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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高麗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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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경종 | 성종 · 목종 | 현종 · 덕종 | ||||
<rowcolor=#670000,#fedc89> 6권 | 7·8·9권 | 10권 | ||||
정종靖宗 | 문종 · 순종 | 선종 · 헌종 | ||||
<rowcolor=#670000,#fedc89> 11·12·13·14권 | 15·16·17·18·19·20권 | 21권 | ||||
숙종 · 예종 | 인종 · 의종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
<rowcolor=#670000,#fedc89> 22·23·24권 | 25·26·27권 | 28·29·30·31·32권 | ||||
고종 | 원종 | 충렬왕 | ||||
<rowcolor=#670000,#fedc89> 33·34·35권 | 36권 | 37권 |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
<rowcolor=#670000,#fedc89> 38·39·40·41·42·43·44권 | 133·134·135·136·137권열전 | 45·46권 |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 ||||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 지(志) ] |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 ||||||
[ 표(表) ] | ||||||
86·87권 「연표(年表)」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후비·종실·공주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88권 「후비1(后妃一)」 89권 「후비2(后妃二)」 | ||||
90권 「종실1(宗室一)」 91권 「종실2(宗室二)」·「공주(公主)」 | ||||||
태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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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유금필 · 최응 · 최언위 (최광윤 최행귀 최광원) · 왕유 왕자지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수경 · 왕순식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태평 · 공직 · 박영규 | ||||||
93권 | ||||||
서필 · 최승로 최제안 · 쌍기 · 최량 · 한언공 · 류방헌 · 김심언 · 최항 · 채충순 | ||||||
94권 | ||||||
서희 서눌 서공 · 유진 · 강감찬 · 최사위 · 황보유의 장연우 · 양규 (양대춘) · 지채문 지녹연 · 하공진 · 김은부 · 주저 · 강민첨 · 곽원 · 왕가도 · 김맹 · 류소 · 윤징고 · 위수여 · 전공지 · 이주헌 · 이주좌 · 안소광 · 조지린 | ||||||
95권 | ||||||
최충 최유선 최사제 최약 최윤의 · 이자연 이자량 이자인 이혁유 이자현 이자덕 이예 이공수 이지저 이오 이광진 · 박인량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 · 황주량 · 류신 · 왕총지 · 위계정 · 소태보 왕국모 고의화 · 문정 · 정문 · 김원정 · 손관 · 최사량 · 김선석 · 임의 임원후 임극충 임극정 임부 임유 임익 임항 · 김한충 | ||||||
96권 | ||||||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 ||||||
97권 | ||||||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 ||||||
98권 | ||||||
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 ||||||
99권 | ||||||
양원준 · 최유청 최당 최린 최선 최종준 최온 최문본 최평 최옹 · 이공승 · 신숙 · 한문준 · 문극겸 · 류공권 류택 · 조영인 · 왕세경 · 이순우 · 임민비 · 최척경 · 함유일 · 염신약 · 이지명 · 유응규 유자량 · 현덕수 · 최균 최보순 최윤개 · 김거공 · 한유한 | ||||||
100권 | ||||||
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 정세유 정숙첨 정안 · 정국검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 ||||||
101권 | ||||||
민영모 민식 · 송저 · 김광중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청 · 왕규 · 차약송 기홍수 · 정극온 · 류광식 · 권경중 · 김태서 김약선 김미 ·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 노인수 · 김의원 | ||||||
102권 | ||||||
금의 · 이규보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김승무 · 이공로 ·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 조문발 · 이순목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하천단 · 채송년 채정蔡楨 · 손변 · 권수평 · 이순효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 ||||||
<rowcolor=#670000,#fedc89> 103권 | 104권 | |||||
조충 조변 · 김취려 김문연 김변 · 이적 · 채정蔡靖 · 박서 송문주 · 김경손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 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 한희유 · 나유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 |||||
105권 | ||||||
류경 류승 류돈 류만수 ·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 정가신 · 안향 안우기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 조인규 조서 조연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 ||||||
106권 | ||||||
백문절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이행검 · 장일 · 김구 · 이승휴 이연종 · 김훤 김개물 · 정해 정오 정포 정공권 · 조간 · 심양 · 추적 이인정 채우 · 김유성 곽린 · 윤해 윤택 ·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황 · 박유 · 홍규 홍융 | ||||||
<rowcolor=#670000,#fedc89> 107권 | 108권 | |||||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 |||||
109권 | ||||||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 ||||||
<rowcolor=#670000,#fedc89> 110권 | 111권 | |||||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 |||||
112권 | ||||||
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 ||||||
113권 | ||||||
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 ||||||
114권 | ||||||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rowcolor=#670000,#fedc89> 115권 | 116권 | 117권 | |||
이색 · 우현보 · 이숭인 |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 ||||
<rowcolor=#670000,#fedc89> 118권 | 119권 | 120권 | ||||
조준 | 정도전 |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 }}} | |||
121권 | ||||||
<rowcolor=#670000,#fedc89> 「양리(良吏)」 | 「충의(忠義)」 | |||||
유석 · 왕해 · 김지석 · 최석 · 정운경 | 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 |||||
<rowcolor=#670000,#fedc89> 「효우(孝友)」 | 「열녀(烈女)」 | |||||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 |||||
122권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rowcolor=#670000,#fedc89> 「방기(方技)」 | 「환자(宦者)」 | 「혹리(酷吏)」 | |||
김위제 · 이녕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 송길유 · 심우경 | }}} | |||
123권 「폐행1(嬖幸一)」 | ||||||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 ||||||
124권 「폐행2(嬖幸二)」 | ||||||
윤수 윤길보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 ||||||
125권 「간신1(姦臣一)」 | ||||||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 ||||||
126권 「간신2(姦臣二)」 | ||||||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rowcolor=#670000,#fedc89> 127권 「반역1(叛逆一)」 | 128권 「반역2(叛逆二)」 | 129권 「반역3(叛逆三)」 | |||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정지상) |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 }}} | |||
<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 131권 「반역5(叛逆五)」 | |||||
한순 다지 · 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 |||||
132권 「반역6(叛逆六)」 | ||||||
신돈 | ||||||
133·134·135·136·137권 | ||||||
신우(우왕) (신창(창왕)) | }}}}}}}}}}}} |
🗡︎ 해동명장전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fff,#101010> 권 1 | 신라 김유신 · 신라 장보고 (정연) · 신라 침나 (소나) · 고구려 부분노 · 고구려 을지문덕 · 고구려 안시성주 · 백제 흑치상지 · 고려 유금필 · 고려 강감찬 · 고려 양규 · 고려 윤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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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5 | 조선 곽재우 · 조선 정문부 · 조선 황진 · 조선 휴정 (유정 / 영규) · 조선 정기룡 · 조선 김시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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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윗첨자의 경우에는 독립적인 열전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해당 인물의 열전 속에서 함께 설명되는 인물들이다. | }}}}}}}}} |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 여요전쟁 공신 양규 楊規 | |
출생 | 미상 |
사망 | 1011년 3월 11일[1] (음력 현종 2년 1월 28일) |
경력 | 형부낭중(刑部郎中)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2] 추증 공부상서(工部尙書)[3] |
공훈 |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4] |
아내 |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 |
아들 | 양대춘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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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군(中軍)에서 용맹을 떨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니 그 위세는 돌과 화살을 압도했고, 원수(=거란군)를 추격하여 생포하니 그 힘으로 국토를 안정시켰다. 한 번 칼을 뽑으면 만 명의 적군들이 다투어 달아나고, 강궁을 당기면 모든 군대가 항복했다."
《고려사》<양규 열전>, 현종이 손수 작성하여 내린 글 中
《고려사》<양규 열전>, 현종이 손수 작성하여 내린 글 中
고려 시대 초기, 11세기 초엽에 벌어진 제2차 여요전쟁 시기에 맹활약한 관리이자 군인이다.[6][7]
거란-요나라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이자 명군이었던 성종 야율융서가 친정했을 때, 소수 정예의 고려군을 이끌고 각지에서 거란군을 격파하며, 포로로 끌려가던 여러 백성을 구출해낸 영웅으로 《고려사》에서 유금필, 척준경, 김경손 등과 함께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큰 전과를 올린 고려의 용장 중 한 명에 해당한다.
제1차 여요전쟁의 주인공 중군사 서희가 강동 6주를 차지하여 거란의 공세를 이겨낼 기틀을 마련했고, 제3차 여요전쟁의 주인공 고려 군주 현종과 상원수 강감찬이 금교역 전투, 귀주 대첩으로 길었던 대거란 전쟁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면 도순검사 양규는 그 사이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인 제2차 여요전쟁의 주인공으로 고려의 멸망을 극적으로 막아낸 구국의 명장이라 할 수 있다.[8]
2. 생애
2.1. 초기
대(對) 거란 전쟁 이전 초년기의 양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9] 평안도 선천군편에 따르면 양규가 안악군 출신이라고 하고 있으며, 이로 볼 때 그의 본관인 안악 양씨가 고구려와 발해의 토착 귀족 가문이었을 것이란 추측이 있다. 발해의 유력 가문인 우성망족 중 하나로 양씨가 있고, 한국사에서 양규 이전 시대에 기록된 양씨라고는 발해의 양씨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그의 부인 홍씨는 은율군군에 봉해진 사실로 보아 안악군 인근의 은율군 출신일 것으로 보이는데[11], 은율군은 오늘날 북한의 행정구역으로도 안악군과 이웃해 있다. 참고로 안악 양씨는 현재 남한에도 300여 명가량이 남아있으나 대부분은 본관이 있는 북한에 있다고 한다.
남한에서 버들 양(楊) 자를 쓰는 양씨의 대종(大宗)인 청주 양씨 측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양(楊)씨들이 모두 청주로부터 갈라져 나왔으며 중화 양씨, 안악 양씨도 마찬가지로 청주 양씨로부터 갈라져 나온 집안으로서 양규 역시 계보를 따지면 청주 양씨에 속한다고 주장하는데, 양규는 청주 양씨 시조 양기보다 300년도 더 전 인물이기 때문에 설득력은 높지 않다.[12]
고려사 <양규 열전>에 고려 7대 목종의 치세 때,
"여러 관직을 거친 끝에 형부낭중이 되었다."
라는 기록만이 파편적으로 남아있는데, 이를 근거로 추측하건대 6대 성종 말년이나 목종 재위기간에 관직에 나섰을 것으로 보인다.그러다가 강조의 정변(1009년)으로 목종이 폐위당하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피해 승려 행세를 하고 있는 현종이 옹립되자 요나라에선 그걸 명분으로 삼아 황제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고려에 쳐들어왔다. 이 무렵 양규는 도순검사(都巡檢使)가 되어 흥화진[13]에서 흥화진사 정성, 흥화진부사 이수화, 판관 장호 등과 함께 3천 명의 병력으로 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양규의 전임 도순검사가 바로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였다. 양규는 강조의 후임으로 흥화진에 부임한 것인데 아무래도 정변 직후의 군 인사는 민감한 사안이었던 만큼 강조의 추천이나 승인없이는 이 요충지에 강조의 후임으로 부임하기는 어려웠을 공산이 크다. 이 때문에 양규는 어떤 형태로든 강조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2.2. 제2차 여요전쟁
2.2.1. 전초전: 흥화진 전투
제2차 여요전쟁의 첫 전투였던 흥화진 전투에서 거란 성종 휘하 40만 명의 대군이 양규가 지키고 있었던 흥화진을 1주일 간 공격했으나, 양규와 3천 명의 고려군은 이를 막아냈다.[14] 성종은 사로잡은 고려 농민들을 보내 투항을 권유하는 아래의 편지를 보냈다."전왕 왕송은 우리 거란을 잘 섬겼는데 강조가 전왕을 시해했기에 그를 벌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강조를 잡아보내면 돌아갈 것이고 안 그러면 모두 죽은 목숨이다. 강조에게 협박당해서 어쩔 수 없이 따른 사람들은 용서해준다."
이에 흥화진의 장수들은 정중한 말로 항복 권유를 거절했고, 이에 성종이 다시 흥화진 장수들에게 비단 옷과 은 그릇 등을 보내면서 항복을 권유했지만 흥화진 장수들은 끝내 듣지 않고 정중한 말로 항복을 거부하는 서신을 또 한번 보냈다.
요성종은 항복 권유가 소용 없음을 깨닫고 20만 명을 무로대(오늘날의 의주 남쪽 부근)에 남긴 뒤, 나머지 20만 명을 이끌고 남하하여 통주 전투에서 강조의 30만 병력을 무너뜨리고 강조까지 포로로 붙잡은 뒤 처형했다. 이후 성종은 항복 권유문을 죽은 강조의 명의로 위조하여 흥화진으로 보냈는데,
"나는 왕의 명을 받고 온 것이지, 조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니오."
"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
요성종이 강조의 편지를 위조해 항복하라고 하자 답변한 말.《고려사》<양규 열전>에서 발췌.
"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
요성종이 강조의 편지를 위조해 항복하라고 하자 답변한 말.《고려사》<양규 열전>에서 발췌.
양규는 "우리는 임금의 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지시를 받을 수 없다."고 일축했다.
이후 남하하던 거란군은 통주성을 공격했으나 끝끝내 함락시키지 못했고, 근처의 곽주성[15]을 함락시켜 6,000여 명의 수비군을 남겼다. 곽주를 일종의 중간기지로 삼기 위함이었는데, 이는 빠른 직공을 위해 최소한의 중간기지를 마련하여 훗날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거란군은 수도 개경으로 남하하는 길에 서경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리고 양규의 진짜 맹활약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2.2.2. 대활약과 최후
전력이 계속 갉아 먹히고, 정체불명의 군대는 계속 뒤에서, 동에서, 서에서 번쩍하고, 병력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고, (이런 상황에서) 거란군은 황제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어마어마한 공포감을 느꼈을 거에요. 어디에서도 이런 군대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정명섭 | 《고려전쟁 생중계》 저자. <평화전쟁 1019> 中
정명섭 | 《고려전쟁 생중계》 저자. <평화전쟁 1019> 中
서경이 거란군의 맹공을 받고 있었던 1010년 12월, 양규는 흥화진에서 7백 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천 명의 군사를 수습했다.[16] 특히 흥화진 남쪽이 무로대에 주둔한 20만 거란 대군에 의해 철저히 틀어막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양규는 소수 정예의 병력으로 은밀히 부대를 운용해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통주까지 남하한 것이었다.[17]
그리고 이 부대를 이끌고 야음을 틈타 거란군이 점령한 중간기지인 곽주로 진격하여 야밤에 6천 명의 거란 수비군을 몰살하고 성을 탈환했다. 소수의 병력으로 곽주성을 치고 들어갔다는 의미인데 어떻게 공격했는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정공법이었을 가능성은 없고, 성내 고려인들의 내응을 통해 무너뜨렸거나 뭔가 책략을 써서 성 안으로 잠입해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18] 이렇게 순식간에 곽주를 점령한 양규는 이후 붙잡혀 있었던 고려 백성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겨 통주성의 방비를 강화했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곽주 전투야말로 여요전쟁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극적인 승리였다. 만약 곽주성이 거란군의 손에 남아있었다면 보급로를 확보한 거란군의 공격에 서경이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며, 만약 서경이 거란군의 손에 떨어졌다면 고려가 당장의 위기는 넘길 수 있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개경이 거란의 공세에 그대로 노출되어 전쟁을 수행할 역량 자체를 상실했을 것이다. 한편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이 때(12월 16일) 큰 별똥별이 곽주에 떨어졌다는 내용이 있다. 우연한 천문 현상일 수도 있지만, 운 좋게도 운석이 곽주의 성곽에 떨어져서 피해를 줬을 가능성도 아주 없진 않다. 이 경우 공성측 병력이 수성측 병력의 1/3에 불과함에도 불가사의하게 공성에 성공한 점, 양규가 탈환한 곽주성을 요새화하지 않고 내부 주민들을 전부 대피시킨 점, 이후의 여요전쟁에 곽주성이 주요 전장으로 등장하지 않는 점 등이 이해될 수 있다. 즉, 곽주성의 성벽이 허물어지며 양규가 손쉽게 탈환했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도 불가능하여 양규가 성을 지키지 않고 떠났으며, 이후 거란군도 곽주성을 다시 사용하지 않은 점 모두가 설명된다. 거란군은 후퇴할 때까지도 제대로 된 후방기지가 없었는데 텅 빈 곽주성을 안 쓸리가 없다. 또한 당시로서는 천재지변에 속하는 운석 낙하는 병사들에게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져서 사기가 꺾이거나 적의 급습에 크게 당황할 여지도 있다.
탁사정이 동북면 정예병을 데리고 튀면서 뒤통수를 쳐서 정예병도 없던 서경도 함락하지 못했던 거란군은 중간 보급기지를 상실하자 다급해졌는지 개경으로 진격한다. 거란군은 서경에서 개경 사이의 길에 고려군이 없었기에 서경도 방치한 채 그대로 진격했고, 이에 고려 현종은 남쪽으로 몽진을 떠나고, 1011년 1월 1일, 요성종이 수도 개경에 입성했다. 그러나 요성종 휘하의 거란군도 꽤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고려의 충신 하공진이 '고려 왕은 이미 남쪽 수천 리 밖으로 피한지 오래다.'라고 과장하자[19] 추격을 포기하고 개경을 불태우며 곧 철수를 개시했다. 이들은 고려인 포로 수만 명을 납치해가며 청천강까지 올라갔는데, 1011년 1월 17일, 귀주에 주둔하고 있었던 중랑장 보량과 귀주 별장 김숙흥이 이들을 습격해 거란군 만 명을 죽였다. 그리고 때맞춰 양규도 거란군이 20만 명을 남겨둔 무로대를 습격하여 2천여 명의 목을 베고, 고려 백성 3천여 명을 구출해냈다.
귀주 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군을 습격하여 만여 급을 베었다. 양규는 무로대의 거란군을 습격하여 2천여 급을 베었으며 포로가 되었던 남녀 3천여 명을 되찾았다. 다시 이수에서 전투를 벌이고, 추격하여 석령까지 가서 2천 5백여 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천여 명을 되찾았다. 3일 후에는 다시 여리참에서 싸워 천여 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천여 명을 되찾았다. 이 날 하루 동안 세 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고, 다시 그들 선봉을 애전에서 맞아 싸워 천여 급을 베었다.
《고려사》 <양규 열전>
《고려사》 <양규 열전>
양규와 김숙흥은 사전에 서로 연락을 취하며 전투를 치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김숙흥은 귀주에서 흥화진 방향으로 거란군을 추격해 들어갔고, 양규는 흥화진에서 귀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며 거란군 후미를 공략했다. 계속 이수(梨樹)에서 석령(石嶺)까지 추격해 2,500여 명의 거란군을 죽이는 동시에 고려인 천여 명을 구출했고, 3일 뒤 여리참(余里站)에서 3차에 걸친 전투를 벌여 천여 명의 거란군을 사살하고, 고려인 포로 천여 명을 탈환하는 전공을 세웠다.
즉, 양규의 목적은 지칠대로 지쳐있었던 거란군에게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혀 출혈을 강요하는 동시에 고려 백성들을 최대한 많이 구출해내는 것이었고, 이는 양규가 이 전쟁에서 세운 최대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렇게 연속해서 전투를 벌이며 거란군을 압박하다가 이윽고 김숙흥 부대와 합류했다. 이 당시 이들은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부대로[20] 퇴각하는 거란의 20만 본대를 계속해서 공격해 연전연승했는데 거란군의 입장에서는 강조의 30만 대군 중 3만이 죽고 27만이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그 군세가 다시 모인 것마냥 두려웠을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려군들이 이곳 저곳에서 찌르는데 부딪힐 때마다 거란군이 수천씩 죽어나가니까 말이다.
이런 양규의 공적은 임경업이 병자호란 때, 요퇴(要魋)[21]를 공격한 것에 비견되어 폄하될 우려가 있는데, 비록 철수하는 병력을 공격한 것은 동일하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 다르다. 임경업은 이미 화의가 다 끝난 상태에서 무단으로 공격[22]한 것이었고, 양규는 엄연히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전 의사가 있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전과를 거둔 것이다. 단순히 철수 중인 적을 쳤다고 폄하된다면 살수대첩이나 귀주 대첩 역시 철수하는 수나라군과 거란군을 공격한 것이며, 노량해전도 철퇴하는 일본군을 공격한 것이니 별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23] 결정적으로 양규의 게릴라전은 언제 요성종이 친정하는 거란 본대와 맞닥뜨려 전멸할지 알 수 없는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그리고 하술하겠지만 양규는 실제로 거란 본대와 맞닥뜨려 전멸하는 것으로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 싸웠는지 몸소 입증했다.
1011년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艾田)[24]에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고 애전에서 이 부대를 요격해 1,000여 명의 수급을 벴다. 그런데 이번에는 요성종이 직접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나고 말았다. 거란 황제의 최정예 친위군이었던만큼 꽤 많은 병력이 양규 부대를 포위했다. 양규와 김숙흥은 요성종의 친위군을 맞아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말 그대로 처절하게 싸웠고, 마침내 힘이 다해 양규와 김숙흥 이하 고려군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기록에 따르면 양규와 김숙흥은 이 마지막 싸움에서 고슴도치와 같이 화살을 맞은 채로 전사했다고 한다. (애전 전투)
양규의 최후 분전은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고 한 것도 있었을 것이고 방금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이 고려를 침략해서 빼앗은 포로의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이들을 안치하기 위해 군현을 새로 설치했을 정도였다.[26]
고려의 무인으로서 극한의 분투를 벌였던 양규 휘하의 부대는 전멸했지만 거란군도 그 결사적인 맹공에 입은 타격이 너무나도 컸던 데다가 큰비까지 내려서 군마와 낙타가 쇠약해지고 무기가 상했을 지경이었다. 겨우 국경인 압록강 일대에 이르렀지만 여기서 흥화진의 정성이 뛰쳐나와 거란군이 반쯤 압록강을 건널 때 그 후위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물에 빠져 익사한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 당시 반쯤 건넜다는 말을 보면 이미 요성종이 건너고 후미 부대가 아직 건너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때 정성을 비롯한 고려군이 기습하자 지칠대로 지친 요 성종의 직속군조차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강을 건너느라 빠져 죽었을 것이다.[27]
양규는 원군도 없이 얼마되지 않은 병력으로 1개월 사이에 모두 7번을 싸워 수많은 적군을 참살했고[28], 그가 구출한 고려인 포로는 무려 3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그가 노획한 군마와 낙타, 병장기도 무수했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양규를 비롯한 서북군의 피나는 분투는 거란군에게 무려 400km에 달하는 고립을 강요했고, 초반에 통주의 주력군이 패배한 여파로 파죽지세의 기세인 거란군에게 개경을 잃은 고려가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었다.[29]
이들의 전공이 아니었다면 거란이 다 이긴 전쟁을 고려의 친조 수락이라는 어정쩡한 조건으로 대충 마무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30] 그토록 탐냈던 노른자위 강동 6주를 어영부영 놔두지도 않았을 것이며, 고려는 무수한 노동력의 손실과 추가적인 배상 등에 시달리면서 파탄을 맞이했을 것이다.[31] 이들의 희생으로 고려는 비록 국토가 초토화되긴 했지만 막대한 노동력을 보전하고 배상을 면하는 등 추가적인 손실을 최소화함으로써 이후 제3차 여요전쟁에서 완벽한 복수에 성공할 수 있었다.
2.3. 사후
(중략) 그 전공으로 양규에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추증하였고, 처인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는 곡식을 지급하였으며, 아들 양대춘(楊帶春)을 교서랑(校書郞)으로 임명하였다. 왕은 손수 다음과 같은 교서를 지어 홍씨에게 내려주었다.
“그대 남편은 장군으로서의 지략을 갖추었고 또 올바른 정치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항상 송죽과 같은 절개를 지니고서 끝까지 나라에 충성을 바쳤으니, 그 충정은 비할 데가 없었으며, 밤낮으로 노고를 잊고 직무에 충실하였다. 북쪽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군(中軍)에서 용맹을 떨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니 그 위세는 돌과 화살을 압도하였고, 원수를 추격하여 생포하니 그 힘으로 국토를 안정시켰다. 한 번 칼을 뽑으면 만 명의 적군들이 다투어 달아나고, 강궁을 당기면 모든 군대가 항복하였다. 이로부터 성과 진이 온전할 수 있었으며, 군사들의 마음은 더욱 씩씩해졌다.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불행히도 전사하였도다. 빼어난 전공을 항상 기억하여 이미 공에 따라 벼슬을 올렸으나 다시 전공에 보답할 생각을 간절히 하여 더욱 널리 알리고자 한다. 그대에게 해마다 벼와 곡식 1백 석을 종신토록 내려줄 것이다.”
『고려사』 권94, 열전 권제7 제신(諸臣), 양규, 현종이 양규와 김숙흥 및 그 가족들에게 전공을 포상하다
“그대 남편은 장군으로서의 지략을 갖추었고 또 올바른 정치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항상 송죽과 같은 절개를 지니고서 끝까지 나라에 충성을 바쳤으니, 그 충정은 비할 데가 없었으며, 밤낮으로 노고를 잊고 직무에 충실하였다. 북쪽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군(中軍)에서 용맹을 떨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니 그 위세는 돌과 화살을 압도하였고, 원수를 추격하여 생포하니 그 힘으로 국토를 안정시켰다. 한 번 칼을 뽑으면 만 명의 적군들이 다투어 달아나고, 강궁을 당기면 모든 군대가 항복하였다. 이로부터 성과 진이 온전할 수 있었으며, 군사들의 마음은 더욱 씩씩해졌다.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불행히도 전사하였도다. 빼어난 전공을 항상 기억하여 이미 공에 따라 벼슬을 올렸으나 다시 전공에 보답할 생각을 간절히 하여 더욱 널리 알리고자 한다. 그대에게 해마다 벼와 곡식 1백 석을 종신토록 내려줄 것이다.”
『고려사』 권94, 열전 권제7 제신(諸臣), 양규, 현종이 양규와 김숙흥 및 그 가족들에게 전공을 포상하다
문종이 즉위하여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라고 하였다.[33]
『고려사』 권94, 열전 권제7 제신(諸臣), 양규, 「문종이 양규와 김숙흥의 초상을 공신각에 걸어두게 하다」
사후 양규는 그 대활약에 걸맞게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았다. 현종은 양규를 공부상서로[34] 추증했고, 양규의 아내 홍씨에게 직접 조서를 써서[35] 죽을 때까지 매년 쌀 100섬을 지급하게 했고, 양규의 아들인 양대춘에게는 교서랑 벼슬을 내렸다.[36] 한편, 양규와 함께 전사한 김숙흥에게도 장군직을 추증했고 그 어머니에게 매년 쌀 50섬을 지급하게 했다.“대중상부(大中祥符)[32] 3년(1010)에 거란이 침략했을 때,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양규(楊規)·부지휘(副指揮) 김숙흥(金叔興) 등은 몸을 바쳐 힘껏 싸워 여러 번 연달아 적을 격파하였으나,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아서 함께 전쟁 중에 전사하였다. 그 전공을 추념하여 마땅히 표창해야 할 것이니, 공신각(功臣閣)에 초상을 걸어서 후대 사람들에게 권장하도록 하라.” |
『고려사』 권94, 열전 권제7 제신(諸臣), 양규, 「문종이 양규와 김숙흥의 초상을 공신각에 걸어두게 하다」
여요전쟁이 완전히 끝난 1019년(고려 현종 10)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했다. 삼한벽상공신은 태조가 개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이니, 양규가 개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인 셈이다. 뒷날 11대 문종(현종의 3남)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두 사람의 초상화를 신흥사 공신각에 봉안하게 했다.
이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시대가 되면 양규에 대한 기록은 많이 줄어들지만,
읍성(邑城)은 견고하지 아니하며, 산성(山城)은 무너지고, 내지(內地)의 익군(翼軍)은 모두 연변(沿邊)에 소속하고, 변향(邊鄕)의 나머지 백성들은 드문드문 초야(草野)에 흩어져 있는데, 만약 현종(顯宗) 때 거란병(契丹兵)이나 고종(高宗) 때 몽고인(蒙古人)과 같이 대거 내침(內侵)하면 부인(婦人)과 어린아이들은 어디에다 두겠습니까?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양규(楊規)와 같은 자가 군사를 잘 쓰고 박서(朴犀)와 같은 자가 성(城)을 잘 지켰는데, 장차 그러한 손을 쓸 수 없을 것입니다.
-『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10월 10일 경진 24번째 기사. 예문관 제학 이선제가 읍성·산성의 수축과 객관의 설치, 어염의 생산을 상서하다
문종 때 예문관 제학 이선제가 성곽 보수에 대한 상소를 올릴 때 군사를 잘 부린 고려의 장군으로 예시를 들고 있다. -『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10월 10일 경진 24번째 기사. 예문관 제학 이선제가 읍성·산성의 수축과 객관의 설치, 어염의 생산을 상서하다
무성(武成)을 입묘(立廟)하는 것입니다. 대개 문무의 도(道)는 천경 지위(天經地緯)와 같으니 편벽되게 폐할 수 없습니다. 당나라 숙종(肅宗)은 태공(太公)을 높여서 무성왕(武成王)을 삼아 입묘(立廟)하여 향사하기를 문선왕(文宣王)과 더불어 비등하게 하여 뒤에는 역대(歷代) 양장(良將) 64인을 배향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은 선성(先聖)의 제사를 위로는 국학(國學)으로부터 아래로는 주·군(州郡)에 이르렀으되, 무성왕(武成王)은 사우(祠宇)가 없고 단지 둑신(纛神) 4위(位)만을 제사지내니 어찌 궐전(闕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훈련관(訓鍊觀)은 곧 송나라의 무학(武學)이니, 빌건대 둑소(纛所)를 훈련관에 병합하고 무성묘(武成廟)를 세워서 제례(祭禮)와 배식(配食)은 대략 문묘(文廟)의 제도에 따르고, 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의 유금필(庾黔弼)·강감찬(姜邯贊)·양규(楊規)·윤관(尹瓘)·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김경손(金慶孫)·박서(朴犀)·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方實)·최영(崔瑩)·정지(鄭地), 본조(本朝)의 하경복(河敬復)·최윤덕(崔閏德)을 배향하게 하소서.
『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3월 28일 정유 3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춘추 대사·오경·문묘 종사·과거·기인 등에 관한 상소
세조 대에서는 양성지가 무묘 건립을 주장할 때 무묘에 배향될 무장 중에 양규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신들의 반대로 무묘는 결국 세워지지 않았다. 재미있게도 양규가 언급된 실록의 임금들인 문종과 세조는 둘 다 조선의 군사 확충에 기여했던 임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지금 훈련관(訓鍊觀)은 곧 송나라의 무학(武學)이니, 빌건대 둑소(纛所)를 훈련관에 병합하고 무성묘(武成廟)를 세워서 제례(祭禮)와 배식(配食)은 대략 문묘(文廟)의 제도에 따르고, 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의 유금필(庾黔弼)·강감찬(姜邯贊)·양규(楊規)·윤관(尹瓘)·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김경손(金慶孫)·박서(朴犀)·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方實)·최영(崔瑩)·정지(鄭地), 본조(本朝)의 하경복(河敬復)·최윤덕(崔閏德)을 배향하게 하소서.
『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3월 28일 정유 3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춘추 대사·오경·문묘 종사·과거·기인 등에 관한 상소
실록 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선천군 편에 의하면 선천에 삼충사(三忠祠)라는 세 명의 충신을 모신 사당이 고려 때 있었는데 뒷날 전란으로 없어졌다가 인조 때 중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사당에는 양규, 김숙흥, 그리고 당시 3차 여요전쟁에서 전사했다는 통주도부서 유백부를 모시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정조 때 나온 삼국시대부터 조선 인조 때까지의 명장들의 일대기를 모은 전기인 <해동명장전>에도 양규의 전기가 들어가 있다.
이렇듯 양규는 조선시대에도 옛 고려의 명장이자 충신으로 조선 사람들에게까지 계속 기억되었던 것이다.
2.4. 후손
양규의 아들 양대춘은 아버지의 공도 있었겠지만 고려사에 1040년 안북대도호부사로 부임 될때 뜻과 지략이 많고 군사에 능하니 변경에 우려스러운 일이 생길 경우 그를 대신하여 보낼 인물이 없어 당장은 외직 보임은 불가하다는 최충의 간언이 있는 걸로 보아 아들 양대춘도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평가받았다. 이후로 크게 출세해서 안북대도호부사를 거쳐 재상까지 지냈다. 왕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평을 받았지만, 양대춘이 활약할 무렵에는 고려도 평화기에 접어들어서 장수로서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37]《고려사》 <예종 세가> 재위 4년(1109) 음력 2월에는 양규의 증손자 양제보(楊齊寶)가 등장한다. 별무반 신기군(神騎軍) 직장(直長) 직위를 지니고 있었고, 예종에게 은합(銀榼)[38]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전공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별무반 신기군 소속이었으면 고려의 여진 정벌에 참전했던 것으로 보인다.[39] 이후 1123년 6월에 인종 대에 가발병마판관(加發兵馬判官)으로 일하던 양제보는 여진 병선 30척이 국경을 침범한다는 잘못된 소식이 들려올 때에 파견되어 경주까지 갔으나 적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또한, 1135~1136년에는 시랑이 되어 대동강을 지키는 후군으로 주둔하였다.
3. 평가
양규는 당대 고려의 지휘관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야전에서의 활약인데, 마치 현대의 특수작전을 연상시키듯 소수의 특공대를 이끌고 인질을 구출하는 등 게릴라전에 능했으며, 이를 통해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동시에 흥화진 전투를 지휘하고 곽주성을 탈환하는 등 수성전과 공성전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이를 고려하면 양규는 다양한 종류의 전투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활약한 시기가 짧아 기록이 많지 않은 게 아쉽지만 그 행적을 고려하면 한국 역사상 손꼽히는 명장 중 한 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결과적으로 국가 멸망의 위기 상황속에서[40] 소수의 얼마 안 되는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 기지를 확보한 후, 많은 적병을 주살한 끝에 적의 우두머리였던 황제 성종을 퇴각시키고, 그럼에도 마지막 한 명의 백성까지 구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놓음으로써 직분을 다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여요전쟁의 주역[41]임에도 서희와 강감찬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서희는 외교 담판 한 번으로 적을 물러나게 만든 인상적인 활약 때문에 유명하고, 강감찬은 3차례에 걸친 여요전쟁을 확실하게 마무리하는 역할이었다. 반면에 양규가 활약한 제2차 여요전쟁이 누가 이겼는지 확신할 수 없을만큼 어정쩡하게 끝났고 나중에 거란이 또 쳐들어오니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 갈 수밖에 없었다. 애시당초 여요전쟁이 서희와 강감찬 2명 빼고는 인지도가 낮은 시대이다.[42]
또한, 서희는 본관과 묘소가 있는 곳이 이천이고, 강감찬은 서울특별시 관악구(금주 낙성대) 출신이다. 이천시는 서희를 대표 인물로 내세우고 관악구는 강감찬의 출신지로 초명과 시호를 쓰는 등 강감찬을 기리며 널리 알리고 있지만, 양규는 출신지가 오늘날 북한 지역인 황해도 안악군 출신일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로써는 추측에 불과하며[43], 주된 활동지역과 전사한 곳도 모두 북한 지역이라서 비교적 관심을 못 받아온 탓인지 역사를 제대로 파헤치지 않으면 이 인물을 잘 모르는 사람도 많으며,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양규 역을 맡은 배우 지승현도 학창시절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였음에도 양규를 잘 몰랐다고 했다.
4. 대중매체
4.1. 다큐멘터리
- 2019년 JT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서는 배우 이우승[44]이 연기했다. 그동안의 소외를 씻어버리듯 주인공으로 등장했으며, 마지막 장면에서 무쌍을 펼친 끝에 자신의 결사대와 거란군도 모두 쓰러지고 홀로 서서 요성종을 쏘아보다가 거란군이 멀리서 쏘아대는 화살비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쓰러지는 모습은 장렬함 그 자체이다.
4.2. 드라마
4.2.1. 강감찬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문신들이 주장하는 강화론에 맞서 주전론을 주장했으며, 거란의 군사 3만 명에게 12번의 야습을 단행해서 적장 13명과 5,300명의 적을 베어 거란군의 후군을 교란시켰다고 한다.4.2.2. 천추태후
2009년 KBS 대하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배우 홍일권이 연기했다. 그래도 용장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보여주는 모습은 인간흉기로 심지어 말과 교감이 가능해서 마음대로 말을 다룰 수 있다. 야율분노를 이길 수 있는 실력이고, 강조를 제압한 적이 있는[45] 야율적로를 1샷 1킬로 베어버렸고, 어지간한 장수 여러 명은 상큼하게 웃으며 베어버리는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에이스급 장수들과 싸울 때 당연히 진 적이 없다.[46][47] 최후에 그는 김숙흥과 함께 화살을 맞고 선 채로 죽는 순간에도 도망가는 거란군을 노려본다.[48][49] 죽기 전에 "이제 갈 때가 되었다."라 말하고 김숙흥이 "장군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라 답하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꼽히고 있다. 그를 죽여야 했던 황제도 적의 용맹에 대해서는 인정했는지 쳐다보는 눈빛이 뭔가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이다. 망작인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건질만한 것이 양규의 묘사이며 고려 거란 전쟁에서의 지휘관의 모습은 많이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맹장이나 용장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4.2.3. 고려 거란 전쟁
자세한 내용은 양규(고려 거란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2023년~2024년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배우 지승현이 연기해 주연급으로 굉장히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 드라마가 잊혀진 위인이었던 '고려의 성웅 양규'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는 호평이 많았다. 실제로 유튜브 등의 댓글들 중에는 한국사 교과서에서 아주 짧게 언급되는 양규의 활약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제대로 알게 됐다는 반응의 댓글이 많다. 당장 지금 이 문서도 드라마 방영 전까지만 해도 내용이 상당히 빈약했는데, 드라마가 반영되면서 관심이 높아져서 문서 내용이 불어난 것이다.
또한 현재 드라마로 인해 소위 '양규 팬클럽' 문화가 형성되며 인기를 끌고 있다.
4.3. 만화
- 고려사를 다루는 학습만화에서도 이들을 빼놓지 않으며 당연히 이들의 최후가 가히 무협지를 뺨치게 한다.[50] 고려사 학습 만화에서 가장 비장미가 넘치며 가슴이 찡한 장면으로 그려냈다.
- 네이버 웹툰 《사신소년》에서 이경호의 48번째 사용 영혼으로 등장한다. 엄청난 전투력 보정을 받았는데 이도류를 사용하거나 작은 단검부터 대검까지 여러 무기들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웨펀마스터 속성까지 붙었다. 동시에 작가가 고려 거란 전쟁을 인상깊게 봤는지[51] 굉장한 편애를 받는 영혼이기도 한데 작중 최초로 영혼 강림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지금껏 단편적으로 풀렸던 위인들과 다르게 가장 뚜렷하게 위인의 역사를 조명받은 영혼이기도 하며 다른 영혼과 달리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이경호와 대화를 하였고 그 끝에는 이경호에게 자신의 모든 힘을 맡기며 떠나는, 그야말로 작가가 작정하고 몰아주기를 했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의 등장인물이 되었다.
[1] 율리우스력 3월 5일[2] 수도나 주요 변경 지역에 있었던 치안 및 군사 장관·감찰관.[3] 상서공부의 장관.[4] 고려 현종 때 처음 제정된 공훈으로, 고려의 개국공신(삼한공신)급에게 내려주는 만큼 고려 역사상 단 3명만이 이 공훈을 받았다. 한 명은 양규와 더불어 활약한 김숙흥이고, 나머지 한 명은 두경승으로 무신정권 당시 고려 명종이 이의민을 견제하기 위해 승승장구하던 무인이던 두경승에게 공훈을 수여했다.[5] 《고려사》 <양규 열전>[6] 양규는 정식 무관직을 역임한 적이 없다. 하지만 전쟁 중 후방에서 지휘뿐만 아니라 전장에 나가 직접 싸우기도 하는 등 용맹한 무장의 모습을 보였다. 고려의 문벌귀족 사회의 특성상 고위급 장수들은 전부 문관이다. 우리가 무관으로 알고 있는 강감찬 역시 무관직을 제수받은 적이 없는 문관 출신 장수다. 애초에 고려시대 무신은 조선시대와 달리 현장에서 활약한 병대장과 같은 자들을 수시채용 형식으로 무신으로 삼은 것에 가까웠다. 요즘으로 치면 하사관급들이 당시 무반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정기적인 시험은 물론, 필요하다면 문관의 품계를 주어 고위직 승진까지 가능했던 조선의 무과와 달리, 고려의 무과는 그러한 것도 없어 정 3품이 사실상 승진의 마지노선이었다. 때문에 무관 출신이 총사령관도 꽤 맡았던 조선과 달리, 고려는 무신정변과 같은 이례적인 케이스를 제외하면 군대의 총사령관급은 주로 문신들이 맡고, 이를 현장에서 오래 구른 무신들이 보좌하는 것에 가까웠다.[7] 사실 과거 제도가 정립된 고려~조선 시기에는 문관이 무관의 위에 있던 건 매우 흔한 일이었다. 대표적으로 별무반 창설로 유명한 윤관이나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강감찬이 문관 출신이었고, 4군 6진 중 6진을 평정했던 김종서나, 임진왜란의 영웅 중 한 명인 권율도 모두 문관 출신이었다. 서양사에선 공화정 당시 로마가 이러한 모습을 취했는데, 대표적으로 한니발에 맞서 파비우스 전략을 내세운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불세출의 전략가로 불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두 인물 모두 정치로 입문한 이후에 군권을 잡아본 인물들이다.[8] 아쉽게도 교육과정에서는 비중이 적어서 기껏해야 양규의 선전(분전)이라는 표현으로 뭉뚱 그려지기도 한다. 실제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거란군의 후방을 괴롭혀서 철수하게 만든 양규가 없었다면 거란이 승리하는 것을 넘어서 고려가 거란의 2차 침공 때 끝장났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거란의 3차 침공에서 다시 한 번 무너졌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근래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는 양규가 거론된 사료가 문제로 출제되고 KBS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에서 주연으로 등장하는 등 인지도를 늘려가고 있다.[9]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무슨 야사집이나 민담집 같은 게 아니라 엄연히 조선 정부에서 공식으로 편찬한 지리서다.[10] 강원도 통천군이 아니라 선천군의 고려시대 이름인 통주를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고려 때의 주(州)를 천(川)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강감찬의 출신지인 금주(衿州)가 금천(衿川)으로 바뀐 것과 비슷한 예.[11] 고려 시대에 군군이나 군부인은 대개 그 사람의 본관에 봉했기 때문이다.[12] 일단 문종 때까지 양규의 후손이 계보를 전하기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13]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군.[14] 대충 환산해도 병사 1명당 적병 133명 정도의 차이를 막아낸 것이다. 다만 고려사의 원문 기준으로 볼때 당시 흥화진을 거란이 대군으로 포위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교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상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 다만 이는 학계에서 인정되는 사실은 아니다.[15] 평안북도 곽산군[16] 통주에서 1,000명의 병사들이 합류해 1,700명의 병력이 되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통주에서 수습된 병사들까지 합쳐 1,000명의 병사가 되었다는 의미인지 확실하지 않다. <평화전쟁 1019> 및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1,700명으로 소개했다.[17] 다만 무로대에 위치한 20만 명의 거란 대군을 뻥카로 보는 추측도 있다. 아무리 당시 거란이 최전성기였다고는 해도 언제든지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송나라가 배후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중원을 통일한 역대 황제들조차 동원하기 힘든 원정군 40만 명을 동원할 역량이 있었는지는 미지수이며, 한반도에 20만 명이라는 대군을 주둔시킬 거점이 있었는지도 불확실하거니와 이후 전쟁에서 무로대에 남았다는 20만 대군은 행방이 묘연해졌다. 물론 무로대에 주둔한 거란의 대군이 20만 명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보급로를 유지하기 위해 적지 않은 병력을 남겨두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전체 40만이 모든 예비 및 보충병력을 합한 숫자고, 우수한 20만의 군대만 데리고 남하하고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병사들만 남겨두었다면 이해가 가능하다. 어중이 떠중이 예비군 20만이 남아있다면 상대적으로 소수인 양규의 정예병들이 이를 격퇴하긴 힘들어도 우회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18] 통주는 전쟁기간 내내 함락되지 않았는데, 양규가 통주에서 1,000명을 수습하기 전에 , 통주성에 퇴각한 강조 밑에 있던 패잔병들이 적잖은 규모였다. 그렇다면 기록보다 통주에서 더 많은 군사들이 동원되었을 수도 있다. 완항령에서 일시적으로 거란을 막는데 공헌하고 통주로 퇴각한 김훈, 통주를 지키던 중랑장 최질 등이 3차 여요전쟁을 앞두고 김훈·최질의 난을 일으켰던 점을 감안하면 새로운 추측이 가능하다. 그들의 공훈이 삭제되면서 통주성 병력의 활약이 잊혔다고 추측해볼 수도 있다.[19] 정확히는 왕이 강남으로 피했다고 말했으며, 이에 강남이 얼마나 떨어졌냐고 묻자 하공진은 수만 리나 떨어져 있어 얼마나 먼지 모른다며 거짓말을 했다.[20] 6천의 거란군이 주둔한 곽주성 탈환 시 1700여명을 동원했다고 치면 이후로도 만명을 넘기기 힘들었을 것이다.[21] 누르하치의 손자이자 홍타이지의 조카다. 이름과 병자호란 참전 경력으로 보면 누르하치의 둘째인 다이샨의 아들인 아이신기오로 요토로 보인다.[22] 다만 이 공격이 마냥 비겁한 짓이라고 보긴 힘들다. 사실 후금-청의 군사는 정묘호란 때부터 강화 후에도 수틀리면 화의 따위는 안중에 없이 노략질과 적대행위를 행해왔기 때문이다. 조선이 정묘호란 이후에도 후금-청을 못 믿고 적대시한 것은 사대주의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이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임경업은 이 공격에서 120여 명의 조선 백성들을 구출해 내는 소득을 얻기도 했다. 단순히 화의가 끝났으니 공격하면 안 된다는 논리면 고거전의 경우 역시 표면적으로나마 고려 국왕이 거란 황제에게 입조까지 약속하며 화친을 청하여 받아들여졌으니 양규도 거란군을 공격하면 안 되었던 것이 된다. 물론 병자호란의 경우 표면적이 아닌 실질적인 굴복으로 끝났으니 경우는 좀 다르나 강화 후에도 약조를 휴지조각으로 여기며 적대행위를 일삼은 것은 거란이나 만주나 다를 바 없다.[23] 철수 중인 군대가 약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집에 갈 일만 남겨둔 상태에선 안 죽으려고 무슨 짓을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심리를 읽고 일부러 길을 터주는 전술도 있을 정도인데 더 설명이 필요한가?[24] 공교롭게도 지명이 '쑥 애(艾)'에 '밭 전(田)'이라서 '쑥밭'이라는 의미가 된다. 애전은 애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참조하자.# 오늘날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실향민 출신 전원곤씨의 말에 의하면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군 태산면 길성동 전촌(전씨 집성촌) 부락 근방에 양규가 전사한 고개가 있었고, 거란군과의 전투 이후 마을이 폐허가 되어 인적이 끊긴 이후로 쑥만 무성한 쑥밭이 되어서 애전현으로 불렀다고 한다. 특히 양규의 출신지를 언급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양규의 전사지를 선천군 편에 수록해 놓은 것을 보아 양규의 전사지인 애전은 선천군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25] 이건 양규와 김숙흥의 엄청난 전공인데 과거 사람의 노동력이 가장 중요했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양규와 김숙흥은 그야말로 고려가 나중에 3차 침공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잡혀갔다가 풀려난 백성들이 나중에 병사로 복무하거나 전시에 필요한 군량미 등을 지원해 줄 수 있었으며, 양규와 김숙흥의 혼신의 힘을 다한 장렬한 혈투 덕분에 고려는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더불어 요나라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요성종에게 굴욕감을 주었다. 명색이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항복을 받아내기는커녕 양규가 후방에서 계속 찌르자 규모를 알 수 없는, 최대 27만일 수도 있는, 고려군에 의한 후방 포위라는 위기에, 그렇다고 자존심 때문에 물러날 수 없었으니 수락이라는 어정쩡한 조건에서 물러났다.[26] 사실, 요나라는 전후 포로들을 정착시키면서 (그들의 원래 고향 이름을 따) 새로 군현을 설치하는 관습이 있었으므로, 단지 이것만 가지고 어마어마한 숫자가 끌려갔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다만, 군현을 새로 설치하는 데 필요한 만큼 끌려간 것만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27] 살수대첩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수나라 군대가 강을 건널 무렵에 고구려군이 후미에서 신나게 두들겨 패서 쾌거를 이루었다는 사례와 비슷하다.[28] 기록에 남은 것만 2만명에 달한다.[29] 저것이 또 지원을 받은 것도 아니라서 《고려사》에서는 고립된 상황에서 이룬 성과라고 되어 있다. 자기가 알아서 거란군을 때려 부순 것이다.[30] 즉, 병자호란처럼 "직접 왕이 나와서 무릎 꿇으면 화친해 줄게"도 아니고, "나중에 오긴 온다 이거지? 강동 6주도 나중에 돌려줄 거라 이거지? 알았어, 일단 돌아갈게. 나중에 진짜 강동 6주 들고 꼭 와서 화친해야 돼?"라며 생색만 내고 끝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고립을 감수한 수도로의 전격전 및 수도 점령 성공이나 국왕이 적에게 사로잡힐 뻔했다는 점 등 여러모로 병자호란을 연상시키는 것이 제2차 여요전쟁이다.[31]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재기하려고 얼마나 피땀들여 노력했는지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만큼 노동력의 중심인 많은 백성들을 잃고, 국토가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당장 인조가 숭덕제에게 항복하고 돌아올 때,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서 갇힌 와중에 왕을 부르며 울부짖었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청나라에 끌려갔다는 기록도 있다.[32] 송 진종의 연호[33] 文宗卽位, 制曰, “大中祥符三年, 契丹入寇, 西北面都巡檢使楊規·副指揮金叔興等, 挺身奮擊, 連戰破敵, 矢集如蝟毛, 俱沒陣下. 追念其功, 合行褒獎, 可圖形功臣閣, 以勸後來.”[34] 상서공부의 최고위 직위. 지금으로 치면 농업부, 자원부, 상공부, 과학부, 건설부, 노동부를 모두 관장하는 장관에 해당한다.[35]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오늘날에도 대통령의 공식 문서라고 대통령이 직접 다 쓰는 것은 아닌 것처럼, 임금의 조서라고 임금이 일일이 작성하진 않는다. 임금이 내용을 대략 정해주면 실제로 글을 쓰는 건 한림원에서 한다. 워낙 큰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현종이 일부러 직접 글을 쓴 것이고, 그래서 《고려사》에서도 "직접 썼다."라고 강조한다. 여담으로 현종은 뒷날 강감찬을 문하평장사로 임명하는 교서도 양규처럼 직접 써서 내려 주었다.[36] 비서성의 정9품 관직.[37] 물론 재상직에 왕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면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와 비견될만한 공은 맞다. 일단은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도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같이 전쟁을 막는 것이기도 하며 국가의 부흥의 제일 요소는 바로 서로 간의 응집력인 것을 보면 비록, 전쟁이라는 자극적인 요소에 묻혔지만 그도 아버지의 이름에 걸맞게 노력해 나라를 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리 요에게 승리했어도 전운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과거였는지라, 아버지인 양규가 고려를 구한 영웅이었다면 아들인 양대춘은 전쟁 이후 혼란스러운 정세를 수습하고 고려의 황금기를 이끌도록 도운 영웅으로도 볼 수 있다.[38] '은으로 만든 그릇'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39] 오늘날로 치면 국가유공자의 후손이 다시 참전용사로 복무하는 것과 비슷한 사례다.[40] 양규의 활약 이전에는 고려의 야전군 태반이 강조가 지휘한 통주 전투에서 일순간에 궤멸당한 상황이었다. 거란군 주력이 그대로 있는 상황에서 양규가 그 배후에서 이런 맹활약을 펼치지 않았다면 서경의 항전과 현종의 파천은 실질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망국의 위기에서 기라성같은 활약을 펼친 것.[41] 흔히 1차에서는 서희, 2차에서는 양규, 3차에서는 강감찬을 주요 인물로 꼽는다.[42] 양규 외에도 제1차 여요전쟁 당시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해서 서희가 소손녕과의 담판을 지을 기회를 만든 유방과 대도수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강감찬이 활약한 제2차, 제3차 여요전쟁에 활약한 이 중 강감찬을 제외한 고려 장군이나 무관들도 잘 알려진 자가 없었다. 지채문이나 강민첨 등 공적이 화려한 인물들도 말이다. 아니, 2차와 3차 여요전쟁을 승리로 이끈 한국사 최고급 명군인 현종도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 인물에 속한다.[43] 물론 양규의 출신지를 안악군이라고 한 동국여지승람의 성격과 이 책이 편찬될 시점인 조선 초기에는 고려실록이 남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신빙성은 크지만, 고려시대가 아닌 후대인 조선시대에 편찬되었다는 한계도 있다.[44] 2016년 KBS 드라마 <임진왜란 1592>에서는 가토 기요마사 역.[45] 물론 진짜 실력으로 베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기습이거나 무방비 상태이기는 했다. 드라마에서 묘사한 인물들을 평가했을 때, 강조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겨뤘으면 야율적로가 질 가능성이 높다.[46] 황제를 죽일 순간까지 이르렀지만 순간 구하러 나온 소배압이 막는 바람에 아쉽게 황제를 죽이지 못했다.[47] 김숙흥 역시 양규에게 정말 단 한끝 차이로 밀린지라 김숙흥 역시 야율적로 따위는 상큼하게 이길 가능성이 높다.[48] 그때까지 두 사람 모두 밤새도록 1대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하다 못해 황제와 소배압이 궁수부대를 부른 것이다.[49] 궁수부대를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 요성종의 입장에서는 더 꾸물거렸다가 양규와 김숙흥 같은 고려군이 또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한가롭게 병사들만 보내서 양규와 김숙흥이 지치기를 바랄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50] 양규와 김숙흥이 돌아오는 요 성종의 군사와 마주치자 김숙흥이 "저승에서 뵙겠습니다, 장군."이라고 같이 결의를 다짐하고 함께 싸우다 전사하기 직전에 김숙흥이 "먼저 쉬겠소, 장군."이라며 먼저 쓰러지자 양규도 같이 싸워준 김숙흥에게 "수... 수고하셨소."와 같은 말을 한 뒤에 자신도 전사한다.[51] 해당 회차는 고려 거란 전쟁이 종영된 이후에 나온 회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