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章煥
1918년 5월 5일 ~ 1951년[1]
1. 개요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시인. 본관은 해주(海州)[2][3].2. 생애
1918년 5월 5일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에서 아버지 오학근(吳學根)과 어머니 한학수(韓學洙)[4] 사이의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한학수는 당초 아버지의 첩실로 들어왔다가 아버지의 본처인 이민석(李敏奭)이 죽자 정실 부인으로 신고되었다.오장환은 회인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되던 1927년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서리(현 안성시 서인동)으로 이주하면서 안성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1930년 안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어서 중동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수료한 뒤 1931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1933년 학교문예지 『휘문』 임시호에 '아침', '화염'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인의 길에 오르게 된다.
1935년 그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치야마(智山)중학교에 전학하여 1936년 수료하였다. 1937년에는 메이지대학 전문부 문예과 별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인 193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급하게 메이지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경기도 경성부 관훈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에 남만서방(南蠻書房)이라는 출판사 겸 서점을 개업하고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0년 얼마간 중국 일대를 전전하다가 경성부로 돌아와 돈암정(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주하여 살기도 했으며, 그해 다시 도쿄로 돌아가 1941년까지 사자업(寫字業)에 종사했으나 평소 술을 좋아하던 성품 탓에 신장이 늘 좋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 황달, 두통, 늑막염, 신장병 등의 질병을 얻었다. 그 뒤 투병생활 끝에 병상에서 8.15 광복을 맞았고, 곧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1946년 임화, 김남천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1947년 10월에서 1948년 2월 월북하여 남포병원에 입원했으며, 치료를 위해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볼킨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1949년 귀국한 그는 계속 투병생활을 이어나가다가 1951년 지병인 신장 결핵으로 끝내 사망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에 상당수의 시인들이 절필하거나 친일활동을 했을 때, 그는 절필하지도 않았고 친일적인 작품활동을 하지도 않았다. 또 서정주와는 서로 시를 주고 받고 자신의 서점에서 자기 시집은 수수하게 만들면서 서정주 처녀시집은 호화판으로 만들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으나 서정주가 변절한 이후로는 관계를 끊고 평생 다시 만나지 않았다.
월북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후 그가 태어난 고향 충북 보은군에 문학관이 세워졌다.
아래는 시 병든 서울의 한 부분.
...그러나 나는 이처럼 살았다.
그리고 나의 반항은 잠시 끝났다.
아 그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거리는 내 눈
아 그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씰개
내 눈깔을 뽑아 버리랴, 내 씰개를 잡어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그리고 나의 반항은 잠시 끝났다.
아 그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거리는 내 눈
아 그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씰개
내 눈깔을 뽑아 버리랴, 내 씰개를 잡어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3. 기타
1982년에 발생한, 공안당국이 군산 지역의 고등학교 교사들을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로 몰아 처벌한 허위 조작 사건인 오송회 사건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공안당국은 교사들이 월북시인인 오장환의 시집인 <병든 서울>을 열람 및 복사 했다는 점을 근거랍시고 들먹이면서 교사들을 빨갱이로 몰아갔다.[1]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48년에 사망했다는 설과 1951년에 사망했다는 설, 1953년에 사망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1950년에 그가 소련을 다녀온 후 쓴 시집과 여행기 「붉은기」가 발견되었고,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북한에 함락된 기간 동안 머물렀다는 지인들의 진술이 있어 1948년 사망한 것은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현재는 1951년 사망설이 가장 유력한데 1953년 그의 절친이던 임화가 처형당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일체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2] 26세 환(煥) 섭(燮) 항렬.[3] 정작 오장환 본인은 1937년 펴낸 시집 '성벽'에서 '성씨보'라는 시를 통해, 자신의 집안이 해주로 이사 온 청나라 사람의 후손이라고는 가계보에 적혀 있긴 하지만, 옛날에 똑똑한 사람들은 대국 숭배를 하고 싶어서 늘 가계보를 창작하고 매매했다면서 자신의 조부가 실제로 상놈이었는지 오씨가 아닌 이씨였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역사에서 자신의 성씨를 믿지 않아도 좋으며, 성씨와 족보 같은 관습이 필요하지 않다고 시에 나타내기도 했다.#[4] 본명은 한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