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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2:22:53

채세윤

파일:채세윤.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채우석(蔡宇錫)
이명 채근우(蔡槿宇)
출생 1902년 4월 27일[1]
전라북도 옥구부 풍면 학당리
(현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증석리)
사망 1973년 3월 10일[2] (향년 70세)
전라북도 옥구군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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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채세윤은 1902년 4월 27일 전라북도 옥구부 풍면 학당리(현 군산시 회현면 증석리)에서 아버지 채규협(蔡奎挾)과 어머니 광산 김씨 김종현(金宗鉉)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연해주로 망명한 뒤 1920년 5월 대한의용군 자유대대 3소대장으로 활약했으며, 1921년에는 연해주 자유시에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가 조직되고 무장부대가 사할린 의용대로 개편되자 제2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자유시 참변을 당하자 북만주 영안으로 돌아가 김좌진, 김혁(金赫), 나중소 등이 조직한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여 별동대원(別動隊員)으로 항일전에 참여했다.

1927년 10월 26일에는 황덕환·이영상(李永祥)·최진만(崔晋萬)·박병찬(朴秉燦) 등과 함께 친일단체인 해림민회(海林民會)를 습격하여 회장 배두산(裵斗山)을 사살하였으며, 동년 10월 26일에는 하얼빈(哈爾濱)으로 가 하얼빈민회를 습격하여 회장 이정(李政)으로부터 민회를 해산하겠다는 각서를 받기도 했다. 또한 동지들과 함께 하얼빈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신민부로 옮겼다. 그러나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그는 심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고 1928년 5월 17일 대련 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만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8.15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갔고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1973년 3월 10일 옥구군에서 병사했다.


[1] 평강채씨대동보 4권 절제사공 휘 심(深)파-임피 전주(부정공 휘 익겸) 종중 238쪽에는 1903년 4월 26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평강채씨대동보 4권 절제사공 휘 심(深)파-임피 전주(부정공 휘 익겸) 종중 238쪽에는 1967년 2월 4일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