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73년 1월 24일 |
황해도 금천군 군내면 상일리[1] (현 황해북도 금천군 금천읍) | |
사망 | 1922년 7월 25일 |
함흥형무소 | |
종교 | 유교 (성리학) → 개신교 (남감리회)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79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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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조종대는 1873년 1월 24일 황해도 금천군 군내면 상일리(現 황해북도 금천군 금천읍)에서 5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강원도 철원군으로 이주하였다.그는 기독교 전도사로서 선교활동을 펴는 한편 한의학을 전공하여 약종상(藥種商)을 겸하기도 했고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는 철원의 봉명학교(鳳鳴學校)와 배영학교(培英學校)에서 구국 교육활동을 벌였다. 당시 배영학교는 군사교육까지 실시하던 민립학교였는데, 1909년 12월 19, 20일 배영학교 교장과 대한매일신보 지사장을 겸임하던 조종대는 한일합병에 반대하는 결의서에 2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한성부의 전덕기에게 보낸 바 있다. 이 때문에 당시 철원 헌병분견소의 내사를 받기도 했다.
경술국치 이후 배영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됨에 따라 조종대는 상경하였다. 그 뒤 경기도 경성부의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선교사업을 폈는데, 이때 한의사 나병규를 만나게 되었고 나병규가 한의술로 자신의 모친을 치료해줘 그 인연으로 의형제까지 맺게 되는 등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어쨌든 그는 고향인 금천군 등 황해도 일대와 철원 등 각지를 다니며 선교활동을 펼쳤으며, 1915년 12월 28일에는 황해도 평산군 보산면 보산리에 살면서 조선총독부에 남감리교회파 포교 신고를 했다.
한편으로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강원도대표로 선출되었으며, 또한 항일운동의 방법으로서 조선인관리퇴직동맹(朝鮮人官吏退職同盟)을 추진하기 위해 일단 이에 필요한 재정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8월 21일 배영학교 시절부터 같이 활동했던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강원도단(江原道團)의 서무국장 강대려로부터 대한독립애국단의 설치 사정을 접하고, 애국단에 가입하여 강원도 각군에 군단(郡團)을 설치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는 평소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강원도 전역의 기독교 인사들과 관련해 발이 넓은 것을 활용하여 원주군·횡성군·강릉군·양양군·김화군·평창군·울진군·삼척군·평해면 등지를 돌며 애국단의 조직 확대를 위해 힘을 쏟았고, 그 결과 강원도 각처에 애국단의 지단(支團)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 1월 대한독립애국단의 강원도단 조직이 발각되어 그는 곧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해 10월 30일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증회·출판법 위반·보안법 위반·공갈취재 등의 혐의로 징역 5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였으나 1921년 3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정치범처벌령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었다. 이에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4월 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면서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후 옥중에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다가 1922년 7월 25일 옥중 순국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69년 10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