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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 | 김영탁(金永鐸) |
호 | 일강(一江) |
출생 | 1886년 10월 15일 |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구봉 | |
사망 | 1934년 6월 29일 |
중국 항저우시 광자병원 | |
가족 | 아버지 김동진, 어머니 전주 이씨 형 김영곤 조카 김석, 김덕근 |
묘소 | 중국 항저우시 악비묘 뒷산 공동묘지 |
본관 | 영산 김씨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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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2.1. 초년기
1886년 10월 15일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구봉에서 부친 김동진(金東鎭)과 모친 전주 이씨 사이에서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주위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영광군 묘량의 외가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908년 9월 영광 광흥학교에 입학했다. 1년만에 졸업한 그는 1909년 경성법부 법관양성소에 입학해 1912년 3월에 졸업했다. 이후 일본에 유학가서 1915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 뒤 1917년 상하이로 망명했다.1918년, 김철은 여운형, 장덕수, 한진교(韓鎭敎), 선우혁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 결성에 참여해 발기인을 맡았다. 이후 서병호, 선우혁과 함께 국내로 잠입한 김철은 영광으로 가서 광흥학교 동창 조병모(趙炳模)의 집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승려를 가장하여 돌아다니며 지방 유지들의 협력을 얻어내고자 노력했다. 또한 고향 함평에 들러 자신의 가산을 정리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했고,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3.1 운동을 협의하고 독립운동자금 지원을 약속받았으며, 기산도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뒤 상하이로 돌아갔다. 이어 신한청년당원들과 함께 상하이 프랑스조계 보창호 329호 건물에 '독립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작업에 착수했다.
2.2.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4월 10일~11일, 각 지방 대표 29명이 모여 초대 임시의정원을 구성했다. 이날 참석한 인사 29명 중 전남대표는 김철 뿐이었고 대다수는 기호 지방 인사들이었다. 이에 대해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들의 지역 대표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여 의원을 다시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이리하여 임시의정원법 규정에 따라 1919년 4월 30일 의원이 새로 선출되었는데, 전라도 대표는 김철과 나용균, 한남수(韓南洙), 장병준 등 4명이었다. 또한 그는 1919년 4월 22일 임시의정원 제2차회의에서 임정 재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법무부위원을 겸임했다.1919년 5월, 김철은 임정특파원으로서 전라남북도 의무금 요구특파원을 임명한 사령서, 국민대회 취지서, 선포문, 13도 대표자 고유문 등을 가지고 국내로 잠입해 기산도와 함께 전남 영광군 백수면 장산리에 거주하는 김종탁(金鍾鐸)을 방문하여 그를 13도 대표의 일원으로 선임했고,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거주하는 박은용(朴殷容)을 의무금 요구특파원으로 선임했다. 또한 6월 23일에는 김요선(金堯璿)을 방문하여 동지로 가입시키고 그로부터 160원의 의무금을 받아냈고, 이 중 60원을 기산도에게 줬다.
1918년 8월 5일, 임정은 위원제를 폐지하고 차장제를 실시했다. 이때 김철은 초대 교통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28일에는 내무국장 이유필(李裕弼) 등과 함께 러시아에서 상하이를 방문한 교통총장 내정자 문창범을 만나 러시아 내부의 상황을 듣고 한민족의 독립에 관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후 문창범이 교통총장 취임을 거절하자, 김철은 교통차장으로서 교통총장 대리의 직무를 맡았다.
(사진 설명: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
1920년 5월 28일, 김철은 임정에서 설립한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1월 18일에는 육군무관학교 학도대 중대장을 겸임했다. 항일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상하이에 설립된 이 학교는 1920년 5월 8일 졸업생 19명을 배출했고, 1920년 12월 4일 제2회 졸업식을 거행해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고자 노력했다.
1921년 3월, 임시의정원 제8회 정기 의회가 개최되었다. 의회에 참석한 의원은 43명이었는데, 김철은 이때 교통차장을 사임하고 김인전, 나용균, 정광호와 함께 전라도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3월 13일 이승만 임시대통령 면직안에 찬성했으며, 1926년7월 국무령에 선출된 홍진으로부터 전라도 대표로 추천받았지만 기호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1926년 12월 14일 국무령에 선출된 김구에 의해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김구는 국무령제 지도체제하의 내각 구성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헌법 개정에 착수했다. 이에 1926년 12월 23일 김철, 윤기섭, 이규홍(李圭洪), 정원(鄭遠)이 헌법개정기안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개정 작업을 거쳐 1927년 3월 5일 임시약헌을 공포했다. 임시약헌은 대통령, 국무령 등의 정부수반을 폐지하고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회제로 개편했다. 이리하여 1927년 8월 19일 국무위원회제하의 내각이 구성되었는데, 김철은 군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11월 8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국무위원 임기 만료에 따른 2차 개각이 단행되었다. 이때 김철은 군무장에 선출되었다.
1931년 5월, 김철은 김구, 이동녕, 조소앙, 조완구 등과 함께 임정 국무위원 명의로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는 난징에서 개최되고 있는 중국국민회의에 임정과 한국독립당의 방침과 정책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선언서>는 옛 한국 영토에 민주독립국가를 확립하는 것과 그 땅에 균등제도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임정은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한국독립당을 근간으로 삼았고, 한국독립당은 민국 전체를 기초로 하여 균등사회를 추구해 나갈 것이 정부의 주의이며 정책이라고 밝혔다. 또한 일제의 만몽 정책을 비판하고 만주지역 한인 문제를 거론하면서, 장차 한국독립당과 중국 국민당 사이에 절실한 연락관계를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
김철은 군무장으로서 직임을 수행하면서도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가입해 애국단원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그는 국무회의에서 김구의 한인애국단 조직과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를 사전에 승인하여 실행하게 했다. 훙커우 공원 의거 후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된 김구, 김철, 안공근, 엄항섭은 상하이의 프랑스조계 환룡로 119호에 잠시 피신했다가 교통대학에 재학하던 신국권(申國權)의 알선으로 YMCA 간사인 S.A 피치 박사의 집에 은거했다. 이후 김구는 가흥으로, 김철은 항저우로 피신했다.
1932년 5월 항저우로 이동한 임정 간부들은 임정 변공서를 개설하고 김철을 비롯한 5명의 국무위원 모두가 참석한 가운데 국무회의를 개최했다. 김철은 이 회의에서 재무장에 선임되었고, 군무장은 김구가 맡았다. 그러나 얼마 후 김구와 김철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윤봉길 의거 직후 중국 측에서 임정에게 5천 불을 지원했는데, 김철이 그걸 착복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또한 상해시상회(上海市商會)에서 윤봉길의 유족에게 조위금 7천불을 바쳤는데, 그것 역시 김철이 횡령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 일로 김철과 격렬한 논쟁을 벌인 김구는 군무장을 사퇴하고 이동녕과 함께 가흥으로 떠났다.
그러던 중 김철의 조카 김석과 조소앙 등이 <시사신보>에 "안창호는 진정한 혁명가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투고했다. 이 기사를 보고 격분한 이유필, 박창세, 이동우, 안공근, 문일민 등이 항저우로 가서 김철, 조소앙, 김석을 힐난, 구타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지금을 몰수했다. 이 사건으로 김철 등 국무위원 전원이 사표를 제출해야 했다. 이 일련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1932년 6월 상순 가흥에서 국무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논의한 결과 한국독립당 이사회를 열어 항저우 사건을 다루기로 결정했다. 그해 6월 하순 김구, 김철, 송병조, 이동녕, 이유필 등 16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한국독립당 이사회는 항저우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논의를 거듭했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해산했다. 이 사건으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은 송병조-이유필계, 김철-조소앙계, 그리고 김구계로 분리되었다.
한편 1932년 12월 30일 프랑스조계에 숨어있던 김철은 일본영사관 정찰대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프랑스 영사가 국제법 위반을 이유로 일본영사관에 항의했고, 김철은 10일만에 풀려났다. 이후 김철의 국무위원 사표는 1933년 3월 6일 제25회 임시의정원 임시회의에서 정식으로 수리되었고, 그는 자신의 아내 최혜순(崔惠淳)과 함께 의정원 전라도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7월, 김철은 의원에 다시 선임되어 의원자격 심사위원을 맡아 새로 의원이 된 이들의 자격을 심사했다. 1934년 1월 2일 제3차 정기 개각이 단행되었고, 김철은 국무위원으로 복귀했다. 이어 1월 20일에 개선된 첫 국무회의에서, 김철은 무임소 위원이 되었다.
이렇듯 임시정부에서 한몫을 톡톡히 한 김철은 여러 한인단체 결성에도 참여했다. 1919년 7월에 대한적십자회 결성식에 참석해 상의원 20명 중 1인으로 임명되었고, 1920년에는 김구, 김립, 김순애, 손정도, 윤현진 등과 함께 의용단을 조직하여 임정의 활동을 지원하게 했다. 그리고 1920년 3월에 안창호가 설립한 선전위원회에 가담해 손두환, 이유필, 정인과 등과 함께 선전 업무에 종사했으며, 1921년 8월에 한중호조총사를 조직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진 중국 인사들을 끌여들었다. 또한 1922년 3월에는 상해 대한교민단 단장을 맡아 몇달간 직무를 수행했고, 그해 7월엔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해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를 포함한 몇 가지 현안 문제를 논의했지만 상호간 노선 차이가 심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3. 최후
김철은 1934년 3월 난징에서 열린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대표회의 및 한국혁명 각 단체 대표회의에 한국독립당대표로 참석했다. 그러나 그해 5월 4일 급성 폐렴으로 쓰러진 그는 항저우 소재 광자병원에서 치료받았지만 6월 29일에 끝내 숨을 거두었다. 향년 48세. 그의 유해는 송병조, 양기탁, 이시영, 조완구 등 임정 요인들의 애도 속에 항저우 악비묘의 뒷산에 있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훗날 아파트 단지로 변해서 현재 김철의 묘소 위치는 알 수 없게 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75년 8월 전남 함평군 신광면 구봉산 기슭에 숭모비를 세워 그의 뜻을 기렸다. 또한 함평시는 2003년 '일강 김철선생 기념관'을 건립했다.
3. 가족
김철은 1917년 상하이에 망명하기 전 고향에서 김해 김씨 김정자(金貞子)와 혼례를 치렀다. 이후 남편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동안, 김정자는 함평군에 남아 있으면서 수시로 일제 경찰에게 압박을 받았다. 이에 김정자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상하이를 찾았지만, 김철은 이혼을 요구했다.“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 몸 바치기로 했으니, 나를 찾지도 기다리지도 말고 부인의 앞날은 알아서 처신하시라.”
홀로 집에 돌아온 김정자는 갈수록 심해지는 일제 경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925년 "남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긴 뒤 집 뒷산 소나무에 목을 메 자살했다. 현재 그 소나무는 '단심송'으로 명명되어 보훈시설로 보호되고 있다.
이후 김철은 1927년경에 전남도립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상하이로 망명한 최혜순(崔惠淳)과 재혼했다. 두 사람은 1929년에 장녀 김미경(金美卿)을 낳았고, 1931년에 차녀 김혜경(金惠卿)을 낳았다. 최혜순은 김철이 사망한 후에도 임시정부에 남아서 홍삼 매매, 병원 운영 등을 통해 낸 수익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다가 3년 후 두 딸을 데리고 인천으로 귀국했지만 인천항에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인천유치장에 상당 기간 감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이후로 8.15 해방 때까지 형사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해방 후에는 고향인 광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75년에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최혜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장녀 김미경은 여성 최초로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정치학, 법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1986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해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다. 차녀 김혜경은 이화여자대학교에 진학했지만 6.25 전쟁 도중 혼인했다가 당시 이화여자대학교의 금혼 정책에 따라 퇴학 처리되었다. 이후 평범하게 살다가 2015년에 췌장암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