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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06:28:35

마광수

마광수
馬光洙|Ma Kwang-soo
파일:thumb_3696639864_1mBHWpzT_1.jpg
출생 1951년 4월 14일
경기도 수원시[1]
사망 2017년 9월 5일 (향년 66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소설가, 시인, 교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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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colbgcolor=#fff,#1f2023>서울청계국민학교 (졸업)
대광중학교 (졸업)
대광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 / 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 석사[2] · 박사[3])
본관 목천 마씨
본적 서울특별시
신체 175cm, O형
배우자 김방옥[4](1985년 결혼 - 1990년 이혼)
가족 이부누나 조재풍(1943년생)[5]
사상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문화적 자유주의)
자유연애(Free love) 옹호[6]
종교 무종교(무신론)
데뷔작 배꼽에 (1977)
소설 권태 (1985)
활동 기간 1977년 ~ 2016년 8월[7]
링크 개인 홈페이지 '광마클럽' }}}}}}}}}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성장 과정2.2. 작가 등단과 교수 재직2.3. 《즐거운 사라》 음란물 지정 및 탄압 사건2.4. 정년퇴임 이후2.5. 사망
3. 성향과 사상
3.1. 성적 자유주의3.2. 알고보면 신사3.3. 실험적인 강의 방식
4. 학문적 업적5. 작문 스타일6. 저서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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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makwangsoo.com/73.jpg
파일:external/www.campuslife.co.kr/img_17103_1.jpg
최연소 교수 부임 시절 말년
시대를 앞서간 천재, '사라'처럼 사라지다.
조철 문화 칼럼니스트. 관련기사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 소설가시여, 잘 가시오. 잘 가시오.
마광수 사십구재 추도사 중에서. 관련기사
대한민국교수, 국문학자, 소설가, 시인, 화가

윤동주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윤동주 스페셜리스트이자 성해방을 비롯한 문화적 자유주의를 주창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과정

어린 시절이 상당히 불우했던 편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몇 달 전, 6.25 전쟁에서 종군사진작가로 활동하던 친아버지가 1.4 후퇴 중 사망하는 바람에 경기도 수원군에서 피난 중 유복자로 태어나 홀어머니 슬하에서 이부 누나와 함께 자랐다.

마광수의 친부 마씨는 어머니의 두 번째 남편이고, 첫 번째 남편 조씨 사이에 딸(마광수에게는 이부 누나) 하나를 얻었다.

2.2. 작가 등단과 교수 재직

파일:마광수.png

대광고등학교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석사, 1983년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녔으며, 학부과정을 전과목 A로 졸업했다. 연세대학교 졸업 후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26세에 등단했으며,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당시 28세)를 거쳐 1983년부터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인문학부 국어국문학과 교수(당시 32세)로 재직하다 2016년 8월 정년 퇴임했다.

또한 1977년 현대문학에 시로 등단한 시인이다. 1985년 장편소설 <권태>로 소설가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이후 <즐거운 사라>[8], <자궁 속으로>[9], <귀족>, <불안>[10], <발랄한 라라>, <사랑의 학교> 등의 소설집과, <가자 장미여관으로>, <야하디 얄라숑>, 육필시집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등의 시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등의 수필집을 집필하였다.[11]

1989년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영화화하려고 했고, 감독으로도 결정되었으나, 제작사는 중간에 감독을 교체하고, 마 교수는 여기에 비난 기자회견을 한 바 있다. 일설에 의하면 마광수의 연기 지도가 너무 야해서 당시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교체했다고 한다.[12]

2.3. 《즐거운 사라》 음란물 지정 및 탄압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즐거운 사라 음란물 지정 및 탄압 사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결론적으로 놓고 보자면, 즐거운 사라는 현재는 물론 그 당시 기준으로도 딱히 음란한 소설은 아니었지만, 기존 교수들 사이에서 금기시하던 사상을 꺼낸 결과 기존 기성세대 교수들에게 꼬투리잡혀서 1992년 10월 교수직을 해임당하고 구속된 사건이다. 이후 1998년 교수직에 복귀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학과에서도 사실상 내쫓겨서 교양과목 강의만 맡았다.

2.4. 정년퇴임 이후

2016년 8월, 연세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며 더이상 마광수의 강의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실형으로 연금을 한푼도 못받았다는 기사가 있지만 실형을 선고 받아도 50% 감액된 연금을 받을수 있다. 마광수 경우는 중간에 8년 해임된 기간으로 납입기간이 짧아졌고 그마저도 실형으로 반으로 잘렸으니 연금액이 작았을것이다. 본인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연금을 받아도 집안일 봐주는 아주머니(가정부)[13] 월급 주고나면 남는게 없다라고 한적이 있다. 더구나 같이 살고 있는 노모의 간병비도 많이 든다고도 했다. 거기다 사망 몇개월 전에는 그가 의지하던 어머니마저 노환으로 별세하면서 그야말로 쓸쓸하기 그지없는 말년을 보냈었다.

2.5. 사망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윤동주 연구」로 박사가 되었지만
윤동주처럼 훌륭한 시인으로 기억되긴 어렵겠고
아예 잊혀져 버리고 말든지
아니면 조롱섞인 비아냥 받으며
변태, 색마, 미친 말 등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칭송을 받든 욕을 얻어먹든
죽어 없어진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저 나는 윤회하지 않고 꺼져버리기를 바랄 뿐
시 <내가 죽은 뒤에는> 전문 마광수 作
어휴, 다 잊힐 겁니다
마광수 탄생 100주년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냐는 질문에
사망하기 몇 달 전 마광수의 모습.

파일:광마클럽.jpg
사망 1년 전 마광수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글.

2017년 9월 5일 오후 1시 51분쯤, 자택인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숨져 있는 것을 가족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집에서 유서를 발견했고 자살로 추정했다. 유서에는 자신의 유산을 시신을 발견한 가족에게 준다고 썼다고 한다. ##

평소 우울증을 앓고 있어 자살로 결론날 것으로 보인다. 실제 2017년 1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누가 불러주질 않아 그냥 집에서 지낸다."라면서 "우울하다", "서운하다"라는 말을 반복하기도 했다. # 특히 그는 30년간 우울증 약을 복용해왔고, 사망 전 의사로부터 입원 권유를 받을 정도로 우울증이 심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또한 사망 이후 일부 지인들은 마광수 전 교수가 제자를 많이 길러내고 싶어 했는데 교수 사회에서 왕따였기에 교양수업만 해야 했고, 전과자 이력 때문에 연금도 제대로 받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주장했다. 또 최근 모친상을 당했고, <마광수 시선>을 출간하면서 시평이나 추천사를 동료 국문학자들에게 의뢰했는데 대부분 거부하거나 답변을 회피해 상처를 크게 받았다고 했다. 2017년 9월 6일 네이버-문화일보 “故 마광수 대학·문단서 왕따… 처지 비관했었다” 실제로 <마광수 시선>에는 비슷한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추천사나 평론 등이 없고 마광수 교수의 글만 수록되어 있다.

시신은 화장 후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에 있는 '분당추모공원 휴'에 안치되었다.

3. 성향과 사상

3.1. 성적 자유주의

이른바 '유미주의적 쾌락주의'를 전적으로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쾌락은 모든 사건의 근본이자 목표라는 것.[14] 사실 그렇게 이해하지 못할 사상도 아니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얼마든지 주장될 수 있는 사상이지만[15] <즐거운 사라> 사건으로 마광수가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자 이문열을 필두로 많은 동료 문인들은 '그런 쓰레기 같은 소설을 쓴 자는 소설가로 부를 가치조차 없다'고 맹비난을 가했다. 특히 마광수와 이문열의 사이는 엄청나게 안 좋았다.[16] 자세한 부분은 이 링크를 참조하자. 마광수와 이문열의 논쟁.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 1권> 발췌

마 교수가 학계에서 왕따를 당하던 와중에 몸까지 아파서 고생하던 시절에 김동길이 보약을 지어 병문안을 간 적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김동길과 마광수 두 사람은 모두 연세대에서 교수를 지낸 이력이 있었고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려 교수 사회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는 등의 동병상련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친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생전에 68운동을 꽤나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서구가 성적 자유주의를 추구하게 된게 68운동 덕분이라고 평가했으며 죽을 때까지 이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실제로 젊었을 때 마광수는 진보 진영에 우호적이었으며 사상적으로 신좌파스러운 면모를 많이 보였지만 여러 가지 사건을 겪은 후 운동권과 좌파 진영도 혐오하게 되었는데 "뒤통수 치는 건 좌파놈들이 더 잘해. 가식적이기도 하고. 진보적 세상 만든다면서, 그놈의 가부장적 권위는 말도 못할 정도로 심각해. 미친 놈들"이라는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도덕을 빙자한 엄숙주의와 위선을 무엇보다 혐오했던 그였기에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17]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시인 고은을 그의 치부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전부터 계속 비판해 온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성향을 보수 진영으로 전향한 것은 아니다.

다만 수많은 여성들을 마광수의 적으로 돌리게 만든 '외모 우월주의'로도 악명이 높다. 2005년 MBC 백분토론에서 "예쁜 애들이 공부도 잘한다"고 발언한 사례는 아주 유명하다. 그러나 이는 외모차별이 아닌 립스틱 페미니즘에서 나온 것이다.[18]

부부강간죄, 성희롱 방지법, 원조교제, 즉 미성년자 성매수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을 남성을 억누르는 악법이라고도 주장하여 논란을 만들기도 했다. 억울한 피해자가 나올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만 링크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억울한 피해자가 나올 수도 있으니 무조건 없애야 하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부강간죄의 경우는 부부간의 특수한 관계[19]에 비춰 생각해 볼 때 성관계에 대한 (능동적인) 동의를 부부 외의 성관계와 같은 수준으로 요구할 수는 없고, 부부강간죄의 필요성에 대한 근거로 여성계가 제시한 사례들은 형법 체계 내에서도 처벌이 가능한 사례들이라는 주장이고, 가정 폭력에 의한 성폭행을 당할 수 있고, 성희롱 방지법 부분은 가해자의 행동에 대한 객관적 판단 기준 없이 피해자의 입장만으로 성희롱이 성립된다고 보는 것이 법적 형평성과 합리성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며, 미성년자 성매수자 신상 공개 문제는 1) 살인이나 강간같은 흉악범죄를 저지른 자도 신상공개를 당하지 않는데, 미성년자 성매수자의 신상을 공개한다는 것은 미성년자 성매수를 살인, 강간등의 흉악범죄보다 더 무겁게 처벌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으며 2) 만 15세~19세의 청소년을 만 14세 이하로 (법적인) 자기책임능력이 없는 청소년과 같은 기준으로 대하고 있으며 3) 미성년자 성매수에 대한 형사적 처벌을 받은 상태에서 신상공개를 또 하는 것은 이중처벌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주장에 가깝다. 사실 글의 논조가 과격한 점이나 편견에 기반한 점이 많고 주장에 억지스러운 점이 많은 것[20]은 사실이고, 이 때문에 널리 동의를 얻기 힘든 주장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덮어놓고 '혹시 무고한 피해자가 나올지 모르니 악법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보기는 힘들다.

파일:광마.jpg

그는 "허례허식과 허세를 비판하며, '성(性)'에 솔직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건전한 사회를 위해서는 성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해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데에 누구보다도 앞장선다. 이렇게 그는 무엇보다도 위선을 최악의 부덕이라 보았고, 생전에도 도덕을 명분으로 삼아 개인을 억압하는 풍조를 강력히 비판했다.

세간에 알려진 변태라는 이미지와 달리 본인은 방탕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올곧고 정직한 성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권위의식같은 것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베풀기도 잘했다. 그 때문인지 1990년대에는 불경한 음란문학이라며 지탄받았지만, 현재는 그가 말한 대로 성적 욕망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상파 방송에서 섹드립을 치는 지금과 비교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3.2. 알고보면 신사

위의 항목을 보면 거칠게 없이 살아와 자유분방하고 주위에 아랑곳없이 살 것 같은 자유인 같지만 실제로는 품위를 갖춘 신사에 가까웠다.

사실 성뿐만이 아니라, "매 순간의 욕구에 충실하고 장래를 기대하며 스스로를 억압하지 말라"는 식의 말을 생전에 자주 했다. 특히 내세론을 크게 비판하며 "내세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 이번 생이나 잘 살라"고 강조한다. 일종의 쾌락주의에 가까우나,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며 욕구를 충족하는 것은 비난한다. 자신이 피해를 입기 싫은 만큼 상대도 존중하라는 것인데, 실제로 마광수 교수 본인도 일상생활에선 그의 글과 다르게 점찮고 부드러운 이미지다.

게다가 마 교수는 이미지와 다르게 학생을 성추행하거나 더럽게 굴어 문제된 적이 없다. 마 교수 본인이 강의 중 그런 루머에 대하여 말하길, "씨발놈들이[21] 소설이랑 현실을 구분을 못하는 거지"라고 일갈. 오히려 학생들에게는 굉장히 정중한 편이었다. 게다가 조교한테 모두 일임하는 웬만한 다른 교수보다 훨씬 신경 써서 시험지를 채점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다만 마광수가 교수였을 때 학생으로서 수업을 듣던, 연세대학교를 나온 범죄심리학자 이수정은 2023년 2월에 한 인터뷰에서 "마광수 교수는 담배를 피워가면서 강의를 했는데, 특정 학생을 지목하면서 노골적으로 성희롱을 했다."라며 여성으로서 당해왔던 성희롱을 회상하던 중에, 마광수 또한 그 사례로 거론하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22]

이런 마광수와 매우 닮은 꼴의 인물이 일본에도 존재하는데, 다름 아닌 만화가 나가이 고이다. 나가이 고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고, 일본의 보수적인 언론과 학계의 맹비난에 시달렸으며, 폭력적이고 성적인 작품 성향과 달리 개인은 매우 선량하고 올곧은 인품의 소유자이다. 그런 쪽으로도 스캔들이 없는 인물이다. 다만 나가이 고가 막대한 부를 누린 성공한 만화가였음을 생각하면, 마광수 교수의 말년은 그야말로 너무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3.3. 실험적인 강의 방식

그런 면모는 강의 중에도 엿보였다. 연극의 이해나 문학과 성과 같은 수업의 경우 수백 명이 듣는 대규모 강의임에도 불구하고 '출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지론에 따라 전자출석만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그로 인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수는 실 수강 인원에 비해 턱 없이 적었지만, 학생을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태도가 감동을 주기도 했다.[23]

4. 학문적 업적

작가로서는 굴곡이 많았지만[24] 문학 연구가로서는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바로 윤동주 시인 연구. 윤동주 하면 떠오르는 정서인 '부끄러움'이 마광수의 발견이며, 마 교수가 제시한 이 틀은 현대 국문학계가 대중에게 '윤동주의 작품은 대체로 이렇습니다'라고 해설할 때 사용하는 정설이 되었다. 이는 마 교수 본인의 가장 큰 자부심 중 하나이다.

다만 이 이후로는 제대로 된 연구성과가 거의 없어서 비판받기도 한다. 실제로 이후론 이렇다 할 논문이 없다. 예를 들어 2000년 재임용 심사 때 연구 실적물로 제출한 것이 에세이집 1권, 장편소설 1편, 단편소설 2편, 시 8편 등 창작물이 대다수고 신문 등 매체 기고문과 학술논문은 겨우 6편밖에 되지 않았다. 다만 90년대 필화사건을 겪으며 8년간 야인으로 지내 타의로 절필당하다시피 한 것을 감안을 해야 한다. 그런 사정이 감안되었는지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지만 정년까지 교수로 일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마 교수 자신이 논문 쓰기를 지양하고 아포리즘을 선호한 데에 있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마광수 어록을 검색해 보면 자신의 생각을 짧은 격언으로 꿰뚫는 능력이 출중함을 알 수 있다.

5. 작문 스타일

문학계에 만연한 지적허영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다. "진짜 좋은 글은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라는 게 마광수의 작문철학으로 그는 가독성을 매우 중시하여 복잡한 문장구조와 어려운 어휘들을 피해 글을 쓴다. 때문에 글이 쉽고 전달력이 매우 높다. 즉 그의 글에는 문학적 허세가 없고 글의 전달력이 높아, 읽는 데 피곤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오히려 "쉽게 쓰는 게 어렵다"라고 말할 정도로 글의 전달력, 가독성에 힘을 쏟는 스타일이다. 작가로서 대단한 장점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광수 교수를 싫어하는 다른 교수들 중 쉬운 문필에 매우 반감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쉬운 어필을 주장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역설하는 교수들도 많다. 특히 송도에서 찾기 쉽다. 글쓰기 수업 때 주제가 나오기 쉬우므로.

6. 저서

7. 기타

강의 시간에 성적인 농담이나 표현을 자주 했지만, 수업을 듣는 여학생들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중간 중간에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을 덧붙였고, 문맥을 이해해보면 결코 그가 퇴폐적이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너무도 솔직한 어른’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뿐.
- 1999년 1학년 교양필수 '글과 삶' 수업 수강 소감

[1] 부모의 집은 서울이지만 6.25 전쟁 피난 중 수원지방서 출생했다.[2] 석사 학위 논문 : 언어표현을 통한 문학의 사회적 효용성 연구(1974).[3] 박사 학위 논문 : 尹東柱硏究 : 그의 詩에 나타난 象徵的 表現을 中心으로(윤동주연구 : 그의 시에 나타난 상징적 표현을 중심으로, 1983).[4] 마광수보다 1살 연하인 1952년생으로, 동국대학교 연극학과 교수였다.[5] 이부 남동생인 마광수와는 달리 자녀가 있어서 마광수 별세 당시 상주는 조재풍의 자녀들인 마광수의 조카들이 맡았다.[6] 성해방이랑 연관이 있다.[7] 2016년 교수 정년퇴임 이후 2017년 사망할 때까지 1년여간은 아무런 활동도 안 하고 자택에 은둔해 있었다.[8] 출간 금지 판결 이후로 재심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영원히 출간될 일이 없는 전설의 소설이다. 단 도서관에서나 중고책으로 볼 수 있다.[9] <첫사랑>이란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10] <페티시 오르가즘>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11] 의외로 멀쩡한 수필집이라고 한다. 애초에 일종의 평론서고, 시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마광수는 이걸 저항의 언어로 1980년대 민중문학에 종언을 고했다고 자찬한다고 한다. 민중문학, 또는 저항문학의 종언이라는 개념은 현대 문학사, 특히 현대 한국 소설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라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할 만한 문제다. 군사독재정권 시대 내내, 그리고 90년대에서 이천년대 초반까지도 한국 문단과 소설계의 주축은 참여문학이나 민중문학, 저항문학 등으로 불리는 사회성이 강한 작품들에 있었으며, 이러한 경향에 반하는 작품들, 특히 유미주의적이거나 쾌락주의적이고 오락성이 강한 작품에 대해서는 '비겁하다'거나 '현실도피적이다'는 비판이 가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21세기 초반 무렵부터 이러한 참여문학 전통이 순식간에 와해되고 오락으로써의 문학이 급성장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무렵 마광수의 작품활동을 선구적이라고 볼 여지는 분명히 있다. 사실 마광수가 호오가 공존하는 평가를 받는 호시절이 끝난 건 <즐거운 사라>부터다.[12] 이때의 경험이 소설 <자궁 속으로>의 일부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13] 상술하듯 마광수는 결혼 5년만에 이혼하였고 자녀도 없었으므로, 가사일의 일부는 가정부가 돌보았다.[14] 가령 나도향의 소설 <>의 주제를 일반적으로 "가난한 빈민들의 도덕적 타락"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마광수는 "그냥 떡치는 게 좋다고 외치는 소설 아니냐"는 이야기를 한다.[15] 따라서 마광수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 역시 상당히 많은 편이다.[16] 마광수는 생전에 이문열 보고 "이문열은 작가도 아니다." 라고 까내린 적이 있다.[17] 말년에는 여성의 인권을 내세워 남자를 포함하여 사회구성원 전체에 검열과 성적억압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욕망- 권력욕과 성욕, 축재욕에 대해서는 여성의 진취성이라는 이름으로 관대한 행보를 취하고 있는 래디컬 페미니즘 운동의 이율배반적 태도를 강렬하게 비판했다.[18] 생전에 마광수는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 자신이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자칭한 적이 있었다.[19]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만 성관계를 하지만, 부부 사이에서는 성관계를 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20] 예를 들어, 부부강간죄의 성립 근거 중 하나는 부부간이라 하더라도 성관계를 갖고 싶지 않을 때는 거절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무시해버렸다.[21] 각색이 아니다! 실제로 강의 중 욕설은 물론이고 자지, 보지, 쓰리썸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스타일.[22] 물론 교차검증이 딱히 안 되는 사항이니 곧이 곧대로 믿으면 곤란하긴 하다. 다만 무엇보다 성에 관련된 얘기를 거리낌 없이하는 특성상 호불호는 있을 수밖에 없긴 하다.[23] 다만 사람이 너무 없다 싶으면 '없어도 너무 없다'고 출석을 부른 사례가 있기는 하다.[24] 그래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당시 제법 회자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문제작 <즐거운 사라>는 일본에서 10만 부가 넘게 판매되어 한국 소설 최초로 일본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일본 내 유명작가도 5만 부 팔기 힘들었다고 하니, 상당히 선전한 셈이다. <가자, 장미여관으로> 역시 일종의 문화원류로서 한국 시문학 역사에 획을 그은 시집이다.[25] 공교롭게도 단편집 중 '마 교수, 지옥에 가다'라는 에피소드가 있다. 마광수가 노벨문학상(!)을 받고 2년 후 사망한다는 설정. 유령이 된 마광수는 신문을 읽으며 이문열을 패러디한 '이문혈'이 자기를 디스하는 글을 보게 되고, 며칠 후 저승사자들이 찾아와 "지옥에 가게 되었다"고 하자 마광수는 "교회 좀 다닐걸" 하면서 지옥에 갔는데, 알고 보니 마광수는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며, 지옥의 염라대왕은 노출이 심한 복장의 섹시한 여인에 채찍을 들고 마조히스트로 보이는 남자들을 개처럼 끌고 다니는 '염라여왕'이었다. 이유는 퇴폐문화를 외치는 이들이 지옥에 많이 와서 이렇게 변했다고. 그리고 마광수가 받을 벌이라며 즐거운 사라에 나오는 '사라'가 섹시한 알몸으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염라여왕 왈, "마 교수는 성 해방을 위해 노력하였으니, 그에게는 지옥에서 성 해방을 전파해야 하는 벌을 주겠다"라고 한다...이게 지옥이야 천국이야[26] 소설은 대놓고 야하다. 등단 40년이 되는 2017년 출간한 '마광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27] 당시 최연소 교수로 27세에 교수가 되었다.[28] 희한하게도 백석과의 인연이 연결된다. 윤동주나 안도현 모두 백석을 롤모델로 하거나 존경하는 유명 시인들이다. 더구나, 고교 후배이자 위 <즐거운 사라> 당시 불교방송 출연 시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당한 고교 후배이기도 하는 노래하는 시인 김광석의 법명을 길상사를 기부받은 법정이 원음이라 지었다.[29] 수업의 주교재인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는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을 주역이나 한의학 같은 동양사상과 관련지어 해석을 시도한 책이다.[30] 사실 이럴 가능성이 크다. 국문과 담당교수가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교수 수업을 듣는다는 이유만으로 학부 학생을 차별하여 불공정하게 학점을 매기는 행위는 교수 자질이 없다는 증거이다. 실제로 학생이 공식적인 루트로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면 교수로서 골치 아파지므로 이를 감수하고 굳이 차별할 이유 역시 없다. 교수 자질이 없는 사람들이 실존해서 가능성은 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자신에게 불리해질 뿐이다.[31] 기계 출석체크 후 도망가는 것[32] 마광수 교수 본인이 방송에서 여러 번 항변하기로는 멀쩡한 과제를 내 줘도 학생들이 으레 야설을 써 오다 보니 과제가 에로틱 판타지 쓰기로 굳어졌다는 것인데, 실제로 2000년대 중반에 카타르시스에 대해 써오라는 과제를 주었을 때 거의 모든 학생이 야설을 지어 제출했지만, 한 학생은 카타르시스를 자아내는 자신의 경험담을 묘사함으로써 A+를 받은 사례가 있다.[33] 실제로 중간고사 대체 리포트로 존재하는 과제였다. 그냥 성의만 있는 수준이면 점수는 잘 나왔다고 한다. 더불어 마광수 교수의 소설 독후감 쓰기도 중간고사 대체 과제. 지정 도서는 매번 바뀌었다.[34] 그러면서도 김이원한테는 "오히려 그 시를 (시집에) 집어넣어서 다른 작품들이 죽었다"고 디스하기도 했다. 한편 홍익대 교수 시절에는 문학 강의 시간에 그 시를 극찬하며 줄줄 외우기도 했다고 한다.[35] 처음에 마광수 교수는 사전에 제자와 만나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당시에는 연락이 전혀 되지 않았으며 지난 11월 제자가 갑자기 연락을 해서 그런 사실을 먼저 이야기했당시 옛 추억을 이야기하고 기분 좋게 헤어져 그냥 양해가 된 줄로 믿었는데 당시에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지금 와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으며 먼저 내게 다시 출처를 밝히라거나, 삭제하라고 요구했다면 다 들어줄 수 있는 일이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김이원은 사전에 협의가 된 적이 없으며 마 교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시가 아까워서 내 시집에 실었다’고 말을 꺼냈고 황당해서 따지자 '미안하게 됐다. 그럼 내 소설 1권을 주마' 하는 태도에 분노하여 표절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 도덕적 불감증에 경종을 울리려는 취지로 폭로를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기사 전문은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82353.html[36] 그 와중에 이런 소소한 잡음이 있기도 했다.[37] 은꼴사라고 하기엔 수위가 좀 심하다.[38] 계몽주의 계열 문학에 큰 반감을 보이는 사람이 계몽주의적 역사관의 오류를 인용하는 점은 아이러니. 이 문서 참고.[39] 그 바로 옆에 있는 것은 다름아닌 박평식의 영화추천 목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