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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대한민국 초대 법제처장 유진오 兪鎭午 | Yoo Jin-oh | |||
출생 | 1906년 5월 13일 | ||
한성부 북서 가회방 재동계 재동동 제3통 제11호[1]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137번지)[2] | |||
사망 | 1987년 8월 30일 (향년 81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본관 | 기계 유씨[3] | ||
호 | 현민(玄民) | ||
재임기간 | 초대 법제처장 | ||
1948년 8월 4일 ~ 1949년 6월 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학력 | 재동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 /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 / 학사) 연세대학교 (법학 / 명예박사) 경희대학교 (문학 / 명예박사) | |
종교 | 유교 (성리학) → 개신교 (장로회) → 천주교 (세례명 : 토마) | ||
의원 선수 | 1 | ||
의원 대수 | 7 | ||
경력 | 제2·3·4대 고려대학교 총장 신민당 총재 헌법기초위원회 위원 초대 법제처장 한일회담 대표 제7대 국회의원 국정자문회의 위원 국토통일원 고문 | }}}}}}}}}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법학자, 교육자, 소설가, 정치인이자 초대 법제처장. 대한민국 제헌 헌법의 초안을 기초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2. 생애
2.1. 해방 이전
1906년 5월 13일 한성부 북서 가회방 재동계 재동동 제3통 제11호(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137번지)에서 아버지 유치형(兪致衡)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10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 재동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1919년 4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1924년 3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 해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제1회 문과A(법과 진학반) 수석[4]으로 입학했다. 1926년 예과 수료 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로 진학했으며, 학부생 시절에는 사회주의 서클인 '경제연구회'를 조직해 후배 리강국, 최용달, 박문규 등과 함께 활동했다.1929년 3월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형법연구실[5] 조수(1929.4~1931.3) 및 법철학연구실[6] 조수(1931.4~1933.3)로 연구했다. 1932년 4월부터는 기존 연구실 지도교수였던 하나무라(花村)로부터 경성제대 예과의 법학통론 강의를 넘겨받아 예과 강사로 출강했다. 1933년 3월까지 연장된 그의 조수 임기가 끝나면 독법강독(獨法講讀) 강의를 맡겨 법문학부 강사로 채용하는 것으로 경성제대 교수진에서 논의가 되어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이미 예과를 마치고 법문학부에 진학하던 1926년부터 '경제연구회" 활동을 한 바 있을 뿐만 아니라, 학부를 졸업하고 연구실 조수로 있으면서 경성제대 동기인 이종수(영문학 전공), 최창규(중문학 전공) 김계숙(철학 전공) 그리고 동경상과대학 출신의 김광진 등을 구성원으로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결성해 돈화문 근처에 사무실을 내어 대학 후배인 리강국, 박문규, 최용달 등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본인이 강의할 과목인 독법강독 교재의 선택권을 박탈당하고 라드브루흐(Radbruch)의 <법학입문>을 사용할 것을 강요당하는 등, 사상을 의심받게 되었고 결국 모교의 교수가 되겠다는 희망을 잃게 된다.[7]
그러던 와중에 유진오는 1932년 3월부터 천도교 재단으로부터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김성수에게 초빙되어 1932년 4월 보성전문학교의 (사실상 전임격의)[8] 강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1933년 4월 전임강사가 되었고, 1933년 4월 정식으로 전임강사가 된 현민은 동아일보 객원 기자도 지냈다. 1937년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고, 1939년에는 김성수의 강권에 의해 보전의 법과 과장 직위에 앉았으면서 유진오는 이후 인생 대부분을 바치게 되는 대학행정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학창시절부터 해오던 문학 활동을 지속 병행하여 '여직공(1931)', '김강사와 T교수(1935)' 등의 작품을 쓰면서 일제에 야합하는 지식인들을 비판하고 노동운동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좌파 탄압이 심해지자 사회주의자의 비참한 말년을 그린 '행보'라는 단편소설을 마지막으로 친일 반공 노선을 택했다. 1939년부터 친일로 변절하여 친일 단체에 가입하고 친일 칼럼을 실었다. 이 때문에 해방 후 사회주의 문인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이태준에 의해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 이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과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갔다.
2.2. 해방 이후
8.15 광복 후에는 우익 진영에 가담하였다. 1946년 보성전문학교의 후신 고려대학교 법정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법정대학 학장을 지냈다. 1948년 6월 1일 제헌 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회가 설치되자 헌법기초위원으로 임명되어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였는데, 그의 헌법 초고가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광복 후에도 과거의 좌익 행적으로 인하여 의심을 많이 받았다. 그 예로 제헌헌법 초안에 '인민'이라는 단어를 썼는데[9] 윤치영 초대 내무부장관을 비롯한 김준연, 김상돈이 공산당이 쓰는 단어라며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10][11][12]유진오가 만든 제헌 헌법 초안은 의원내각제와 양원제를 채택한 것이었다. 원래 대한민국은 독일처럼 의원내각제로 총리가 실권을 가지며 대통령은 그저 국가원수로서의 상징성만 갖는 존재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이런 실권 없는 대통령은 원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제헌 국회는 이승만의 강력한 주장으로 유진오의 초안을 급하게 수정하여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게 되었다.[13] 오늘날까지 한국의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의원 내각제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헌법과 관련하여 유진오는 헌법 전문(前文)에 대한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지금 헌법을 제정하여 민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데 이는 단순한 연합 각국의 승리와 후원의 선물이 아니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나라 국민이 3·1 정신과 같은 위대한 정신을 가지고 종시 일본 제국주의와 투쟁한 결과이며 금반 헌법을 제정하여 수립하고자 하는 정부도 기미년에 삼천만의 민의에 의하야 수립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계승하여 재건하는 것이라는 것을 웅장하게 선언한 것이다."[14]
1948년 8월 4일부터 1949년 6월 4일까지 초대 법제처장을 지냈다. 1952년 고려대학교로 복귀하여 대학원장을 지냈고, 1952년 9월부터 1965년 10월까지15년 간 제2·3·4대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총장 재임 당시 매우 유능한 교육 행정가였으며, 학교의 기강을 다잡아서 고려대학교의 강의와 교육이 옛날 일본의 제국대학 수준으로 충실하게 이루어지도록 기틀을 마련하였다. 강의 능력도 뛰어나서, 그의 헌법 강의는 대한민국 최고로 불릴 정도였다.[15]
고대 총장으로서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려대 4.18 의거 당시에는 시위 중인 고대 학생들을 보호하고자 몸소 시위 장소인 국회의사당 앞에 나아가 학생 대표들을 설득하여 경찰의 안전귀가 약속하에 해산하게 하는 노력을 하였으나 학생들이 돌아가는 길에 정치깡패들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 시민들이 분노했고 이는 결국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고대 총장직을 그만 둔 후, 1967년 민중당에 대통령 후보로 영입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신한당 윤보선 후보와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로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후에는 통합 야당 신민당의 총재로 취임하였고, 1967년 6월에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현역 전국구 국회의원인 민주공화당 김성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3선 개헌안이 날치기로 통과된 것에 충격을 받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1970년 이후 당권을 유진산에게 넘겨준 뒤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 때만 해도 박정희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투사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의 친일 전력에도 불구하고 국민들과 대학생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의원직 사퇴 이후 자택에서 요양하다가 1980년부터 전두환 대통령의 국정자문위원 제의에 응해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1983년 5월 29일에는 유치송 민한당 총재, 김수환 추기경 등과 함께 김영삼의 단식 투쟁을 중단하자고 권유하기도 했다.
1987년 8월 3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고려대학교가 전직 총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성대하게 치러주었는데, 당시 NL 계열이 장악하고 있던 총학생회는 "민족 고대가 변절자의 장례식을 치러주는 것은 수치"라고 주장하며 장례식장에서 농성을 벌였다.[16][17]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7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종로[18] | [[신민당(1967년)|]] | 55,703 (69.58%) | 당선 (1위) | 초선[19]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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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20]) | }}}}}} |
4. 여담
- 세 번 결혼하였다. 1919년 성진순과 결혼하였다가 1926년 사별하였고, 1928년 박복례와 재혼하였으나 다시 사별하여, 1956년 이용재와 재혼하였다. 부인 이용재는 "이명래 고약"을 개발한 이명래의 딸이며, 독립유공자이자 국립극장장을 역임한 이용상의 누나이다.
- 3남 4녀를 두었는데, 차남 유완은 연세대학교 도시공학과 명예교수이고, 삼남 유종은 첼리스트로 포항시립교향악단 지휘자를 역임했다.
-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에서 고경표가 연기한 유진오는 미국 극작가 유진 오닐에서 따왔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사람과의 공통점이 생각보다 많다.[21] 일제강점기 상류층 출신 엘리트에다가 항일운동을 하다 나중에는 항일운동세력을 배신[22][23]했다는 속성때문에 극중 인물의 모티브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 소설가 이효석의 경성제1고보, 경성제대 1년 선배이다. 경성제1고보 시절부터 이효석은 소설을, 유진오는 시를 서로 보여주고 평가하면서 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효석이 글을 써서 받은 고료로 자주 술을 먹었다고 한다. 이효석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 중 하나일 정도로 가까운 친우였다.
- 경기도 하남시 상산곡동 512-2번지에 '현민 유진오 박사 생가터'가 있다. 2006년 8월 21일 하남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유진오의 출생지가 서울특별시로 기록되는 것으로 보아 이 터에 있던 생가에서 출생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하남시 상산곡동·하산곡동 일대가 기계 유씨의 집성촌인 것으로 보아 아버지 유치형의 출생지 내지 유진오의 원적지인 것으로 볼 수는 있다.
- 시인 유진오랑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동명이인일 뿐만 아니라 인연도 있는데 추후 여순사건에 엮어 시인 유진오는 사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 당시 유진오가 앞장서서 구명운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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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아버지 유치형이 1907년 살았던 주소지가 바로 이곳이다. 주간조선 기사에서 유진오의 차남 유완이 "할아버지께서 이곳에서 사셨다"고 증언하였다.[2] 주간조선 기사[3] 충목공파(忠穆公派) 35세손 진○(鎭) 항렬이다.[4] 문과B(문과 진학반) 수석은 이종수 서울대 교수였다.[5] 형법학 강좌 교수: 하나무라 미키(花村美樹).[6] 법철학 강좌 교수: 오다카 도모오(尾高朝雄). 다만 이 때 오다카 교수가 양행(洋行) 중이어서, 실제로는 후나다 쿄지(船田亨二) 교수의 감독을 받았다고 한다.[7] 이 경험은 이후 유진오의 대표작 '김강사와 T교수(1935)'에 반영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전문학교 독일어 강사로 생계를 유지하던 중 대학 시절 좌익 서클 활동이 문제가 되어 곤욕을 치른다. 이를 두고 소설에서는 '인생이란 도대체 모순 그것이 아닌가', '이 사회에서는 이중 삼중 사중 아니 칠중 팔중 구중의 중첩된 인격을 갖도록 강제되고 있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는데 당시 유진오의 심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을 듯하다.[8]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수 임기가 1933년까지여서 명목상 시간강사 신분으로 있었으나, 사실상 전임강사의 역할을 하고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9] 유진오 헌법초안의 제2조가 “국가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발한다.”이다. 현행헌법 제1조 제2항에 해당한다.[10] 결국 '인민' 부분은 모두 '국민'으로 변경되었다.[11] 참고로 일제강점기 시절 좌우 가리지 않고 사용하던 '인민'이란 단어가 이 사건 이후로 대한민국에선 완전히 금지어가 돼버렸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을 의미하므로, 국가 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 결국 우리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셈이다" (유진오, 「헌법기초회고록」 65쪽, 일조각 刊)[12] 참고로 이후 제2공화국 때 민주당 구파가 탈당하고 창당한 "신민당" 역시 처음 당명을 정할 때는 '자유인민당'이 유력한 후보였다. 물론 김도연 등은 "빨갱이 같다. 아직 우리나라에선 안된다." 하며 반대해 낙마했다.[13] 당시 유진오는 이승만에게 대통령제가 되면 독재가 일어날 수 있다며 의원내각제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으나 이승만은 계속 대통령제 만을 고집하여 결국 이승만의 뜻대로 대한민국은 대통령 중심제 국가가 되었다. 유진오의 경고처럼 이승만의 민주적 선거를 통한 독재로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의원내각제가 도입된 제2 공화국에는 선거를 통한 독재는 막았을지는 모르지만 군사 쿠데타로 인해 다시 좌절된다. 그러나 박정희 역시 유진오의 경고대로 대통령제를 이용해 독재를 한다.[14] 이를 두고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도 많다. 왜냐하면 이전에 친일행적 당시 대동아 전쟁 운운하던 사람이 광복을 하기 무섭게 이같은 행보를 보였고, 이로 인하여 다른 학자나 정치인들의 의심을 쉽게 받았다.[15] 그야 제헌헌법을 기초한 사람이 바로 유진오였기 때문. 요즘 말로 하면 저자직강 되시겠다.[16] 총학생회뿐만 아니라 행정학과 이문영 교수를 비롯하여 여러 교수들도 저항했다.[17] 반발할 만도 한 게 친일을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속죄하나 했더니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전두환에게 빌붙었으니...[18] 제1지역구[19] 1969.9.18 신민당 해산 (3선 개헌 반대에 따른 제명)[20] 종로구[21] 유진오가 무명의 역사 인물은 아니므로, 제작진이 유진 오닐만 알고 진짜 유진오를 모르는 채 작중 인물의 이름을 유진오로 지었을리는 없다. 작중 인물과 실제 유진오의 나이도 비슷하고, 작품을 위해 항일사에 대해 조사하다 보면 알게 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친일파였던 시절이 있기 때문에 논란을 피하고 싶던 작가와 제작진이 유진 오닐만 언급하고 유진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22] 작중 유진오가 항일세력을 배신한것도 1930년대, 실제 유진오가 친일행보를 시작한 것도 똑같이 1930년대.[23] 물론 드라마 인물과 몇몇 속성들이 다르긴 하다. 드라마는 실제 유진오가 가진 속성(일제강점기 상류층 조선인, 엘리트 조선인, 작가, 기자, 항일세력 배신 등)을 작중의 유진오와 서휘영이 나눠 갖는 느낌이다. 드라마 속 유진오는 독립운동 동지이자 짝사랑하는 여자가 일본군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녀를 살리려고 배신했고, 결국 그의 배신을 용납 못했던 그녀에게 살해당한다. 그리고 드라마 속 유진오는 겉으로 친일파인 척하면서 뒤로는 항일세력에게 큰 돈을 대주는 돈줄 역할이고, 실존 인물 유진오처럼 뛰어난 작가는 아니다. 뛰어난 글재주를 가진 작가라는 속성은 유아인이 연기한 서휘영이 가져갔다. 대신 서휘영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법학자 겸 작가였던 현실의 유진오와 달리, 경성제대 의학부를 자퇴한 작가 겸 항일운동가로 나온다. 그래도 역사의 유진오처럼 작중 서휘영도 경성제대 시절 수석도 했고, 기자생활도 한다.뭐 어쨌거나 경성제대 출신 엘리트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