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867년 4월 13일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룡리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 |
사망 | 1928년 8월 18일 |
만주 돈화현 | |
호 | 포석(抛石) 또는 일운(一雲) |
본관 | 나주 나씨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나중소는 1867년 4월 13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룡리에서 부친 나윤철(羅允鐵), 모친 이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74년생인 밀양 손씨와 결혼해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부인 손씨는 나중소가 만주로 망명할 때 함께 가지 않고 서울 정릉동에 살았고, 나중소는 큰 딸 복희를 시집보내고 남은 아들 둘과 딸 둘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했다.나중소는 16살 때인 1882년에 무과에 급제했고,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한 후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898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함북시찰관과 진위대 부위를 역임하다가 1907년 정미7조약에 의해 대한제국군이 해산된 뒤 고향에 은거했다가 1917년에 만주로 망명했다. 나중소의 손녀 나영자(羅英子)의 증언에 따르면, 나중소는 집안의 땅이 철도부지로 모두 빼앗기자 더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만주로 망명했다고 한다.
2.2. 대한군정서
나중소는 1919년 3월 25일 대종교 신도를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정의단의 군사교관으로 초빙되어 안도현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해 8월 7일 정의단을 개편하여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를 조직할 때 관여했으며, 12월에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명칭을 변경하고 자신은 참모부장에 선임되었다.1920년 5월 3일 왕청현 봉의동에서 신민단(新民團), 도독부(都督府)·, 광복단(光復團), 국민회(國民會), 의군부(義軍府), 군정서 등 북간도지역 6개 단체 대표들이 참석했을 때, 나중소는 김좌진과 함게 군정서 대표로 참가했다. 이후 대한군정서는 총재 서일과 사령관 김좌진의 지휘하에 군대를 양성하고 근거지 수비를 강화하며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이때 나중소는 김좌진 등과 함께 1920년 2월에 북간도 왕청현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설립하고 김좌진을 사관연성소 소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교수부장에 선임되었으며,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 도움을 요청해 교관 이범석과 졸업생 장교 박영희, 백종렬(白鍾烈), 강화린(姜華麟), 오상세(吳祥世), 이운강(李雲岡), 김훈(金勳) 등을 불러들였다.
나중소는 교수부장으로서 생도들에게 민족정신의 함양을 위한 역사교육을 강조했으며, 군사교육도 별도로 실시했다. 그는 두 개의 연병장에서 사관생도들에게 철저한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술과는 일본군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실탄으로 사격연습을 실시했다. 이에 일제는 국자가에 본부를 둔 중국군 혼성여단 보병제일단장 맹부덕(孟富德)을 압박해 대한군정서를 토벌하게 했다. 맹부덕이 9월 6일 200명의 중국군을 서대파에 파견하자, 김좌진과 나중소는 중국군에게 큰 소 2마리와 돼지 1마리를 잡아 대접하면서 협상했고, 중국군은 9월 7일에 되돌아갔다.
1920년 9월 9일 왕청현 십리평의 삼림에서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식이 거행되어 298명의 사관이 배출되었다. 그 중 80명은 소위로 임명, 배치되었고, 나머지 200여 명은 연성대(敎成隊)로 조직되었다. 연성대 대장은 나중소였고, 부관은 최준형(崔峻衡), 중대장은 이범석, 소대장은 이민화, 김훈, 이탁(李鐸), 남익(南益) 등이었다. 나중소는 연성대를 이끌고 청산리 전투에 참가해 일본군을 상대로 조직화된 항쟁을 펼쳤다.
2.3. 대한독립단
청산리 전투 후, 대한군정서는 북만주로 이동해 1920년 12월경 밀산에 도착했다. 그러다가 러시아 정부의 군사원조 약속을 받고 1921년 1월 흑룡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으로 향했다. 이후 1921년 3월 하순, 이만에 모인 여러 독립군 단체들은 대한총군부라는 통합단체를 조직하기로 합의했다.1921년 4월 12일, 대한총군부는 다시 대한독립단으로 명칭을 변경했고, 대한독립단은 단본부에 외교부를 설치했으며, 중국 영안현에 사관학교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대한독립단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홍범도, 고문 백순(白純), 김호익(金虎翼), 외교부장 최진동, 사령관 겸 참모부장은 김좌진이 맡았다. 이때 나중소는 이장녕과 함께 참모 직책을 맡았다. 서일은 나중소를 서간도에 파견해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일, 러시아 공산당의 원조, 중국 관헌의 동정, 영안현에 사관학교 설립 등을 살펴보고 교민들을 상대로 선전할 것을 훈시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벌어진 후 대한독립단은 와해되었고, 그는 북만주로 돌아와 잔여 병력을 수습했다. 1921년 10월 3일, 나중소는 밀산에서 김좌진과 함께 국내 진공을 위해 전 군정서 사관학교 졸업생 전부를 안도현 백하 일대에 소집할 것과 모연대 30명을 연길, 화룡, 왕청 지방에 파견해 소맥분(小麥粉)을 징발하고, 이를 안도현 백하 지방으로 보낼 것을 협의하고 행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연길현에 살고 있는 박창손(朴昌孫), 박봉춘(朴逢春), 김성룡(金成龍), 이춘근(李春根) 등에게 생도들을 모집하도록 지시했다.
2.4. 이후의 경력
1922년 1월 20일, 나중소는 안도현 군인양성소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해 6월경 김좌진, 이장녕 등과 함께 길림성 영안현 영고탑에서 50리 떨어진 한인 마을에 독립군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급하는 등의 계획을 추진했다. 그리고 7월에는 마진, 방진성(方振成), 이광태(李廣泰) 외 10여명 등과 함께 마적을 회유하는 계획을 논의하기도 했으며, 8월 4일에는 북만주에서 대한독립단 재건을 논의했다. 그 결과 1924년 3월 대한군정서가 재조죅되었고, 나중소는 재건 대한군정서의 서무부장 겸 참모로서 활동했다.1925년 3월 10일, 나중소는 영안현 영안성에서 조직된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해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및 감사원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그해 9월 하순 정의부의 지청천 장군이 신민부 본부를 찾아와 신민부와 정의부와 연합 모연대를 조직했다. 이에 그는 지청천 휘하에 들어가 서남로향관(西南路餉官)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1926년 3월에 돈화현에서 신민부 돈화판사부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해 6월 10일 서울에서 순종의 장례식이 거행되자, 이에 대한 추모회를 개최해 교민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노력했다.
이렇듯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나중소는 1928년 8월 18일에 만주 돈화현 산중에서 병사했다. 동아일보 1928년 10월 11일자 기사는 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알렸다.
현적을 만주 길림성 돈화현에 둔 평안도 출신 라중소(羅仲昭)씨는 구한국시대 육군부위(副尉)를 지내다가 정국의 변함을 딸아, 만주로 이거하야 북만 일대에서 ○○단의 군정서 장교로 있든 중, 군대에 쫓기여 돈화현 산중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지난 8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는데, 슬하에는 자녀도 없이 단신으로 망명 중, 별세한 가련한 형편이라더라.
동아일보 1928년 10월 11일자 기사, <나중소씨 영면>
동아일보 1928년 10월 11일자 기사, <나중소씨 영면>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나중소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