덕분이었다. 기형도 전집에서는 "기형도의 언어들은 유예된 죽음의 언어들이다"라고 평가한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시인으로 대표되는데 7, 80년대의 암울한 시대 상황 속 가난과 고통을 글에 녹여낸 한편 일면의 따뜻함과 희망을 노래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시들 중 <가는 비 온다>라는 시 속엔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친 지강헌일당의 사건을 연상시키는 시가 등장한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실제로 인질극 당시 지강헌홀리데이[22]를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깨진 유리조각으로 그어 자해를 하였다.

이 정서에는 불행한 가족사가 한몫 하는데, 아버지는 기형도가 9세 때인 1969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두 살 터울의 둘째 누이는 기형도가 15세 때에 요절했다. 실제로 기형도의 시에는 가족에 대한 비관적 정서가 자주 드러난다.[23]

중학생 때부터 알게 되는 <엄마 걱정>이라는 시가 기형도가 쓴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이다.[24] 고등학생들에게는 무분별한 산업화에 따른 환경 파괴와 인간성의 상실을 주제로 한 시 <안개>가 잘 알려져 있다.

굉장히 센티멘털하고 아름다운 시를 많이 남겼다.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시는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라는 마지막 구절로 유명한 <빈 집>이며, 이외에 1980년대 대학가의 정치적 격동 속 외로움과 상실감을 노래한 <대학 시절>, <질투는 나의 힘>[25] 또한 유명하다.

사실 기형도가 시인으로 데뷔할 수 있었던 것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당시 단독 예심위원이었던 마광수 덕분이었다. 마광수가 고백하기를 기형도는 별로 시를 잘쓰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26] 그가 낸 작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친구의 의가 틀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의 시를 뽑았다고.
이런 이력에 밀려 잘 안 알려진 부분이지만, 기형도는 소설도 몇 편을 썼다. 기형도 전집에 모두 실려 있기에 읽어볼 수 있다. <어떤 신춘문예>는 약간 작위적이어 보이는 설정을 채용했지만 당선에 기약없는 신춘문예의 현실을 드러내고, <겨울의 끝>에서는 본인의 단명에 대한 믿음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으며, <미로>, <면허>에서는 정신적인 부분을 파고든다. 한편으로 그가 연세대 재학 시절 쓴 <영하의 바람>에선 그의 누이에 대한 슬픔을 은유한 것으로 보이는 가족 구조를 쓰고 있다. 이외에도 수필, 평론도 썼다. 시 작법 자체가 뛰어난 작가는 분명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소설가인 성석제와 친구이며 연세대에서 만나 같이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천재교육 기준 중 2-1 교과서에 각각의 작품이 한 책에 나왔다.

5. 대중매체

6. 기념 사업

기형도의 출생지인 대연평도 새마을리 해변가에 그의 작품이 전시된 작은 공원이 있다.

고인이 유년시절부터 요절할 때까지 살았던 광명시에서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기형도를 기념하고 있다[33]. 특히 운산고등학교는 '기형도 프로젝트'를 하고있다. 자세한 것은 운산고 문서로 가볼것.

2004년 광명중앙도서관을 개관하면서 3층 인문사회자료실에 기형도 코너를 설치한 뒤 지금까지 관리해오고 있다. 관내 화영운수 버스들 내부에 기형도 시가 부착되는가 하면 2014년 3월 6일에는 기형도 25주기 추모문학제가 열렸고, 2017년까지 광명역 인근에 기형도문학공원과 기념관이 건설될 예정이다.관련기사
2015년 기형도문화공원이 개장되었다.

2017년 11월 10일 광명시 소하동[34]기형도문학관이 개관하였다.[35] 관련기사

2019년 10월 29일 모교인 중앙고등학교 신관 뒤 화단에 기형도 시비가 세워졌다.[36]

7. 동성애자 루머

7.1. 의혹 제기 측의 주장

인터넷PC통신도 없던 1980년대, 동성애자들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공간이 바로 종로 등지의 심야극장이었다. 기형도가 숨진 파고다 극장 역시 대표적인 '게이 크루징(cruising)' 극장 중 하나.[37] 이에 따라 기형도가 동성애자라는 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형도 게이설은 오래전부터 게이 커뮤니티와 동성애자들, 인권운동단체 사이에서 꾸준히 제기되어온 근현대 한국 문단의 대표적인 가십 중 하나다. 기형도 게이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의 시(詩) 중에 소수자로서의 소외감, 더 나아가서 직접적으로 동성애자로서의 감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들이 많다고 주장한다. 아래는 이들이 근거로 주장하는 시와 그 대목이다.
어둠 속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렸다
어떤 그림자는 캄캄한 벽에 붙어 있었다
눈치 챈 차량들이 서둘러 불을 껐다
건물들마다 순식간에 문이 잠겼다
멈칫했다, 석유 냄새가 터졌다
가늘고 길쭉한 금속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잎들이 흘끔거리며 굴러갔다
손과 발이 빠르게 이동했다
담뱃불이 반짝했다, 골목으로 들어오던 행인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저들은 왜 밤마다 어둠 속에 모여 있는가
저 청년들의 욕망은 어디로 가는가
사람들의 쾌락은 왜 같은 종류인가

<나쁘게 말하다>

그는 쉽게 들켜버린다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공원 등나무 그늘 속에 웅크린

그는 앉아있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허용하는 자세로
나의 얼굴, 벌어진 어깨, 탄탄한 근육을 조용히 핥는
그의 탐욕스런 눈빛

나는 혐오한다, 그의 짧은 바지와
침이 흘러내리는 입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허옇게 센 그의 정신과

내가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그의 세계에 침을 뱉고
그가 이미 추방되어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
단 한 걸음도
그의 틈임을 용서할 수 없다

갑자기 나는 그를 쳐다본다, 같은 순간 그는 간신히
등나무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손으로는 쉴새없이 단장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속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 무엇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늙은 사람>

또한 짧은 대구 여행기인 '장정일 소년'[38]에서는 커밍아웃을 암시하는 구절이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나는 그에게 내 고통의 윤곽을 조금 말해 주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만 마시니 기분이 이상하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정작 텍스트의 주인공인 장정일은 "그(기형도)는 자기 시의 진로를 놓고 고민을 털어놓았으나, 나는 그의 말을 기억도 하지 못할 만큼 무심히 넘겨들었다"며 기형도의 커밍아웃을 부정했다. 장정일 외 관련된 지인들의 추가적인 반박은 아래 문단 참조.

7.2. 지인들의 반박

기형도가 성소수자라는 주장은 그의 사망 장소와 독해자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문학적인 수사와 은유로 점철된 시를 제외하면 심증도 물증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불어 당장 바로 위의 장정일의 증언이 그러하듯 기형도의 지인들의 증언과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게이설은 신빙성이 극히 떨어진다.
죽음의 장소 때문에 기형도가 게이였다느니 무슨 불치병이 있었다느니, 혹은 자살한 것이라느니 하는 억측이 사정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떠돌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와 붙어 지내던 친구들이 다 생존해 있는 판인데 황당하고 기가 막힐 일이다. 특히 가족들이 많이 상처받았다. 시의 각광도 죽음의 센세이셔널리즘 때문이라는 말도 많았다. 독자의 환상도 존중받아야겠지만 없는 사실의 창작은 좀 곤란한 일이다.
-김갑수(시인 겸 평론가), <입 속의 검은 잎> 서평
그 흔한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좋아하던 여성이 있었다. 여류작가 K였다. K는 그 무렵 내가 일하던 신문에 소설을 연재했던 관계로 담당기자인 기형도와 비교적 자주 접촉하고 있었다. 이따금 K와의 통화로 짐작되는 통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체했다.
어느 날 한밤중 신문사 근처 음식점에서 회식에 참석했다가 볼일이 남아 있어 신문사에 잠깐 들렀는데 기형도가 문화부에 혼자 남아 누군가와 소곤소곤 통화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술김에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해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는데 기형도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얼른 전화를 끊고 희미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깊은 밤중에 누구랑 전화하는 건가?”
“모르셔도 돼요.” 기형도는 고개를 외로 꼬며 들릴 듯 말 듯 대답했다.
“여자 아닌가, 맞지?” 내가 웃음을 머금고 짓궂게 다그치자 기형도는 말없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취재노트만 분주하게 뒤적였다.
이번에는 목청을 깔고 진지하게 말했다. “자네와 통화한 사람, 혹시 K 아닌가?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그래. 그래야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잖아? 그런데 말이야. K, 좋은 여성임엔 틀림없지만 자네와 나이 차이가 너무 심해. 여자가 남자보다 열 살이나 위라면 누가 봐도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잖아?”
기형도의 옆얼굴이 금세 홍조를 띠는 듯 보였다. 그는 이내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고 항의하듯 말했다. “열 살은 무슨 열 살, 아홉 살 차이밖에 안 되는데…”
-정규웅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

또한 결정적으로 기형도 본인의 텍스트에도 스스로의 이성애를 자연스레 표현한 구절이 발견된다. 기형도의 작품을 모아놓은 「기형도 전집」 을 보면
안내양은 날 사랑하는 걸까? 얼굴만 좀 예쁘면 연애걸 수도 있겠는데.(p.316~317)
00과 만나 잠시 이별의 암시를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가 대했던 많은 대화들에 대하여 그녀의 슬픔이라는 몇 줄의 눈물로 보상받는 꼴이 되고 말았다. 오, 또 이렇게 되었다. 언제나 나는 진실로 연애다운 사랑을 할 것인가. 통나무집에서 그녀가 키스를 요구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중략) 지난 81년 겨울 '하얀 집'(라면집)의 김00씨가 생각났다. 나에게 파카를 벗어준 머리가 길고 담배를 즐겨 피우던 키 큰 여자.(중략)그 여자, 내가 지금 추억만으로써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상현달 같은 여자.(p.327)

이렇듯 기형도가 이성으로서 호감을 가진 여인들이 여럿 언급된다. 그러나 남성에게 그러한 감정을 가졌다고 밝히는 텍스트는 어느군데도 없어 게이는 물론이거니와 양성애자로 보기에도 힘들다. 그 외 기형도 시인 20주기 추모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에도 기형도의 연애사에 관한 대목이 몇 줄 나온다. 원래 시인의 성격이 연인에 관한 자신의 연애사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다니는 편이 아니었다고.

따라서 오늘날 학계에서는 기형도가 게이라는 주장은 근거없는 낭설로 여겨진다. 기형도라는 인물이 지하에서 동성애 운동을 펼치거나 동성애 탄압의 아이콘도 아니었음에도 기이하게 동성애 추문에 시달린 특이 케이스 중 하나. 고인의 명예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유가족들도 세상을 떠난 가족이 게이설로 시달리는 것에 오랫동안 아픔을 겪었다고 하니 새로운 학문적인 접근이 아니라면 가벼운 언행으로라도 시인이 게이라는 주장은 일절 삼가는 것이 좋다.


[훈음] 형통할 법도 [2] 그의 묘소가 있는 안성 천주교추모공원의 묘비에는 1960년 2월 25일이 출생일로 새겨져 있다.[3] 낭장공파 27세손 도(度) 항렬. 성우 기영도가 같은 항렬이다.[4] 1990년 9월 작고[5]서울시흥초등학교.[수석졸업] [수석졸업] [8] 입학 시에는 정법대학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졸업 시에는 사회과학대학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9] 이 부분은 김광석이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기형도가 신춘문예에서 시 부문으로 당선된 것은 25살 때의 일이다.[10] 연평면사무소에서 주택가쪽으로 연평중앙로를 따라 내려오면 2번째 블럭에 위치해 있다.[11] 지금이야 서울특별시광명시의 학군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지만, 시 승격 이전의 철산동 일부, 하안동, 소하동 일대에 거주하는 취학 연령자들이 서울 소재 학교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12] 같이 활동한 회원 중 한 명이 법학과 출신의 소설가 성석제다.[13] 100훈련단 예하 연대 또는 167연대나 수도군단으로 추정된다.[14] 소집해제할 때 감정을 담은 《제대병》이라는 시가 있다.[15] 그때 상영하고 있던 영화는 뽕 2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에로 영화처럼 알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에로티시즘이 들어있을 뿐 내용은 의외로 괜찮은 영화다.[16] 묘소의 바로 옆에 시인보다 2년 뒤에 돌아가신 시인의 아버지 무덤이 있다.[17] 한국 인디밴드 검은잎들의 이름이 여기에 기인한다.[18] 사후 20년이 되는 2009년 3월을 기준으로 초판 24쇄, 재판 41쇄, 총 65쇄, 24만 부가 판매되었다.[19] 2019년 2월 기준 86쇄, 30여만 부가 판매되었다.[20] 사후 20년이 되는 2009년 3월을 기준으로 초판 15쇄, 4만 7천 부가 판매되었다.[21] 시인을 아끼고 추억하는 지인과 문우들의 산문, 그리고 그의 사후 그의 시를 분석하고 의미 지은 여러 비평가들의 밀도 높은 평문들을 한데 모은 책이다.[22] 직역하면 ‘휴일’이라는 뜻[23] 요절한 누나에 관한 시로는 <가을무덤-제망매가>가, 가족 모두가 이야기된 시로는 <위험한 가계 1969>가 있다.[24] 천재교육의 경우 2학년 1학기에 나온다.[25] 특히 이 시의 마지막 구절,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도 많이 알려져 있다.[26] 오늘날의 현대시 작법 기준으로 보아도 관념어와 추상어를 남발하는 기형도의 시는 별로 좋은 예가 아니다. 다만, 그가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한 것 자체가 높게 평가될 뿐.[27] 앨범 어디에도 기형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28] 인용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수백 개 명함들을 읽으며 일일이 얼굴들을 기억할 순 없지 / 와이셔츠 단추 한 개를 풀면서 날 선 칼라가 힘없이 늘어질 때까지 어쨌든 우리는 살아온 것이니 / 굳게 뚜껑을 닫는 만년필처럼'[29] 어머니 장옥순 여사의 독백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네가 가고 안 오던 날 / 나는 밤새도록 기다렸다. / 가끔 네가 돌아올 것처럼 / 생각날 때가 있단다. // 너는 '내가 쓴 글을 /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어요'라고 했지. / 우리 아들 형도의 글을 / 많은 사람이 보게 해달라고 / 엄마는 오늘도 기도한다. / 장옥순'[30]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 한다.'[31]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32] 기형도 시집을 갖고 있다는 김용만은 식은 밥이라 외쳤지만 답은 민경훈의 찬밥[33] 정작 그가 태어난 곳인 옹진군은 기형도에 대해 홍보하는 등의 활용은 전무하다. 다만 옹진군은 지자체 소멸 위기 지역인데다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대책도 딱히 없는지라 출신 유명인 홍보는 고사하고 지자체의 오늘내일이 위험한 상황이다. 만약 강화군에 편입이 된다면 이후 강화군 차원에서 기형도의 출생지라는 점을 이용해 관광지로 만들어줄 가능성은 있다.[34] 일직동 이케아 광명점 북쪽에 있다. 근처에는 소하동CNG충전소도 있다.[35] 친누나인 기향도씨가 기형도문학관 명예관장으로 있다.[36] 기형도 친누나를 비롯한 여러 관련인들이 시비 제막식에 참석했다.[37] 파고다 극장은 탑골공원 바로 옆에 존재하던 극장으로, 당시 동시상영관이자 여러가지 문화공연을 자주 개최하던 2류 극장으로 유명했다. 도심 중심가에 위치한, 대관료가 싼 극장으로 80년대에는 당시 언더그라운드에서 태동하던 헤비메탈 공연이 자주 열리곤 했다. 소위 말하는 "쌍팔년도 메탈"하던 사람들 중에 "내가 소싯적에 파고다 극장에서 공연 했는데"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38] 시인 겸 소설가 장정일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