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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적개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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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년 8월 26일 세조에 의해 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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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병조판서
의산군(宜山君) 충무공(忠武公)
남이
南怡
파일:남이 장군 초상화.jpg
<colbgcolor=#94153e'><colcolor=#ffc224,#db9e00> 출생 1443년
한성부 연화방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산 일대)
사망 1468년 10월 27일 (향년 26세)
한성부 군기시(軍器寺)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서울특별시청 일대)
복권 1818년[1]
묘소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 145
봉호 의산군(宜山君)
시호 충무(忠武)
본관 의령 남씨[2]
붕당 신훈 (신 공신, 종친)[3]
최종
관등
정2품 병조판서(兵曹判書)[복권]
공훈 정충출기포의 적개공신 1등(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 一等, 1467)
학력 무과 식년시 장원 급제 (세조 6년) 최연소 17세
경력 한성부 선전관(宣傳官)
행 부호군(行副護軍)
행 호군(行護軍)
우상대장(右廂大將) 건주여진정벌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
공조판서(工曹判書)[겸직][최연소]
병조판서(兵曹判書) 최연소 26세
겸사복장(兼司僕將)
조부 의산위 남휘(宜山尉 南暉)
조모 정선공주(貞善公主)
부모 부친 - 남빈(南份, 1421 ~ ?)
모친 - 남양 홍씨 홍여공(洪汝恭)의 딸
부인 정부인 - 안동 권씨 권람(權擥)의 4녀 (사별)
계부인 - 고성 이씨 (재혼)
그 이외 측실 2명
자녀 1녀 - 남구올금 권씨 소생

1. 개요2. 생애
2.1. 왕가의 외증손2.2. 무과 등재 및 출사2.3. 이시애의 난, 건주위 진압. 당상관에 오르다.2.4. 최연소 병조판서. 그러나...2.5. 남이의 옥
3. 기타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 세조 때 무관, 척신.

2. 생애

2.1. 왕가의 외증손

1441년[7] 서울 낙산 아래[8]에서 태어났다. 고조 할아버지는 개국공신이자 영의정부사인 충경공 남재[9], 큰 할아버지는 문종의 고명대신이자 좌의정을 역임한 충간공 남지, 둘째 할아버지는 세종의 총애를 받은 예문관 직제학(증 대사헌) 남간, 할아버지는 부마도위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 할머니는 태종의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이고 아버지는 군수 남빈(南份), 어머니는 현감 홍여공(洪汝恭)의 딸이다. 남이는 개국공신의 후손으로 태종의 외증손이 된다. 아버지까지는 종친 대우를 받았다.

2.2. 무과 등재 및 출사

세조 6년인 1460년[10]에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한다. 우리 나이로 18세에 등과한 셈인데 조선 전기 문과에 급제하는 평균 나이가 30세 전후였고 무과도 그보다 약간 어리거나 거의 비슷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18세의 무과 급제는 놀라운 성취였다. 당시 세조는 한명회 등 훈구 공신들의 공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경계해 왕실 종친들과 젊은 인재들을 통해 견제하려 했다. 단종을 죽인 명분 자체가 왕권의 확립이었는데 세자인 예종은 사사건건 아버지 성에 안 찼고 이런저런 이유로 발영시(拔英試),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면 엘리트 선발 대회를 열어 인재를 뽑았다. 세조 12년인 1466년 치러진 이 시험에서는 새로 인재를 뽑는게 아니라 이미 문과, 무과에 합격했던 젊은이들 중 젊은 엘리트 관료들을 재발굴하는 거였다. 문과는 40명을 뽑은 반면 무과는 단 4명이었는데 남이는 바늘 구멍 같은 관문도 보기 좋게 뚫어냈다. 장원은 아니었다.[11] 그만큼 남이가 장수로서 역량이 뛰어난 인물이라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그의 나이 21세[12]인 1463년인데 1466년까지 선전관[13]의 직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략) 임금이 명하여 허종을 체찰사(體察使)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또 행 호군(行護軍) 조계종(趙繼宗)·선전관(宣傳官) 남이(南怡)·겸사복(兼司僕) 조영달(趙穎達) 등을 군관(軍官)으로 삼아서 보내었다. (하략)
세조실록 31권, 세조 9년 (1463년) 10월 22일 정미 1번째기사 <신숙주·구치관·윤찬 등을 불러 북방의 일에 대해 논의하고 대책을 정하다>
새벽에 대가(大駕)가 움직이었는데, 중로(中路)에 왕세자가 길가에서 말에서 내리자 선전관(宣傳官) 권필(權佖)·조맹춘(曹孟春)·하복산(河福山)·남이(南怡)가 모두 말에서 내리니, 임금이 곧 의금부(義禁府)에 내리기를 명하였다. (하략)
세조실록 38권, 세조 12년 (1466년) 3월 23일 갑자 2번째기사 <세자에 대해 예우할 것을 전지하다>
헌납(獻納) 조간(曹幹)이 아뢰기를,
"판서(判書) 남이(南怡)는 경진년(庚辰年)[14]에 처음 무거(武擧)에 등제(登第)하고, 병술년(丙戌年)[15]에 재차 발영시(拔英試)[16]에 등제하였는데, 이제 또 초시(初試)에 나아가기를 청하니, 다른 예(例)와 같지 않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중시(重試)에 나아가려는 것으로 잘못 알고 허락하였으니, 시험에 나아가지 말게 하라."
하고, 이어서 남이에게 하교하기를,
"경(卿)의 재망(才望)은 본시 나타났으니, 만약 장원(壯元)하지 못하면, 재주를 상(傷)하고 희망을 덜게 되니, 시험에 나아가지 말라."
하니, 남이가 나와서 뭇사람에게 선언(宣言)하기를,
"성상께서 신에게 명하시기를, ‘너의 이름을 천하에 들렸으니, 용이하게 시험에 나아감은 불가하다.’고 하셨다." 하였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남이가 초시(初試)에 나아가기를 청한 것은, 전일에 장원[魁]하지 못함을 한(恨)하여, 이제 다시 과거에 나아가면 장원할 것으로 여겨서이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에 성상께서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노상(路上)에 말을 세우고, 남이에게 묻기를, ‘네가 등제(登第)하려 하느냐?’ 하니, 남이가 대답하기를, ‘신(臣)은 나이가 젊고 지위가 높아 상덕(上德)이 심중(深重)한 까닭으로 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여, 성상께서 가상히 여겼는데, 이 말이 어찌 속마음에서 나왔겠는가?" 하였다.
세조실록 45권, 세조 14년(1468년) 3월 27일 정해 1번째기사 <남이를 중시에 나가지 말게 하다>

2.3. 이시애의 난, 건주위 진압. 당상관에 오르다.

북정가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
(전략) 이시애(李施愛)·이시합(李施合)·이명효(李明孝) 등이 독전(督戰)함이 매우 급하였다. 물러나 배반하는 자 두 사람을 참수(斬首)하여 머리를 창대 위에 걸어서 군중에게 보이니, 군중이 다리를 떨며 모두 창을 안고 진격하여 모두 10여 합(合)을 싸웠다. 김교(金嶠)는 울타리 남쪽 모퉁이를 감당하여 방어하였다. 적이 김교의 거느린 군사를 엿보니 모두 나약(懦弱)하여 매우 쉬운 것을 알고는 정예한 병사가 다 한데 모여들어 공격하니, 화살이 비와 같으므로 우리 군사도 분발하여 다투고 쏘아서 적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였다. 사상(死傷)함이 셀 수가 없었으나, 이숙기(李淑琦)·남이(南怡)가 살상한 것이 가장 많았다. (하략)
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1467년) 6월 24일 정사 2번째기사 <진북 장군 강순이 북청에 진입할 때 절도사 허종과 의논하다 >
무송군(茂松君) 윤자운(尹子雲)을 좌참찬(左參贊)으로, 김질(金礩)을 겸 의금부 판사(兼義禁府判事)로, 이서(李墅)를 겸 오위장(兼五衛將)으로, 이숙기(李淑琦)를 행 사직(行司直)으로, 남이(南怡)를 행 부호군(行副護軍)으로 삼았다. 북청(北靑)의 싸움에서 남이가 진(陣) 앞에 출몰(出沒)하면서 사력(死力)을 다하여 싸우니, 향하는 곳마다 적이 마구 쓰러졌고 몸에 4, 5개의 화살을 맞았으나 용색(容色)이 태연자약하였다.[17] 이숙기도 또 힘써 싸워서 공(功)이 많았기 때문에 아울러 당상관(堂上官)으로 제수(除授)하여서 이들을 상 주었던 것이다.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1467년) 7월 14일 정축 2번째기사 <윤자운·김질·이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전략) 하고, 또 유시(諭示)하기를,
" 남이(南怡)가 가장 용감(勇敢)함을 나타낸다는 말을 듣고, 이제 당상관(堂上官)에 임명하고 표리(表裏) 1벌을 주어서 여러 장수(將帥)들을 격려한다. 이숙기(李淑琦)도 또 적을 쏘는 데 능하다고 하니, 당상관(堂上官)에 임명한다. 그 나머지 장사(將士)들도 유능한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그대가 그 등급을 매겨서 계달(啓達)하는 대로 즉시 상(賞)을 주겠다."
하였다.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1467년) 7월 14일 정축 3번째기사 <유자광이 임금의 뜻을 맞추니 관직을 더하고 서찰로 이준을 유시하다>
이날 밤 3고(鼓)에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이 먼저 산개령(山介嶺)을 넘으니, 대장 어유소(魚有沼)가 다음으로 종개령(鍾介嶺)을 넘고,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이 잇달아 평포(平浦)에 이르렀다. 강순(康純)이 준(浚)에게 보고하기를,
"내가 사자 위장(獅子衛將) 남이(南怡)·맹패장(猛牌將) 이숙기(李淑琦)를 전봉(前鋒)으로 삼아 종개동(鍾介洞)에 이르니, 적(賊)이 목채(木寨)를 설치하고, 북청(北靑) 사람 장봉(張奉)으로 하여금 1백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지키게 하였는데, 남이(南怡)가 먼저 목채(木寨)를 부수고 돌격(突擊)하여 2급(級)을 참수(斬首)하고 20여 인을 사로잡고 치중(輜重) 10여 바리[駄]를 빼앗으니, 나머지 잔당(殘黨)이 도주하였습니다. 위협받아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않겠다는 뜻을 가지고 타이르고, 사로잡은 자들을 놓아서 돌려보냈습니다. 산개령(山介嶺) 위에 이르니, 적(賊)이 또 목채(木寨)를 설치하고 관군(官軍)이 이르는 것을 망(望)보다가, 요새(要塞)를 막기를 더욱 튼튼히 하였는데, 이숙기(李淑琦)가 돌격하여 목채(木寨)의 문을 쳐부수고 고개를 넘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하략)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1467년) 7월 25일 무자 4번째기사 <이준이 강순·어유소와 함께 적을 무찌르고 연달아 진을 치다>
우찬성(右贊成) 김국광(金國光)·우참찬(右參贊) 윤필상(尹弼商)·행 호군(行護軍) 남이(南怡) 등이 도총부(都摠府)에 모여서 군공(軍功)의 등급을 의논하여 1등을 정충 출기 포의 적개 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으로 하고, 2등을 정충 포의 적개 공신(精忠布義敵愾功臣)으로 하고, 3등을 정충 적개 공신(精忠敵愾功臣)으로 하였다.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1467년) 8월 26일 기미 1번째기사 <김국광·윤필상·남이 등이 군공의 등급을 의논하여 정하다>
대사헌(大司憲) 양성지(梁誠之)가 《평삭방송(平朔方頌)》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聖上) 13년 여름 5월에 적신(賊臣) 이시애(李施愛)가 길주(吉州)에서 반역(叛逆)하니, 성상께서 진노(震怒)하여 도총사(都摠使) 신(臣) 이준(李浚)과 부사(副使) 신(臣) 조석문(曹錫文)에게 명하여 서울의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정벌(征伐)하게 하였습니다. (중략) 비장(裨將) 남이(南怡) 등이 돌격하여 싸워서 적의 기치(旗幟)를 빼앗고, 적 수백 명을 목베었습니다. (하략)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1467년) 9월 6일 무진 3번째기사 <이시애 난 평정을 기리는 대사헌 양성지의 평삭방송(平朔方頌)>
승정원(承政院)에서 교지(敎旨)를 받들어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오백창(吳伯昌)과 원접사(遠接使) 김길통(金吉通)에게 치서(馳書)하기를,
"명(明)나라 사신이 만약 장수(將帥)의 성명(姓名)을 묻거든, 대답하기를, ‘대장(大將)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이라.’고 하고, 만약 군사 숫자를 묻거든, 대답하기를, ‘1만 명이라.’ 하여, 모두 사실대로 대답하라."
하였다.
세조실록 43권, 세조 13년 (1467년) 9월 20일 임오 4번째기사 <평안도 관찰사 오백창 등에게 명 사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치서하다>
주장(主將) 강순(康純)이 승정원(承政院)에 봉서(奉書)하여 아뢰기를,
"신(臣)이 군사를 거느리고 9월 26일에 우상 대장(右廂大將) 남이(南怡)와 더불어 만포(滿浦)에서부터 파저강(婆猪江)으로 들어가 공격하고 이만주(李滿住)와 이고납합(李古納哈)·이두리(李豆里)의 아들 이보라충(李甫羅充) 등 24명을 참(斬)하고, 이만주와 이고납합 등의 처자(妻子)와 부녀(婦女) 24구(口)를 사로잡고, 활로 사살(射殺)하고서 머리를 참(斬)하지 않은 것이 1백75명이고, 중국인 남자 1명, 여자 5구(口)와 아울러 병장(兵仗)·기계(器械)·우마(牛馬)를 얻었고 가사(家舍)와 쌓인 곡식(穀食)은 불태우고 진(陣)을 물려서 요동(遼東)의 군사를 기다렸으나, 여러 날 동안 성식(聲食)이 없기 때문에 이달 초2일에 군사를 돌이켜 초3일에 강을 건넜습니다. 좌상 대장(左廂大將) 어유소(魚有沼)는 고사리(高沙里)로부터 올미부(兀彌府)로 들어가 공격하여 21급(級)을 참(斬)하고, 활로 사살하고 머리를 참(斬)하지 못한 것이 50명이고, 중국 여자 1구(口)와 아울러 병장(兵仗)·기계(器械)·우마(牛馬)를 얻고 가사(家舍) 97채를 불태우고, 또한 요동(遼東)의 군사를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하고, 이달 초4일에 그 잡은 중국 사람 등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붙이고 옷과 양식을 급여(給與)하였고, 그 얻은 병장(兵仗)·기계(器械)·우마(牛馬)의 수는 따로 기록하여 계문(啓聞)합니다." (후략)
세조실록 44권, 세조 13년(1467년) 10월 10일 임인 1번째기사 <강순이 승전의 봉서를 올리다. 중국 군대와 접촉시의 태도 등을 사목으로 유시하다>
(전략), 강옥[18] 등이 앞에 나와서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다. 김보가 말하기를,
"원컨대 남재상(南宰相)이 쏘는 강궁(强弓)을 보았으면 합니다."
하니, 명하여 상현 강궁(上弦强弓)을 취하여 주게 하였다. 김보가 청하여 남이(南怡)로 하여금 쏘게 하매, 남이가 즉시 띠고 있는 대전(大箭)을 뽑아서 한껏 당겨서 쏘았더니, 강옥(姜玉)이 하례하기를,
"이와 같은 양장(良將)은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데, 이 같은 사람이 좌우를 모시었으니 전하는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고, 김보[19]가 말하기를,
"저들에게 쏘았던 궁시(弓矢)를 원컨대 제도(帝都)로 가지고 돌아가 뭇 사람들에게 과시(誇示)하기를, ‘이것은 우리 조선이 건주(建州)를 정벌할 때의 비장(裨將) 남이(南怡)의 활이다.’라고 하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남이(南怡)뿐만이 아니라, 오늘 정중(庭中)의 장수와 군사들의 궁력(弓力)은 이보다 강한 자가 또한 많으니, 이것을 어찌 중원(中原)에 족히 보이겠는가?"
하니, 강옥 등이 말하기를,
"' 이와 같은 경궁(勁弓)은 천하(天下)에서 얻기 어려우니, 보이게 하여도 해롭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친히 잔(盞)을 잡아 두목(頭目)에게 내려 주니, 두목 등이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받아 마시기를 마치고는 머리를 조아려 물러났다.
세조실록 46권, 세조 14년(1468년) 5월 18일 정축 1번째기사 <김보가 활을 청하다. 진상하는 물건에 얘기하다>

선전관으로 재직 중에 경복궁으로 뛰어든 호랑이를 단숨에 처치했다는 야사가 있으며 일찍이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선전관으로 봉직하던 중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 전공을 세워 행 부호군이 되고 뒤이어 당상관에 계자되었다.[20] 이시애의 난이 진압된 후 행 호군이 되었으며 적개공신 1등[21]이 된다. 이시애의 난이 끝나자마자 우상대장으로 강순, 어유소 등과 더불어 요동의 건주 여진 토벌[22]에 출전해 공을 세운다. 특히 추장 이만주를 현 평안북도 만포시에서 주살하여 그 이름을 알렸다. 이 공으로 중추부동지사를 거쳐 불과 25세의 나이에 자헌대부(정2품), 공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의산군이라는 어마어마한 직위에 오른다.
(전략) 정충 출기 포의 적개 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 자헌 대부(資憲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兼五衛都摠府都摠管) 의산군(宜山君) 남이(南怡)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왕은 이르노라. 적(賊)을 토벌하고 적개(敵愾)하는데 반드시 훌륭한 장수의 재주에 힘입는 것이다. 충성을 정표(旌表)하여 책훈(策勳)하는데 마땅히 성대한 상(賞)을 주는 전례(典禮)를 거행해야 하는데, 이것은 공의(公義)에서 나오는 것이요, 사사로운 은혜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생각건대 경은 지식이 육도(六韜)를 갖추었고 기운이 만인의 무리를 제압하였다. 어려서부터 효건(驍健)한 재예(才藝)를 자부(自負)하였고, 일찍이 금위(禁衛)의 행렬에 끼였었다. 전번에 적신(賊臣) 이시애(李施愛)가 역적(逆賊)의 모계(謀計)를 부려서 간사하게 속이고 흉악한 기염(氣焰)을 선동하여 부엉이가 날개를 벌리듯이 하였다. 곧 원융(元戎)에게 명하여 가서 천토(天討)를 이루게 하였다. 경으로 하여금 따라가서 병졸(兵卒)에 앞장서서 바로 나가게 하니, 오직 진군(進軍)하여 죽는 것이 영화(榮華)인 것을 알고 항상 전장(戰帳)에 나가는 것이 남에게 뒤질까 두려워하였다. 소매를 걷어 올리며 남 먼저 오르는 용기를 떨치고 몸을 빼쳐서 홀로 당하려는 마음을 일으켰다. 친히 시석(矢石)의 교차(交叉)되는 것을 무릅쓰고 시호(豺虎)의 소굴을 바로 쳤도다. 흉도(兇徒)를 세 화살로 죽였고 요기(妖氣)를 한번 호령하는 사이에 쓸어버렸다. 공(功)을 갚으려 하니, 마땅히 총명(寵命)을 더하여야 하겠다. 이에 경을 책훈(策勳)하여……하니, 이르거든 수령할지어다. 아아! 황하(黃河)가 띠[帶]와 같이 되고 태산(泰山)이 숫돌[礪]같이 되도록 금일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가물 때는 장마가 되고 내[川]에는 배[舟]가 되어, 더욱 뒷날 공효(功効)에 힘쓰기를 바란다."
하였다. (하략)
세조실록 44권, 세조 13년(1467년) 11월 2일 갑자 1번째기사 <공신연을 베풀다. 적개 공신 귀성군 이준 등이 치사하니, 교서를 반사하다>

<조선왕조실록>상에 남아 있는 남이의 전공은 매우 화려한데 무예가 절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시애의 난에서는 사자위장 또는 비장의 직분으로 참전하여 화살을 4~5대를 맞아도 용색이 태연자약했다는 기록, 진 앞에 나서 사력을 다해 싸웠다는 기록, 이숙기와 더불어 살상한 것이 제일이었다는 기록, 목책을 부수고 돌격하여 적의 수급을 베었다는 등의 무용을 자랑하는 기록이 전하며 건주위 정벌에서는 우상대장으로 참전하여 이만주 부자를 참살하는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명나라 사신이 남이의 명성을 듣고 그가 쏘는 을 보고 싶다하는 기록과 참관 후 감탄하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우리 나이로 불과 25세의 젊은 나이에 선봉장 겸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무공을 세운 기록이 당대에도 유별난 것도 사실이며 남이와 함께 했던 강순(1390년생), 어유소(1434년생), 박중선(1435년생), 이숙기(1429년생) 등은 연배가 남이보다 7~15세까지 높았던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을 것으로 보인다. 보통 최연소 병조판서라는 수식어로 유명한 남이지만, 군인으로서 그의 진정한 전성기는 25세인 1467년으로 1년 동안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건주위를 정벌함으로써 선전관에서 부호군, 호군, 중추부동지사를 거쳐 의산군에 책봉되고 자헌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 공조판서가 되는 엄청난 승진을 거듭한다. 적개공신 1등, 건주위 정벌 군공 2등은 덤.

<조선왕조실록>에서 1467년 남이의 기사는 화려한데 개국공신의 자손으로 명문 대가에서 태어나 왕가의 방계 혈족으로서 20살 전후에 등과하여 입직하고 25세에 엄청난 군공을 세워 공조판서,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을 정도. 이러한 남이의 젊은 혈기가 훈구 대신들이나 동급의 지위에 오른 선배 장수들의 시선에는 자만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2.4. 최연소 병조판서. 그러나...

윤자운(尹子雲)을 팔도 군적사(八道軍籍使)로, 남이(南怡)를 병조 판서(兵曹判書)[23]로, 김예몽(金禮蒙)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서장(李恕長)을 함길북도 관찰사(咸吉北道觀察使)로 조성산(趙誠山)을 함흥 부윤(咸興府尹)으로, 허종(許琮)을 오위 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박중선(朴仲善)을 평안중도 절도사(平安中道節度使)로, 어세공(魚世恭)을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삼았다.
ㅡ 《조선 왕조 실록》 세조 14년(1468년) 8월 23일

주변의 시기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조의 총애 속에 세조의 재위 끝무렵이자 예종의 즉위년이었던 1468년 26세라는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에 임명되는 초고속 승진을 이룬다. 공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어 남이의 관직 경력이 절정에 이른 것이었는데 조선 최연소 공조판서병조판서 기록이다.[24][25] 세조는 훈구 대신들의 발호를 신진 종친을 등용함으로서 견제하려 했고 구성군 이준과 의산군 남이가 이에 해당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 병조 판서 박중선(朴仲善)을 평안중도 절도사(平安中道節度使)로 삼고, 의산군(宜山君) 남이(南怡)를 병조 판서로 삼으니, 형조 판서 강희맹(姜希孟)이 일찍이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한계희(韓繼禧)에게 말하기를, "남이의 사람됨이 병사(兵事)를 맡기기에는 마땅치 못하다." 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한계희가 임금에게 아뢰어, 박중선을 다시 병조 판서로 삼고 남이를 의산군(宜山君)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삼고, 오자경(吳子慶)을 평안중도 절도사로 삼았다.
- 조선왕조실록 예종즉위년 (1468년) 9월 7일

그러나 남이의 병조판서 생활은 오래 못 갔는데 세조가 양위하고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세조의 측근 중 1명이었던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한다.[26] 다만 물러난 직위가 국왕의 호위를 맡은 친위대인 종2품 겸사복장임을 볼 때 실각으로까지 해석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는 의문이다.[27][28] 예종 즉위년 <조선왕조실록> 기록으로는 지중추부사였던 한계희가 "예전에 강희맹이 '남이의 사람 됨됨이가 병사(兵事)를 맡길만 하지 않다'라고 말한 바 있다"라고 말을 보태 병조판서를 박중선으로 갈았다고 돼있다. 한계희는 한명회의 6촌 동생이며 예종의 세자 시절 스승으로 세자시강원을 거쳤고 남이를 찍어낸 공으로 익대공신 3등에 오른다. 양소공(襄昭公) 박중선은 순천 박씨로 남이와 같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적개공신이었다. 얼마 뒤 남이가 처형될 때 익대공신에 올라 경기도 관찰사, 도총관, 이조판서에 이른다.[29] 이는 남이 사후의 기록이니만큼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나 젊은 나이에 오만함으로 병사를 맡길만 하지 않다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고 반면에 훈구 대신들이 젊은 신진 대신들을 견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남이를 비판한 한계희가 원상 세력의 중심이었음을 볼 때 남이의 오만함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당시의 훈구 세력과 원상 세력이 신진 세력을 견제했던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하며 오히려 이준과 남이 간의 반목으로 말미암아 신진 세력이 원상 세력에 대해 적극적인 대처를 못하고 몰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남이 사후 비슷한 신진 세력인 영의정 이준이 몰락하는 과정도 같기 때문이다.[30]

2.5. 남이의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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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1] 방계 후손 우의정 남공철의 요청으로 순조가 복권[2] 충경공파(忠景公派)-의산위공파(宜山尉公派)[3] 반대 세력은 훈구파였는데, 원훈구신의 줄임말이 훈구이다. 또한 원훈 또는 구훈이라 불리었다. 구성군 등이 신훈에 해당되었다.[복권] 순조 18년[겸직] 오위도총부 도총관[최연소] 25세[7] 의령 남씨 족보에는 1443년 계해생으로 되어 있다. 남이 동생의 유서나 당대의 행장에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 정선공주의 아들로 전해져 한국사 대사전 등에 수록되었듯이 이 부분도 향후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기록을 존중하자는 뜻에서 별도 수정하지는 않는다.[8] 당시 지명은 연화방[9] 남재는 정도전의 당여인 남은의 형으로 왕자의 난 때 죽을 뻔 했다. 하륜이 변호해 이직(조선)과 함께 살아남았다.[10]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457년이 아닌 1460년 합격으로 확인됐다. 17세에 출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1441년생 설을 따르다보니 1457년 무과 등제로 추정한 오류였던 것이다. 족보에 따르면 실제로는 1443년생으로 1460년에 무과 등제한 것이 맞다.[11] 장원은 나중에 좌우위 대장군에 오르는 금휘(琴徽)였고 문맹손(文孟孫), 나중에 충청 병마 절도사에 오르는 박형무(朴衡武)가 발영시 무과 동기다. 재미있는게 문맹손은 원래 한명회 연줄이었는데 발영시에 합격하며 세조에게 발탁되자 한명회가 제거한다. 발영시 합격 발표 직전 한명회가 맹득미라는 하급 관리가 관마 유용을 했다는 스캔들을 터뜨리면서 수사 책임을 맡았는데 문맹손을 엮어 넣었다. 문맹손은 장형 80대를 맞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자형(刺字刑, 죄인의 얼굴이나 팔에 죄명을 문신하는 형벌.)까지 받을 뻔했다. 세조는 그럼에도 문맹손을 내치지 않고 끝내 발영시 합격자 명단에 넣어 한명회 쪽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무시하고 중용하는데 결국 세조 사후 한명회 손에 제거된다.[12] 우리 나이 기준[13] 형명(形名)·계라(啓螺)·시위(侍衛)·전명(傳命) 및 부신(符信)의 출납을 맡았던 관직으로 1457년(세조 3) 어가(御駕) 앞에서 훈도(訓導)하는 임무를 맡은 무관을 선전관이라고 일컫게 됨에서 시작되었다. 근시(近侍)의 직임을 가지므로 서반승지(西班承旨)로 지목되어 청요직(淸要職)으로 간주되었으며 장차 무반의 중추적 존재로 성장할 인재들이라는 점에서 무재(武才)가 있고 효용(驍勇 : 굳세고 용맹함)한 사람을 뽑아 임명하고 끊임없이 무예와 병법을 연마시키기로 되어 있었다. 특히 당상관·당하관을 막론하고 4인을 승전기(承傳岐)로 정하여 전명을 전담시켰는데 그들은 6개월만에 전직되도록 되어 있었지만 가장 핵심적 존재였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15명이 3교대로 5명씩 입직 근무를 하였지만 <경국대전>에는 체아(遞兒) 수록(受祿)하는 8인의 선전관만 규정되었고 이후에 선전관청(宣傳官廳)이 설치되면서 선전관은 정직(正職)으로 20인 남짓한 원수를 유지하는데 이들 전임(專任)의 선전관 이외에 문관과 무관이 겸직하는 겸선전관이 50인 남짓 있었다. 소속 관원 품계는 정3품 당상관에서 9품관까지 다양하였다.[14] 1460년[15] 1466년[16] 세조(世祖) 때 임시로 베푼 과거를 말함. 세조 12년(1466) 5월 5일 단오절에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을 모아 술을 내려 주고 친히 글을 지으며 베풀었음.[17] 참고로 이때 남이는 화살을 더 많이 맞았으나 화살로 인해 상처를 입은 것이 4발 ~ 5발의 화살이었다는 뜻이라고 한다.[18] 명나라 사신[19] 명나라 사신. 조선 출신 환관이어서 '우리 조선'이라고 말하고 있다.[20] 행 부호군은 종4품, 당상관은 정3품 이상으로 관등이 관직보다 높은 경우 관직명 앞에 '행'을 붙인다.[21] 정충출기포의 적개공신[22] 당시 명나라북원을 공략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건주 여진의 추장 이만주가 요동을 공격했고 이에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과 명나라군이 협공을 한 것을 말한다.[23] 이전에는 공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이었다.[24] 지금으로 따지면 20대 중반짜리가 국토교통부 장관 및 국방부 장관을 병행한다라고 생각하면 된다.[25] 최연소 영의정 기록은 같은 종친 계열인 구성군 이준.[26] 7월 7일이 즉위일이다. 세조는 예종이 즉위한 다음 날에 숨을 거두었다. 아무리 병에 걸렸다지만 부왕의 인사를 부왕이 살아있을 때 뒤집은 것.[27] 현재로 보면 국방부 장관에서 대통령경호처장으로 물러난 셈.[28] 사실 오래 갈 인사는 아니었기는 했다. 남이의 배경이었던 세조가 승하하였고 세조가 구상했던 왕족 및 신진 세력에 의한 원상 세력 견제라는 측면에서 등용되었던 인사가 이준과 남이였기 때문이다. 원상 세력에 힘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예종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29] 중종반정 1등 공신 박원종의 아버지이자 성종의 사돈이다.[30] 이준은 역모로 참형을 당하지 않았을 뿐, 2년 후인 1470년에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는 누명을 쓰고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배소에서 1479년에 39세로 죽는다.[31] 경기도 기념물 제 13호[32] 외가인 남양홍씨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화성에 묻었다고 한다.[33] 실제 남이와 그의 모친인 남양 홍씨만 처형되고 그의 딸은 노비로 갔다가 1년 후 풀려나고 의령 남씨 족보에 따르면 해주 오씨 참판공파인 양반 오백옹에게 출가한다. 남이의 동생도 귀양으로 그친다.[34] 태종의 외손녀이기도 하다.[35] 실록에는 술자리에서 취해서 했다고 되어있다. 술자리에서 실수를 한 것이든 아니면 술김에 진심이 나왔든 둘 중 하나다.[36] "성상께서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지나치게 사랑하시니, 신은 그윽이 그르게 여깁니다."- 세조실록 46권, 세조 14년 5월 1일 경신 2번째기사. 여기서 세조도 주변사람들도 남이의 말이 옳지 않다고 여겼는지 세조가 주위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김국광, 이숙기, 유자광은 모두 남이가 옳지 못하다 하는데 어세겸만은 잘못 대답해서 세조가 어세겸이 쓸만한 사람이라 여겼는데 아니구만! 이라고 했다고. 참고로 어세겸은 구공신 세대와 신공신 세대 사이의 세대다. 구공신들이 태종 시절에 태어났거나 했다면 어세겸은 세종 초엽에 태어났고 남이는 세종 말엽에 태어났다.[37] 임금이 유자광과 남이를 면질(面質)하도록 명하니, 유자광이 남이를 불러서 남이가 말한 것을 갖추 말하였다. - 예종실록 1권, 예종 즉위년 10월 24일 경술 4번째기사[38] "유자광이 본래 신에게 불평을 가졌기 때문에 신을 무고(誣告)한 것입니다. 신은 충의(忠義)한 선비로 평생에 악비(岳飛) 로 자처하였는데,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예종실록 1권, 예종 즉위년 10월 24일 경술 4번째기사[39] 두 사람의 사이가 극도로 나빴을 가능성은 정말 없는 것이 실록에서 두 사람의 사이가 그렇게 나빴다는 기록은 없고 그나마 앞서 말한 남이가 구성군을 질투한듯한 발언에서 유자광이 남이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그 발언이 세조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것은 물론 구공신들은 모두 남이가 옳지 않다고 한 상황에서 유자광이 딱히 넌씨눈 짓한 남이를 감싸줄 이유는 없다.[40] 낙하산 이라기 보다는 발탁이 맞는 표현이겠다. 왕조시대에 관료의 등용은 현재의 개념으로는 모두 낙하산이기 때문. 남이는 병조판서에 임명될 때 20대 후반이었는데 판서급은 당상관에 해당되는 직책이며 또한 6조의 우두머리다. 나이를 감안하면 일반적으로는 오를 수 없는 자리. 그나마 무과에 급제한지 8년 정도 지났고 이시애의 난에서 큰 활약을 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경력에 비하면 과분한 승진임은 부정할 수 없다. 세조의 구공신세력을 견제하기위한 발탁이라 보는 것이 정설이다.[41] 물론 이는 어느 정도 그럴만한 여지도 있다. 예를 들어 남이는 세조에게 구성군에 대한 총애가 지나치다고 했는데 구성군은 남이와 거의 동갑이지만 영의정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남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오른 병조판서도 일반적으로는 30대도 안 된 나이에 오를 자리는 아니다. 두 사람모두 구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세조의 발탁이었다.[4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남이가 이런저런 불경하다고 판단될만한 말을 한 것은 실었지만 막상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게획은 안 나와있다.[44] 으레 역모사건이면 어떻게 이를 실현시킬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데도 말이다.[43] 射侯, 과녁에 활을 쏘아 맞히는 일. 또는 쏘아 맞히는 과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