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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330066><colcolor=#fff>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내무부차장 현순 玄楯 | Hyun Soon | |||
| | |||
| 출생 | 1879년 3월 21일[1][2] | ||
| 경기도 양주목 석적면 항동 (현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도하리 항동마을)[3] | |||
| 사망 | 1968년 7월 11일 (향년 89세) | ||
| 미국 로스앤젤레스 |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63호 | ||
| 재임기간 | 초대 외무부차장 | ||
| 1919년 4월 11일 ~ 1919년 4월 22일 | |||
| 제2대 내무부차장 | |||
| 1919년 8월 5일 ~ 1919년 11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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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명 | 현반(玄槃) | ||
| 자 | 치관(致寬) | ||
| 가족 | 아버지 현제창(玄濟昶) | ||
| 학력 | 관립영어학교 (중퇴) | ||
| 종교 | 개신교 (감리회) | ||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1963년 수훈) | }}}}}}}}} |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감리회 목사. 1963년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2.1. 초년기
현순은 1879년 2월 28일 경기도 양주목 석적면 항동(현 양주시 은현면 도하리 항동마을) 도암산(道岩山) 자락에서 아버지 현제창(玄濟昶)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역관에 출사한 집안으로, 10대조 현욱(玄頊)으로부터 조부 현일(玄鎰)에 이르기까지 2대를 제외한 7대에 걸쳐 역과에 급제하여 역관으로 활동했다.[5]그러나 부친 현제창은 문관으로 진출하여 1883년 종6품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종6품 인의(引儀), 1884년 정6품 빙고 별제(氷庫別提), 1885년 종6품 직산 현감(稷山縣監), 1886년 종6품 인제 현감(麟蹄縣監), 1898년 중추원 3등의관(中樞院三等議官) 등의 관직을 지냈다. 또한 독립협회에 가입해 <독립신문>의 발행에 참여했으며, 1898년 11월 4일에 고종황제의 명령으로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되었는데, 현제창은 이때 체포된 간부 17명 중 한 사람이었다. 현순은 이러한 부친의 밑에서 외국어를 공부했으며, 일찍부터 개화에 대한 관심을 품었다.
이후 장성한 그는 관립영어학교와 무관학교를 다녔지만, 1898년 한성영어학교를 책임지고 있던 허치슨의 고압적인 교육방침에 크게 반발하여 그를 추방하고자 하였으나 좌절하고 학교를 떠났다. 한편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서재필의 지지자가 되었고 이승만 등과 친분을 다졌다.
1899년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으로 해산된 뒤, 현순은 일본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도쿄에서 'Jun Den KiuKo Sa'라는 학교에 입학해 세계사·지리·화학·물리·수학 등을 공부했다. 이 학교가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도 '순천(順天)'이라는 이름이 붙은 학교인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기독교를 접한 그는 1901년 선교사 피쉬(Fish)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2년 학교를 졸업한 현순은 과학 공부를 계속하려 하였으나,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 별다른 일자리가 없어 하릴 없이 시간을 보내던 그는 동아개발회사(東亞開發會社)의 하와이 이민 모집 광고를 보고 하와이 이민을 결심했다. 그는 인천 용동감리교회의 목사 G.H. 존스로부터 감리회 신앙공부를 이수한 뒤 1903년 2월 8일 가족과 함께 제2차 이민단을 인솔하고 하와이로 떠나 3월 2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2.2. 하와이에서의 경력
한국인들은 각처의 사탕수수 농장에 취업하였다. 그러나 이민 초기 한국인들의 생활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낯선 언어·풍습·기후에 시달렸고, 현지인들의 냉대, 열악한 노동 조건 및 조국에 대한 향수도 이들을 괴롭혔다. 그리하여 이들 중에는 이민 실무자들을 원망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속출해 교포사회의 큰 문제로 떠올랐다. 이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현순은 자치회(Self-Rule Association)를 조직하는 데 힘썼으며, 야간학교를 개설해 한인 자제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그러던 중 현순의 활동을 눈여겨 본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그를 가와이(Kauai) 섬의 전도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그는 섬 곳곳을 돌아다니며 교포들을 돌보면서 전도하였고, 몇몇 농장주들의 재정적 후원을 받기도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가와이섬에 감리교회를 설립했고, 이 교회는 하와이 각처에서 한인교회들이 설립되는 발판이 되었다.
2.3.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907년 한국으로 귀국한 현순은 배재학당(培材學堂)의 영어교사 겸 학감을 맡았다. 이어 1908년 정동감리교회 부목사, 1909년 서울 서부 지역 전도 목사를 맡았으며, 1909년에는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6]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어서 1911년 정동감리교회 부목사, 1913년 전국주일학교 주임, 1914년 정동감리교회 목사, 1915년 전국주일학교 총무 등을 역임했다.1919년 3.1 운동 계획이 한창이던 무렵, 현순은 상하이로 파견되어 열국에게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청하는 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주변인들에게 "강원도로 전도 여행을 떠난다"고 말한 뒤 2월 23일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때 현순에게 맡겨진 과업은 첫째, 한국을 즉시 빠져 나갈 것, 둘째, 만주의 봉천으로 갈 것, 셋째, 그곳의 독립운동가들을 만날 것 등이었다고 한다. 초라한 농부 모습으로 변장하여 일본 경찰의 감시를 뚫고 봉천에 닿은 그는 우여곡절 끝에 최창식(崔昌植)이라는 사람을 만나 함께 상하이로 떠났고, 3월 1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현순은 상하이에 도착하는 즉시 한국에서 입수된 독립선언서를 이광수와 함께 영문으로 번역, 3월 4일 3.1 운동의 발발을 현지 언론에 널리 알렸다. 그리고 3.1 운동의 진상을 파악해 3월 9일 미국에 전보를 보냈고, 이후 3.1 운동에 대한 기사가 미국 언론에 실림으로써 3.1 운동이 교포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그는 3·1 운동을 계기로 한국 독립에 대한 외국의 원조를 얻기 위하여 미국인 피취 (G. A. Fitch)의 주선을 받아 몇몇 미국인들과 접촉하였다. 또한 그는 쑨원과의 면담도 시도했지만 무산되었다.
이후 그는 최창식과 함께 베이징으로 건너가 반일적인 중국 혁명가들과 접촉하는 한편 영국인 저널리스트 심프슨 (L. B. Simpson)과도 면담, 그로 하여금 한국으로 들어가 한국인들의 투쟁을 취재하도록 설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현순은 3.1 운동이 일어난 직후 외국의 협조를 구하는 데 힘쓰는 한편, 동지들과 함께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는 3월 하순에 동지들과 함께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현순은 총무로 선임되었고, 그를 중심으로 독립임시사무소에서는 각국 공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국내의 독립운동상황을 현지 언론에 제공하면서 파리의 김규식 및 미주의 이승만과 연락을 취하였다. 이 독립임시사무소가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그는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된 이후 북경주재 미국대사, 미국 목사 등과 함께 회합을 갖고 그 후속 조치에 관한 문제를 협의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활동으로 말미암아 현순은 일본 정보기관에 의하여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 그는 내무총장를 맡아 김규식과 함께 임시정부의 외교를 전담했다. 한편 이 무렵 각처에 난립한 여러 임시정부를 상해임시정부로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벌이려는 계획이 추진되자, 그는 각지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상하이로 불러 모으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되어 대한인국민의회의 지도자들을 설득, 그들을 상하이로 불러 모으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대한인국민의회를 임시정부로 흡수하는 데 성공한 현순은 그 과정에서 여러 문제를 겪었었다. 즉 그 교섭 과정에서 현순의 ‘설명 불충분’으로 서로간에 오해가 있었고,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문창범이 교통국장 취임을 거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간 것이다. 결국 그는 사태의 수습을 위하여 그 해 11월 14일 내무총장에서 물러났다.
2.4. 대사관 파동
1920년 6월 현순은 상하이를 떠나 8월 미국에 닿았고, 9월부터는 그곳에서 김규식의 뒤를 이어 구미위원회(歐美委員部)의 임시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우선 임시정부의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국민회와 신한민보사의 후원을 받아 미 서부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금 운동을 벌였다. 그는 장기적으로 미국 전역은 물론 멕시코와 쿠바의 한국인들까지 찾아 다니려 했다.그런데 1921년 4월 그는 갑자기 워싱턴 D.C.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대사관을 설치하고 그 대사를 자처하여 교포 사회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대사관 설립의 이유
아! 대한민족이 세계열강에 대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임시정부를 설립하여 이에 三星霜이나 아직 한 번도 독립의 승인을 받을 수 없었는데 마침 미국 대통령 하딩씨가 취임 후 미일의 관계가 점점 험악하게 되어 그 형세는 드디어 干戈에 호소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 정부에 정식으로 독립의 승인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므로 대통령 이승만 각하에 대해 외교의 급박을 전보하였더니 대통령으로부터 이미 대사 叙任의 사령을 위원부로 송부하였으니 그곳에서 좋도록 조처하라는 뜻의 電訓이 있었다.
따라서 곧 대사임명장을 받고 또 대통령에 대해 공관 설립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였더니 4월 4일 대통령이 公電으로 이를 확인한다는 뜻의 회답이 왔다. (중략) 대사관 경비 유지를 위해 모든 財錢은 前 구미위원부로 보내지 말고 대사관으로 송금하기 바란다. 특별주의 서재필 씨는 미국 시민인 고로 대한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것은 법률이 허하지 않는 일임을 알기 바란다.
주미대사 구미위원장 현순
아! 대한민족이 세계열강에 대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임시정부를 설립하여 이에 三星霜이나 아직 한 번도 독립의 승인을 받을 수 없었는데 마침 미국 대통령 하딩씨가 취임 후 미일의 관계가 점점 험악하게 되어 그 형세는 드디어 干戈에 호소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 정부에 정식으로 독립의 승인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므로 대통령 이승만 각하에 대해 외교의 급박을 전보하였더니 대통령으로부터 이미 대사 叙任의 사령을 위원부로 송부하였으니 그곳에서 좋도록 조처하라는 뜻의 電訓이 있었다.
따라서 곧 대사임명장을 받고 또 대통령에 대해 공관 설립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였더니 4월 4일 대통령이 公電으로 이를 확인한다는 뜻의 회답이 왔다. (중략) 대사관 경비 유지를 위해 모든 財錢은 前 구미위원부로 보내지 말고 대사관으로 송금하기 바란다. 특별주의 서재필 씨는 미국 시민인 고로 대한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것은 법률이 허하지 않는 일임을 알기 바란다.
주미대사 구미위원장 현순
이에 따르면, 현순이 이승만에게 "미국 정부에 한국 독립의 승인을 요청하여야 한다"는 전문을 보냈더니, 그로부터 "이미 위임장이 위원부로 송부되었으니 편의대로 하라"는 회신이 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시 이승만에게 "공관 설립을 확인하여 달라"고 요청하여 그로부터 "그것을 확인한다"는 전문을 4월 4일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그는 4월 18일 현순을 해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당신의 委員 해임. 公使위임장도 勿施하니 사무와 재정을 서재필에게 전장하오. 위임장은 급할 때 쓰란 것이오. 公館이란 말 업섯소. 4월 4일 전보도 公電 기다리라 한 것이오. 4월 9일 정부에 보낸 電報도 대실수. 돌프께 위임장 도로 주오.
즉, 이승만은 그에게 위임장을 보내긴 했지만 "대사관을 설치하라"는 지시는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순은 4월 19일 이승만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이 ‘33인의 대표자’임을 상기시키고, "서재필과 프레드 A. 돌프는 외국인이므로 외교를 맡길 수 없다"고 반박하며 해임을 거부하였다. 이어 그는 5월 4일 "정한경과 돌프를 구미위원부에서 파면한다"고 통보하였으며, 5월 6일 미국 국무성 비서장을 방문하여 양국간의 수교를 요청함으로써 주미대사로서의 대외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사관이 2개가 되어버리자, 뉴욕의 대한인공동회는 워싱턴 D.C.에 대표를 파견해 진상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가 5월 2일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현순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했으며, 그의 실책을 6조목으로 열거했다. 더 나아가 대한인공동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여, 향후 현순의 활동을 제약하고자 하였다.
1. 현순 씨에게 경고를 발할 것.
2. 이 사건을 미, 포, 묵과 원동 각처 동포들에게 포고할 것.
3. 위원들은 미, 묵, 포 동포들의 가장 신망 있는 사람으로 속히 선출하여 대통령께 헌의할 것.
2. 이 사건을 미, 포, 묵과 원동 각처 동포들에게 포고할 것.
3. 위원들은 미, 묵, 포 동포들의 가장 신망 있는 사람으로 속히 선출하여 대통령께 헌의할 것.
이러한 조사에 이어 서재필은 5월 7일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고 5가지 이유를 들어 현순을 비판했다.
玄氏의 이번 不祥事는 第一로 國家外交의 機密을 漏泄하고 第二로 免職 後 國書를 美國國務院에 보내어 國家외 體面을 辱되게 하였고 第三으로는 大統領과 政府의 命令에 背馳하였고 第四로는 委員部의 財政을 横領하고 또 重要文書를 事務所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竊取하였고 第五로 郵便 通信 및 銀行의 往來를 弄濫하여 政府와 各地 通信機關과의 連絡을 끊고 金融의 길을 閉塞하였다.
즉, 그는 현순이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였고,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켰으며, 대통령과 정부의 명령을 거역하였고, 구미위원부의 재정을 횡령하고 문서를 탈취하였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비난한 것이다. 이같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현순은 대사관을 계속 유지시켰다. 그리고 5월 11일에는 미국 국무장관 휴즈(C. E. Hughes)에게 ‘大韓民國臨時政府 駐美特派大使’라는 직함으로 공문을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 대통령 및 정부가 한국의 전면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것
둘째, 그와 같은 취지의 선언문을 미국 대통령의 명의로 각국 정부에 보낼 것
셋째, 미국 정부는 1882년 체결된 양국간의 조약에 의거하여 한국과의 직접적인 외교적·상업적 관계를 즉시 재개할 것.
둘째, 그와 같은 취지의 선언문을 미국 대통령의 명의로 각국 정부에 보낼 것
셋째, 미국 정부는 1882년 체결된 양국간의 조약에 의거하여 한국과의 직접적인 외교적·상업적 관계를 즉시 재개할 것.
그리고 그는 여전히 ‘大朝鮮獨立團三十三賢’의 대표라 자처하면서, 미국 정부에 사과문을 보낸 이승만과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위임통치의 연장 선상에서 외교 활동을 하고 있다고 힐난했다. 그러나 현지 여론은 갈수록 현순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임시정부 각료들이 서명한 그의 면임장이 5월 24일 도착함으로써 그의 입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게다가 서재필 측에서는 현순의 구미위원부 사무실을 폐쇄하고 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던 구미위원부 예금 구좌를 서재필의 이름으로 옮기는 등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결국 그는 5월 말 미국을 떠나 하와이로 이동했다.
2.5. 이후의 행적
현순은 자신의 지지기반이 잘 갖춰진 하와이로 돌아간 뒤 이승만과 서재필, 구미위원부를 비난하는 글을 배포해 한인 교포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위임 통치’ 문제를 들어 그들을 공박했다. 그러나 하와이에 구축된 이승만 지지 세력의 압력이 갈수록 심해지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상하이로 떠나야 했다.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모스크바로 가서 한국 독립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얻으라"는 의뢰를 받았다. 이에 그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極東人民代表大會)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그는 ‘목사 동무’ (Comrade Minister)라 불려지면서 레닌과 트로츠키 등 소련 지도자를 만나 한국 독립에 대한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온 현순은 1922년 7월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 참석했지만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고, 1923년에 이르러 재정적 궁핍에 빠지자 영국 제약회사에 판매원으로 취직해 각처를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장춘에서 감리교회의 감독인 프라이 박사가 보낸 편지를 받은 그는 판매원을 그만두고 1923년 2월 하와이로 떠나 호놀룰루 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호놀룰루 교회에서 1926년까지 담당했지만, 박용만 계열과 이승만 계열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가와이섬으로 자리를 옮겨 오랫동안 그곳에서 목회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그는 하와이 각처를 돌아다니며 교민들에게 임시정부의 새로운 대표자 김구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면서 모금 운동을 벌이는 한편 매달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1935년, 현순은 임시정부로부터 '하와이군도 선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하와이 교민들로 하여금 임시정부를 지원하도록 설득하는 책임을 맡았다. 1940년 일선에서 은퇴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1968년 7월 1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현순에게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75년 8월 4일 독립유공자 장인환·서상한 등의 유해와 함께 국내로 봉환되어# 같은 달 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3. 흑역사
6.25 전쟁이 한창 전개되고 있던 1950년 무렵에 지은 시들을 통해 김일성을 찬양한 적이 있다. 가령 현순의 시집 중 하나인 시와 연극의 110~112p에서 김일성을 장군이라는 호칭까지 붙이면서 찬양하고 대한민국을 남침한 북한군의 승리를 원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는 반면 맥아더는 맥흉(麥凶)이라 칭하고 이승만은 국적(國賊)이라고 칭하고 있다. 다만 현순이 비록 일시적으로 좌파적 입장을 견지한 적이 있었긴 했지만 이후 평생을 미주에서 거주했고 공산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음을 고려할 때 현순의 이러한 시는 1919~1920년말까지 전개되었던 이승만과의 첨예한 대립 및 갈등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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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모리스 윌리엄 | 1950 어니스트 베델 | 1950·1968 일라이 M. 모우리 | 1950 제이 제롬 윌리엄스 | 1950 존 W. 스태거즈 | ||||||
| 1950 찰스 에드워드 러셀 | 1950 폴 프레드릭 더글라스 | 1950 프레데릭 브라운 해리스 | 1950 프레드 A. 돌프 | 1950 허버트 아돌프스 밀러 | ||||||
| 1950 호러스 뉴턴 알렌 | 1950 윌리엄 L. 로버츠 | 1952 리처드 J. H. 존스턴 | 1952 올리버 R. 에이비슨 | 1959 에템 멘데레스 | ||||||
| 1959 (취소) | 1961 아이작 D. 화이트 | 1961 카터 매그루더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62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126명 | ||||||
| 1962 강무경 의병 | 1962 고광순 의병 | 1962 고두환 만주방면 | 1962 기삼연 의병 | 1962 김덕제 의병 | ||||||
| 1962 김도원 국내항일 | 1962 김도현 의병 | 1962 김동식 국내항일 | 1962 김마리아 국내항일 | 1962 김봉학 계몽운동 | ||||||
| 1962 김석진 계몽운동 | 1962 김수민 의병 | 1962 김승학 임시정부 | 1962 김예진 중국방면 | 1962 김원벽 3·1 운동 | ||||||
| 1962 김정련 중국방면 | 1962 김정익 의열투쟁 | 1962 김진묵 의병 | 1962 김철 임시정부 | 1962 김태원 의병 | ||||||
| 1962 김학규 광복군 | 1962 김혁 만주방면 | 1962 김홍일 광복군 | 1962 나철 의열투쟁 | 1962 문일민 임시정부 | ||||||
| 1962 민양기 만주방면 | 1962 박세화 의병 | 1962 박장호 만주방면 | 1962 박재혁 중국방면 | 1962 박치의 만주방면 | ||||||
| 1962 반하경 계몽운동 | 1962 변학기 의병 | 1962 서일 만주방면 | 1962 선우혁 임시정부 | 1962 손정도 임시정부 | ||||||
| 1962 송계백 일본방면 | 1962 송병선 계몽운동 | 1962 송학선 의열투쟁 | 1962 심남일 의병 | 1962 안경신 만주방면 | ||||||
| 1962 안명근 계몽운동 | 1962 안승우 의병 | 1962 안태국 계몽운동 | 1962 안희제 계몽운동 | 1962 양세봉 만주방면 | ||||||
| 1962 여순근 만주방면 | 1962 오강표 계몽운동 | 1962 오광선 만주방면 | 1962 오기호 의열투쟁 | 1962 왕회종 의병 | ||||||
| 1962 우덕순 의열투쟁 | 1962 우동선 의병 | 1962 유관순 3·1 운동 | 1962 유근 계몽운동 | 1962 유도발 계몽운동 | ||||||
| 1962 유림 임시정부 | 1962 유명규 의병 | 1962 유시연 의병 | 1962 윤병구 중국방면 | 1962 윤세복 만주방면 | ||||||
| 1962 윤세용 만주방면 | 1962 (취소) | 1962 윤현진 임시정부 | 1962 이갑 계몽운동 | 1962 이강 계몽운동 | ||||||
| 1962 이경섭 3·1 운동 | 1962 이광호 국내항일 | 1962 이규갑 임시정부 | 1962 이남규 의병 | 1962 이만도 계몽운동 | ||||||
| 1962 이면주 계몽운동 | 1962 이상룡 임시정부 | 1962 이상철 계몽운동 | 1962 이석 의병 | 1962 이석용 의병 | ||||||
| 1962 이소응 의병 | 1962 이수흥 만주방면 | 1962 이애라 만주방면 | 1962 이윤재 문화운동 | 1962 이인식 3·1 운동 | ||||||
| 1962 이종암 중국방면 | 1962 이종호 만주방면 | 1962 이준식 광복군 | 1962 이중언 계몽운동 | 1962 이진룡 의병 | ||||||
| 1962 이진무 만주방면 | 1962 이학순 계몽운동 | 1962 이한응 계몽운동 | 1962 이현섭 계몽운동 | 1962 이회영 만주방면 | ||||||
| 1962 이희승 문화운동 | 1962 임병찬 의병 | 1962 (취소) | 1962 장진홍 의열투쟁 | 1962 장태수 계몽운동 | ||||||
| 1962 전덕기 계몽운동 | 1962 전덕원 만주방면 | 1962 정동식 계몽운동 | 1962 정용기 의병 | 1962 정인승 문화운동 | ||||||
| 1962 정태진 문화운동 | 1962 정한경 미주방면 | 1962 조경한 임시정부 | 1962 조도선 의열투쟁 | 1962 조맹선 만주방면 | ||||||
| 1962 조병옥 국내항일 | 1962 조인환 의병 | 1962 지용기 의병 | 1962 차도선 의병 | 1962 차병혁 3·1 운동 | ||||||
| 1962 차이석 임시정부 | 1962 채응언 의병 | 1962 채찬 만주방면 | 1962 최시흥 만주방면 | 1962 최양옥 만주방면 | ||||||
| 1962 최용덕 광복군 | 1962 최재형 임시정부 | 1962 최팔용 일본방면 | 1962 최현배 문화운동 | 1962 표영준 의열투쟁 | ||||||
| 1962 한징 문화운동 | 1962 함태영 3·1 운동 | 1962 현익철 만주방면 | 1962 홍만식 계몽운동 | 1962 홍범식 계몽운동 | ||||||
| 1962 홍진 임시정부 | 1962 황학수 임시정부 | 1962 황현 계몽운동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63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224명 | ||||||
| 1963 강명규 만주방면 | 1963 강순필 국내항일 | 1963 강창제 임시정부 | 1963 강철구 만주방면 | 1963 계화 만주방면 | ||||||
| 1963 고운기 광복군 | 1963 고인덕 의열투쟁 | 1963 고제량 의병 | 1963 곽재기 의열투쟁 | 1963 곽종석 3·1 운동 | ||||||
| 1963 구연영 국내항일 | 1963 권영만 국내항일 | 1963 권용일 의병 | 1963 권쾌복 학생운동 | 1963 기산도 의열투쟁 | ||||||
| 1963 김경태 국내항일 | 1963 김관오 광복군 | 1963 김광진 만주방면 | 1963 김규식 만주방면 | 1963 김기한 만주방면 | ||||||
| 1963 (취소) | 1963 김동수 광복군 | 1963 김두만 임시정부 | 1963 김만수 만주방면 | 1963 김병로 문화운동 | ||||||
| 1963 김병록 의열투쟁 | 1963 김보형 만주방면 | 1963 김복한 의병 | 1963 김봉수 만주방면 | 1963 김상길 학생운동 | ||||||
| 1963 김상태 의병 | 1963 김석창 만주방면 | 1963 김성근 임시정부 | 1963 김성엽 만주방면 | 1963 김성호 만주방면 | ||||||
| 1963 김세환 3·1운동 | 1963 김승만 만주방면 | 1963 김영숙 만주방면 | 1963 김영철 만주방면 | 1963 김우근 만주방면 | ||||||
| 1963 김원국 의병 | 1963 김원조 국내항일 | 1963 김재근 국내항일 | 1963 김준승 만주방면 | 1963 김지환 3·1 운동 | ||||||
| 1963 김창곤 만주방면 | 1963 김창근 중국방면 | 1963 김창환 만주방면 | 1963 김천익 만주방면 | 1963 김최명 만주방면 | ||||||
| 1963 김태오 3·1 운동 | 1963 김태원 만주방면 | 1963 김평식 만주방면 | 1963 김한종 국내항일 | 1963 나월환 광복군 | ||||||
| 1963 나중소 만주방면 | 1963 나창헌 임시정부 | 1963 남정각 중국방면 | 1963 노기용 국내항일 | 1963 노복선 광복군 | ||||||
| 1963 민강 국내항일 | 1963 민영구 광복군 | 1963 민필호 임시정부 | 1963 박기성 광복군 | 1963 박기제 만주방면 | ||||||
| 1963 박기한 만주방면 | 1963 박민항 만주방면 | 1963 박상진 국내항일 | 1963 박세건 만주방면 | 1963 박시창 광복군 | ||||||
| 1963 박연백 의병 | 1963 박응백 만주방면 | 1963 박중서 만주방면 | 1963 박찬익 임시정부 | 1963 방순희 임시정부 | ||||||
| 1963 백기준 임시정부 | 1963 백기환 의열투쟁 | 1963 백낙주 만주방면 | 1963 백남규 의병 | 1963 백시찬 만주방면 | ||||||
| 1963 백운한 만주방면 | 1963 백정기 중국방면 | 1963 변춘식 만주방면 | 1963 서상교 학생운동 | 1963 서상렬 의병 | ||||||
| 1963 서상한 일본방면 | 1963 손기업 만주방면 | 1963 손창준 만주방면 | 1963 송병조 임시정부 | 1963 송진우 문화운동 | ||||||
| 1963 신공제 임시정부 | 1963 신덕영 만주방면 | 1963 신송식 광복군 | 1963 신숙 만주방면 | 1963 신영삼 임시정부 | ||||||
| 1963 신우현 만주방면 | 1963 신팔균 만주방면 | 1963 안규홍 의병 | 1963 안병찬 계몽운동 | 1963 안상익 3·1 운동 | ||||||
| 1963 안세환 3·1 운동 | 1963 안재환 중국방면 | 1963 안지호 3·1 운동 | 1963 안춘생 광복군 | 1963 양기하 만주방면 | ||||||
| 1963 양우조 임시정부 | 1963 엄순봉 중국방면 | 1963 여행렬 의열투쟁 | 1963 연병호 임시정부 | 1963 오면직 중국방면 | ||||||
| 1963 오복원 의열투쟁 | 1963 오상서 만주방면 | 1963 오운흥 국내항일 | 1963 우승창 만주방면 | 1963 우재룡 국내항일 | ||||||
| 1963 유기동 만주방면 | 1963 유상렬 임시정부 | 1963 유창순 국내항일 | 1963 유흥수 학생운동 | 1963 윤준희 만주방면 | ||||||
| 1963 윤창하 학생운동 | 1963 이건석 의열투쟁 | 1963 이광 임시정부 | 1963 이광세 국내항일 | 1963 이교재 임시정부 | ||||||
| 1963 이규채 임시정부 | 1963 이기송 3·1 운동 | 1963 이동수 의열투쟁 | 1963 이명상 의병 | 1963 이명하 만주방면 | ||||||
| 1963 이민화 만주방면 | 1963 이상만 임시정부 | 1963 이상호 학생운동 | 1963 이서현 만주방면 | 1963 이설 계몽운동 | ||||||
| 1963 이세영 임시정부 | 1963 이순모 3·1 운동 | 1963 이신애 국내항일 | 1963 이용담 만주방면 | 1963 이우영 만주방면 | ||||||
| 1963 이원직 임시정부 | 1963 이유필 임시정부 | 1963 이인 문화운동 | 1963 이장녕 만주방면 | 1963 이재현 광복군 | ||||||
| 1963 이정 만주방면 | 1963 이정렬 국내항일 | 1963 이준용 만주방면 | 1963 이창용 만주방면 | 1963 이춘영 의병 | ||||||
| 1963 이치모 국내항일 | 1963 이탁 임시정부 | 1963 이한구 의병 | 1963 이홍래 만주방면 | 1963 이화익 중국방면 | ||||||
| 1963 이화주 만주방면 | 1963 임국정 만주방면 | 1963 임봉주 국내항일 | 1963 임의탁 임시정부 | 1963 임창모 의병 | ||||||
| 1963 장관주 국내항일 | 1963 장기천 만주방면 | 1963 장덕준 문화운동 | 1963 장덕진 만주방면 | 1963 장두환 국내항일 | ||||||
| 1963 장해평 중국방면 | 1963 장형 국내항일 | 1963 전좌한 중국방면 | 1963 전태선 의열투쟁 | 1963 전홍섭 만주방면 | ||||||
| 1963 정남용 국내항일 | 1963 정봉화 만주방면 | 1963 정순경 만주방면 | 1963 정신 만주방면 | 1963 정의도 임시정부 | ||||||
| 1963 정이형 만주방면 | 1963 정인복 만주방면 | 1963 정찬조 만주방면 | 1963 정태희 임시정부 | 1963 조경환 의병 | ||||||
| 1963 조길룡 학생운동 | 1963 조명하 중국방면 | 1963 조병준 만주방면 | 1963 조시원 광복군 | 1963 조원세 국내항일 | ||||||
| 1963 조인제 광복군 | 1963 조종대 국내항일 | 1963 조지 새넌 맥큔 | 1963 조지 쇼 | 1963 조진탁 3·1 운동 | ||||||
| 1963 조창호 의열투쟁 | 1963 주기철 문화운동 | 1963 주명우 3·1 운동 | 1963 주병웅 만주방면 | 1963 지달수 광복군 | ||||||
| 1963 차병제 만주방면 | 1963 채기중 국내항일 | 1963 최관용 만주방면 | 1963 최낙철 학생운동 | 1963 최능찬 3·1 운동 | ||||||
| 1963 최병선 중국방면 | 1963 최병수 3·1 운동 | 1963 최병호 만주방면 | 1963 최석준 만주방면 | 1963 최수봉 의열투쟁 | ||||||
| 1963 최은식 3·1 운동 | 1963 최지관 만주방면 | 1963 최진동 만주방면 | 1963 최천호 의열투쟁 | 1963 한봉수 의병 | ||||||
| 1963 한상렬 의병 | 1963 한상호 만주방면 | 1963 한흥근 의열투쟁 | 1963 함석은 만주방면 | 1963 허형 의열투쟁 | ||||||
| 1963 현순 임시정부 | 1963 현천묵 만주방면 | 1963 홍사구 의병 | 1963 홍성익 임시정부 | 1963 홍주 만주방면 | ||||||
| 1963 홍찬섭 3·1 운동 | 1963 황덕환 만주방면 | 1963 황병길 만주방면 | 1963 황상규 중국방면 | 1963 황학봉 만주방면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65~1969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94명 | ||||
| 1965 체스터 니미츠 | 1966 천궈푸 | 1968 고이허 만주방면 | 1968 궈타이치 | 1968 권준 중국방면 | ||||||
| 1968 (취소) | 1968 김기형 임시정부 | 1968 김명권 만주방면 | 1968 김봉식 만주방면 | 1968 김상옥 만주방면 | ||||||
| 1968 김석 중국방면 | 1968 김성택 만주방면 | 1968 김시중 의병 | 1968 김용구 의병 | 1968 김원범 의병 | ||||||
| 1968 김원식 만주방면 | 1968 (취소) | 1968 김진성 만주방면 | 1968 김진준 만주방면 | 1968 김천성 광복군 | ||||||
| 1968 김태연 만주방면 | 1968 김학섭 만주방면 | 1968 김홍서 임시정부 | 1968 노병대 의병 | 1968 노태준 광복군 | ||||||
| 1968 다이리 | 1968 로버트 그리어슨 | 1968 류용야오 | 1968 마수례 | 1968 모더후이 | ||||||
| 1968 문창학 만주방면 | 1968 박도경 만주방면 | 1968 박인화 의병 | 1968 박태열 만주방면 | 1968 박희광 만주방면 | ||||||
| 1968 백삼규 만주방면 | 1968 서원준 만주방면 | 1968 서의배 국내항일 | 1968 손승억 만주방면 | 1968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 | ||||||
| 1968 신정백 의병 | 1968 신태식 의병 | 1968 신현구 국내항일 | 1968 아치볼드 해리슨 바커 | 1968 양승우 만주방면 | ||||||
| 1968 양한규 의병 | 1968 여준 만주방면 | 1968 유득신 국내항일 | 1968 유상근 의열투쟁 | 1968 유택수 만주방면 | ||||||
| 1968 윤이병 계몽운동 | 1968 이규선 3·1 운동 | 1968 이규창 중국방면 | 1968 이기 의열투쟁 | 1968 이명균 국내항일 | ||||||
| 1968 이병묵 만주방면 | 1968 이병욱 만주방면 | 1968 이붕해 만주방면 | 1968 이성구 중국방면 | 1968 이성우 의열투쟁 | ||||||
| 1968 이양섭 3·1 운동 | 1968 이응서 만주방면 | 1968 이의준 만주방면 | 1968 이진택 만주방면 | 1968 이창덕 만주방면 | ||||||
| 1968 이현규 의병 | 1968 이희경 임시정부 | 1968 임치정 계몽운동 | 1968 장소진 3·1운동 | 1968 장윤덕 의병 | ||||||
| 1968 장쥐 | 1968 장진원 중국방면 | 1968 장췬 | 1968 전덕명 만주방면 | 1968 정서송 3·1 운동 | ||||||
| 1968 조지 애쉬모어 피치 | 1968 조창선 국내항일 | 1968 주석환 만주방면 | 1968 주칭란 | 1968 차병수 임시정부 | ||||||
| 1968 차희식 3·1 운동 | 1968 채세윤 만주방면 | 1968 채원개 광복군 | 1968 천리푸 | 1968 최규동 문화운동 | ||||||
| 1968 최도환 의병 | 1968 최세윤 의병 | 1968 최영걸 만주방면 | 1968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 1968 한훈 의열투쟁 | ||||||
| 1968 한흥 만주방면 | 1968 홍원식 의병 | 1968 황병학 의병 | 1968 황줴 | 1968 황창오 국내항일 | ||||||
| 1969 세바스티안 우가르테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77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84명 | ||||||||
| 1977 쉐웨 | 1977 강상모 만주방면 | 1977 강진원 의병 | 1977 권기옥 중국방면 | 1977 김교헌 만주방면 | ||||||
| 1977 김대규 의병 | 1977 김동신 의병 | 1977 김성수 중국방면 | 1977 김순애 임시정부 | 1977 김승곤 광복군 | ||||||
| 1977 김약연 만주방면 | 1977 김용재 광복군 | 1977 김이직 만주방면 | 1977 김중건 만주방면 | 1977 김진만 국내항일 | ||||||
| 1977 (취소) | 1977 나태섭 광복군 | 1977 남궁억 문화운동 | 1977 남석인 의병 | 1977 노원섭 의병 | ||||||
| 1977 노응규 의병 | 1977 노임수 의병 | 1977 문상익 3·1 운동 | 1977 문창숙 만주방면 | 1977 민용호 의병 | ||||||
| 1977 박승길 만주방면 | 1977 박영준 광복군 | 1977 박영희 만주방면 | 1977 박인항 국내항일 | 1977 박춘실 의병 | ||||||
| 1977 서상용 만주방면 | 1977 서영석 3·1운동 | 1977 손양윤 만주방면 | 1977 송병순 계몽운동 | 1977 송주면 계몽운동 | ||||||
| 1977 신건식 임시정부 | 1977 신언성 만주방면 | 1977 안경근 임시정부 | 1977 안병무 임시정부 | 1977 양진여 의병 | ||||||
| 1977 염온동 임시정부 | 1977 오광심 광복군 | 1977 오성술 의병 | 1977 왕광연 3·1 운동 | 1977 원심창 중국방면 | ||||||
| 1977 유민식 만주방면 | 1977 유병기 의병 | 1977 유석현 중국방면 | 1977 유장렬 국내항일 | 1977 유지명 의병 | ||||||
| 1977 유해준 광복군 | 1977 윤병구 미주방면 | 1977 이강산 의병 | 1977 이강훈 중국방면 | 1977 이관석 만주방면 | ||||||
| 1977 이기손 의병 | 1977 이병채 의병 | 1977 이상정 임시정부 | 1977 이승길 계몽운동 | 1977 이우식 문화운동 | ||||||
| 1977 이원대 중국방면 | 1977 이재윤 의병 | 1977 이종건 광복군 | 1977 이종희 광복군 | 1977 이진영 광복군 | ||||||
| 1977 이형우 만주방면 | 1977 이화일 만주방면 | 1977 임용상 의병 | 1977 장한성 만주방면 | 1977 정용대 의병 | ||||||
| 1977 정운경 의병 | 1977 정춘서 의병 | 1977 조용하 미주방면 | 1977 조정인 의병 | 1977 차천모 만주방면 | ||||||
| 1977 채광묵 의병 | 1977 최욱영 의병 | 1977 최익형 계몽운동 | 1977 최중호 중국방면 | 1977 최해 만주방면 | ||||||
| 1977 한성수 광복군 | 1977 허빈 만주방면 | 1977 홍준옥 3·1 운동 | 1977 홍충희 만주방면 | 1977 황재운 3·1운동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80~1990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101명 | ||||
| 1980 강원형 계몽운동 | 1980 강인수 중국방면 | 1980 권인규 의병 | 1980 금달연 의병 | 1980 기우만 의병 | ||||||
| 1980 김대지 임시정부 | 1980 김봉원 만주방면 | 1980 김인전 임시정부 | 1980 김일두 임시정부 | 1980 마진 만주방면 | ||||||
| 1980 박문용 임시정부 | 1980 사도덕 | 1980 서종채 의병 | 1980 손영각 의병 | 1980 안무 만주방면 | ||||||
| 1980 양근환 일본방면 | 1980 양윤숙 의병 | 1980 오의선 임시정부 | 1980 왕주이 | 1980 이구연 임시정부 | ||||||
| 1980 이능권 의병 | 1980 이봉우 만주방면 | 1980 이종혁 만주방면 | 1980 임이걸 3·1 운동 | 1980 장석영 3·1 운동 | ||||||
| 1980 조훈 만주방면 | 1980 진치언 의병 | 1980 진희창 임시정부 | 1980 한봉근 중국방면 | 1980 한정만 의병 | ||||||
| 1982 김석황 임시정부 | 1982 김성숙 임시정부 | 1982 김영백 의병 | 1982 류인식 문화운동 | 1982 윤세주 중국방면 | ||||||
| 1982 윤인순 의병 | 1983 정현섭 중국방면 | 1983 조윤하 만주방면 | 1982 최창식 임시정부 | 1986 권석도 의병 | ||||||
| 1986 김갑 임시정부 | 1986 김영현 만주방면 | 1986 이명순 만주방면 | 1986 정순만 만주방면 | 1986 황준성 의병 | ||||||
| 1987 신언준 중국방면 | 1987 안정근 임시정부 | 1988 유동하 의열투쟁 | 1989 고창일 노령방면 | 1989 엄항섭 임시정부 | ||||||
| 1989 원세훈 중국방면 | 1990 강기덕 국내항일 | 1990 박봉석 의병 | 1990 서병희 의병 | 1990 손덕오 의병 | ||||||
| 1990 염인서 의병 | 1990 이은영 의병 | 1990 이충응 의병 | 1990 이필봉 의병 | 1990 이현 3·1 운동 | ||||||
| 1990 이황룡 의병 | 1990 이희룡 3·1 운동 | 1990 임하중 의병 | 1990 장인초 의병 | 1990 정기찬 의병 | ||||||
| 1990 정철화 의병 | 1990 조병두 의병 | 1990 지석용 3·1 운동 | 1990 최산흥 의병 | 1990 추삼만 의병 | ||||||
| 1990 김상덕 임시정부 | 1990 김의한 임시정부 | 1990 김일곤 중국방면 | 1990 김형빈 만주방면 | 1990 명제세 임시정부 | ||||||
| 1990 박건웅 임시정부 | 1990 오영선 임시정부 | 1990 윤해 만주방면 | 1990 이관직 만주방면 | 1990 이광민 만주방면 | ||||||
| 1990 이병화 만주방면 | 1990 이종건 만주방면 | 1990 장도빈 국내항일 | 1990 장철호 만주방면 | 1990 정인보 문화운동 | ||||||
| 1990 조지영 임시정부 | 1990 최이붕 중국방면 | 1990 김춘배 만주방면 | 1990 김치홍 의병 | 1990 박여성 의병 | ||||||
| 1990 박인호 3·1운동 | 1990 양경학 의병 | 1990 윤동주 학생운동 | 1990 이대극 의병 | 1990 이명서 만주방면 | ||||||
| 1990 이봉희 만주방면 | 1990 장일환 국내항일 | 1990 정기선 의병 | 1990 최동오 임시정부 | 1990 태양욱 의병 | ||||||
| 1990 한이경 국내항일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92~1995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114명 | ||||||||
| 1992 곽중규 임시정부 | 1992 김철남 임시정부 | 1992 이달 중국방면 | 1992 고평 만주방면 | 1992 손기혁 의병 | ||||||
| 1992 현정건 중국방면 | 1992 현정경 만주방면 | 1993 이철형 의병 | 1993 강기운 만주방면 | 1993 김태원 의병 | ||||||
| 1993 문석봉 의병 | 1993 박건병 중국방면 | 1993 박치화 만주방면 | 1993 이필희 의병 | 1993 이흥관 임시정부 | ||||||
| 1993 장두량 만주방면 | 1994 장봉한 만주방면 | 1994 천병림 중국방면 | 1994 민효식 의병 | 1995 강경선 중국방면 | ||||||
| 1995 강이봉 의병 | 1995 강제하 만주방면 | 1995 강진해 만주방면 | 1995 계봉우 임시정부 | 1995 권순명 의병 | ||||||
| 1995 권준 의병 | 1995 금기철 의병 | 1995 김강 만주방면 | 1995 김경운 의병 | 1995 김난섭 만주방면 | ||||||
| 1995 김덕순 의병 | 1995 김덕흥 의병 | 1995 김동수 의병 | 1995 김문희 임시정부 | 1995 김범이 의병 | ||||||
| 1995 김법린 국내항일 | 1995 김병조 중국방면 | 1995 김병태 의열투쟁 | 1995 김봉규 의병 | 1995 김선여 의병 | ||||||
| 1995 김성범 만주방면 | 1995 김수곡 의병 | 1995 김영란 국내항일 | 1995 김영렬 만주방면 | 1995 김용대 만주방면 | ||||||
| 1995 김원국 만주방면 | 1995 김원식 의병 | 1995 김율 의병 | 1995 김응백 의병 | 1995 김이섭 만주방면 | ||||||
| 1995 김일봉 만주방면 | 1995 김일원 의병 | 1995 김정원 의병 | 1995 김종철 의병 | 1995 김준택 만주방면 | ||||||
| 1995 김창균 만주방면 | 1995 김태연 중국방면 | 1995 김훈 만주방면 | 1995 나병삼 만주방면 | 1995 나시운 의병 | ||||||
| 1995 나정구 만주방면 | 1995 노을룡 중국방면 | 1995 노종균 중국방면 | 1995 문양목 미주방면 | 1995 문일평 중국방면 | ||||||
| 1995 박경순 임시정부 | 1995 박차정 중국방면 | 1995 성익현 중국방면 | 1995 송종익 미주방면 | 1995 송헌주 미주방면 | ||||||
| 1995 신석우 임시정부 | 1995 신창룡 의병 | 1995 신창현 의병 | 1995 안공근 임시정부 | 1995 안국형 만주방면 | ||||||
| 1995 안원규 미주방면 | 1995 안현경 미주방면 | 1995 엄주필 노령방면 | 1995 오상원 의병 | 1995 유광흘 만주방면 | ||||||
| 1995 유성삼 만주방면 | 1995 유일한 미주방면 | 1995 윤덕보 만주방면 | 1995 윤흥곤 의병 | 1995 이광복 중국방면 | ||||||
| 1995 이교영 의병 | 1995 이대위 미주방면 | 1995 이덕삼 중국방면 | 1995 이범직 의병 | 1995 이병진 만주방면 | ||||||
| 1995 이석이 의병 | 1995 이영준 중국방면 | 1995 이인금 의병 | 1995 이중봉 의병 | 1995 이희삼 만주방면 | ||||||
| 1995 임병극 만주방면 | 1995 전학수 만주방면 | 1995 정봉준 의병 | 1995 정원집 의병 | 1995 조창룡 만주방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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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 최진하 미주방면 | 1995 최천유 의병 | 1995 한시대 미주방면 | 1995 허근 만주방면 | 1995 홍석호 만주방면 | ||||||
| 1995 홍언 미주방면 | 1995 홍학순 만주방면 | 1995 황봉신 의병 | 1995 황봉운 의병 | }}}}}}}}}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20%;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1996년 수훈~ ] {{{#!wiki style="margin: -5px -1px" | 73명 | |||||
| 1996 강윤희 의병 | 1996 김치보 노령방면 | 1996 이중집 만주방면 | 1996 장명도 만주방면 | 1996 추푸청 | ||||||
| 1996 남공선 만주방면 | 1996 안광조 의병 | 1996 엄해윤 의병 | 1996 윤상열 3·1 운동 | 1996 정인국 의병 | ||||||
| 1996 최봉준 노령방면 | 1996 최영호 만주방면 | 1997 김호 미주방면 | 1997 백일규 미주방면 | 1997 임성우 미주방면 | ||||||
| 1997 조병요 미주방면 | 1998 김용성 미주방면 | 1998 김찬수 만주방면 | 1998 박사화 의병 | 1998 심용준 만주방면 | ||||||
| 1998 차천리 만주방면 | 1999 신우여 노령방면 | 1999 후쭝난 | 2000 이호원 만주방면 | 2000 이성화 의병 | ||||||
| 2001 김학무 중국방면 | 2002 김규면 노령방면 | 2002 신현규 국내항일 | 2002 채영 노령방면 | 2003 이필상 의병 | ||||||
| 2004 윤자영 중국방면 | 2005 권오설 국내항일 | 2005 조동호 국내항일 | 2005 김철수 국내항일 | 2005 김태연 국내항일 | ||||||
| 2005 김한 중국방면 | 2005 정헌태 국내항일 | 2005 최윤구 만주방면 | 2005 한위건 중국방면 | 2006 고지형 3·1운동 | ||||||
| 2006 박영 만주방면 | 2006 이재유 국내항일 | 2006 이민환 노령방면 | 2006 한봉철 만주방면 | 2007 이자해 중국방면 | ||||||
| 2007 전일 노령방면 | 2008 유기석 중국방면 | 2008 이춘숙 임시정부 | 2009 장기초 만주방면 | 2009 길선주 3·1 운동 | ||||||
| 2009 이운혁 국내항일 | 2010 이경호 국내항일 | 2010 김창헌 만주방면 | 2010 김호 만주방면 | 2010 신광삼 만주방면 | ||||||
| 2010 유찬희 만주방면 | 2010 임기홍 만주방면 | 2010 이웅해 만주방면 | 2011 강영소 미주방면 | 2011 유상돈 노령방면 | ||||||
| 2012 임성섭 국내항일 | 2013 박창철 만주방면 | 2014 프레더릭 매켄지 | 2014 백남준 만주방면 | 2014 송중직 국내항일 | ||||||
| 2014 이진산 중국방면 | 2015 강익록 국내항일 | 2015 전병현 임시정부 | 2017 조응순 만주방면 | 2019 이봉구 3·1 운동 | ||||||
| 2020 이영쇠 3·1운동 | 2025 김창준 만주방면 | 2025 제랄딘 T. 피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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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2월 28일.[2] 연주현씨8수대동보 6권 503쪽에는 1878년 3월 21일생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880년 2월 28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4] 중랑장공파(구 천녕 현씨) 27세 木변 항렬.[5] 10대조 현욱(玄頊) : 1616년(광해군 8) 증광시 역과 한학(漢學) 전공에 2등 2위로 급제 → 9대조 현덕우(玄德宇) : 1639년(인조 17) 식년시 역과 한학 전공에 2등 2위로 급제 → 8대조 현각(玄珏) : 1662년(현종 3) 증광시 역과 한학 전공에 1등 3위로 급제 → 7대조 현상하(玄尙夏) : 1693년(숙종 19) 식년시 무과에 병과 2위로 급제 → 6대조 현심(玄深) : 미급제, 청학(淸學) 전공으로 종5품 사역원 판관(司譯院判官) 역임 → 5대조 현계근(玄啓根, 초명 현경제玄敬躋) : 1747년(영조 23) 식년시 역과 왜학(倭學) 전공에 3등 7위로 급제 → 고조부 현후(玄㷞) : 1773년(영조 49) 증광시 역과 한학 전공에 1등 1위, 즉 장원 급제 → 증조부 현재명(玄在明, 초명 현이원玄以遠) : 1786년(정조 10) 식년시 역과 한학 전공에 2등 1위로 급제 → 조부 현일(玄鎰) : 1827년(순조 27) 증광시 역과 한학 전공에 1등 1위, 즉 장원 급제.[6] 현 감리교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