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최광옥(崔光玉) |
본관 | 경주 최씨[1] |
생몰 | 1877년 8월 15일 ~ 1910년 7월 19일 |
출생지 | 평안남도 중화군 대륵골[2] |
사망지 |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연남리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2.1. 초년기
최광옥은 1877년 8월 15일 평안남도 중화군 대륵골에서 부친 최윤조(崔允祚)와 모친 이순문 사이의 1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며 단지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는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다. 청년이 된 그는 독립협회에 활동하면서 스스로 단발을 했으며, 서양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들여 기독교인이 된 뒤 부친을 설득해 역시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부친 최윤조는 한의사는 아니었지만 독학으로 한의학을 공부해 침을 잘 놓았다고 하며,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한 사람들을 치유해주고 기독교를 전도했다고 한다.최광옥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던 시절 이광일(李光一)과 결혼한 뒤 부인을 2년제 성경학교에 입학하도록 하여 신교육과 기독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안창호, 서병호, 김필순, 이승훈, 주시경 등 서북 출신 인사들과 자주 교류했으며, 이승만, 이상재 등 기호지방 인물들과도 친교를 나눴다. 이 시기 최광옥은 조선 왕조를 입헌군주국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고 하며,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국민들을 근대적 시민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계몽과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독립협회 해산 이듬해인 1899년, 최광옥은 안창호가 설립한 점진학교 교사로 초빙되었다. 점진학교는 강서군 최초의 남녀공학이었으며, 암화리 하천에 제방을 쌓고 침수지를 메워 농토를 확장하는 등 토지개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최광옥과 안창호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땅을 일구는 것만이 아니라 개척된 토지에 공동체를 이루어 모범적인 농촌을 건설하고자 했다.
2.2. 숭실중학교 재학
1900년 가을, 최광옥은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들여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901년 2학년으로 월반하여 수업을 받았고, 점진학교의 중학과정을 졸업한 남학생들을 숭실중학교 3학년으로, 여학생은 숭의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시켰다. 또한 그는 숭실중학교 하급반 학생들을 가르치는 조교 역할도 수행했다.1904년 5월 15일 차이석, 노경오와 함께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교사로 채용되어 숭실중학교에 재직했다. 또한 1904년 5월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주관한 사범강습회에 참가한 최광옥은 김구와 함께 장대현 교회의 장로인 방기창의 집에 머물면서 사범강습을 받았다. 사범강습회 일과를 마치고 방기창의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시국을 논의하면서 우의를 다졌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당시 최광옥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당시 숭실중학생으로 교육과 애국의 열성이 학계와 종교계와 일반 사회에 명성 쟁연한 동지라. 최군과 친밀히 교제하며 장래사를 의논했다."
이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부흥 사경회에서도, 두 사람은 함께 참석했다. 사경회가 끝난 뒤 김구와 오순형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최광옥에게 동행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를 수락하고 김구를 따라 장연군에 간 그는 베어드 목사에게 전도 활동 상황을 보고했으며, 베어드 목사는 최광옥의 전도능력을 선교회에 보고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김구와 오순형)은 숭실학당을 올해 졸업하고 학교 교사로 있는 최광옥에게 함께 가서 전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최씨는 이를 받아들여 같이 갔는데, 가는 길에 배에 탄 사람들에게 전도했다. 이때 신천에서 온 두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장련 집에 도착하여 최씨는 매일 저녁 사랑방에서 전도하고 모인 신자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였다. 얼마 후 그는 평양으로 돌아왔는데, 오씨(오순형)의 형(오인형) 집안 사람 다섯 명이 새로 믿기로 결심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한편, 최광옥은 한때 일진회에서 기록 서기를 맡았다. 하지만 일진회가 나중에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취지와는 달리 일제 침략에 동조하는 모습을 드러내자 즉시 탈퇴했다. 이후 그는 1905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2.3. 일본 유학
최광옥은 1905년 초 일본에 도착한 뒤 일본 세이소쿠학교 예비과정에 입학해 영어와 수리를 공부했다. 이때 일승관(日勝館)이라는 곳에서 문일평, 장응진 등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유숙했다. 문일평은 일본에 유학한 지 얼마 안되어 돌아갔지만, 장응진은 세이소쿠학교 예비과정을 마친 최광옥과 함께 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를 결성했다.최광옥은 세이소쿠학교 예비과정을 마친 뒤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사범학교에서 공부하는 한편 시간이 나는 대로 메이지대학의 청강생이 되어 유명 교수들의 강의를 부지런히 섭렵했다. 그러나 너무 과로한 데다 영양실조가 겹치면서 그가 요절하는 계기가 된 폐병을 이때부터 앓게 된다.
그가 장응진과 함께 결성한 태극학회는 유학생 상호간의 정보를 나누고 공유하면서 학업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모습이었고, 그 내면에는 민족의 장래를 논의하는 민족운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1906년 당시 회원은 280명이었으며, 지회 회원까지 합치면 600명이 넘었다. 1908년 6월 당시 전체 일본유학생의 40% 이상이 태극학회 회원이었다. 최광옥은 태극학회 창립 이래 총무원을 역임하여 실무를 맡으면서 안창호가 지도하고 있는 미주의 공립협회와 적극 교류했다. 그리고 유학생 소식을 국내에서 발간되는 <그리스도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1906년 6월 24일 일본 YMCA에서 개최된 한국유학생 환영회에 참석한 최광옥은 황성기독교청년회, 질레트 총무, 일본 감리교회 해리스 감독 등 기독교계 인사들과 유학생 250여 명이 참석한 이날의 연설과 회의경과를 황성신문에 기고했다. 이후 폐병으로 인해 총무원 자리에서 물러나 귀국을 준비했고, 1906년 7월 16일 김홍량, 김상은, 박영로 등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에는 태극학회 특별회원으로 적을 두고 활동했다.
2.4. 애국계몽운동
최광옥은 귀국 후 서울과 의주, 평양 등지를 오가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마다 않고 달려가 강의했다. 그는 최신 학문인 과학과 수학을 통해 논리성과 합리성을 가르쳤고, 역사와 국어를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과 얼을 잊지 않도록 가르쳤다. 그러던 중 의주에서 건립된 양실학교의 학무를 맡게 된 그는 교과과정의 내용을 세우고 학무운영을 담당했지만, 얼마되지 않아 사임하고 평양으로 돌아와 의무교육운동을 전개했다.친구 김홍량은 최광옥이 혼신의 힘을 다해 교육운동을 주도하면서 정작 자신은 한시도 몸을 쉬지 않자 몹시 걱정했다. 그래서 물 좋고 공기 맑은 안악의 연등사에 거처를 마련하고 여기서 정양하라고 추천했다. 최광옥은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1906년 초가을에 안악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도 편히 쉬지 못했다. 그가 안악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안악군의 유지들과 지사들이 모여들어 그와 함께 국내외의 어지러운 정세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민족의 진로와 현시국의 타개 방안에 대해 밤새 토론했다. 그리고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교사를 양성하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06년 12월, 최광옥은 안악 지역 유지들과 함께 안악면학회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강령, 규칙, 회칙 등을 갖추지 못해 시간이 소요되자, 그는 평양군민회가 주관하는 사범교육운동에 가담하여 사범강습소를 설치하고 교사 양성에 착수했다. 최광옥은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육관을 심어주려 노력했지만, 젊은이들이 과거 제도가 폐지된 마당에 관리로 나갈 것도 아닌데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대꾸하는 걸 보고 속을 끓여야 했다. 젊은이들은 근대화 교육이란 서양의 오랑캐 학문을 배우는 것이고 예수쟁이가 되는 길이라 생각해 아예 신교육을 외면해버리기 일쑤였다.
최광옥은 그런 그들에게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그는 1906년 9월 평안남도 관찰사를 맡고 있던 이시영을 찾아가 사범교육과 의무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학제를 개량해서 평양 지역만이라도 실험적으로 의무교육을 실행할 것을 강력히 청원하고 자신의 교육 대계를 설명하면서, 우선 관찰사의 힘을 빌려 문맹에서 깨지 못한 상태에 있는 청년들을 계도시킬 교육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시영은 그의 요구를 수락하고 직접 교육운동을 주선했다. 그러자 평양 젊은이들이 대동문 거리 연설회장에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최광옥은 이 자리에서 청년들에게 민족이 처한 정황을 설명하고 교육만이 한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시영은 훗날 그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평양 성내는 물론 그 주위 고을의 청년들을 모두 동원시켜 대동문 거리에 집합을 시켰지. 하얀 옷을 입고 벌떼같이 몰려들던 그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해. 그때 확성기가 어디 있어. 그런데도 넓은 대동문 거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연설을 하니 군중들이 감격의 도가니에 빠져, 울며 환성을 높여 단결의 힘을 과시했지."
최이순, <살아온 조각보>
최이순, <살아온 조각보>
1906년 10월 서우학회가 조직되자 신입회원으로 가입한 최광옥은 1907년 1월부터 서우학회와 합동으로 평양 사범강습소 설치 운동에 착수했다. 그는 평양군민회와 서우학회가 합동하여 근대교육의 열기를 빠른 시일 내에 확신시키기 위해 교원을 어서 양성해야 한다고 봤다. 그 결과 1907년 2월에 설립된 평양군민회 조직 산하에 교육부를 두었고, 최관옥은 정재명과 나란히 교육부 임원에 임명되었으며, 서우학회와 합동으로 '교육규정'을 제정, 평양군의 인허를 받아 이를 평양성내에 반포했다. 또한 당시 평양군수 백낙균과 교육위원들과 함께 학무회를 발족하기도 했다.
최광옥은 이외에도 평양성내 3부와 내천방에 유지들을 학무위원에 선정하고 각 면마다 학무총대 1인씩을 선발하여 이들로 하여금 각리에 소재한 사숙의 교육상황을 조사하도록 했다. 이는 사범교육을 통해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여 황해도, 평안도의 각 사립학교에 배치하고자 한 것이다. 우선 평양 상업회의소를 임시로 빌려 사범강습소가 설치되었고, 각리에서 뛰어난 인재를 모집해 사범교육을 시작했다. 1907년 3월 11일에 열린 평양군 사범강습소 개소식에는 안창호가 막 귀국하자마자 참석했으며, 최광옥은 축사를 낭독했다. 당시 사범강습소 개교식을 취재한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학문 대가 최광옥씨가 축사를 낭독함에 감사의 뜻이 간절하여 여러 학생의 골수에 관철하는지라, 당일 입학한 사범학생이 60여 명에 달한 지라. 장래 국가독립의 효시가 될 것은 반드시 우리 서북이 증명할 것이로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16일자 기사.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16일자 기사.
최광옥이 낭독한 축사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교사 양성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60명 정원에 90명의 학생들이 지원했다. 입학자격은 25세 이상 40세 이하의 품행이 단정한 자이며, 설치 교과는 산술, 지리, 역사, 법률, 물리, 영어, 일어, 작문 등이었다. 교사로는 최광옥과 김응도가 임명되었으며, 이 외에 군수 백낙균과 위원 정재명, 노승식, 박봉보, 김호연 등이 강사로 선정되었다. 초기에는 재정 부족으로 사범속성 야학으로 운영하고자 했으나 나중에 3개월 과정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907년 6월 12일에 개최된 졸업식에는 최종시험을 통과한 60명이 졸업했다. 졸업식은 내외의 관헌과 각 사회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어 큰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우등생들에게는 백낙균 평양군수가 상품을 수여했다. 한편 학무회는 각리에 학무위원들과 함께 학교설립을 주도하고 설립된 학교를 관할했으며, 졸업생들을 새로이 설립된 신식학교에 교사로 초빙하도록 조치했다. 그 결과 평양 지역 각리 82개 처에 학교가 설립되었고 학교 경영자는 70여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생기면서 사범강습소 졸업생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에 졸업시험에서 낙제한 30여 인을 재교육시켜 교사로 거듭나게 했으며, 각리에서 사숙을 운영하며 가르치던 훈장들도 신학문을 자습하도록 한 후 매월 초하루에 한 번씩 교사 자격시험을 치르게 하고 시험을 통과한 자들을 교사로 임명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통과된 26명은 신교육 담당 교사로 선발되어 신설학교에 배치되었다.
평양 사범강습소는 1907년 11월부터는 서우학회에서 운영하는 사범학교인 서우학교로 발전했다. 또한 입학자격도 18세 이상으로 했으며, 사범과정을 수료한 많은 젊은이들이 학교 교원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서우학교의 교직원들은 모두 서우학회 회원들로서 민족에 대한 책임감을 갖춘 교원 양성에 주력했다. 이후 서우학회는 1908년 1월에 함경도 출신 인사들에 의해 조직된 한북흥학회와 통합하여 '서북학회'로 개편되었다.
서북학회 역시 서우학회의 활동을 인계하여 각 지역에 학사시찰위원을 파견하고 지회와 지교 활동을 지도, 관리했다. 최광옥은 서북학회 의주 학사시찰위원으로 임명되어 의주 지역의 교육 상황을 시찰 및 조사했다. 이렇듯 평양에서 사범강습소의 운영을 성황리에 마친 그는 다시 안악 인사들의 초빙을 받고 안악으로 향한 뒤 안악면학회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먼저 양산학교에 하기사범강습소를 개설하여 교사 양성에 매진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1906년 12월 1일 안악면학회가 양산학교 내에서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안악면학회에는 최광옥과 김용제, 최명식, 임택권, 김홍량, 정명재, 송종호, 차승용, 양성진, 장윤근, 김용규, 안명근 등 황해도 유지 인사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각자 기금을 각출하여 출범했다.
안악면학회의 목적은 신교육의 실시와 민족계몽이었다. 그들은 청소년들을 계몽하여 민족자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많은 학교를 세우고 교사들을 양성하고자 했으며, 농사 기술을 개량하고 공업을 장려하여 산업진흥을 도모하고자 했다. 최광옥은 안악의 교육열이 뜨거운 것을 보고 이곳이 한국 신교육 운동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먼저 사범교육 학생들에게 공급할 적절한 교재를 직접 출판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김용제가 100원, 최명식이 50원, 그리고 여타 회원들이 10원, 20원씩 각출했고, 입회금과 월례금을 합하여 총 300원의 기금이 마련되었다. 1907년 봄, 안악면학회는 이 기금을 토대로 '면학서포'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설립했다.
면학서포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저술, 출판하고 보급하는 사업을 실시했다. 최광옥은 필요한 교재를 직접 집필하기로 하고 1907년 11월에 <교육학>을 간행했고 1908년 1월에 <대한문전>을 간행했다. 두 교과서는 안악면학회에서 A5 판형으로 발행되었으며, 서울 보문사에서 활자본으로 인쇄했다. 이들 교재는 서울의 광학서포와 중앙서관, 평양의 태극서관, 그리고 안악의 면학서포 등지에서 25전의 가격으로 발매되었다. 1908년 1월 19일 초판이 나온 이래 그해 6월에 재판이 나올 정도로 인기가 상당했으며, 특히 <대한문전>은 대성학교 예비과와 신민회 계통 학교에서 국어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면학서포에서 발간한 책의 판매대금은 주로 안악면학회가 필요로 하는 서적 구입과 면학회 운영자금으로 충당되었다. 이렇게 해서 면학서포는 수천 권의 책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는 면학서포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또한 최광옥은 1909년에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의주군의 양실학교에서 잠시 교원 및 교장으로 일하기도 했고,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의 제3대 교장으로 취임 약 반년간 근무하다가 건강이 나빠 사임했다.
이밖에도 민중계몽에 이바지한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에 관여하기도 하고, 배천군수(白川郡守) 전봉훈이 설립한 사범강습소를 맡아 후진양성에 힘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안악에서 지방 유지들과 뜻을 모아 베짜는 기계를 서울에서 들여와 광목 생산의 향상을 돕는가 하면 연초제조기를 들여와 담배를 생산하여 일본 상품과 경쟁케 하였다.
1909년 10월 신민회에 가담한 최광옥은 신민회의 국외독립운동기지 개척의 계획에 따라 김용제, 최명식 등과 함께 서간도에 농장 경영을 위한 현지 답사를 계획했다. 최명식이 1차로 답사했으며, 그는 뒤이어 답사하기로 계획하고 안동현에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무역상을 설립할 계획을 추진했다.
2.5. 최후
1910년 7월, 최광옥은 연백군 배천읍의 군수 전봉훈의 초빙을 받고 전봉훈의 사저에 머무르면서 청년을 모집해 사범강습소를 개설했다. 그는 이곳에서 각 면의 유지 및 청년들과 함께 신교육을 실시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또한 그는 밭에서 김매는 청년들 틈에 끼여 밭김도 같이 매면서 가르치고 밤에 밖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그는 폐병이 날로 악화되어 운신이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이를 무릅쓰고 끝까지 청년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깨우치려 노력했다.그러던 1910년 7월 19일, 최광옥은 아침 일찍 배천 마을의 산에 올라가 청년들을 상대로 연설했다. 그러나 연설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침을 멈추지 못하고 피를 토한 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청년들은 그를 급히 연백군 은천면 연남리에 소재한 진사 유재륜의 집에 급히 이송하고 응급조치를 했다. 그러나 최광옥은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그날 오후 5시 10분에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최광옥의 시신은 전봉훈 군수의 사랑방으로 옮겨졌으며, 그곳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전봉훈은 마을 사람들과 의논하여 그의 장례를 읍장으로 치르고 장지를 배천 마을의 앞산인 남산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각처에 전해지자 경기, 서북, 해서 일대의 인사들과 인근의 남녀학교의 임원들, 그리고 학생 수천 명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기록에 따르면, 읍민들 모두가 상복을 입었고 상점은 철시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7월 22일 12시에 배천읍 남산묘지에 안장되었다. 황성신문은 그의 사망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평양군에 거한 최광옥씨는 품행이 단결하고 사상이 고상하여 청년계의 모범이 되는 고로 일반 사회에 신용이 풍저하더니 신경쇠약병으로 다년 신음하던 중 배천군 하기 강습소에 부병이도(扶病而徒)하였다가 당지에서 애통히 사망한 고로 원근의 사우가 애도하며 애석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황성신문' 1910년 7월 22일자 기사
'황성신문' 1910년 7월 22일자 기사
황해도, 평안도 일대의 인사들은 그의 업적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이후 한일병합, 105인 사건 등이 잇달아 벌어지면서 기념비는 끝내 세워지지 못했다.
1935년 배천 남산의 최광옥의 묘지가 공원으로 편입된다는 소식을 들은 친지와 동지들은 의견을 모아 평양 보통강 건너편의 장대현 교회 묘지인 서장대 묘지로 이장하기로 결정했다. 장대현 교회는 최광옥 생전에 한때 장로로서 활동했고 사범 강습을 받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1935년 11월, 그의 유해는 배천 남산묘지에서 평양 장대현 교회의 서장대 묘지로 이장되었고, 1935년 11월 25일 묘비 제막식이 열렸다. 그의 옛 동지였던 안창호는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겼다.
"사랑하는 동지 광옥군, 조금만 더 기다리오. 멀지 않아 강토를 되찾고 민족이 다시 놓이게 되오. 안심하고 기다리오."
그러나 정작 8.15 광복으로 한국이 해방된 후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한 이래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장대현교회는 당국의 탄압으로 문을 닫아야 했고 그의 묘지 역시 잊혀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최광옥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