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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8:25:51

안톤 체호프

체호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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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000000><colcolor=#ffffff> 안톤 체호프
Антон Че́хов|Anton Chekhov
파일:Anton_Chekhov_1889.jpg
본명 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국적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860년 1월 29일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 현[1]
사망 1904년 7월 15일 (향년 44세)
독일 제국 바덴바일러
직업 극작가, 소설가, 의사
서명
파일:Подпись_Антон_Чехов.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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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묘소 <colbgcolor=#fff,#1f2023>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
학력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의학 / 학사)
사조 리얼리즘
활동 기간 1878년1904년
신체 185cm
종교 무종교[2]
부모 아버지 파벨 예고로비치 체호프
어머니 예브게니야 체호바
배우자 올가 크닙페르 (1901년 결혼) }}}}}}}}}
파일:Chekhov_1898_by_Osip_Braz.jpg
초상화

1. 개요2. 생애3. 작품 세계
3.1. 소설3.2. 희곡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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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Не говори мне про свет луны; покажи мне лучше мерцание света на треснутом стекле.
내게 달빛에 대하여 말하는 대신, 깨진 유리창에 비치는 한 줄기 빛을 보여 줘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활동했던 러시아극작가, 소설가, 의사.[3]

알렉산드르 푸시킨에서 시작되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레프 톨스토이로 절정을 이루었던 러시아 문학 황금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문호로 꼽힌다. 러시아에서는 체호프를 "황혼의 작가"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2. 생애

1860년 러시아 제국타간로크(Таганро́г)에서 6남매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4]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노였다. 할아버지 대에 자수성가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고 어느 정도 먹고 살 정도의 규모의 잡화상을 운영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림과 음악 등 예술에 조예가 깊은 인물로 교회 성가대를 조직하고 지도하였는데, 7살부터 교회 산하에 있는 유치원에 다니던 체호프도 형제들과 함께 그 성가대에서 노래를 했고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가 저술한 많은 작품의 모티브가 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찬송가, 사도행전에서 종교 교육을 받았는데... 나는 내 어린 시절이 아주 음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난 종교가 없다. 옛날에 두 형과 함께 교회에서 <좋아지리라>나 <대천사의 목소리.를 트리오로 부를 때면, 모두들 감동해서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 부모님을 부러워했지만 그 당시 우리는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1892년 3월의 편지

9살에 따간로그 중등학교에 입학했고, 이 나이부터 새로 차린 아버지의 가게 '차, 설탕, 커피 그 외 식민지에서 수입한 상품들'에서 일했다. 1873년 가을에는 처음으로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아름다운 헬레네'를 관람하고 연극에 관심을 가졌다. 형제들과 집안에서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1875년에는 <키르키즈인>을 썼는데, 이 작품은 학교 시절 저술 중 유일하게 전해지는 작품이다.

1876년 아버지의 가게가 파산하여 집안이 몰락하였다. 안톤을 제외한 가족들은 모스크바로 이주하지만, 그는 남아서 고학으로 학교를 수료한다. 이 무렵에도 손으로 쓴 잡지 <말더듬이>에서 따간로그의 삶을 코믹하게 묘사하고, 학교 친구인 드로씨의 아마추어 연극에서 코믹한 노인 역할을 했다. 1877~78년에는 학교 잡지 '여가 시간'에 <세미나 인생>등을 발표했고 인생 최초의 희곡이며 미완성 작품인 장막극 <플라토노프>[5], 단막극 <지혜 겨루기>, 보드빌 <닭이 쓸데없이 우는 게 아니다>를 집필했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플라토노프 뿐이다.[6]

1879년 따간로그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족이 있는 모스크바로 이주하고, 모스크바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아직 학부생 신분이긴 했지만 가난한 사람이 병원 갈 돈이 없어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환자의 집까지 찾아가서 기초적인 치료를 무료로 해 준 적이 많았다고 한다. 또 가족의 생계를 위해 푼돈이라도 벌 목적으로 취미로 쓰고 있었던 단편소설들을 시험삼아 여러 출판사에 보내 보았다. 그런데 이 원고가 호평을 받으면서[7] 그의 글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1882년 단편 모음집 <농담>을 출간하고, 1883년 모스크바 근교의 병원에서 일했다. 1884년 6월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크레쉔스크 시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안토샤 체혼떼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유머 단편집 <멜뽀메나의 이야기>를 출간한다. 1885년에는 단막극 <큰 길가에서>를 집필했으나 검열 대문에 출판하지 못한다. 이해 12월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하면서 '페테르부르크 잡지'를 운영하는 작가이자 평론가인 알렉세이 수보린과 처음 만나게 된다. 1886년 수보린이 발행하는 신문 '새 시대'에 단편들을 기고하고, 두번째 단편집 <잡다한 단편들>을 출간한다. 이 해 작가 D. V. 그리고로비치가 보낸 재능을 낭비하지 말라는 충고를 담은 편지에 감동해 자신의 문학적 재능에 크게 고무되었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전업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맏형 알렉산드르는 이때 평론가기자로, 둘째형 니콜라이는 화가로 활동했는데 니콜라이는 동생의 작품에 삽화나 표지를 그려주었다.

당시 유럽의 관점에서 보면 하층민이 그냥 대학도 아닌 의대를 나온 것도 상당히 의외인 일인데 심지어 귀족들의 직업으로 여겨진 문학가의 길을 택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케이스였다. 냉전 시절까지는 러시아 제국 시대의 역사가 외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서방의 문학가와 사학자들은 당연히 그가 귀족 출신일 것이라고 확신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알려져 있었지만 소련 붕괴러시아 혁명 이전의 역사가 대대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체호프가 하층민 출신의 문학가였다는 것이 알려졌다.

엄청난 수의 단편 소설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1886년 한 해에만 무려 116편의 단편을 썼고 1887년엔 69편을 썼다. 작가 생활 초기에는 정말 취미 정도의 이야기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글을 많이 쓰게 되면서 점점 작가로서 성장하며 진지하고 철학적인 주제를 내세우게 되었다.

당시 유럽 출판계에서는 원고료를 단어 수와 비례하게 매겼기 때문에 이 시기의 유럽 소설들은 대부분 분량이 매우 방대했다. 도박으로 빚을 많이 졌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 유별나게 긴 것도 이 때문이다.[8] 반면 체호프는 반대로 간결하면서도 재미있는 글을 쓰는 경향을 보였다.

1887년 9월 모스크바 코르쉬 극장의 극장장 코르쉬의 요청으로 희곡 <이바노프>를 완성하고, 세번째 단편집 <해질녘에>, 네번째 단편집 <정직한 대화>를 출간한다. 11월에 코르쉬 극장에서 <이바노프.가 공연되었는데, 이 작품과 공연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나온다.
첫 공연에서 객석이나 무대 뒤나 아주 흥분되어 있엇는데, 그런 건 32년간 극자에서 일하고 있던 프롬프터도 보지 못한 거였어요.
1887년 1월 형 알렉산드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난 괴짜 짓을 하고 싶어요. 단 한 명의 악인도 천사도 없고(비록 광대들의 수를 적게 할 수 없다고 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아무도 정당화하지 않으며....하지만 이걸 성취했는지는 모르겠어요...
1887년 10월 형 알렉산드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꾸진스키와 함께 '덴마크 왕자 햄릿'이라는 보드빌을 구상하기도 했지만 무산된다. 이후 체호프의 많은 작품에 셰익스피어 희곡의 소재와 주제가 엿보인다.

1888년 첫번째 장편소설 <스텝>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간되었다. 10월에는 <해질녘에>로 예술 아카데미로부터 푸시킨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에 단막극 <백조의 노래>와 <곰>을 발표했고, 모스크바 코르쉬 극장에서 두 작품 모두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다.
아, 만일 '북녘 신문'에서 내가 보드빌을 쓰는 걸 알면 나를 파문할 겁니다. 하지만 손이 근질근질하고 그런 걸 써보고 싶은데 어쩌겠어요. 심각한 걸 쓰려고 애써봤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요...
1888년 2월 한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2월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차이코프스키와 교류를 가졌는데, 그의 음악을 좋아한 체호프는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대본을 쓰고 싶어했고 '벨라'라는 오페라에 대해 논의했다.

1889년 1월, <이바노프>를 개작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리스키 극장에서 무대에 올린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내 희곡이 크게 성공해서, 난 월계관을 쓰고 돌아왔습니다.
1889년 2월 한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해 화가인 둘째형 니콜라이가 폐결핵으로 사망하며 큰 충격을 받는다.

같은 해 단막극들 <청혼>, <타치야나 레피나>, <담배의 해로움에 관하여>를 집필하고, 두 번째 장막극 <숲의 정령>[9]도 집필한다. 12월에 모스크바의 아브라모바 극장에서 숲의 정령을 공연했으나 실패하자 살아생전 두 번 다시 공연하지 않았고, 출판도 허락하지 않았다.
<숲의 정령>을 출판할 수 없습니다. 난 이 희곡을 증오하고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1889년 10월 편지에서.

1890년에는 차이코프스키에게 헌정한 단편 모음집 <침울한 사람들>을 출간하고, 단막극 <결혼 피로연>, <강요된 비극 배우>를 발표한다. <숲의 정령>을 개작하기도 했으나 끝내지 못한다. 이 해 작가로서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계기가 된 시베리아 횡단 및 사할린섬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는 홍콩실론 섬도 방문했다. 이전까지 체호프는 레프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이 여행에서 얻은 경험을 계기로 체호프 본인의 독자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더불어 여행 경험을 토대로 체호프는 여행기 <시베리아에서>와 사할린 관찰 보고서인 <사할린 섬>을 집필, 출판하였다. 사회 고발적인 성격이 강한 수필이다.
파일:체호프 사할린섬 삽화.jpg
소설 '사할린섬'의 삽화

당시의 시베리아나 사할린은 유배지이자 러시아 제국에서도 가장 변방이었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대다수가 가난은 물론이며 정부의 탄압과 무관심에 시달렸던 지옥같은 곳이었다. 의사이기도 한 체호프는 학부생 때 그랬던 것처럼 여행 중에 무상으로 주민들을 진료해 주기도 했는데 이 덕분에 소련에서도 인민을 위하여 봉사한 작가라고 존경받았다.

불행히도 체호프는 이 여행 이후 결핵에 걸려 자주 앓아눕기 시작했다. 그를 걱정하던 형과 아버지도 결핵으로 죽어서 그도 전염되었다는 설도 있고 시베리아 여행에서 환자들을 진료해 주면서 전염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그는 결핵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자 자신이 언제든 곧 죽을 수 있음을 각오하며 살았다고 한다.

1891년에는 단막극 <기념일>을 집필하고, 첫 유럽 여행을 떠나 , 베니스, 로마, 파리를 방문한다. 1892년에는 기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구호운동에 참여하고, 이듬해까지 콜레라 확산 방지 의료 활동을 했다. 3월에는 모스크바 근교의 멜리호바로 이주한다. 11월에는 '러시아 사상'에 중편소설 <6호실>[10]을 기고한다.

1894년에는 2번째 유럽 여행을 떠났고, 1895년 8월에는 <사할린 여행기>를 출간하고 야스나야 폴랴나를 방문해 레프 톨스토이와 만났다. 그리고 장막극 <갈매기>를 집필한다.
비록 무대의 조건을 무시하며 끔찍한 걸 쓰고 있지만, 만족스럽게 작품을 쓰고 있어요. 코미디이고, 여자 역할 셋, 남자 역할 여섯에, 4막이고, 풍경(호수가 보이는)이 있으며, 문학에 대해 많은 대사, 사건은 적고, 5쌍의 사랑이 있습니다.
1895년 10월 수보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896년에는 딸레쥐 마을의 초등학교 건립 후원자로 활동했고,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리스키 극장에서 <갈매기>를 초연했으나 실패하여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2년간 다른 극단들의 갈매기 공연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희곡은 굴욕적으로 크게 실패했어. 극장에는 의혹과 굴욕의 무거운 긴장감이 돌고 있었지. 배우들은 추악하고 바보들처럼 연기했어. 여기서 교훈을 얻었어. 희곡은 쓰지 말아야 한다는.
1896년 10월 동생 미하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897년에는 노비스욜끼 마을의 초등학교 건립 후원자로 활동한다. 3월에 출혈 등 심각한 폐결핵 증세가 일어나, 프랑스에서 요양하며 에밀 졸라드레퓌스를 위한 사면 운동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리고 과거 실패했던 <숲의 정령>을 개작한 장막극 <바냐 아저씨>를 집필한다.

1898년 오랜 지인 수보린이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보수적인 견해를 지닌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와 절교했다. 같은 해 멜리호바에 학교를 건립했고, 극작가 겸 평론가인 네미로비치 단첸코가 <갈매기>에 매혹되어 끈질기게 요청하자 새로 창단한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재공연을 허락한다.
<갈매기>는 나를 매혹시킨 유일한 현대 희곡이고, 당신은 모범적인 레퍼토리로 연극을 위해 커다란 흥미를 불러일으킨 유일한 현대 작가입니다.
1898년 5월 네미로비치 단첸코가 체호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해 9월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여배우 올가 크닙페르와 처음 만나게 된다. 건강이 악화되어 얄타에서 요양하기도 했으나, 12월 스타니슬랍스키와 네미로비치 단첸코의 연출로 공연된 <갈매기>의 대성공으로 극작가 체호프가 재조명된다.

1899년 3월 막심 고리키와 처음 만났고, 모스크바의 말리 극장에서 먼저 <바냐 아저씨>공연 허락을 요청했지만 네미로비치 단첸코의 끈질긴 요청으로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초연을 허가한다. 공연은 성공했다.
희곡의 내용은 거대하고 상징적이며, 형식은 아주 독창적이고 탁월한 작품입니다.
1900년 1월 고리키가 체호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같은 해 폐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소 건립과 오지의 학교 건립을 위한 기금 모음 운동에 참여했다. 멜리호바의 영지를 매각하고 얄타로 이주한다.

1900년 1월에는 러시아 문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천되어 회원이 되었다. 이해 봄부터는 올가와 교제를 시작하였으며,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요청으로 <세 자매> 집필을 시작한다. 10월부터 연습이 시작되었고 1901년 1월 초연한다.
내 희곡을 수정하며 내가 어떻게 이런 작품을 썼는지, 무엇을 위해 썼는지 놀라고 있소.
1900년 11월 올가 크닙페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갈매기>와 <바냐 아저씨>의 성공 이후에 극단은 이제 체호프의 새 희곡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이렇게 우리 운명은 그대부터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손에 놓여 있었다. 희곡이 있으면 공연 시즌이 있고, 희곡이 없으면 극단은 고유의 향기를 잃게 되엇다.
스타니슬랍스키, <예술에서의 나의 삶>
이 해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5월 25일에 올가 크닙페르(Ольга Леонардовна Книппер-Чехова,1868~1959)와 결혼했다. 올가는 8살 연하로, 당시 33세였다. 하지만 점차 결핵 증세가 심해지기 시작한다.

파일:chekhovolga.jpg

1902년 <세 자매>로 그리보예도프 상을 수상했고, 체호프 전집이 11권으로 출간된다. 1889년에 쓴 단막극 <담배의 해로움에 대해>를 개작하여 발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끼던 후배인 막심 고리키가 반체제 혐의로 아카데미에서 제명 처리되자 그는 이를 반대하였다. 아카데미에서는 저명 인사였던 그를 설득했지만 스스로 아카데미에서 2년 만에 탈퇴하였다.

1903년, 두번째 전집이 출간되는데 총 16권으로 권수가 늘어났다. 단편 <약혼녀>를 발표했고, 3월에 <벚꽃 동산>집필에 착수해 10월에 완성한다.
드라마가 아니라 코미디, 부분적으로는 소극(笑劇)인 작품이 탄생했소.
1903년 9월 올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904년 1월 17일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벚꽃 동산>이 초연될 때 그도 무대에 나와서 인사를 했는데 그야말로 곧 죽을 사람을 연상시킬 정도로 쇠약해진 얼굴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관객들이 "보내시오! 제발! 안톤 파블로비치를 제발 병원에 보내시오!" 라고 소리를 질렀고 결국 체호프는 연극이 끝나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병원에서 치료도 받고 6월부터는 독일 바덴바일러에서 요양도 하면서 조금 건강이 괜찮아진 체호프는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지만, 결국 벚꽃동산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만다.

요양지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도 못 간 1904년 7월 2일, 밤에 갑자기 고열과 여러 증세를 보였으며 벌떡 일어나서 독일어"나 죽네(Ich sterbe/이히 슈테르베)!"라고 소리쳤다. 독일인 의사가 와서 진료했으나 얼마 안 가 의사는 조용히 청진기를 내리고 고개를 돌리며 말하길 "마지막 가는 길에 샴페인을 주도록 하세요." 이 말에 아내인 올가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샴페인을 따랐고 결국 마지막으로 샴페인을 입에 머금은 그는 미소를 지으며 유언을 남겼다.
"Давно я не пил шампанского."
"얼마만에 마셔 보는 샴페인인지."
그리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희곡 쪽에서 구태의연한 러시아 사회를 향해 의미있는 사회적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는 그의 작품세계가 점점 원숙미를 더해가던 중 한창 젊은 나이인 44세로 요절했다.

러시아 정부는 그의 시신을 특별히 냉동열차로 운반해 조국에 묻힐 수 있도록 배려했다. 비슷한 시기에 병으로 죽은 러시아 제국 장군인 표도르 켈러(1850~1904)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체호프의 죽음을 애도하러 온 사람들이 착각하여 켈러의 장례식에 참석한 일도 있었다. 체호프는 7월 9일 노보데비치 무덤에 묻혔는데 니콜라이 고골 등 러시아의 여러 유명 예술가들도 묻힌 곳이다.

레프 톨스토이가 무척 아끼던 후배였기에 톨스토이와도 여러 번 만났고 체호프도 톨스토이를 존경하였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다 보니 체호프가 죽었다는 소식에 톨스토이는 매우 슬퍼했으며 당연히 장례식에 참석했다.

아내 올가와의 결혼 생활은 불과 3년뿐이었고[11] 둘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다. 올가는 남편과 사별한 후에도 배우로 꾸준히 활동하며 장수를 누리다가 55년 만인 1959년에 만 90세로 사망했다. 그녀는 소련 시절에도 '인민을 위하여 봉사한 작가'라고 호평받으며 더 많이 출판되던 체호프의 책과 연극, 영화에 대하여 일부 판권을 인정받아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게 지낼 수 있었으며 체호프를 그리워하는 회고록도 썼다.

고향인 타간로크에는 그를 기념하는 문학 박물관과 오페라 발레극장이 있다.

3. 작품 세계

당연히 모국 러시아에서는 위대한 대문호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러시아 언론매체에서 늘 열 손가락에 드는 작가로 나올 정도.

"체호프의 소설 중 하나인 6호 병동을 읽고 '나 자신이 '6호 병동'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두려워진 나는 창 밖으로 뛰쳐나갔다"는 평을 남긴 뒤 큰 충격을 받아 혁명가가 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블라디미르 레닌이다. 본인이 자기 입으로 밝힌 이야기이다.

3.1. 소설

수많은 후대 소설가들이 체호프의 단편 소설과 문체에 영향을 받았는데, 레이먼드 카버, 어니스트 헤밍웨이, 버지니아 울프, 서머싯 몸[12], 캐서린 맨스필드, 나딘 고디머[13] 등 그 이름을 나열하기도 버거울 정도다. 작품의 소재도 러시아 농민들의 삶이나 공무원들의 고생부터 말도둑, 심지어 탐정물까지 쓴 적이 있을 정도로 그 범위가 매우 다채롭다.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단편소설 중 하나라고 극찬하기도 했다.[14]

글의 길이가 대체적으로 짧은 편이며 개중엔 단 몇 페이지에 불과한 작품[15]도 있다.

아무튼 이런 단편을 한 해에 100편 넘게 쏟아냈다. 이렇다 보니 아직까지 그의 단편들이 전집 수준으로 번역되지는 못하고 있으며 그나마 나온 것들도 출판사별로 제각기 중복되어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2020년을 기준으로 대표작들을 두루 포함하여 가능한 한 중복을 피해서 읽고 싶다면 민음사, 열린책들, 펭귄, 문예 역본을 차례로 읽으면 된다. 범우사에서도 덜 알려진 단편 위주로 선집을 낸 바 있다. 체호프 단편 수록 작품 정리

3.2. 희곡

이처럼 소설가로서의 위상도 독보적이지만 극작가로서의 명성이 더 높다. 노르웨이의 헨리크 입센, 스웨덴의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함께 현대 희곡의 아버지로 꼽힌다. 전 세계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함께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극작가이다. 러시아 근대문학을 배울 때도 소설가로서보다는 극작가로서 더 쳐주는 경향이 짙고 러시아인들은 체호프를 소설가라기보다는 극작가로 생각하는 편이다. 그 자신도 문단보다는 연극계 쪽으로의 인연이 더 깊었다. 부인 올가도 잘나가는 모스크바 예술극단의 스타급 배우였다.[16] 러시아의 연극배우 지망생들에게는 셰익스피어 작품 이상으로 파고들어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특히 연기와 연출의 방법론을 두고 19세기 러시아의 스타니슬랍스키와 메이어홀드가 논쟁을 벌였을 때 그 대상이 체호프의 걸작 벚꽃 동산을 어떻게 무대에 올릴 것인가가 주제였기 때문에, 배우와 연출가들에게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작가이다. 서브텍스트라는 개념이 바로 체호프의 연극의 극화 과정에서 심도 깊게 연구된 개념이다.

대표작은 4대 장막극으로 불리는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 동산. 이들을 포함한 장막극 7편, 단막극 10편을 남겨 총 17편의 희곡을 썼다.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많은 희곡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희곡의 경우 4대 장막극은 유명세만큼 많은 판본이 있고, 비교적 덜 알려진 단막극들도 연극과인간에서 2000년대 초에 낸 '체호프 희곡 전집'[17]을 통해 초역된 것을 시작으로 모두 번역되었으나 '플라토노프'만큼은 번역이 없다.[18]

체호프의 총이라는 클리셰 법칙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1막에서 벽난로의 총이 공들여 묘사되었다면 그 총은 극이 끝나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발사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복거일이영도의 작품을 비평하면서 체호프의 총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체호프의 총과 반대되는 개념이 바로 맥거핀인데 중요한 소재인 것처럼 초반부에 등장하였다가 서사를 진행시키는 기능만 수행하고 그 떡밥은 슬며시 사라지게 하는 서사 기법으로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에 의해 유명해진 서사 기법이다.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을 쓴다는 인상이 있는데 '관리의 죽음', '드라마' 같은 유머러스한 작품도 많이 썼다. 기승전병의 창시자 「...죽었다」 그의 단편작 중 상당수는 읽다보면 지금 기준으로도 웃음을 자아내는 내용이 많다. 체호프 본인도 꽤나 유쾌한 성격이었다고 알려지며 스스로를 코미디 작가라고 생각했다. 갈매기는 아예 서문에 4막으로 구성된 코미디(희극)이라고 명시되어 있을 정도이다.

소설과는 반대로 희곡은 '미묘하다', '모호하다', '비밀스럽다', '수수께끼 같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작품 발표 초기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체호프 희곡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평가이다. 전통적인 희곡의 틀과 달리 뚜렷한 외적 사건이나 갈등 없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통해 그들의 내면 세게를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체호프의 새로운 극작술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19]
이탈리아 연출가 스트렐러는 체호프의 작품이 첫번째 뚜껑을 열고 나서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 기대하게 하는 '중국의 보물함' 같다고 했고, 러시아 연출가 메이예르홀드는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처럼 추상적'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러시아 연출가 에프로스는 '저마다 자신만의 체호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부분적으로는 인상주의고, 어떤 부분은 상징주의, 필요에 따라서는 사실주의, 때로는 인상주의까지도... 그래서 <갈매기>에 대한 해석, <갈매기>에 대한 결합할 수 없는 의견들이 그렇게 많이 존재하는 것이며-이것은 마치 다양한 희곡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스타니슬랍스키
체호프의 희곡 속에는 주제도 플롯도, 행동도 없다. 체호프의 희곡들은 단지 '피상적인 디테일'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그의 희곡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非)극적이다.
미르스키(러시아 문학가)
체호프의 희곡은 상세한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가슴을 조이는 사건도, 위대한 영웅도, 포악한 악당도 등장하지 않고 선과 악의 대결 등 갈등이 외형적으로 두드러지게 존재하지 않는다. 자살이나 결투 등 가장 강력한 연극적 효과를 야기하는 사건들은 무대 뒤에서 일어나고, 갈등이나 그 폭발은 의도적으로 물밑 흐름 속에 감춰진다. 등장인물들의 근본적인 갈등은 그들 같의 작은 다툼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 현실과 이상의 괴리, 가능성과 현실화의 불가능 등을 개인적으로 인식한다는 데 있고 그들 간의 갈등, 그들 내부의 갈등은 이러한 모순의 외적인 한계와 그 실현가능성을 상실한 등장인물들의 내면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외적으로 드러나질 않는 등장인물들의 심리적인 미묘한 갈등체계는 체호프 희곡에 대한 모호함을 일으키게 하는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의 희곡에는 주인공도 조연도 존재하지 않고, 모든 등장인물들이 각자 자신만의 전기(傳記)를 소유하며 심리적, 외형적으로 구체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동등하고 작가의 독특한 대화구조를 통해 이것이 이루어진다. 거의 모든 장막극에 10~20대부터 60~80대가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등장인물들이 그 세대만의 희망과 고통을 토로한다. 평범한 인물들의 민주적인 집단 주인공 체제는 , '어떤 스타도 만들지 않고 배우들 모두를 똑같이 훌륭하게 만드는 배역을 창조하고자 했던'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원칙에 잘 부합되어 해당 극장과 체호프를 밀착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체호프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들로, 일상적인 삶에서 그렇듯 선인과 악인, 영웅과 소인배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단지 현실에 잘 적응하는 인물들과 과거 혹은 미래만을 꿈꾸는 인물들이 있을 뿐이다. 일상의 비극과 일상의 희망 사이를 방황하는 이들의 모습은 미화되지도 비난받지도 않은 채 객관적으로 그려지며, 그 판단은 독자 혹은 관객에게 맡겨진다. 또한 등장인물들은 서로 단절되어 있다. 모든 인물들은 자신의 내적인 세계에서만,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틈, 현실과 이상의 틈 속에서만 존재하고 꿈꾼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간에도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귀기울이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러한 현실이 체호프의 희곡 속에서 보여지는 삶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극 분위기만큼이나 언어도 모호하고 불명확하다. 그의 언어는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시적이고 서정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들도 결합되고, 민요, 노래, 속담, 의성어, 의태어, 침묵 등도 풍부하게 사용되어 독특한 그만의 언어를 창조한다. 체호프는 때로는 완성되지 않은 문장을 사용하고, 이를 위해 말줄임표를 많이 사용하며 구체적인 행위나 사건을 나타내는 동사를 생략하기도 한다. '사이'로 불리는, 정지와 침묵[20]이 때로는 말보다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말을 하는 주체는 있으나 듣는 대상은 불명확하게 설정돼 있는 경우도 많은데, 주인공들이 자신의 '내부의 프리즘'을 통해 주변 세계, 주변 인물들과 교류하기 대문이다. 그래서 이 대사가 독백인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고 그래서 체호프의 대사를 대화체와 독백체로 나눠 그 의미와 형식을 파악하기도 한다. 이러한 대사 구성은 인간들 간의 단절, 영원한 고독, 서로에 대한 이해의 불가능 등과 연결되는 체호프 작품의 주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로 인해 부조리극 작가들이 체호프를 자신의 시조로 인식하기도 한다.

본인은 자신의 작품들을 희극, 또는 드라마 장르로 규정하였지만 모두 희극이나 보드빌이라 불렀고, 비극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체호프와 스타니슬랍스키가 가장 많이 논쟁을 한 부분도 바로 희곡의 장르에 대한 다른 인식 때문이었다. 희극, 비극, 희비극, 보드빌, 멜로드라마, 부조리극 등 어떤 장르로 체호프의 희곡을 규정해야 될지에 대한 혼돈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4. 기타


[1] 러시아 로스토프주 타간로크[2]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해선 꽤나 말을 아꼈기에 추정하기 쉽지 않지만 대체로 유신론적 불가지론자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본다. 일견 무신론자보다 더 회의적인 것 같지만 어쨌든 본인의 편지에선 "무신론자가 아니"며 "주님을 찬양한다"고 하기는 했다.[3] "의학은 나의 아내요, 문학은 나의 애인이다." --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4] 현재 러시아 남서부 로스토프주에 위치한 도시로, 아조프 해와 접한다.[5] 이 제목은 편의상 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왔을 뿐, 확실히 정해진 제목이 없는 작품이다. 그래서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파더레스'라는 제목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분량이 어마어마해 대본 그대로 공연하면 6시간 분량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 공연은 다들 축약한 편. 그래서인지 정식 번역본이 없다.[6] 맏형 알렉산드르가 1878년 10월에 쓴 편지에 의하면 <지혜 겨루기>는 대사가 훌륭하게 쓰였고 모든 등장인물이 개성이 있지만, 주제가 너무 미약했다고 한다.[7] 1880년 단편 '이웃인 학자 프리드리히 박사에게 보내는 돈 지방 지주 스테판 블라지미로비치 N의 편지>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머 잡지 '잠자리'에 게재되었다. 이때부터 1887년까지 '아뜨', '체혼떼', '안토샤 체혼떼', '환자 없는 의사', '내 형제의 형제', '비장 없는 사람', '율리시즈' 등 수많은 필명으로 활동한다.[8] 다른 동네 이야기긴 하지만 프랑스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빅토르 위고의 작품들이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주제의식에서 벗어나지는 않는 러시아 소설에 비해 프랑스 소설은 분량 늘리겠다고 소설의 주된 서사 진행에서 이탈해서 딴소리를 늘어놓는 게 너무 심하게 눈에 보일 정도로 억지스러운 경우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편.[9] 번역에 따라 '숲귀신'이라고도 한다.[10] '6호 병동'이라고도 번역한다.[11] 또한 올가가 연극배우 활동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적지 않았고 때문에 3년 동안에도 부부가 함께했던 시기는 길지 못했다. 대신 두 사람은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400편이 넘는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으며 이들 내용은 체호프의 만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12] "인물 간의 대화를 체호프만큼 생생하게 전달하는 작가는 지금껏 없었다."고 평했다.[13] 199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남아공의 소설가로 "체호프가 없었다면 우리 작가들 가운데 누가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평했다.[14] 한국 번역본에서는 가장 위대한 단편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one of'가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 작품은 클리셰 파괴로도 유명한데 특히 결말에서 두 연인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게 아니라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하며 끝나서 '끝나지 않는 이야기'란 인상을 주었다고. 한편으론 이런 결말에 익숙하지 않던 독자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15] Flash Fiction(엽편)이라 불리는 종류의 소설들로 약 300자 내외의 분량으로 이루어진 단편들이다. 이런 쪽을 주로 다루는 작가도 있는데 이 장르의 시초는 이솝 우화로 유명한 이솝이나 일본의 SF 작가 호시 신이치가 대표적이다.[16] 올가는 체호프의 희곡 대표작인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자매 등에 출연한 바 있었고, 이를 계기로 체호프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17] 1권에 단막극들 전체를 실었고, 2권은 이바노프&갈매기&세자매, 3권은 숲의 정령&바냐 아저씨&벚꽃 동산.[18] 연극과인간 판 1~3권의 책날개에 4권으로 이 작품이 나온다고 예고되어있는 것을 보아 이 작품도 내려고는 했으나, 어째서인지 엎어진 듯. 실제로는 출간되지 못했다.[19] 연극과인간 판 <체호프 희곡전집> 2권 역자 후기 참조.[20] 사용횟수는 갈매기에서 32번, 바냐 아저씨에서 43번, 세 자매 60번, 벚꽃동산 32번.[21] 셰익스피어는 1564년, 체호프는 1860년생이다.[22] 해럴드 블룸은 체호프의 작품중 그의 천재성이 가장 빛나는 작품은 세 자매라며 특히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가 봤어도 경탄했을 작품이라고 극찬했다.[23]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시집을 남겨 역대 최고의 시인 중 하나로 평가받았고 햄릿을 비롯한 대작희곡들을 수십 편 남겼다. 게다가 이들 희곡은 운문 형태로 대단히 시적인 작품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