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20:39:09

전덕기

파일:전덕기.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전봉운
본관 정선 전씨#
출생 1875년 12월 8일
한성부 서부 황화방 소정동계
(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사망 1914년 3월 23일
경기도 경성부
(현 서울특별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목회 활동2.3. 계몽 운동2.4. 민족 운동2.5. 105인 사건과 최후
3. 관련자료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감리회 목사.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전덕기는 1875년 12월 8일 한성부 서부 황화방 소정동계(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거주하던 아버지 전한규(全漢奎)와 어머니 임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9살 되던 해인 1884년 8월에 아버지를 잃었고, 그해 11월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지면서 고아가 되었다. 이후 숯장사를 하던 작은아버지 전성여(全成汝)의 양자로 입적하여 함께 살며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전성여는 남대문 시장에서 숯을 팔며 가난하게 살면서도 조카인 전덕기가 17살이 될 때까지 친자식처럼 잘 대해줬다.
집안이 가난하여 정식적인 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이웃집 서당을 기웃거리며 어깨너머로 한문을 배웠다.
전덕기는 17살이 되던 1892년에 서양인 선교사 W.B 스크랜턴[1]의 가정에 부엌 일꾼으로 들어가 일을 하다 요리를 배워 요리사로 근무했다. 전덕기와 스크랜턴 선교사의 만남에 대해선 2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전덕기는 사회에 대한 불만과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선입견에 시달린 끝에 스크랜턴의 집에 여러번 돌팔매질을 했다고 한다. 이에 스크랜턴이 전덕기를 붙잡으려고 달려갔는데, 전덕기는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에 스크랜턴이 돌을 던진 이유를 전덕기에게 묻자, 전덕기는 솔직하게 답했고, 화를 내기는 커녕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하는 그의 태도에 감동을 받아 이후 두 사람은 서로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고, 전덕기는 자신이 그동안 오해했음을 깨닫고 스크랜턴의 집에서 일하며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전덕기는 숯장수를 했던 작은 아버지에 의해 스크랜턴의 병원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전덕기는 17살 때부터 스크랜턴의 집에서 일했고, 민중에게 의료를 베풀어주는 그를 지켜보며 차츰 기독교에 호감을 품기 시작했다.

2.2. 목회 활동

전덕기는 스크랜턴 선교사 밑에서 4년간 일하면서 그가 민중에게 의료선교를 베푸는 걸 지켜봤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신분의 귀천 없이 평등하다는 만민평등사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숭고한 희생', 그리고 서양인 의사의 헌신과 봉사라는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배웠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마침내 1896년 스크랜턴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898년 '속장(屬長)'에 임명되었다. 속장은 감리교 이외 교단들에서의 구역장 혹은 순장에 해당하는 개념으로서, 열 명 내지의 신자로 구성된 소규모 집단을 대표하고, 그 집단 내의 신자들의 신앙을 지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1900년, 전덕기는 상동교회 새성전 신축공사에서 '유사(有司)'로서 재정 업무를 맡았으며, 1901년에는 '권사(勸師)', 1902년에는 미감리회 연회로부터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전덕기는 그 자신이 민중 출신이었고 남대문에서 생활하면서 민중의 고통과 애환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기독교 신앙을 전파했다. 그 결과 그가 일하는 상동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이 몰려들면서 서울 내에서 영향력이 큰 교회로 자리잡았다.

1905년 6월, 전덕기는 제1차 미감리회 한국선교연회에서 M.C. 해리스 감독에게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고 정식 직첩을 수령했다. 이는 W.C 스웨러 선교사가 그에 대한 호의적인 보고서를 올린 것이 컸다.
제가 상동교회 목사로 있기는 합니다만 지방 순회와 다른 여러가지 일로 교회에 전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운봉(전덕기) 형제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야 했습니다. 그는 훌륭하게 그 일을 수행했고 아주 유능한 인물로 성장하였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그가 본처 집사 목사로 안수받도록 추천하는 바랍니다.

송길섭의 <민족운동의 선구자 전덕기 목사>에 따르면, 어느 해 장질부사로 죽는 사람이 많고 그들의 유족들이 시신에 손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전덕기 목사가 마른 쑥으로 코를 막고, 나막신을 신고 직접 방 안에 들어가서 시체를 염하고 장례식까지 치러주었다고 한다. 이런 전덕기의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고 그를 따르며 존경하는 사람들이 그가 있는 상동교회로 몰려들었다. 헤이그 밀사 문서의 전 버전에도 있던 내용이지만, 이러한 전덕기의 행보가 알려지자 상동교회 문 앞에 시체나 병자를 가마니로 싸서 버리고 가는 일이 잦아졌다. 전덕기는 그들을 모두 장례를 치르거나 치료해줬다고 한다. 그 결과 상동교회는 1910년 서울에서 교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상동교회는 1739명, 정동교회는 1347명, 동대문교회는 1139명이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수라 할 수 있다.

2.3. 계몽 운동

전덕기는 자신의 출생과 성장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인 민중의 고통과 애환을 함께 경험했고, 그들을 기독교로 인도하여 구원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확신했다. 1903년 5월, 전덕기는 배일의식이 지나치게 강해 정치성이 짙게 배여 있다는 이유로 해산한 엡윗청년회(상동청년회)[2]를 재조직했다. 이후 그는 가난한 가정의 자녀와 교육을 기회를 놓쳐버린 청년 및 여성을 위해 초등교육기관인 공옥여학교[3], 공옥학교[4], 중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5], 여자중학교 네 개의 학교를 운영했다. 또한 상동청년학원 내 정규교육과정 이외에 노동자와 빈민을 위한 야학프로그램과 일반인을 위한 다양한 강습회 프로그램을 실시해 민중을 상대로 계몽운동을 펼쳤다.

또한 그는 전근대적이고 인습적인 제도와 의식에 반대했다. 1906년 8월, 그는 <가정잡지>에 "놀고 먹는 사람"이란 제목의 글을 게재해 노동을 기피하는 양반층에게 비판을 가했다.
대저 우리나라 집안을 의론하건대 오늘날 어찌하여 이같이 빈약하고 곤궁한 지경을 당하였는가? 그 원인을 탐구하면 여러 가지 폐단이 많거니와 제일 큰 폐단은 집집마다 놀고먹는 사람이라. (중략) 우리나라 사람들은 놀고 먹는 것이 복이라 하여 손톱에 물을 퉁기고 앉아서 일평생을 허송하니 비록 유전한 재물이 산같이 있어도 일개 걸인이라 다름이 없고 가련한 인생이라.

그는 또 <가정잡지>에 <내외간 화목한 일>, <속기를 해석함> 등 여러 글을 실어서 남자와 여자, 남편과 부인의 관계는 상하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 평등하며, 이런 평등의 관계가 가정에서 실현될 때 가정의 평화가 충만하게 됨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상동교회 교인인 주시경이 상동청년학원 국어교사로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게 했으며, 밤에도 상동청년학원 부설 '국어 야학반'을 만탕 문법을 가르치고 우리말을 보급하는 것을 용인했고, 매주 일요일 오후 2시에 '국어 문법강습회'를 개최해 상동교회 교인과 일반 대중들에게도 국어 문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주시경 외에도 이승만, 박승규, 장도빈(張道彬), 최남선 등 당시 최고의 교사들을 상동청년학원에 배속시켜 기독청년들을 가르치게 했다.

2.4. 민족 운동

전덕기는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독립협회 서무부장이 되었고, 만민공동회 활동에도 참여해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이동녕, 이동휘, 양기탁, 조성환 등 다양한 인사들과 교류했다. 이후 독립협회가 탄압을 받자, 전덕기는 여러 인사들을 상동교회에 숨겨줬고, 이상설, 이회영, 이동녕, 이준 등 여러 인사들과 함께 매주 목요일 7시에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회합을 열었다.

1903년 재조직된 엡윗청년회(상동청년회)를 통해 1889년 독립협회가 해산되며 흩어졌던 민족운동가들을 재규합하였으며 1904년 10월 15일 상동교회 내에 중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였다.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은 전국의 1,400명이 참여한 반일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이들을 ‘상동파’(尙洞派)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 채결 이후 상동청년회는 을사오적을 처단을 모의하기도 했으며 매일 수천명이 모여 조약무효 상소운동을 하였으며[6],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는 문제를 놓고 이회영과 함께 논의하여 상동교회 청년회 회장 이준과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선정했다. 그는 이회영의 인맥을 통해 고종의 친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고,[7] 헤이그 특사가 떠나기 전날 밤, 상동청년회장 이준을 위해 축도하고 특사 파견이 성공하도록 둘이서 지하실로 들어가 철야기도를 했다.

전덕기가 이렇듯 항일 인사들을 숨겨주고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맡고 있는 상동교회가 선교사가 운영하는 감리회 교회이기 때문에 일제가 쉽게 손을 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발판으로 삼아 상동교회를 민족 운동의 근거지로 삼을 수 있었고, 국채보상운동 당시 서울 시내 모금소를 상동교회 내에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던 1907년, 전덕기는 안창호, 양기탁, 이갑, 이동녕, 이시영, 유동열, 유동작, 이동휘, 안태국, 최광옥, 이승훈, 김구, 노백린, 이강, 조성환, 신채호, 이덕환, 김동원, 김홍서 등과 함께 신민회를 설립했다. 양기탁 등이 이끄는 <대한매일신보> 인사들은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고, 전덕기가 이끄는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은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이동휘와 이승훈, 안태국 등은 평안도 일대를 관장했고, 안창호 등은 미주에 이주한 한인들을 포섭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김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국내와 국외를 통하여 정치적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는데 그것이 곧 신민회(新民會)였다. (중략)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전덕기, 이동녕, 주진수, 이갑, 이종호, 최광옥, 김홍량과 그 외 몇 사람의 중심인물과 당시 400여 명 정예분자로 신민회를 조직했다.

전덕기를 비롯한 신민회 간부들은 1909년 3월 서울 회의와 4월 청도회의를 통해 국권회복의 최고 전략이 독립전쟁이라고 판단하고 해외 독립군기지 건설과 신한촌 건설, 경제적 자립을 목표로 삼고 신한촌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했다. 이에 남만주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고, 각지에서 자금을 모집해 군자금으로 활용하려 했다. 이때 전덕기는 재무를 총괄하는 직책을 맡아 신민회의 자금을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5. 105인 사건과 최후

전덕기의 사망에 대해 당초 알려졌던 내용은 1911년에 있었던 일제에 의해 조작된 105인 사건을 이용해 신민회 회원들을 체포하면서 핵심 인물인 전덕기 또한 체포되고 그 후 심문과정에서 고문을 받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1914년에 후유증의 악화로 사망했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최근 알려진 내용을 통해 전덕기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1911년,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해 신민회를 탄압했다. 이때 전덕기는 경찰에 체포된 피의자들로부터 신민회 회원으로 종종 거명되고 일제 경찰이 신민회 회원으로 인지는 했지만 불기소결정을 내렸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한국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을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서양 감리회의 반발은 물론이고 열강의 비난에 직면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105인사건과 말년의 활동 문단 참고

전덕기가 체포되었다고 알려진 시기에 1911년 8월 조선목사청년회 역원 일본 시찰단의 일원으로 현순, 양전백, 한석진(韓錫晉), 이상재, 김일선(金日善), 이원긍(李元兢) 등과 함께 일본 기독교계를 방문했고, 귀국 후인 그해 10월에 다시 일본 감리교회 총회 참석차 도쿄를 다녀왔고, 12월 20일 정동교회에서 거행된 협성신학교 1회 졸업식에 참석하여 졸업 축사를 했다. 이렇듯 그는 105인 사건에 직접 연루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뜻을 함께 하던 많은 동지들이 탄압받고 신민회 조직이 와해되는 걸 지켜보며 실의와 좌절에 빠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전덕기는 1911년부터 폐결핵에 시달렸고,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에 현순 목사가 그를 대신해 상동교회를 이끌었다. 그 후 1914년 3월 23일, 전덕기는 서울에서 병사했다. 향년 39세.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장례인파는 상동교회로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남대문 시장 일대 거지와 인근 불량배들, 그리고 백정들이 나서서 상여를 메고 소복을 입은 기생과 창녀들이 구슬피 울면서 긴 상여행렬의 뒤를 따랐으며 장례행렬이 10리에 달했다고 한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 두모면 수철리에 마련되었지만 1934년 일제의 이장 명령으로 유골을 화장, 한강에 뿌렸다. 그 후 위패만이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제단에 모셔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전덕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관련자료



[1] 이화학당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튼 부인의 아들[2] 1897년 9월 최초 조직[3] 1897년, 1886년 설립당시 교명은 공옥학교[4] 1899년, 이후 공옥보통학교로 개명[5] 1904년 9월 15일[6]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1905년 11월 을사오조약이 발표되자 상동청년회에서는 연일 수천 명이 모여 조약무효 상소운동을 전개하고 각 도의 청년회 대표가 모여 교회사업을 토의하나 이면에는 순전히 애국운동이다”라고 기록[7] 여기서 안 그래도 분위기 살벌한 덕수궁에서 어떻게 친서를 가지고 나왔는지 현재까지도 주장이 갈리는데, 첫째는 고종의 조력자였던 선교사 헐버트에게서 전달받았다는 설, 두번째는 내시 강석호와 전 목사의 친척인 박상궁의 전달을 통해 받았다는 설이다. 일단 확실한 건 이준 열사는 위임장을 수령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