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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3 15:16:02

김광진(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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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학문적 업적
3.1. 실학 연구와 자본주의 맹아론과의 관계
4. 스캔들

1. 개요

金光鎭
1903년 ~ 1981년

북한의 경제학자. 보성전문학교 상과 및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교수.

2. 생애

1903년 6월 23일,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상과대학(現 히토츠바시대학)을 졸업하였다. 백남운의 동경(도쿄)상과대학 후배이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1931년 9월 리강국 등과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연구실 조수로 있었다.

보성전문학교의 시간강사를 맡다 1932년 유진오, 오천석과 함께 보성전문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1939년까지 경제사, 상업학 등을 강의하였다.

재직중 여러 강연회에 강사로 활동하고 '보전학회논집' 등의 학술지와 '동아일보' 등의 신문에 경제평론이나 조선경제사 관계 논문을 발표하였다. 좌익 경향을 띠는 교수였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1939년 강단에서 물러난 뒤에는 평양으로 내려가 고무공장을 경영하였다. 광복 후 1945년 8월 1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가 결성되자 무임소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45년 8월 2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가 합작하여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되자 상공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에서 1947년 사이에는 백남운을 통해 남한 학자들을 입북시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임용시키는 소임을 맡았다. 일설에는 이때 김일성의 경제 교사였다는 말도 있다.

1949년 5월에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1954년 과학원 후보원사, 같은 해 10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강좌장을 맡았다. 1957년 3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 부장교수가 되었다.

1960년대 초중반 노예제 유무 및 삼국시대 사회성격을 둘러싸고 김광진, 김석형 등의 봉건제론과 도유호, 임건상, 백남운 등의 노예제론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이후 김광진은 정약용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실학 연구로 옮겨갔다.

이후 1960년 11월 과학원 경제법학연구소 소장, 마르크스레닌주의 방송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강좌장, 과학원 상무위원 등을 거쳐 1963년 5월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64년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장이 되었다.

1964년 6월 중국 북경(北京)에서 개최된 아시아경제세미나에 북한 학자 대표 중 1인으로 파견되었다. 정치활동으로는 1961년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직책을 맡았고,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73년 7월, 만 70세 생일에 즈음하여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1년 9월 10일에 사망하였다. 이후 애국렬사릉이 조성되자 그곳에 안장되었다.

3. 학문적 업적

조선 후기와 일제 시기 경제사·운동사 및 정약용의 경제사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화폐사, 재정사도 그의 연구분야였다. 한국사의 아시아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출발하였으나 이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이 조선에도 적용되었다는 일국사적 발전단계론으로 옮겨갔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적용하여 조선 후기의 경제적 상태를 해명하면서, 한국 경제사에는 노예제 단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1933년 백남운의 저서 <조선사회경제사>에 대해 "본서(本書)는 맑스주의의 입장에서 조선사회의 발전법칙을 과학적으로 규정한 점에 있어서 종래의 조선사에 일대청산을 필(畢)한 것이라고 볼 수 잇다. (중략) 그러나 이 시대의 노예계급(奴隸階級)이 중요한 직접생산계급이엿엇음에는 틀림없으나 (중략) 경제기구의 특징을 간단히 '노예국가'로써 단정하여 버림이 반다시 정당한 견해일가를 나는 다소 의심하는 바"라고 비판했다.

1937년에는 '고구려 사회의 생산양식 - 국가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삼국지 동이전이나 광개토대왕릉비 등에서 보이는 하호(下戶)라는 용어에 대해 "하호는 대체로 피정복, 씨족공동체원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백남운이 하호를 노예(奴隷)로 규정하여 고대 한국에 노예제가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너무 앞서나간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노예의 존재를 가지고 바로 노예소유자적 구성, 즉 노예제 사회로 규정짓는 것은 조급하다고 비판하면서 3세기에 이르기까지도 고구려는 씨족사회를 아직 벗어나지 않았고, 호태왕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내노예제보다도 수취관계로서 가장 지배적이었던 것은 '공납제(貢納制)'라고 주장하였다.

1949년에는 '조선민족해방투쟁사'의 일부를 집필했으며, 1955년 김광진은 「조선에 있어서의 봉건제도의 발생 과정-노예 소유자적 구성의 존부 여하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력사과학』 1955년 8/9월호)를 통해 조선은 원시공산제에서 봉건제로 직접 이행했다는 노예제 결여론을 주장하였다. 그러자 이듬해 도유호는 「조선력사상에는 과연 노예제 시대는 없었는가」(『력사과학』 1956년 3월호)에서 고대 한국에도 노예제가 존재했다고 비판하였고, 다시 김광진은 「삼국시대의 사회경제구성에 관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력사과학』 1956-5/1956-6)로 재비판하였다. 김광진이 저술한 이 논문은 북한에서의 조선사 시기 구분 논쟁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논쟁은 고대 한국 사회에 대해 김광진, 김석형의 봉건제론과 도유호, 임건상, 백남운의 노예제론이 대립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팽팽한 논쟁을 이어가던 쌍방의 논자들은 1960년에 들어 서면서 고조선을 '노예 소유자 사회(고대 동방형의)'로 규정하는 데 합의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주어진다. 결과적으로 삼국 시대는 봉건제로 규정되며 이는 노예제를 고조선, 부여, 진국 시대에 설정함으로써 가능해진 셈이다. 1962년에 나온 『조선통사 상』 개정판은 이러한 내용을 담았다. 1960∼62년에 걸쳐 스무 차례에 달하는 학술토론회가 개최된 뒤, 1963년에 『고조선에 관한 토론 론문집』과 더불어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가 출간되었다. 삼국 시대만 놓고 보면 김광진의 봉건제설이 채택된 것처럼 보이나, 논쟁의 발단이 노예 소유자적 구성의 존부 여하를 놓고 벌어진 것임을 감안하면 고조선=노예제설은 김광진의 주장이 패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역사학은 노예제의 결여라는 조선적 특수성을 강조하기보다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이 조선에도 관철되었음을 인정하는 방향을 채택한 것이다.

1963년 김광순·변낙주와 함께 '조선경제사상사(상)'을 공동 집필하였다. 그 후 1973년에는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이라는 논문을 공동저술하였다.

3.1. 실학 연구와 자본주의 맹아론과의 관계

1930년대 이후 최익한은 정약용에 대한 많은 연구를 발표하면서 정약용 사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하였으며, 그는 북한 역사학을 주도하면서 『실학파와 정다산』(1955)을 간행하였다. 김광진이 정약용을 반봉건적 혁명 사상가이자 탁월한 경제 사상가이며 애국적인 정치 활동가로 평가한 것 역시 최익한의 정약용 평가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60년대 초반 김광진은 내재적 발전의 사상적 자원으로서 실학에 주목하였지만, 자본주의 맹아론과는 거리를 유지하는 입장이었다. 김광진은 조선 후기에 우리 나라에서 자본주의적 맹아의 발생은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감촉되지 못 하리 만큼 극히 미약했다고 하면서, 경제적 발전이 지지부진함에도 계몽사상의 발아가 되는 사상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현실적인 차원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며 이를 부정하는 것은 경제적 유물론이라고 비판하였다. 즉 우리나라에서도 미약한 자본주의적 요소에서 계몽 사상이 발생한 것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1973년 김광진이 정영술, 손전후와 함께 간행한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에서는 일국사적 발전단계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 맹아론을 받아들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의 머리말은 "사대주의와 교조주의, 민족허무주의와 민족배타주의를 철저히 극복하고 종래 제국주의자들과 일제어용학자들이 부르죠아적독단론에 기초하여 떠벌이던 《아세아적정체론》, 《후진국개발론》과 《자본주의이식론》, 《식민지통치유익설》 등을 견결히 반대배격"한다고 그 입장을 표명하였고, 19세기 조선 사회가 ‘공장제 수공업’ 즉 매뉴팩쳐 단계에 들어섰다고 주장하였다.

4. 스캔들

보성전문 교수 시절, 평양에서 체호프의 ‘앵화원’이라는 연극을 관람하였다가, 거기에 출연하고 있던 조선일보 기자 노천명에게 반하였다. 노천명은 시인 김기림의 구애도 칼같이 거절하였을 만큼 까칠하고 도도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김광진의 구애에는 흔쾌히 마음을 열었다. 평양의 개운사에서 처음 만난 이래 그들의 연애는 불꽃을 튀겼으며, 김광진은 곧 아내와 이혼하고 노천명과 재혼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아내와 이혼을 협의하러 경성으로 간 김광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노천명은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김광진의 동료 교수였던 유진오는 잔인하게도 이 스토리를 '이혼'이라는 소설로 써버렸다. 이에 격분한 모윤숙, 이선희 등 동료 여성 문인들이 모델을 밝히라며 유진오를 찾아가 삿대질을 하며 싸웠는데, 이러한 소동은 노천명의 수모를 세간에 더욱 더 널리 알려지게 만들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김광진이 노천명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은 것이 아내와의 의리때문이 아니라, 기생 출신의 1930년대 인기 가수 왕수복 때문이라는 데 있었다. 왕수복은 본디 이효석 죽기 직전의 마지막 연인이었는데, 1935년 실시된 인기투표에서 ‘목포의 눈물이난영을 3위로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을 만큼 당대의 스타였다. 그녀는 미모의 기생 출신이지만 유학을 떠나 음악을 공부하여 성악가가 됐으며, 평양의 대학 교수로서 종생했던 의지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런 면모들은 무려 14살이나 연상이었던 김광진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1]

그 후 김광진은 보성전문 교수직을 그만두고 평양에서 고무공장을 경영하며 왕수복과 같이 살았다. 남북 분단 이후 김광진은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되었고, 왕수복은 공훈배우가 되었다. 김광진은 1986년에 죽었고, 왕수복은 나이 여든에 김정일의 호의로 ‘독창회’까지 열고 2003년에 죽었다.


[1] 여담으로, 노천명은 이걸 보고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란 시를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