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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05:52

이태원(1938)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은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02년
이름 이태원
분야 영화
은관문화훈장(2등급)
파일:문화옥관.jpg
연도 1993년
이름 이태원
분야 영화
옥관문화훈장(4등급)

{{{#white 이태원}}}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49h81002_5.jpg
출생 1938년 3월 15일
평안남도 평양부
(現 평양시)
사망 2021년 10월 24일 (향년 83세)

1. 개요2. 생애 및 활동
2.1. 탈세 혐의 비화
3.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영화 제작자.

한 시대를 풍미한 '태흥영화사'의 사장이며, 임권택 감독과 함께 1990년대 한국 영화를 이끈 영화인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 및 활동

1938년 3월 15일 평양시 출생.

6.25 전쟁을 겪고 난 뒤 해방 후 한때 정치깡패 조직에 몸담기도 했었는데,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대부분의 조직폭력배들이 체포되는 가운데 살아남아 건설업자로 전향해 활동하다가, 1980년대 초반 태흥영화사를 설립하고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이장호이두용배창호 등 1980년대 대표 감독들의 영화를 제작하다가 1989년 임권택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제작하면서 평생의 파트너가 되었다. 이때부터 <장군의 아들>・<개벽>・<서편제>・<춘향뎐>・〈취화선〉 등 임권택 감독의 대표작을 도맡아 제작했다.
정성일 : 〈비구니〉(1984년 제작 중단된 영화)를 계기로 이태원 사장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아제 아제 바라아제〉부터 15년에 걸친 태흥영화사와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물론 옛날에 잠깐 스쳐 지나간 인연은 있다고 하지만, 감독으로서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은 어땠습니까?

임권택 : 이태원 사장은 처음 만나자마자 무조건 그때 10억인가, 쌓아놓았으니까 무조건 10편을 같이 하자는 거요. 그때는 영화 한 편에 한 1, 2억 할 때니까. 내가 하도 그 소리가 우스워가지고. (웃음) 내가 이태원 사장한테 '영화라는 것은 다 끝나고 한 작품의 결과를 보고 열 작품을 하든 하는 거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더니 상당히 무안했던가봐. 그래도 〈비구니〉 촬영에 들어갔는데, 돈이 굉장히 많이 지불됐는데도 그 영화를 어쩔 수 없이 제작 중단했으니, 나는 이태원 사장이 어떻게 뒤를 수습하는가 관심이 있을 거 아니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못한 거니까 돈 내놓으라고 할 텐데, 그런 소리도 일체 없고 그거를 그렇게 편안하게 해결해나가는 걸 보면서 나는 늘 미안한 거지.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 아니오. 내가 이런 걸 하자고 했으니까. 그러다가 내가 〈씨받이〉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 갔다 오고 하니까 이 사장이 엎어진 거 다시 한 번 같은 테마로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하자는 거요. 그게 인연의 시작이지.[1]

정성일 :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태흥영화사와 감독님의 첫 번째 작품입니다. 그 이후(2003년까지) 벌써 15년 가까이 되었고, 지금도 같이 작업하고 계시지만,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은 감독님이 생각하기에 어떤 분입니까?

임권택 : 두 가지로 예를 들 수가 있는데, 가령 〈장군의 아들〉에서는 기획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거요. 왜 그러냐면 〈장군의 아들〉이 흥행에 성공하니까 충무로에서 임권택이가 돈 벌어다줬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나는 그거야말로 제작자 이태원 씨가 만들어서 번 것이라고 생각해요. 1960년대에 활약한 액션감독이 세월이 흘러 어떻게 달라졌는지, 내 자신이 나를 점검해보고 싶은 그런 생각을 일깨워준 거요. 그런 끝에 돈을 벌었는데, 그거는 전혀 감독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시작서부터 완전히 그 사람이 만들어간 거요. 또 하나는 자신이 좀 믿고 있는 감독에 대해서 모험을 할 줄 아는 사람. 그러니까 가령 영화제 내보내는 소재라는 게 사실 적자를 감수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좀 믿고 가능성이 보인다 할 때는 그런데도 투자하는, 흔치 않은 그런 제작자.[2]
정성일과 임권택의 대담 中
그 외에도 박철수의 <오세암>・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화엄경> 등의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2004년 임권택의 〈하류인생[3]이 흥행에 실패하고는 영화 제작에서 손을 떼었다. 그래서 임권택의 100번째 작품인 〈천년학〉은 김종원(키노 2(Kino 2) 대표)이 제작하였다. 이후 독자적인 멀티플렉스 극장 THC 9를 의정부시에 개관하였는데, 바로 옆인 의정부역 신세계백화점 10층에 들어선 CGV에 밀려 고전하다 결국 CJ에 인수되어 새 이름인 'CGV 의정부태흥'으로 바뀌었다.

2020년도 중반에 낙상 사고를 당해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진 다음, 입원해 있다 2021년 10월 24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태원의 사망 소식과 함께 태흥 영화사가 다시 관심을 받게 되어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전주국제영화제가 끝난 뒤에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태흥 영화사 기획전을 계획했다. 그런데 하필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식을 불과 두 시간 앞두고 강수연뇌출혈심정지로 사망하는 바람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개최된 태흥영화사 기획전에서 강수연이 집중・조명되고 이태원은 관심 밖이 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2.1. 탈세 혐의 비화

1996년에는 영화사 매출을 조작해서 거액의 세금을 탈루한 혐의로 곽정환 대표와 함께 구속되었는데, 여기에는 여러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었다.

당시까지 한국영화계는 대략 10여개의 국내 영화제작사, 영화배급사들, 자기 지역에 한두개의 영화관을 소유한 전국 수백 명의 극장주들에 의해서 굴러가고 있었는데, 대부분 지역 유지나 조폭들이었다. 서로 간에 끈끈한 인맥으로 묶인 이들은 "좋은 게 좋은 거지"식의 주먹구구식 운영으로 일관했고, 당연히 매출과 관람객 집계, 세금 납부 등은 전부 엉터리였다. 이 때문에 1990년대 초중반부터 금융권과 대기업 등 외부의 대자본이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이런 후진적인 구조가 투자에 방해가 된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자 문화산업 육성을 내세운 정부는 영화계에 칼을 들었고, 바로 전통적인 충무로 질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태원과 곽정환이 제일 먼저 걸려든 것이다. 이 두 명을 시발점으로 주요 영화 제작자, 배급사, 지방 극장주들 수십여명이 탈세혐의로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당시에는 지방 극장주들이 미리 시나리오와 출연배우를 보고 제작사에 선금을 주고 상영권을 구매한 다음에 영화가 극장에 걸리면 입장수익을 전액가져가는 구조였기 때문에, 극장주들이 수익을 쓸어가는 이었고 제작사들은 그다지 돈을 벌 수가 없는 처지였다. 당연히 자본축적이 안 되니 다음 영화도 극장주들한테 헐값을 받고 상영권을 미리 팔 수 밖에 없었고, 게다가 극장주들은 관객수를 조작해서 매출을 축소신고했으며, 연계된 배급사, 제작사 모두 회계처리를 엉터리로 했다. 돈이 되는 외화수입도 비슷한 형태였다. 당연히 정확한 관람객 집계, 매출통계는 아무도 몰랐다. 즉 당대 한국 영화판은 소수의 깡패 극장주들이 지배하던 아수라장에 가까웠다.

어쨌든 1996년도에 벌어진 이태원의 구속과 애니깽 사태1950년대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충무로 질서가 붕괴하는 신호탄이었다. 이후의 한국영화계는 기존의 주먹구구식 가내수공업에서 탈피해서 자본이 주도하는 영화산업으로 질적인 도약을 하게 된다. 제작-홍보-배급-상영-2차시장[4] 등 전 분야에서 기존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3. 여담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 카메오 출연한 적이 있는데, 모두 주인공에게 넌지시 충고하는 역할이다. 〈장군의 아들 2〉에서 깡패 김두한이 문맹이라 간판을 못 읽고 헤매자 "여보게, 자네 김두한이지? 글 좀 읽고 다녀."라고 조언하고, 〈취화선〉에서는 화가 장승업이 술에 취해 지붕 위에 올라가 행패를 부리자 "이봐 장승업이, 기왓장 깨져 이 사람아. 지붕 위에 올라가서 그림 되면 나도 올라가겠다."라고 비꼬아서 말한다.

영화 〈여타짜〉를 연출한 이지승 감독이 그의 아들이다. 이 감독은 태흥영화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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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 임권택·정성일 대담, 현실문화연구, 2003, p.30~31[2]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 임권택·정성일 대담, 현실문화연구, 2003, p.145[3] 전(前) 대표 이태원의 삶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4] 비디오, 인터넷, 케이블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