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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4 12:14:30

최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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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淳雨
1916년 4월 28일 ~ 1984년 12월 16일

1. 개요2. 생애3. 저서4.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미술사학자이자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

본명은 희순(熙淳)이며 순우(淳雨)는 그의 필명이다. 아호는 간송 전형필이 지어준 혜곡(兮谷).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로 유명하다.

2. 생애

1916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황해도 해주에서 자랐고 개성 송도보통학교를 졸업하여 개성부립박물관에서 일하였다. 당시 박물관장 고유섭의 가르침을 받아 문화재와 미술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1] 광복 후 최초로 고려청자를 주제로 한 글을 썼고, 이후 사망할 때까지 60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43년 개성부립박물관에 입사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개성부립박물관[2]에서 국립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이후 국립박물관 학예관,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들을 역임,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취임하였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와 한국미술사학회장, 문화재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평생을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글과 전시를 통해 알리며 우리나라 미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949년 당시 북한군의 개성시 외곽의 국지전으로 국립중앙박물관 개성분관의 소장품들의 위험을 감지하여 유물들 거의 대부분을 31개의 궤짝에 포장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본관으로 이전시켰다.

또한 1950년부터 서울대, 고려대, 홍익대, 이화여대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1984년 향년 68세를 일기로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최순우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의 광주공원묘지에 있다.

그의 자택은 현재 '최순우 옛집'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서 시민문화유산 1호로 보존하고 있다. 최순우 옛집은 혜곡최순우기념관라는 명칭의 박물관으로도 운영되고 있으며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3. 저서

4. 여담


[1] 이 때 만난 학문적 동반자가 황수영, 진홍섭 이다.[2] 개성부립박물관은 1946년 국립중앙박물관 개성분관으로 승격된다.[3] 최순우 전집은 현재 절판되어 중고 서점을 통해서 밖에 구할 수 없다.[4] 보급판과 초판의 차이점이 존재하는데, 우선 본문과 표지를 일반 용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가장 큰 차이는 전체 쪽수가 456쪽에서 416쪽으로 줄면서 '조선 말기 회화/ 초상화·불화·민화/ 흔하지 않은 이야기'가 빠지게 되었다.[5] 일부 도판은 이전과 같이 흑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