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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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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3.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4. 무오공신(戊午功臣)5. 수종공신(隨從功臣)
5.1. 충혜왕(1342년)5.2.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6. 중흥공신(中興功臣)7. 회군공신(回軍功臣)8. 공신호

1. 개요

고려에서 공신 칭호를 수여받은 인물의 목록이다.

2.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 삼한벽상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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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공신
1등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2등
견권 능식 권신 염상
김락 연주 마난
3등
2천여 명(사서에 전하지 않음)
삼한공신
유금필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양유 · 김견술 · 서필
이상 배향공신
강공훤 · 강궁진 · 권행 · 금용식 · 김극렴 · 김선평 · 김유렴 · 김인윤 · 김일긍 · 나총례 · 류차달 · 박지윤 · 소격달 · 왕경 · 염형명 · 원극유 · 윤신달 · 이금서 · 이능일 · 장정필 · 최정헌 · 허선명
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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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벽상공신고려삼한일통에 공을 세운 공신을 일컫는다. 줄여서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일컫기도 한다. 940년 신흥사를 중수할 때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고 건물 내부 동·서쪽 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이라고도 한다. 한편 삼한벽상공신이 삼한공신 중에서도 벽에 그려진 공신들을 따로 지칭하는 상위 등급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삼한공신들 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을 지칭한다. 삼한공신은 기록에 대체로 삼한공신, 삼한벽상공신, 개국공(開國公) 등의 칭호로 나타난다.

이들은 숫자가 많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내용이 없기 때문에 금석문 등의 자료를 통해 개별적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 여러 문제가 겹쳐서 세간에 전해지는 삼한공신 명단이나 특정 가문과 삼한공신과의 연관성은 조선시대까지만 와도 보증되지 않는다. 삼한공신이 되어 중앙으로 진출한 호족 중 다수가 광종의 공포정치로 인해 경우에 따라 후대에 천역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나올 정도로 가문의 부침을 겪은 데다, 여요전쟁으로 공문서 등 각종 사료가 소실된 것의 영향까지 겹친 탓인지 문종 연간에 이르러서는 증명서를 분실한 경우라도 어떻게든 삼한공신 후손이라는 것만 증명할 수 있으면 음서 혜택을 볼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여요전쟁 이전의 왕실 및 중앙 기록을 복원한 7대 실록조차 극도로 부실한 내용만 남았으리라고 추정되는 마당에 기존의 상훈 체계를 복원하는 과정이 순탄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에서는 실질적으로 삼한공신이라는 용어가 개국공신이라는 용어를 대신했다. 《고려사》는 918년 왕건이 쿠데타를 통해 고려를 건국한 후에 쿠데타를 통한 건국 과정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부득이하게 쿠데타 구성원을 포상했다고 말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삼한일통 프로파간다와 통일 과정에서 새로 포섭된 호족들에게 중점을 두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경종 때 개국공신에게 공음전을 하사하였다는 기사를 제외하면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 기록에서 개국공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나타나지 않는다. 쿠데타 당시의 개국공신 2등 중 그나마 통일 전쟁 과정에서의 행적이 풍부한 김락(金樂)은 충렬왕 때의 기록에는 태조통합공신(太祖統合功臣)으로 나온다. 쿠데타로 고려를 건국한 후 당시 포상을 받은 무리들을 개국공신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를 정할 때의 기록도 정확히는 개국이나 공신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단지 포상의 등급만 나눠놓고 있다. 애초에 3등이 2천여 명이나 되어 명단조차 알 수 없던 것을 보면 실제로 의미있는 공을 세웠다기보다 단순히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 전원이나 기존 행정 및 치안 조직이 포섭 대상이 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대신 왕건에게 배향된 6공신(배현경, 홍유, 복지겸, 신숭겸, 유금필, 최응)과 삼한공신이 한 묶음으로 국가 보훈 차원에서 사실상 개국공신 대우를 받았다.[1] 고종 때 실시된 보훈 행정에서는 구체적으로 6공신 및 삼한공신이 최고 등급, 삼한후벽상공신이 그 다음, 그 외 배향공신이 또 그 다음 등급의 대우로 나타난다.

3.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삼한벽상공신은 고려 시대 공신 등급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현종 이후에 이에 버금가는 큰 공을 세운 인물에게는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이라고 해서 맞먹는 등급으로 해주었다.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 삼한후벽상공신
봉호
시호
성명
본관
생몰
비고
양규(楊規) 안악 ? ~ 1011
김숙흥(金叔興) 미상 ? ~ 1011
정중부(鄭仲夫) 해주 1106 ~ 1179 삭훈 추정
이의방(李義方) 전주 ? ~ 1174 삭훈 추정
이고(李高) 미상 ? ~ 1171 삭훈 추정
두경승(杜景升) 만경 ? ~ 1197
이의민(李義旼) 정선 ? ~ 1196 삭훈 추정
최충헌(崔忠獻) 우봉 1149 ~ 1219 삭훈 추정
최우(崔瑀) 우봉 ? ~ 1249 삭훈 추정

이 외에도, 정중부, 이의방, 이고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운 후 벽상공신으로 봉해졌으나 이들이 실각한 후 모두 취소되었을 것이다. 이의민이나 그 다음 최충헌, 최우도 벽상공신이었으나 역시 삭탈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김방경, 강감찬이 삼한후벽상공신으로 잘못 언급되는 글들을 인터넷 상에서 볼수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4. 무오공신(戊午功臣)

고종 45년(1258) 무오정변으로 최씨 정권을 무너트리는데 공을 세운 공신.

참고로 김준 일가 및 이공주 등은 원래 최씨 가문의 가노(家奴)였기에 본관이 없다.[3]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 무오공신
봉호
시호
성명
본관
생몰
비고
위사공신(衛社功臣)
해양후
(海陽侯)
김인준(金仁俊) 없음 ?~1268 이후 김준(金俊)으로 개명.
박희실(朴希實) 문의 ?~?
이연소(李延紹) 미상 ?~? 이후 이인환(李仁桓)으로 개명.
김승준(金承俊) 없음 ?~1268 이후 김충(金冲)으로 개명.
박송비(朴松庇) 덕원 ?~1278
문정공
(文正公)
류경(柳璥) 문화 1211~1289
김대재(金大材) 없음 ?~1268
김용재(金用材) 없음 ?~1268
김식재(金植材) 없음 ?~? 김석재(金碩材)로도 표기됨.
차송우(車松祐) 연안 ?~1268
장열공
(莊烈公)
임연(林衍) 진주 ?~1270
이공주(李公柱) 없음 ?~?
김홍취(金洪就) 강릉 ?~?
동력보좌공신(同力輔佐功臣)
백영정(白永貞) 수원 ?~?
박천식(朴天植) 미상 ?~?
이제(李梯) 미상 ?~1268 이제(李禔)로도 표기됨.
서정(徐挺) 미상 ?~?
조문주(趙文柱) 미상 ?~1269
박성대(朴成大) 덕원 ?~?
신윤화(辛允和) 미상 ?~?
오수산(吳壽山) 미상 ?~?
서균한(徐均漢) 미상 ?~?
송송례(宋松禮) 여산 1207~1289
김정려(金貞呂) 미상 ?~?
여우창(呂遇昌) 함양 ?~?
유존혁(劉存奕) 미상 ?~1273
강국승(康國升) 미상 ?~?
전취천(田取千) 미상 ?~?

5. 수종공신(隨從功臣)

원 간섭기에 고려의 왕 또는 세자가 원나라에 갔을 때 수행한 신하들을 공신으로 책록했는데, 이를 수종공신이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설명

원종(고려) 때부터 책록을 시작하여 공민왕 때까지 이어졌다.

5.1. 충혜왕(1342년)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한 뒤, 충혜왕이 원나라에 소환당하자 이때 왕을 수행하여 보필한 신하들이 책록되었다.

1등 공신
2등 공신

5.2.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1352(공민왕 원년), 공민왕이 왕자 시절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한 공신.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 연저수종공신
봉호
시호
성명
본관
생몰
비고
일등상공신(一等上功臣)
조일신(趙日新) 평양 ?~1352
금녕부원군
(金寧府院君)
충간공(忠簡公) 김보(金普) 김해 ?~?
평성부원군
(平城府院君)
김일봉(金逸逢) 미상 ?~1365
서령군(瑞寧君) 문희공(文僖公) 류숙(柳淑) 서산 1316~1368
정환(鄭桓) 미상 ?~?
영원부원군
(寧原府院君)
충희공(忠禧公) 신소봉(申小鳳) 환관 ?~?
일등공신(一等功臣)
평해부원군
(平海府院君)
손기(孫琦) 미상 ?~?
이몽가(李蒙哥) 미상 ?~?
하성부원군
(夏城府院君)
양평공(襄平公) 조익청(曺益淸) 창녕 ?~1352
안성군(安城君) 김용(金鏞) 안성 ?~1363

6. 중흥공신(中興功臣)

폐가입진의 논리로 창왕의 폐위와 공양왕의 옹립에 공을 세운 공신으로, 이른바 흥국사 9공신이라 불린다.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 중흥공신
1389년 12월 18일 책록(공양왕)
봉호
성명
본관
생몰
비고
화령군개국충의백(和寧郡開國忠義伯) 이성계(李成桂) 전주 1335~1408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 심덕부(沈德符) 청송 1328~1401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 정몽주(鄭夢周) 연일 1337~1392 영원군(永原君),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 책록→1390년 승격
조선군충의군(朝鮮郡忠義君) 조준(趙浚) 평양 1346~1405
○○○충의군(忠義君) 지용기(池湧奇) 충주 ?~1392 봉호 미상(삭훈)
○○○충의군(忠義君) 설장수(偰長壽) 1341~1399 봉호 미상(삭훈), 조선 초기에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으로 봉군
○○○충의군(忠義君) 박위(朴葳) 밀양 ?~1398 봉호 미상(삭훈 후 복권)
창성군충의군(昌城郡忠義君) 성석린(成石璘) 창녕 1338~1423
봉화군충의군(奉化郡忠義君) 정도전(鄭道傳) 봉화 ?~1398 봉화현충의군(奉化縣忠義君), 1392년 삭훈 후 복권

7. 회군공신(回軍功臣)

1388년 위화도 회군 및 개성 시가전에 가담한 인물들로, 당초 공신으로 선정된 것은 45명이고 추가로 변안열 등 고인 7명과 윤소종·남재에 대한 포상이 검토되었다. 옥사에 연루된 조민수·왕안덕·지용기·최공철·변안열·김백흥 등 6명이 삭훈되면서, 최종적으론 48명에게 공신전이 수여되었다. 회군공신은 조선 때에도 재책록되었기에 회군공신전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이 중에서 3명이 제외되었다. 《고려사》에는 박총·안경·김상·윤소종·남재 등이 추록 명단에 거론되고 있으나, 이들은 조선 때 회군공신으로 추록된 점으로 보아 고려 당시에도 논의는 있었으나 실제 추록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남성리·이지·장자충·최윤수·황순상 등이 실제 추록된 인물로 판단된다.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 회군공신
1390년 4월 9일 책록(공양왕)
봉호
성명
본관
생몰
비고
1등 공신
화령군개국충의백
(和寧郡開國忠義伯)
이성계(李成桂) 전주 1335~1408
창성부원군
(昌城府院君)
조민수(曺敏修) 창녕 ?~1390 삭훈
2등 공신
청성군충의백
(靑城郡忠義伯)
심덕부(沈德符) 청송 1328~1401
강원군
(江原君)
왕안덕(王安德) ?~1392 삭훈
○○○충의군
(忠義君)
지용기(池湧奇) 충주 ?~1392 삭훈
배극렴(裵克廉) 성산 1325~1392
윤호(尹虎) 파평 ?~1393
정지(鄭地) 나주 1347~1391 삭훈 후 복권
유만수(柳蔓殊) 문화 ?~1398
○○○충의군
(忠義君)
박위(朴葳) 밀양 ?~1398 삭훈 후 복권
최윤지(崔允沚) 해주 1331~1403
황보림(皇甫琳) 영천 1333~1394
이무(李茂) 단양 1355~1409
이빈(李彬) ?~1410
용성군
(龍城君)
조인옥(趙仁沃) 한양 1347~1396
남은(南誾) 의령 1354~1398
봉복군
(奉福君)
신조(神照) 승려 ?~?
경보(慶補) 청주 1314~1406
동천군
(東川君)
조희고(趙希古) ?~?
변안열(邊安烈) 원주 1334~1390 추록, 삭훈
용성군
(龍城君)
조인벽(趙仁璧) 한양 ?~1393 추록
척산군
(陟山君)
이원계(李元桂) 전주 1330~1388 추록
3등 공신
경의(慶儀) 청주 ?~1395
이화(李和) 전주 1348~1408
최단(崔鄲) 경주 ?~?
최운해(崔雲海) 통천 1347~1404
이두란(李豆蘭) 청해 1331~1402
육려(陸麗) 옥천 ?~?
이승원(李承源) ?~?
윤사덕(尹思德) ?~1394
구성로(具成老) ?~?
박영충(朴永忠) 죽산 ?~?
정요(鄭曜) 초계 1331~1414
황희석(黃希碩) 평해 ?~1394
유광우(兪光祐) ?~?
김인찬(金仁贊) 양근 ?~1392
장사길(張思吉) 안동 ?~1418
최공철(崔公哲) ?~1390 삭훈
왕빈(王賓) ?~?
박가실(朴可實) ?~1410
김천장(金天莊) ?~?
정자의(鄭子義) ?~?
이백(李伯) ?~?
조온(趙溫) 한양 1347~1417
정송(鄭松) ?~?
이덕림(李德林) 경주 ?~?
백영우(白英祐) ?~?
장철(張哲) 안동 ?~1399
남성리(南成理) ?~1398 추록
이지(李至) ?~1414 추록
장자충(張子忠) ?~? 추록
최윤수(崔允壽) ?~? 추록
황순상(黃順常) ?~? 추록
김백흥(金伯興) ?~1390 추록, 삭훈

8. 공신호



[1] 6공신 중 최응을 제외한 나머지는 삼한공신에도 포함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최응은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태조 6공신은 실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더라도 대개 삼한공신 앞에 별도로 언급된다.[2] 1,000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3] 《고려사》 지리지에서 해양현은 김준의 외향(外鄕)이라고 한 것을 볼 때, 본관이 아니라 모계 혈통의 출신지로 보인다.[유자우묘지명] [최충헌묘지명]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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