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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민공(莊愍公) 강순 康純 | |
| <colbgcolor=#c00d45'><colcolor=#fff> 출생 | 1390년 |
| 고려 서해도 신천군 (現 황해남도 신천군)[1] | |
| 사망 | 1468년 10월 27일 (향년 78세) |
| 조선 한성부 군기시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서울특별시청 일대) | |
| 본관 | 신천 강씨 |
| 자 | 태초(太初) |
| 시호 | 장민(莊愍) |
| 가족 관계 | 조부 - 강윤부(康允富)[2] 부 - 강진행(康鎭行)[3] 부인 - 전주 이씨[4] |
1. 개요
조선의 무관.2. 생애
병마절도사 강진행의 아들로 태어났다. 음서로 관직에 올랐으며 갑사로 시작해 1443년 제주에 침략한 왜구들을 토벌했고 첨지중추원사, 상호군, 회령도호부사, 1450년 판군기감사, 첨지중추원사를 거쳤다.이후 평안도 조전절제사가 됐고, 1451년 황해도 조전절제사가 되었다. 북으로는 여진, 남으로는 왜구를 토벌하며 군공을 쌓았다. 세조가 즉위하고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1460년 판길주목사로 북방으로 갔고 여진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1461년 함길도 도절제사를 거쳐 1465년 중추원사를 역임했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이 발발하자 77세의 나이에 토벌군 부사령관이자 진북장군에 임명되어 구성군을 보좌했다. 북청에서 이시애군을 방어했으며 유격전으로 인해 북청을 뺏겼으나 2차 북청 전투에서 이시애군을 패퇴시키며 북청을 탈환했다.
만령 전투 당시 중군 소속으로 화차를 앞세워 화력전에서 압도하며 승리를 거둬 난을 종결시켰다. 건주위 여진의 준동에 남이, 어유소와 함께 이만주를 척살하는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우의정에 올랐고 잠시 영의정까지 있었다. 이후 신천부원군, 오위도총관으로 임명되었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했다. 유자광의 고변으로 인해[5] 남이가 추포되었고 심문과정에서 남이가 강순을 끌어들여 강순 역시 고문을 받게 되었다. 4일 뒤 남이,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조숙, 조영달, 이지정 등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고 그 중 거열형에 처해졌다.
처형되기 직전 강순은 남이에게 말했다.
남이야! 너는 나와 무슨 원수가 졌기로 나를 끌어넣었느냐?
이에 남이는 이렇게 답했다.
여보시오 우상! 나도 참으로 원통하오! 당신은 원상으로 내가 누명을 쓰고 죽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있소? 그래서 우상도 같이 죽어야 싸다고 여긴 것이오!
시신은 7일간 저잣거리에 효수되었고 고향인 보령에 안장했다. 1818년 우의정 남공철의 건의로 신원되었고 고종 때 시호가 추서되었다.
처형 당시 78세로 무려 조선 건국 이전인 고려 공양왕 때 태어난 인물로서 2년만 더 일찍 태어났으면 80세가 넘었으므로 당시 조선 예법에 따라 사형을 피할 수 있었지만 괘씸죄의 희생양이 된 셈.[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