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4:26:14

효도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노라조의 동명의 노래에 대한 내용은 효도(노라조)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 0 -10px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eee,#000> 분노 환멸 · 짜증 · 투정 · 성가심 · 악의 · 자기방어 · 안달 · 분함 · 꺼림 · 진노 · 증오 · 공통
슬픔 실망감 · 무능 · 애달픔 · 후회감 · 우울 · 한탄 · 비참 · 무기력 · 좌절 · 고독 · 비통 · 공통
불안 공포 · 걱정 · 스트레스 · 초조 · 혼란 · 의심 · 조심 · 나약함 · 당혹
아픔 시샘 · 배신감 · 외로움 · 얼떨떨함 · 핍박 · 억울 · 괴로움 · 고난 · 버림받음 · 불행 · 피로
창피 억눌림 · 시선의식 · 부끄러움 · 열등감 · 죄책감 · 불쾌 · 한심
기쁨 고마움 · 편안함 · 들뜸 · 행복 · 믿음 · 여유 · 즐거움 · 자신감 · 용기 · 안심 · 우월감 · 희열
사랑 내리사랑 · 형제애 · 우정 · 안갚음 · 따름 · 감동 · 자비 · 상냥함 · 설렘
바람 · 희망 · 탐욕 · 음욕 · 욕심 · 간절함 · 기대 · 갈급함 · 그리움 · 인색
감정의 상위 분류: 욕구 · 감성 · 이성
하버드 대학 심리학자 수전 데이비드의 분류 결과와 칠정의 요소
}}}}}}}}} ||

1. 孝道
1.1. 여러 문화권에서의 양상1.2. 논의1.3. 비판1.4. 여담1.5. 관련 문서
2. 일본의 성씨
2.1. 실존 인물2.2. 가상 인물
3. 관련 문서

1. 孝道

위인자자 갈불위효 욕보심은 호천망극
(爲人子者 曷不爲孝 欲報深恩 昊天罔極)
원시효자 백행지본 사친지효 양친지성
(元是孝者 百行之本 事親至孝 養親至誠)
사친여차 가위인자 불능여차 금수무이
(事親如此 可謂人子 不能如此 禽獸無異)

"사람의 자식 된 자로서 어찌 효도를 하지 않으리오? 그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하여도 하늘처럼 다함이 없도다.
본래 효도는 모든 행함의 근본일진대, 부모님을 섬기는 데에는 지극한 효로써 하고, 봉양하는 데에는 정성을 다할 것이니라.
부모님 섬기기를 이같이 한다면 가히 사람의 자식 된 자라 할 것이나, 이같이 하지 못한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느니라."
사자소학 효행편
안갚음[1], / Filial Piety[2]

효도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 또는 부모를 정성껏 잘 섬기는 일을 뜻한다. 효도의 '효'에서 라는 한자는 아들노인을 업고 있는 모양의 글자다. 다만 갑골문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상단부의 글꼴은 노인 노()가 아니라 봉할 봉()에 가까웠으리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의 자형은 주나라 시대의 금문에서부터 그 뿌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상나라에서는 지배층의 통치 명분 확보와 결속을 위해 조상을 공경하던 수준에 머무르던 효 의식이, 주나라에 와서 적용 범위가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효라는 개념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행동양식 중 대표적인 것이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 중에 부모가 죽을 때까지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동물은 아직 학계에 보고된 바가 없다.

민간전승에 따르면 까마귀가 대표적인 효도의 아이콘이라고 하며, 유교 전승에 따르면 부모가 늙으면 자식 새가 대신 벌레를 물어다가 부모에게 먹인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과학적 관점에 따르면 먹이를 물어다 주는 건 오히려 부모 새라고 한다. 까마귀는 자식이 부모보다 덩치가 커져도 부모가 계속 자식에게 먹이를 잡아서 먹여 준다. 즉, 과학이 없었던 시절에 덩치가 작은 개체가 덩치가 큰 개체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걸 보고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효도가 인간이 지금과 같은 사회를 구성하면서 생긴 관습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동식물과 달리, 인간 사회에서 고령자가 주위의 어떠한 보살핌도 없이 죽으면 사회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지식을 후세대에 전파가 가능한 고지능 동물인 인간 특성상, 육체적으로 쓸모가 없어졌더라도 살아오면서 쌓은 지식과 지혜가 있기에 노인을 배척하는 행위는 도덕, 사회적인 불안감 조성 외에도 노인을 부양하여 지식이나 노하우를 손쉽게 얻는 그룹보다 발전이 지체되기도 한다.

과거에는 각 국가들이 현대와 같은 고도의 복지 시스템을 만들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부모는 자신이 봉양하는 윤리를 만들어 부양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 현명한 것으로 대접받았다. 물론 가족 개념이 느슨해진 지금도 어느 정도 유효하다. 그러나 효도를 절대적 가치니 성스러운 것이니 운운하며 성역화해버리면 온갖 사회 문제[3]가 발생할 수 있다.

자신의 부모에게 스스로 해야 할 효도를 배우자에게 떠넘기는 문제로 부부갈등이 일어나는 경우도 흔하다 보니, "효도는 셀프다."라는 말이 나왔다.

효행 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은, 자녀가 부모 등(친족에 해당하는 존속)을 성실하게 부양하고 이에 수반되는 봉사를 하는 것을 "효'로(제2조 제1호, 제3호), 효를 실천하는 것을 '효행'으로(같은 조 제2호), 각각 정의하고 있다.

1.1. 여러 문화권에서의 양상

효는 거의 모든 시대와 문화권에서 매우 중요시되는 도덕이다. 특히 동아시아의 경우 유교의 여러 개념들 중에서도 효는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진다. 공자는 효(孝)를 통하여 예(禮)를 설명하였는데, 누구나 공감하고 쉽게 이해하며 지키려고 하는 '효'를 이용하여, '예'라는 다소 어려운 가치를 설명하기도 하였다. 흔히 유교(유학)는 충효의 사상이라고 불리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가치가 바로 '효'였다. 다만 공자는 부모도 자식한테 효도를 받으려면 부모가 먼저 조부모에게 효도를 하면서 자식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자식들도 부모를 진실로 따르고 효도한다고 가르쳤으며 맹목적인 복종은 효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서양에서도 효가 중요시되는 것은 비슷해서, 유대교그리스도교는 아예 십계명 차원에서 효가 중요하다고 못박았다. 십계명은 앞부분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율법이고 뒷부분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율법인데, 뒷부분의 율법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이 "부모를 공경하라."[4]이다. 이러한 부모에 대한 공경의 구절은 추가로 다른 부분에서 더 발견되는데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명령하는 대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고 잘 될 것이다."(신명기 5장 16절) 에서 부모를 공경하면 축복을 받는다고 서술하고 있고 다른 구절 '네 안에서 사람들은 아버지어머니를 업신여기고, 이방인을 억압하며 고아와 과부를 학대한다.( 에제키엘 22장 7절)' 에서 예루살렘을 책망할 때 부모를 업신여겼다는 부분을 책망할 정도였다. 게다가 철학자들 역시 효도는 정언적 명령이고 미덕이라고 했다.[5]

이처럼 효는 그야말로 인류의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세상의 많은 율법들은 효도하라고는 강조해도, 자식을 사랑하라고는 크게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고 보았던 반면,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2. 논의

한편 인류 전체에 효도와 관련된 윤리 풍습이 존재하나 그것이 동아시아만큼 체계적인 도덕의 모습으로 갖춰진 경우는 희박하다. 또한 현대 문명에서 모든 윤리의 근간을 이루는 현대 윤리학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의무와 권리만을 말해왔기 때문에 효도에 대한 문제는 최근까지 뒷전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효도는 아무 이유 없이 해야 하는 것으로 정당한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덕 윤리학이 출현하고 현대 윤리학이 발전하면서 효도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었고, 지금은 효도를 도덕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다양한 논증이 제기되고 있다.

일단 부모에게 효도해야 할 가장 큰 이유로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 윤리에 기초한 미덕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위의 중요성 단락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 문명이 발생한 이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식이 나이가 찬 뒤 늙은 부모를 정성껏 부양하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미덕이자 권장할만한 행위로 여겨져 왔다. 예로부터 인류 사회 곳곳에서는 효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 구성원에게 상당한 비난과 도덕적 책임 추궁이 가할 뿐만 아니라, 특정 문명이나 종교에 따라서는 엄격한 사법 처리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에는 불효를 '강상죄'라 하여 엄하게 처벌하였다. 이는 현대 사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을 보인다. 상단의 효행 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서 볼 수 있듯이 대한민국 법률은 효도를 하나의 법률 조문으로 박아놓고 굉장히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의 효행은 도덕적 근거에 더해 성문법으로 표시된 법적 근거까지 등에 업고 있는 셈이다. 이는 효라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도덕적 관습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대를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효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된 논증은 호혜성 원리이다.[6] 도덕적으로 특정인이 상대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았다면 그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것은 당연한 도덕적 요구이다. 배은망덕이라는 표현이 괜히 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보면 부모는 자식에게 상당한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주었으므로 자식에게는 그것을 부모에게 보답할 도덕적 요구가 부여될 것이다.

이러한 논증을 비판적인 시점으로 바라보자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의무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의무는 설명하지 못하고,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에게 받은 혜택은 먼저 요구한 것이 아니라 비자발적으로 받은 혜택인데 그것에 보답해야 할 의무가 있냐는 것이다.[7] 채권자-채무자의 관계로 설명해보면, 맨 위의 경우 나나 상대나 모두 자발적인 선택이 가능한 사람들이고 실제로 나는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 상대에게 혜택을 받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 혜택(=채무)을 상대에게 갚을 의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자식의 경우 자식의 입장에서 혜택은 자발적인 의사와 관계없이 갑자기 주어졌고 거절할 수도 없으므로 자신이 받은 이익을 다시 보답하여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황경식은[8] 감사에 의거한 논증으로 효도를 정당화했다. 효도는 기본적으로 감사나 보은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행해야 한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감사나 보은이라는 개념은 타인으로부터 받은 이익에 대한 심신양면의 반응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인 보은과 감사는 도덕적 요구의 중대한 원천이긴 하나 그 결과가 신체적 행위만이 아니라 정신적 감정까지 포함된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갖는다. 다만 이 같은 보은과 감사의 감정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이상의 조건이 충족되었을 경우 혜택을 받은 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보은지정을 갖게 될 것이다. 이 감사나 보은에 의거한 효도는 다른 상호성과 같은 등가교환의 관계를 넘어 우정의 계기를 내포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 지속적이고 정신적인 우의를 설명할 수 있다. 간혹 부모와 자녀는 의무관계로서 서로 잘할 의무가 있는데 왜 이러한 당연한 의무에 효도해야하냐는 반론이 있지만 부모들이 자녀를 보살피는 행위는 단지 일반적인 유형의 의무가 아니라 특수한 역할과 관련된 의무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는 부모의 동기나 태도에 있어 그들은 단순히 의무의 요구를 능가하는 까닭에 자녀 편에 있어서 감사하고 보은하고자 하는 특수한 의무가 생겨나는 것은 합당하다는 것이다.

권상우는[9] 사회생물학을 접목시켜서 효도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논증을 폈다. 사회생물학적으로 보면 생물은 친족에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당장 인간처럼 자식을 보살피는 동물도 많고 무리를 위해 희생하는 미어캣 같은 사례도 있다. 이러한 행동이 진화하는 것을 '혈연선택'이라고 하고 인간의 자식 사랑이나 효도도 혈연선택의 일부이다. 권상우는 여기서 혈연선택이 유학의 성선설을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유학에서는 효도 정신이 근간이 되어 타인에 대한 선한 행동이 나타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상우는 사회생물학이 유학적 주장의 기본공리(성선설)를 증명하고,[10] 이를 통해 효를 정당화하는 유학적 주장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결과적으로 사실은 가치와 다르다는, 사회생물학자 본인들이 가장 열심히 주장하는 논리에 의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유학적 주장이 내적 정합성을 가지냐는 의문도 제기할 수 있다.

이 외에 효도를 우정의 특별한 형태로 보고 정당화하려는 덕 윤리학적 입장도 있다.

1.3. 비판

아비가 자식에게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근본된 뜻을 논하자면 사실 욕정이 결과로 나타났을 뿐 아닌가? 자식 또한 어미에게 또한 무슨 친함이 있겠는가? 비유컨대 병 속에 있던 물건을 꺼낸 것과 같을 뿐 아닌가?
후한서》 <공융전>[11]
어머니, 전 효도라는 말이 싫어요.
제가 태어나고 싶어서 나왔나요? 어머니가
저를 낳으시고 싶어서 낳으셨나요.
'낳아주신 은혜' '길러주신 은혜'
이런 이야기를 전 듣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와 전 어쩌다가 만나게 된 거지요.
그저 무슨 인연으로, 이상한 관계에서
우린 함께 살게 된 거지요. 이건
제가 어머니를 싫어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제 생을 저주하여 당신에게 핑계 대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전 재미있게도, 또 슬프게도 살 수 있어요.
다만 제 스스로의 운명으로 하여, 제 목숨 때문으로 하여
전 죽을 수도 살 수도 있어요.
전 당신에게 빚은 없어요 은혜도 없어요.
우리는 서로가 어쩌다 얽혀 들어간 사이일 뿐,
한쪽이 한쪽을 얽은 건 아니니까요.
아, 어머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난 널 기르느라 이렇게 늙었다, 고생했다"
이런 말씀일랑 말아주세요.
어차피 저도 또 늙어 자식을 낳아
서로가 서로에 얽혀 살아가게 마련일 테니까요.
그러나 어머니, 전 어머니를 사랑해요.
모든 동정으로, 연민으로
이 세상 모든 살아가는 생명들에 대한 애정으로
진정 어머닐 사랑해요, 사랑해요.
어차피 우린
참 야릇한 인연으로 만났잖아요?
<효도에>, 마광수[12]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사항입니다. 자연 생태계에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돌보는 게 생태적 현상은 아닌 거예요. 부모도 성인이고 자식도 성인이기 때문에, 각각 자기 개체의 보존을 해나가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생각을 할 줄 알기 때문에, 옛 은혜를 생각해서 나이 든 부모를 돌보는 거예요. 그런데 유교에서는 자식을 키우는 것보다 부모를 모시는 것을 더 우위에 두고 효를 중요한 윤리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은 의무이고,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것은 선택에 속합니다. 선택의 문제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되고, 안해도 죄가 아니라는 얘기예요. 부모가 자식을 버리면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지만, 자식이 부모를 돌보지 않는다고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를 돌보면 칭찬받을 일,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륜(승려)

비판적인 입장에서 효도를 바라볼 때 가장 중심이 되는 주장은, 효도는 부모 세대나 타인에 의해 강요될 것이 아니라 자식 스스로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부모가 자식을 잘 돌보지 않고 학대, 방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에게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공경하라 강요하는 것은 도리어 "뻔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설령 같은 자식 세대라도 가정환경이 다르니 남에게 참견하는 것도 오지랖일 뿐이다.

자식은 노후 보험애완동물도 아닌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다. 창작물에서 피조물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조물주는 선역이 아닌 악역이며 현실에서도 신에 대한 지나친 미화와 피조물의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강요하는 종교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부모에 대한 지나친 미화와 자식의 무조건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충효사상도 얼마든지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과거에도 효도에 대한 예의와 가치관 차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아버지 상중에 병이 나서 하녀를 시켜 환약(丸藥)을 만들게 했는데, 마침 찾아온 손님이 이 장면을 보게 되었다. 당시에는 부모의 상중에 병이 나거나 건강을 상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서 사람들에게 불효자라고 욕을 먹었다. 이후에 모친이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낙양에 안장했는데, 이는 고인을 고향 땅에 장사지내는 풍습에 어긋나는 일이 었기 때문에 또 다시 불효자라고 욕을 먹고는 파면당했기도 하였다.

이렇듯 효는 부모에 대한 감사가 기본적이기 때문에 자식에게도 효를 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필요한데, 무조건적으로 효를 해야 한다는 발상은 상처받은 자식들을 무시한 채 자녀의 책임만 강조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따라서 도리어 이 효 때문에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처받은 가정들이 사회 곳곳에 곪아있는 경우가 현대에 매우 많다. 이기적인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을 한국 사회에서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효 사상 역시 표면적으로만 따르기만 하고 방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치는 독거노인들이 증가하는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이며, 효의 강조는 역설적으로 부모에게 받은 비정상적인 교육법을 대물림하기도 한다. 실제로 아동 학대범 태반이 피학 경험이 있다. 결국 효를 귀히 여기는 문화가 일종의 권리로 작용하여 부모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않은 이들의 도주로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慈) 마음이 있어야 효가 뒤따라오는 법이며, 효 만큼 자식에 대한 애정과 교육도 무척 중요하다.

효도에 대한 강조가 물질적인 부양에 대한 강조를 낳고, 결과적으로 사회의 속물화와 보수화에 기여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효를 강조하면 할수록,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부모의 허영심을 충족해주고 용돈을 많이 줄 수 있어 효를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이 되고 그러지 못한 사람은 도덕적으로 열등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비하할 때 "너의 부모에게 미안하지도 않느냐." 같은 비난은 한국에서 굉장히 흔하다. 결국 자신이 돈이 필요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것이 도덕적 의무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또 이는 단순히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공자의 논어에도 "효의 끝, 즉, 완성은 입신하여 도를 행하고, 이름을 후세에 빛내어 부모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입신양명이 꼭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수 있으나 결국 사회의 주류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효도하는 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최근에는 자식 세대(소위 2030) 사이에서 86세대~베이비붐 세대에 대한 적대감, 혐오와 함께 효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점점 강화되고 있다.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는 건 물론 단순 취업조차 어려워지는 청년실업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부모 세대로부터 학업, 취업, 독립, 부모에 대한 경제적 부양 등으로 대표되는 효에 대한 압박감을 지속적으로 받다보니 효에 대해 점점 부정적으로 시각이 변화하고 있는 것. 이전과 달리 경제적 눈높이는 높아진 반면 핵가족화되면서 부양에 대한 심리적 부담은 더 커진 데다, N포 세대라 불릴 정도로 결혼, 출산을 포함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는 세대 입장에서 효도가 자신에게 무슨 의미냐는 타산적 생각도 적용될 수 있다. 사회경제적인 관점에서 효도는 다른 호혜적 관습과 마찬가지로 연금처럼 그것이 자신에게도 돌아올 것으로 기대되기에 믿고 투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고갈 위기와 함께 자식 세대가 번식 본능 자체를 포기하면서 미래를 어둡게 보는 풍조가 형성되었고, 효도 또한 투자 가치를 잃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에는 한번 직장을 잡으면 평생 먹고 살거나, 경지만 있다면 평생 소득을 얻을 수 있는 농경 사회였고, 자식이 경제력을 잃을 때쯤엔 부모가 사망하여 부양 의무를 덜 수 있던 때는 큰 상관이 없었다.[13] 하지만 의학의 발전으로 직장 은퇴 후에도 20년 이상 생존하게 된 것이 현재 상황이다. 출산율 하락에 따른 젊은층의 인구 감소로 인한 부양 노인 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이런 효 사상에 기대는 국가 정책에 더욱 반감을 갖게 만든다.

그 외에도 교육열에 불타 최대한 부족함 없이 열성적으로 지원하려는 부모는 많지만, 그만큼 인격적·정서적으로는 제대로 지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자녀의 성적은 잘 알아도 정작 자녀의 반 번호는 모른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물론 과거에는 교육이랄 것도 없이 방목하듯 키웠지만, 대신 그만큼 요구하는 눈높이나 기대도 낮았고 자립심과 모험심도 형성되기 쉬웠다. 그러나 지금은 취업이나 창업이 비교적 쉬웠던 베이비 붐 세대의 호경기가 아닌, 계층간 이동이 매우 경색된 레드 오션의 불경기이며, 어린 시절부터 겪는 경제난과 취업난 속에서, 부모의 어설픈 통제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꿈 없이 좌절하는 젊은이가 많은 실정이다. 이런 이들에게 아무런 경제적 이득과 반대급부 없는 효도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런 세대 갈등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면서 존속살해[14] 등 존속 대상 범죄가 해마다 증가하는 중이다.

이를 종합하자면 효도는 금수저가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금수저의 2세라고 해도 부모님께 항상 효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금수저는 태어나서부터 물질적으로나 환경적으로는 풍부하기 때문에 부모님으로부터 사랑과 믿음과 희망과 소망 등 관심을 많이 받고 다른 가정집 자식들과 다르게 부족함 없이 제대로 잘 성장해서 이런 좋은 환경을 부여한 부모님께 효도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기 쉽다. 실제로 몇몇 금수저들은 자신들이 부모에게 엄청나게 감사함을 느껴 효도를 철저히 잘 하기로 유명하다.[15] 그 반대로 흙수저는 자기 혼자 먹고 사는 것도 상당히 힘들어서 부모에게 효도를 할 여유조차 되지 않을뿐더러 자신도 원치 않게 태어났는데 괜히 억울하게 태어나게 만든 장본인인 자신의 부모를 원망하며 서로 찢어져서 따로 살게 되는 경우도 많다.[16]

또한 효도가 사회의 도덕률과 충돌할 때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부모가 도둑질을 하는 것을 목격한 자녀가 부모를 고발하는 것은 비도덕적인가? 효도를 중시하는 유교적 관점에서는 자녀가 부모를 고발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며, 설령 부모가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자녀는 이를 숨겨줘야 마땅하다고 대답한다.[17] 실제로 법에서는 이를 두고 기대가능성이 없다는 말로 친족이 범인을 은닉시켰을 경우 처벌을 할 수 없게 규정하고 있다. 아무리 법이라도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신고하게 강제하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고 옳지 않다고 본 것이다. 조선시대까지의 유교의 영향과 일제강점기 식민지배를 받은 영향인지 법적으로 형사소송법 제224조, 235조를 통해 자녀가 부모를 고소, 고발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18] 현대에 들어 부각되는 친부모의 방임, 아동학대나 과잉체벌 등의 이유로 위헌 논란이 크지만 아직까지 논의된 바는 적은 편이다. 최근 유류분 관련 일부 위헌판정과 친족상도례가 위헌 판정을 받기도 하여 금전적인 부분에 대해선 위헌을 받기도 하였는데 향후 이런 양상의 변화가 다른 분야로까지 변화되길 예상되는 부분도 보인다.

1.4. 여담

1.5. 관련 문서

2. 일본의 성씨

히라가나 ひょうどう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법 효도
통용 표기 효도, 효우도, 효우도우 등
최영애-김용옥 일본어 표기법 효오도오
로마자 표기 Hyōdō

일본의 성씨. 한자로는 兵藤, 兵頭 등으로 표기된다. 참고로 두 성씨 모두 실존하는 성씨.

2.1. 실존 인물

2.2. 가상 인물

3. 관련 문서



[1] 효도의 우리말[2] 빅토리아 시기 영국에서는 filial respect라고 불렀다.[3] 막장 부모, 가정불화, 고독사, 아동 학대, 저출산 기타 등등.[4] 영어 성경: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5] 일례로 알베르 카뮈의 역작 이방인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의 죽음에도 별로 슬퍼하는 기색도 없고 장례식에서도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간쓰레기 취급 받아 무죄 방명될 일이라지만 식민지인 살인이 사형이 되고 만다. 그만큼 부모에게 예를 갖추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당연시되는 일이었다는 것.[6] 최정묵. '논문: 인간다움에 대한 공자의 논변.' 동서철학연구 39.단일호 (2006): 43-64.[7] 황경식. '충효사상의 현대적 의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철학사상 12 (2001): 42-43[8] 황경식. '충효사상의 현대적 의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철학사상 12 (2001): 35-62[9] 권상우. '유학과 사회생물학의 대화-도덕의 기원과 정당성을 중심으로.' 동양철학연구 59.단일호 (2009): 485-518[10] 실제로 유학은 성선설에 기초한다[11] 공융은 공자의 후손이었으며 이름난 효자였다. 그러나 조조는 위 말을 꼬투리 잡아 불효자로 매도하고 공융과 그 처자식을 주살했다.[12]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못내 억울하고, 게다가 적반하장 격으로 세상에 내보내준 은혜를 고마와하라고 들입다 강조해대는 효 사상이 얄밉다"(마광수의 뇌구조), "어머니가 되어 자식을 키우는 경우 제일 먼저 명심해두어야 할 사항은 우선 아이가 아이 스스로의 뜻에 따라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아이는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 이 세상에 던져졌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된 사람들은 무조건 '희생적으로' 아이를 기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무언가 보답을 기대한다거나 흔히 말하는 '효도(孝道)'를 바라선 안된다."(젊은 엄마들에게 주는 글), "효도에 대한 지나친 강박증은 도리어 부모를 죽일 수도 있고, 부모의 후광에 대한 비굴한 기대감 역시 스스로의 정체성에 흠집을 내게 된다. 우리는 부모의 정자난자를 빌려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부모의 일차적 목적은 자식 생산이 아니라 섹스의 쾌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를 고마워 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다."(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그 외에도 마광수는 가족 관계가 개인에게 미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가족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탈가족주의)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김유식이 직접 정리한 마광수 교수 에세이 갤러리 참조.[13] 설령 부모가 사망하지 않아도 자식의 자식, 즉, 손자가 부양한다. 물론 이 경우에는 손자 입장에서는 부양이 따블로 늘긴 하는데 (손자 입장에서는) 조부모가 수명이 초월적으로 많지 않은 이상은 살더라도 얼마 못 가 사망하고 어차피 살아도 둘 다 살기보다는 둘 중 하나만 살 가능성이 높다.[14] 존속살해는 용어로 쓰이며 가중처벌되는 반면 비속살해라는 말은 생소하며 법적으로 그냥 일반적인 살인으로 취급되는 것, 비속살해 후 자살을 동반자살이라고 표현하는 것 등은 자식을 부모 소유물로 보는 영향으로 볼 수 있다.[15] 그리고 또 금수저는 기본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막대한 재산은 언젠가 남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는데 자기 자식이라도 패륜을 일삼는 자식이라면 썩 달갑지 않을 것이다. 또 집안에 형제자매가 여럿 있다면 서로간에 경쟁자가 되어 눈에 더 잘 띄기 위해서라도 경쟁적으로 부모의 마음에 들도록 효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을 효라고 부를 수 있는가? 진정한 사랑이 없는 행동이 효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물질을 위한 행위일 뿐. 사실상 그들의 부모는 이미 재물적으로 부족함이 없기에 정신적, 애정적 효를 원할 지도 모른다. 그것이 없다는 것은 효일 수 없을 것이다. 효 또한 받는 이가 판단할 일이지 주는 이의 행동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16] 다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게 대체로 본인이 흙수저에서 넉넉하게 먹고 살만큼 성공을 하게 되면 그래도 어려운 환경에서 못난 자신을 이렇게까지 키워주셨기 때문에 부모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며 부모와 같이 사는 경우도 많다.[19] 사회에서 객관적인 기준의 성공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흙수저를 벗어나지 못한) 부모와 헤어져 따로 사는 경우가 많다.[17] 이는 공자가 한 발언에서도 드러나는데 제자가 의 아버지가 살인을 했고 그것을 순이 알았다면 어찌 해야하냐고 묻자 공자는 그렇다면 "왕위를 버리고 아버지와 함께 멀리 도망쳐야 한다."고 주장했다.[18] 예외적으로 살인, 성폭행, 가정폭력은 신고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