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문무술(文武術) |
생몰 | 1887년 9월 20일 ~ 1950년 9월 28일 |
출생지 | 함경남도 원산시 부상동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문무술은 1887년 9월 20일 함경남도 원산시 부상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원산에서 주익(朱翼)으로부터 주세진(朱世鎭)에게 권총 2정과 실탄 5발을 건네 줄 것을 위탁받고 이 무기를 보관했다. 이후 윤영주(尹永周)외 1명과 함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계획하고, 1919년 5월 19일 원산의 부호 남상준(南相俊)에게 군자금 천원을 서신으로 요구하였으며, 동월 하순에는 윤영주와 같이 남상준의 집에 찾아가 남상준의 아우인 남상보(南相輔)에게 군자금을 요구, 100원을 받아냈다.이후 서울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서울로 올라와 군자금을 모금하고, 1919년 6월에 서울에 거주하는 남관희(南觀熙)에게 군자금 100원을 모연하였으며, 1920년 1월에는 유극선(劉克善)과 함께 서울의 차상건(車相健)에게 군자금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고 일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체포되었다. 그는 1920년 10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갈, 강도미수,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와 함흥형무소를 오가며 옥고를 치렀다. 1925년 7월 석방된 문무술은 1927년 12월 11일 함경남도 원산시 신간회 지부에 참가해 이세모(李世模), 전진규(全眞珪), 유재숙(劉在淑), 장기도(張基都), 임경수(任敬洙) 등과 함께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의 권익 옹호를 위해 활동했다.
8.15 광복 후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의회의 관선 의원으로 발탁되었지만, 유엔조사위원회에게 소련의 조선독립 천연공작을 배제하고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실시하고 감시해 달라고 요청하자는 내용의 긴급동의안이 상정되자 이를 반대했다가 긴급동의안이 끝내 통과되자 김규식, 여운홍, 김붕준, 정이형, 강순, 박건웅, 고창일, 허규, 허간룡, 김돈, 황진남, 정주교 등 23명의 관선의원과 함께 총퇴진을 결의했다. 이후 서울에서 살다가 6.25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에게 억류되었고, 1950년 9월 28일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탈환했을 때 도주하던 북한군에게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문무술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6년에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