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6군자(六君子)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이진 | 권부 | 우탁 | 신천 | }}}}}}}}} |
| 고려 성균좨주 문희공(文僖公) 우탁 禹倬 | |
| <colbgcolor=#fedc89><colcolor=#670000> 출생 | 1262년 (원종 3년) |
| 사망 | 1342년 (충혜왕 복위 3년) (향년 81세) |
| 국적 | |
| 시호 | 문희(文僖)조선 |
| 본관 | 단양(丹陽) |
| 자 | 천장(天章), 탁보(卓甫) |
| 호 | 백운(白雲), 단암(丹巖) |
| 세칭 | 역동선생(易東先生) |
| 부모 | 아버지 우천규(禹天珪) 어머니 이씨(李氏)[1] |
| 배우자 | 초취 영천 이씨(永川 李氏)[2] 재취 전주 최씨(全州 崔氏)[3] |
| 자녀 | 장남 우원광(禹元光) 차남 우원명(禹元明) |
| 친인척 | 오촌 조카 적성군(赤城君) 우길생(禹吉生) |
| 관직 | 영해사록(寧海司錄) 감찰규정(監察糾正) 성균좨주(成均祭酒) |
1. 개요
고려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 부친은 향공진사(鄕貢進士) 우천규(禹天珪).2. 생애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에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임명되었다. 영해군에 팔령(八鈴)이라는 요망한 귀신을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우탁이 부임하자 바로 그것을 부숴서 바다에 던져버리니, 음사(淫祀)가 드디어 근절되었다.여러 번 승진하여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는데, 그때 충선왕(忠宣王)이 부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淑昌院妃)[4]를 취하니[5] 우탁이 흰 옷 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메고 대궐로 나아가 상소하여 거리낌 없이 간언[6]하였다. 이에 주변 사람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었고 왕도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뒤에 연로하므로 예안현(禮安縣)으로 은퇴하였는데, 충숙왕(忠肅王)이 그 충의를 가상히 여겨 재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경사(經史)에 정통하였는데 특히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서 점을 치면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역정전(易程傳)」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나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우탁이 문을 닫아걸고 한 달 남짓 깊이 연구하였더니, 마침내 해득(解得)하여 생도들을 가르쳤는데, 그 때부터 이학(理學)이 비로소 행해졌다.
관직이 성균좨주(成均祭酒)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으며, 1342년(충혜왕 3)에 죽었다.
3. 사상
한국에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안향의 제자로서, 이진[7], 권부[8], 우탁[9], 백이정[10], 이조년[11], 신천[12] 등 소위 6군자 중 한 명이다. 안향 - 6군자 - 이제현 - 이색 - 정몽주로 고려 성리학의 계보가 이어진다.4. 둘러보기
| '''[[한국 문학|한국 문학사 {{{#!wiki style="font-family: Times New Roman, serif; display: inline"]]''' | ||||
| {{{#!wiki style="word-break: break-all; 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colbgcolor=#c1c1c1,#4a4a4a> 고조선 · 삼국 · 남북국 (BC 4C~AD 936년) | <colbgcolor=#eeeeee,#222222> 시 · 가요 | [[고조선| 고조선 ]][[신라| 신라 ]][[고구려| 고구려 ]][[백제| 백제 ]][[가야| 가야 ]][[발해| 발해 ]] | |
| 설화 · 소설 | [[신라| 신라 ]] | |||
| 산문 | [[신라| 신라 ]][[고구려| 고구려 ]][[백제| 백제 ]][[발해| 발해 ]] | |||
| 고려 시대 (936년~1392년) | 시 · 가요 | [[고려| 고려 ]] | ||
| 설화 · 소설 | [[고려| 고려 ]] | |||
| 산문 | [[고려| 고려 ]] | |||
| 조선 시대 (1392년~19세기) | 시 · 시조 | [[조선| 조선 ]] | ||
| 소설 | [[조선| 조선 ]] | |||
| 산문 | [[조선| 조선 ]] | |||
| 개화기 · 일제강점기 (19세기 말~1945년) | 시 · 가사 | [[구한말| 조선 ]][[대한제국|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 | ||
| 소설 · 극 | [[대한제국|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 | |||
| 산문 | [[구한말| 조선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 | |||
| 현대 (1945년~21세기) | 시 · 가사 | [[대한민국| 해방·전후 ~ 1970년대 ]] 김지하(타는 목마름으로 · 오적 · 무화과), 고은(만인보), 박목월(나그네), 조지훈(승무 · 낙화), 서정주(국화 옆에서), 김수영(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풀), 김춘수(꽃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신동엽(껍데기는 가라), 손로원(봄날은 간다), 신경림(농무 · 목계 장터), 이형기(낙화), 천상병(귀천), 백기완(묏비나리) | ||
| [[대한민국| 1980년대~2020년대 ]] 김민기(아침이슬 · 상록수), 나태주(풀꽃), 도종환(접시꽃 당신 · 흔들리며 피는 꽃), 박노해(노동의 새벽), 박주연(너에게로 또 다시), 안도현(너에게 묻는다), 이영훈(사랑이 지나가면), 장정일(샴푸의 요정), 기형도(입 속의 검은 잎), 최영미(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승자(삼십세), 정호승(슬픔이 기쁨에게), 제페토(그 쇳물 쓰지 마라), 허수경(혼자 가는 먼 집), 황지우(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
| 소설 · 극 | [[대한민국| 해방·전후 ~ 1970년대 ]] 황순원(소나기 · 카인의 후예), 박경리(토지 · 김약국의 딸들), 최인훈(광장), 이청준(당신들의 천국), 김승옥(무진기행), 윤흥길(장마 ·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조세희(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현기영(순이 삼촌), 황석영(장길산 · 삼포 가는 길 · 황석영 삼국지), 오정희(중국인 거리 · 유년의 뜰), 이강백(파수꾼 · 결혼), 하근찬(수난이대 · 흰종이 수염 · 야호), 이범선(오발탄), 손창섭(비오는 날 · 잉여인간), 김동리(무녀도 · 역마) | |||
| [[대한민국| 1980년대 ~ 2000년대 ]] 조정래(태백산맥), 이문열(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이문열 평역 삼국지), 최인호(고래사냥 · 상도 · 해신), 복거일(비명을 찾아서), 최명희(혼불), 양귀자(원미동 사람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신경숙(엄마를 부탁해), 은희경(새의 선물), 윤대녕(은어낚시통신), 공지영(고등어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마광수(즐거운 사라),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이영도(드래곤 라자)[1], 이우혁(퇴마록)[2] | ||||
| [[대한민국| 2000년대 ~ 2020년대 ]] 조창인(가시고기), 김훈(칼의 노래), 한강(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김영하(살인자의 기억법), 박상영(대도시의 사랑법), 장강명(표백), 정보라(저주토끼), 정유정(종의 기원, 7년의 밤), 김초엽(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3], 천선란(천 개의 파랑)[4], 손원평(아몬드) | ||||
| 아동문학 | ||||
| 산문 | ||||
| 세계의 문학사 둘러보기 | ||||
| 동양문학 | 한국문학(장르·고전·현대) · 중문학 · 일문학 · 인도문학 | |||
| 서양문학 | 그리스 문학 · 라틴 문학 · 영문학 · 불문학 · 독문학 폴란드 문학 · 노문학 · 이문학 · 서문학 · 포문학 스칸디나비아 문학 · 네덜란드 문학 · 켈트 문학 · SF | |||
| 중양문학 | 아랍 문학 · 페르시아 문학 · 튀르키예 문학 메소포타미아 문학 · 고대 이집트 문학 | |||
관련 문서: 한국 문학|향가|고려가요|시조|가사|고전소설|판소리|신소설|참여문학|순수문학|민중문학|장르문학|웹소설 | ||||
| }}}}}}}}} | |||
[1] 본관 불명.[2] 목사 이원백(李元伯)의 딸.[3] 최원숭(崔元崇)의 딸.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의 현손.[4] 본관은 언양 김씨. 충렬왕의 제3비였고, 충선왕의 제7비가 되었다. 진사 최문(崔文)과 사별한 과부였다가 충렬왕과 재혼하였고, 후에 충선왕과 삼혼하였다. 미색이 뛰어났다.[5] 다만 당시 몽골에는 부왕이 사망할 경우 모후를 제외한 부왕의 후궁들을 그 아들이 취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충선왕은 이러한 풍습을 따라 그녀를 취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6] 이것이 지부상소(持斧上疏)의 시초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결기를 알려주는 사례로 조선의 지부상소들이 유명하지만 그 시작은 고려시대의 우탁으로 본다. 전후 사정이 어떠하든 간에 유학자의 시선에선 족보상 어머니를 부인으로 취하는 충선왕의 행동은 폐륜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유학자로서 충언을 올린 것이다.[7] 검교첨의정승. 고려말 대학자이자 문하시중을 지낸 이제현의 아버지.[8] 첨의정승. 이제현의 장인.[9] 성균좨주.[10] 첨의평리 상의회의도감사. 이제현의 스승이자 사돈.[11] 정당문학. 고려말 권신 이인임의 조부.[12] 판밀직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