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송인수(宋仁秀, 宋仁壽) |
본관 | 은진 송씨 (恩津 宋氏) |
출생 | 1897년 2월 19일 |
한성부 서서 반송방(성외) 지하계 석교동 (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 |
사망 | 1927년 5월 19일 |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형무소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9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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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의 암살을 시도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7년 2월 19일 한성부 서서 반송방(성외) 지하계 석교동(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에서 아버지 송성근(宋聖根)과 어머니 김씨(金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대문공립심상고등소학교[2]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09년,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해 한동안 궁핍한 삶을 살기도 했었다. 점차 직업을 가져 돈을 벌면서 살림은 나아졌으나 직장에서 받은 차별로 반일감정이 싹트고 있었으며, 1925년에 직장을 나온 이후로 안중근과 같은 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1926년 3월에 경성사진관에 들른 송학선은 서양식 칼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미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고자 결정한 차에 하늘이 내려준 칼이라 생각해 칼을 챙겼다. 해당 칼은 길이가 15cm에 손잡이가 흰 고급 과도로, 그는 숫돌에 칼을 갈아 날을 세우고 창틀 위에 두었다.
그 무렵 순종이 승하하고, 송학선도 망곡대열에 참가해 통곡한다. 그러다 순종의 빈소로 통하는 출입문인 창덕궁 금호문으로 총독부의 주요 인물들이 다니는 것을 보고 여기서 총독이 지나갈 때를 노려 암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해 4월 28일, 창덕궁 안으로 일본인 3명이 탄 차가 들어간 것을 본 송학선은 차가 나올 때 뛰어들어 안에 타고 있던 2명의 일본인을 죽이고 달아났다. 쫓아오는 기마 순사와 서대문경찰서의 순사 오필환에게도 중상을 입히고 달아났으나 곧 따라온 일경들에게 붙잡혔다.[3]
그런데 송학선이 죽인 인물들은 사이토가 아닌 다른 일본인이었다. 당시 송의사가 죽인 일본인은 국수회(國粹會) 지부장 다카야마 다카유키(高山孝行)와 경성부회 평의원 사토 토라지로(佐藤虎次郎)였다. 함께 탑승했던 평의원 이케다 나가지로(池田長次郎)는 중상에 그쳤다.총독을 죽인 줄 알았던 송학선은 비슷하게 생긴 다른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했다. 재판에서 일본인 변호사가 사형만큼은 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사형이 구형되었고, 1927년 5월 19일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어 순국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66년 5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미혼이어서 직계 후손은 없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193~194p
[1] 문헌에 따라 宋[2] 8.15 광복 후 서대문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73년 2월 28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1335246#home.[3] 기마 순사와 오필환도 나중에 부상이 악화되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