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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항섭

파일:독립운동가 엄항섭.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엄대형(嚴大衡)
자 / 호 군상(君常) / 일파(一波)
본관 영월 엄씨[1]
출생 1898년 10월 15일[2]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사망 1962년 7월 30일(향년 63세)
북한 평양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214호
애국렬사릉
학력 보성법률상업학교 (졸업)
지장대학 (졸업)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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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독립당 요인으로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둘째 부인 연미당[3]과 장녀 엄기선 또한 독립유공자이다. 임택근문화방송 전무이사는 외사촌누나 청풍 김씨(1895 ~ 1970. 11. 17.)[4]의 셋째 아들이다.

2. 생애

2.1. 생애 초반

1898년 10월 15일(음력 9월 1일) 경기도 여주군(現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에서 아버지 엄주완(嚴柱完)과 어머니 청풍 김씨[5]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엄승섭(嚴承燮), 남동생 엄홍섭(嚴弘燮)이 있었다.

할아버지 엄세영(嚴世永)은 1855년(철종 6) 식년시 진사시에 2등 15위로 입격하고 1864년(고종 1) 증광시 문과에 병과 13위로 급제한 뒤 농상공부 대신, 판중추부사(종1품),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고, 아버지 엄주완 또한 1885년(고종 22) 증광시 진사시에 2등 23위로 입격하고 1892년(고종 29) 별시 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하여 정7품 승정원 가주서(假注書)를 시작으로 권지(權知)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종9품), 홍문관 수찬(修撰, 정6품), 남학 교수(南學敎授, 종6품)를 역임하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관제 개혁이 이뤄진 뒤에는 경술국치 직전까지 종2품에 오른 인물이었다.

또 외할아버지 김규식 또한 진사시에 입격하고 1870년(고종 7) 정시 문과에 병과 16위로 급제한 문과 출신자로 병조 참판(종2품)에 오르고 갑오개혁 뒤에는 인천부 관찰사(仁川府觀察使)와 충주부 관찰사(忠州府觀察使) 등을 지냈으나, 충주부 관찰사 재직 중에 단발령 강행에 앞장선 것으로 보수적인 지식들의 증오를 사다가 1896년 2월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진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렇듯 그는 당대의 문벌 가문이면서도 개화사상가 서양 문물에 대해서 상당히 개방적인 집안에서 자란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한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보성법률상업학교[6]를 졸업하고 3.1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망명 당시에는 일명 예빗·엄이라고도 불렀다. 중국에 망명해서는 일파(一波)라는 호를 주로 사용했고, 필명으로 대형(大衡)을 사용한 적도 있다. 엄항섭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1920년 항저우(杭州)에 있는 지장대학(之江大學)[7]을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상하이에서 언론활동을 하다가 1929년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중앙위원이 되었다.

2.2.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본래 상하이프랑스 조계국에서 일했던 그는 상해임시정부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가장 노가다에 가까운 업적은 그 시절에 김구의 백범일지를 등사기로 일일이 인쇄한 것이다(...). 등사기가 무엇인가, 복사기의 조상으로 한 장을 일일이 인쇄해야 하고 글자를 일일이 칼로 파야 했다. 그것도 한자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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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구, 박찬익, 이동녕, 엄항섭

이후 김구를 극진히 대우하였고, 김구의 생활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임시정부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어도 임정을 떠나지 않고 김구를 보좌하면서 김구의 최측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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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엄항섭과 부인 연미당의 결혼식(1927). 결혼식에 참석한 김구·안창호·이동녕·이시영 등의 임시정부 요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2.3. 한국광복군 활동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성립전례식은 충칭에서 가장 좋은 호텔인 가릉빈관에서 개최되었고, 당시 충칭에 있는 외국 사절들을 비롯하여 중국국민당·중국공산당의 인사들과 중국군 관계자 등 200여 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였다. 행사는 일본공군기의 공습을 피해 아침 7시부터 3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이 행사의 제반 준비와 실무를 맡아 한 것이다.

그리고 임시정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나 활동을 미주교포들에게 알리는 일을 맡아 했다. 당시 임시정부가 해결해야 했던 주요한 과제의 하나는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중국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턱없이 모자랐다. 광복군을 창설하였지만, 그 대원들의 의식주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하였고, 그것을 미주교포들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재정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임시정부가 어떠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는지를 알려야 했다. 선생이 그 일을 맡았다. 선생은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배관기(光復軍總司令部成立典禮拜觀記)」·「광복군에 관한 보고」·「대한철혈남아 사방에서 운집」등의 글을 작성하여,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선생이 보내는 글들은 대부분 미주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에 그대로 보도되었다. 선생은 《신한민보》의 통신원 역할을 하였고, 《신한민보》는 ‘임시정부 소식’난을 마련하여 이를 미주교포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1944년 인면전구 전지공작대의 활동에 감명받은 주중 미대사관에서 '한국인 공작반'을 신설하자 송면수, 안병무, 안우생, 박영만과 한국인 공작반에 파견되었고 OSS와 연합작전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는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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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규와 엄항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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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OSS에서 도와주었는데 엄항섭이 그걸 주선해주었다.

맨 왼쪽부터가 엄항섭, 김구. 엄항섭이 보낸 전보(1944) 중국 군사위원회가 일임했던 광복군에 대한 행정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위임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2.4. 8.15 광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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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충칭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광복을 맞이한 김구 선생(앞줄 왼쪽 5번째)과 임정 요인들이 환국을 앞둔 1945년 11월 3일 촬영한 사진. 김구 선생 왼편이 엄항섭선생(앞줄 왼쪽에서 4번째)이다.(『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4, 2011)

광복 후 11월 3일 임시정부 환국 제 1진의 한 사람으로 상하이 비행장을 출발해 비행기편으로 김포공항에 착륙하였다. 귀국해서도 김구를 따라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선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취임사에서 그는 '우리 소년군은 오늘과 같이 길러온 유지들을 중심으로 진행할 방침인데 일반 사회에서도 많은 원조를 해주기 바란다.'라고 발표하였다.

신탁통치 문제가 대두되자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에 참가, 반탁 운동을 벌였다.

1947년 12월 이후 김구가 남북협상으로 전환하면서 그 역시 노선을 전환, 1948년 4월 20일 남북협상에서 한국독립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김구가 이승만과 결별하자 김구를 따라 1948년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함께 참가하는 등 계속 김구의 측근으로 활동하다가 김구 사후에는 지인들과 멀리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해 갔다.

김구가 남북협상 노선을 선포한 이후 신익희, 이시영, 이범석 등 상당수 임시정부 인사들이 김구 곁을 떠났고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조소앙마저도 결국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사회당을 창당해서 김구를 떠났지만 엄항섭만은 끝까지 김구의 노선을 따랐을 정도로 임시정부 인사들 중에서도 김구의 최측근이었다.

엄항섭의 막내딸 출생지가 경교장 근처일 정도로 김구와 가깝게 지냈다. 그런데 해방 초에 미군정에 일하는 한인 직원들에게 반탁을 위한 파업을 부탁했는데,그 결과 미군정 직원들이 파업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김구는 엄항섭에게 부탁해 파업중지 방송을 권고했다. '우리의 투쟁은 미군정에 대한 것이 아니라 탁치에 반대하는 것이며, 워싱턴에서 온 전문에 따르면, 탁치를 실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니 미군정 관리를 포함한 모든 조선인들은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업무에 복귀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화가 난 존 하지는 김구를 협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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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학교 설립시 김구와 격려차 방문 1948년 1월 18일 낙원동. 앞줄: 김구, 장형, 뒷줄: 장도빈, 엄항섭, 양주동, 김정실, 박정숙

1947년 3월 건립된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에서 강사와 부소장을 맡기도 하였다

양성소의 매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기간은 제1기가 2개월이었고, 제2기부터 마지막 교육을 받은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내용은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역사·선전·민족문화·국민운동·철학·약소민족문제·농촌문제·협동조합·사회학·공산주의 비판·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다. 1948년 12월 제5기 수료생 명부에 따르면 명예소장 이승만, 소장 김구, 부소장 엄항섭, 이사장 장형으로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강사는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신익희(申翼熙)·지청천(池靑天)·나재하(羅在夏)·김성주(金成柱)·김경수(金敬洙)·최호진(崔虎鎭)·김정실(金正實)·양주동(梁柱東)·민영규(閔泳珪)·엄상섭(嚴詳燮)·엄항섭(嚴恒燮)·김학규(金學奎)·설의식(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주석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안재홍(安在鴻)·정인보(鄭寅普)·황기성(黃基成)·이인(李仁)·김활란(金活蘭)·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이은상(李殷相)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이때 엄항섭은 친분이 있던 김정실, 양주동과 함께 강사로 참여하였다.

1949년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육군포병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권총으로 살해된 김구암살사건(金九暗殺事件)이 발생하여 건국실천원양성소의 본부였던 원효사는 1948년 9월 홍익대학교가 인수했지만 김구가 암살된 후, 해체되었다.

2.5. 6.25 전쟁 이후

그는 6.25 전쟁 이후 납북되었는데, 조소앙과 함께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가입하여 그 해 7월 상임위원 겸 집행위원에 취임하여 활동했다. 하지만 저 단체는 말 그대로 얼굴마담이었다. 북한에 억류된 한국독립당 인사들 중에서는 제일 젊었다.(50대)

1958년 9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주장한 통일방안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판단한 북한당국은 납북인사들을 탄압, '엄항섭, 명제세, 노일환' 등에 반혁명분자라는 혐의를 씌어 연행한다. 이것이 바로 북측이 자행한 '엄항섭(嚴恒燮) 사건'으로 엄항섭 등을 체포하자 함께 납북됐던 조소앙은 조작이라며 이에 항의하여 단식투쟁을 벌였다. 단식투쟁 중 병을 얻어 1958년 9월 10일 조소앙은 타계했다고 알려져 있다.

엄항섭은 북한에서도 남북통일을 위해 진력했다고 하며 납북인사들 중에서는 조소앙과 함께 가장 강력히 김일성 1인 독재체제에 저항했으나, 결국 1962년 7월 30일 평양에서 홧병에 따른 고혈압으로 외롭게 숨을 거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8]

198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봉안되었다. 또한 1990년 8월 15일 북한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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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항섭의 묘.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다.

3. 대중매체에서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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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야공파-교리공파 28세손 ○섭(○燮) 항렬.(족보)[2] 음력 9월 1일.[3] 첫째 부인인 풍천 임씨 임건호(任建鎬)의 셋째 딸은 상하이까지 같이 따라갔으나 1926년 6월 28일 그곳에서 별세하여 사별하였다.[4] 외조부 김규식(金奎軾, 1838 ~ 1896)의 아들 김진달(金鎭達, 초명 김진룡(金鎭龍), 1870 ~ ?)의 딸이다.[5] 김규식(金奎軾, 1838 ~ 1896)의 1남 3녀 중 차녀이다.[6] 고려대학교의 전신.[7] 미국 기독교 북장로회와 남장로회에서 연합으로 중국 항저우에 창립한 기독교대학이다. 1845년 저장성 닝보시에서 창립된 숭신의숙(崇信義塾)을 전신으로 하며, 1952년 폐교되고 학과들은 절강사범대학·저장대학·푸단대학 등에 분리되어 합병되었다.[8] 1991년 10월 1일 공개된 전 북한 정무원 부부장(차관급)을 지내다가 1980년대 중반 망명한 박병엽(朴炳燁, 필명 신경완申敬完)의 구술기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