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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陸軍駐滿參議府 | |
활동시기 | 1924년 ~ 1929년 |
주요 전적 | 국내 진공 작전 |
1. 개요
參議府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활동하였던 무장독립운동단체. 정식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2. 통의부의 분열
1922년에 통군부가 개편되어 출범했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가 복벽파의 의군부와 공화파의 통의부로 분열되었다. 이에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산하의 광복군 사령부를 계승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육군주만참의부를 조직한다.[1]3. 참의부의 활동과 해체
참의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조직이 되어 남만주 압록강변에 주둔하며 무장 활동과 한인 자치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이들의 활동지역은 국내진입이 쉬운 압록강 유역으로 특히 평안북도 초산·위원·만포진·자성의 대안인 집안현은 참의부의 주요 군사 근거지이자 활동 무대였다. 그러다가 1925년에 일제와 장쭤린이 미쓰야 협정을 체결하면서 장쭤린이 한국의 독립군을 탄압하자, 만주에 있던 3부(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독립운동가들은 위기의식을 느꼈고 한자리에 모여 1927년에 3부 통합 논의를 전개하였다.(민족 유일당 운동)그러나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 통합 논의는 3부 간의 이해 상충으로 인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3부 통합은 국민부와 혁신의회의 결성으로 마무리되었다. 참의부는 결국 1929년에 해체되어 국민부와 혁신의회에 각각 흡수되었다.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24년 압록강변에서 있었던 마시탄 의거가 그것으로, 참의부 2중대 산하 특공대가[2] 압록강 하구 마시탄 근처에 매복해있다가 사이토 마코토와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기치가 탑승한 일본 순시선을 습격했다. 총독 사살은 불발에 그쳤지만 독립신문 등 국외 신문에서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여 독립운동계에 적잖은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만주 동포사회도 크게 통쾌해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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