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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文孚 표준영정(제77호/2005.4.26.지정)[1] | |
<colbgcolor=#a52a2a><colcolor=#fff> 성명 | 정문부(鄭文孚) |
본관 | 해주 정씨 |
출생 | 1565년 3월 20일 |
조선 한성부 남부 명철방 남소동계[2] | |
사망 | 1624년 12월 28일 (향년 59세) |
조선 한성부 | |
자 | 자허(子虛) |
호 | 농포(農圃) |
시호 | 충의(忠毅) |
부모 | 부친 - 정신(鄭愼, 1538 ~ 1604) 모친 - 강릉 김씨 김흥례(金興禮)의 딸 |
부인 | 신계순(申繼順, 1562 ~ ?)[3] |
자녀 | 장남 - 정대영(鄭大榮, 1586 ~ 1658) 차남 - 정대융(鄭大隆, 160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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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관이자 의병장. 현대 사람들에게는 임진왜란 당시 북관대첩을 주도한 의병장으로 기억되는 인물이자 비운의 영웅.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毅).지금까지 한 번도 사극에서 등장한 적이 없다. 정문부가 이끌었던 북관 대첩이 미디어로 나온 적이 없는 이유는 북한지역에서 있었던 전투여서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영향도 있다. 다만 평양성 전투를 징비록에서 다루었던만큼 정문부와 북관 대첩도 추후 임진왜란 사극이 다시 나오면 등장할 수도 있다.
2. 생애
1565년(명종 20년) 한성부 남부 명철방 남소동계에서 태어났다. 1585년(선조 18년) 식년 생원시 및 식년 진사시 양시에 각각 2등 6위와 2등 15위로 입격하고, 1588년 식년시 문과에 갑과 2위(아원)로 급제하였다. 정문부는 문과에 급제했지만 관직은 정7품 무관직인 한성부 참군으로 시작했는데 이후 1589년 홍문관 수찬을 거쳐 사간원정언 겸 중학교수(中學敎授)를 역임했다. 1590년 사헌부지평으로 지제교를 겸했으며 1591년 함경북도 병마 평사가 되어 북변의 여러 진(鎭)을 순찰하였다. 이 때의 관직은 정6품 무관직인 북평사.1592년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로 피난한 임해군과 순화군의 잘못으로 인해 국경인, 국세필, 정말수 등은 이들을 오히려 사로잡아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기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당시 함경도에 임관하고 있던 정문부는 이 사실에 격분해 의병을 일으켜[4] 경성과 회령에 주둔하고 있던 이들 무리를 처단했지만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와 정면으로 맞붙기에는 병력이 한참 모자랐다. 그러나 열세인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길주성을 포위하고 이후 왜군을 상대로 2차례 승리(석선령 전투, 길주 전투)를 거두면서 왜군이 함경도 지역을 퇴각하게 만드는 북관대첩을 이루게 된다. 이런 전과가 가능했던 것은 정문부의 지휘와 더불어 함경도에 모집한 의병들에 다수의 관군 출신들이 합심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북관대첩의 성과에 비해 정문부는 선무공신에도 책봉되지 못했고[5] 단지 영흥부사로 승진된 것에 그쳤는데 이는 그의 공적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순찰사 윤탁연의 반대가 작용해서 승진으로 국한된 듯. 정문부가 이후에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은 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임해군과 순화군을 구했다는 이유가 작용했는데 전시에 창칼을 거꾸로 돌린 국경인 등을 진압하기 위해 그들을 구한 셈이 된 것.[6]
그렇다고 정문부가 임명된 영흥부사가 보잘것없는 관직은 아니다. 전국에 5개밖에 없었던 대도호부인 영흥의 부사는 엄연히 정3품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조정에서 막연히 윤탁연의 말만 듣고 정문부의 처우를 결정한 것은 아닌 것. 당시 의병대장 정문부의 지휘를 받았던 부장 정현룡을 정문부보다 높은 종2품 함경도 병사로 승진시켰던 점을 들어 정문부의 공이 폄하된 것처럼 보기도 하지만, 정현룡은 1547년생으로 정문부보다 18세나 많은 40대 중반인데다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종성 부사로 종3품관이었고, 20대인 정문부는 정6품에서 단번에 정3품이 된 것이니 상당히 파격적인 승진을 한 것은 맞다. 아래 서술에도 나오지만, 이후 정문부는 사망 전까지 30여년의 기간 동안 계속 그 이상의 직책만 역임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20대에 부이사관급으로 승진하여 죽기 전까지 퇴직과 복직을 반복하면서 계속 고위공무원단에만 있었던 셈.
어찌보면 붕당정치의 피해를 몸소 다 체험한 인물 중에 한 명이다. 1599년 장례원 판결사와 호조참의를 겸했고, 1600년 용양위 부호군이 되었다. 이후에도 예조참판, 장단부사, 안주목사 등이 되는 등 1615년까지 관직 활동을 겸했다. 한편 정문부가 관직 생활을 지내는 동안에 조정에서는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1599년에 홍여순의 사헌부 임명에 대해 정인홍과 류영경이 토론 배틀을 벌였지만 서로 합의를 보지 못해 결국에는 정인홍이 중심이고 이이첨, 기자헌, 유몽인이 이끄는 대북과 류영경이 중심이고 박홍구, 박승종, 류희분이 이끄는 소북으로 나눠졌다. 광해군 시기에는 대북과 소북이 권력을 나뉘지만 정문부는 북인이 아니었던 탓에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귀해 전주부윤이 되었고 1624년 부총관이 임명됐으나 병으로 관직을 받지 않았다. 이 무렵에 서인과 남인은 북인에 대해 처벌을 2가지로 나눴는데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해서 유배를 간 북인 인물들은 살려줬지만 북인에서 권신이었거나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은 재기하면 반드시 서인과 남인 권력에 견제당할 수 있다는 미명 아래 처벌했다.[7]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을 거치는 격동기 동안에도 정문부는 살아남았으나, 안타깝게도 박홍구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아 감옥에서 사망했다. 연루된 이유는 그가 지은 초회왕의 시가 이괄의 난에 관련있다는 죄목이다. 하지만 정문부는 북인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인과 남인은 굳이 왜 그를 역모 사건에 넣었지는 알 수가 없다. 사실 이전부터 정문부는 임해군 문제에 연루되어 처벌받은 적도 있는데 정작 임해군의 처벌은 제대로 받지 않았고 임해군을 구한 셈이 되었으니 엮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함경도 지방민의 송원으로 사후 신원이 복구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에 묘가 있는데 경기도 기념물 제37호이다.
3. 대중매체
- 2003년 신작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떤 한 선비가 방에 있던 정문부에게 “장군 이제 나오셔야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의병을 일으킨 정문부는 함경북도를 쳐서 매국노이자 순왜인 국경인, 국세필을 죽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등장종료.
4. 여담
- 문집으로 농포집이 있는데 정문부가 8살 때 지은 시가 남아 있다.초승달 初月그 누가 곤산의 옥을 쪼아다(誰斲崑山玉 수착곤산옥 )직녀의 머리빗을 만들었던가(磨成織女梳 마성직녀소)견우와 이별한 그날 이후로(牽牛離別後 견우이별후)시름에 겨워 푸른 하늘에 던져버렸네(愁擲碧空虛 수척벽공허)
- 정문부의 할아버지는 정언각이라는 자인데[9] 을사사화의 후속편인 정미사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정언각은 양재역 벽서 사건을 빌미로 대윤 세력을 일망타진했는데 그 과정에서 죽거나 쫓겨난 사람들이 을사사화 때보다 많았다. 이 때문에 정언각에 대한 민심은 나빠서 양재역 벽서 사건 자체도 정언각이 조작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이후 정언각이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죽자 사람들은 '의로운 말(義馬)'이라며 칭찬했을 정도.
- 정문부가 문과에 급제했음에도 무장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며 출세가도를 달리지 못한 것도, 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던 것, 억울하게 옥사에 희생된 것까지 할아버지의 나쁜 평판이 영향을 미쳤다는 상상도 가능하게 한다. 본인으로서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을 평생 굴레로 업고 다녔을 가능성이 높고 누구도 그를 지키려는 연줄이 되지도 못했을 테다. 그러나 그런 평가에 굴하지 않고 의로운 삶을 살았으니 견조호손이라 평가할 수 있다.
- 독립유공자 정규섭은 정문부의 직계 13대 종손이다. 독립유공자 정준교는 정문부의 9대손이며,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필근,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정형근, 대진대학교 미술학부 명예교수인 정현숙은 정문부의 12대손이다.
-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당시 평안도 관찰사 박엽(朴燁)과 함께 광해군이 총애하는 신하라는 이유로 처형된 의주 부윤(義州府尹) 정준(鄭遵)이 바로 정문부의 5촌 종질(從姪)이다. 정준 또한 정문부와 마찬가지로 1610년(광해군 2)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한 문관 출신으로, 광해군 재위 시절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을 적극 실천해 후금 홍타이지의 준동을 견제했다. 정문부는 정준이 처형된 뒤 1년 만에 옥사한다.
-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1인자 정중부와 이름이 비슷해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다.
[1] 윤여환 교수가 그렸다. 가로 103cm, 세로 173cm / 견본수묵채색 / 의정부시 충덕사 봉안.[2] 현 서울특별시 중구 쌍림동·장충동1·2가·광희동1·2가·을지로6가[3] #[4]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문부가 북도병마사였는데 튀었다가 한 유생의 집에 숨어있다가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고 나온다. 하지만 감찰사인 유영립이 튀었다가 붙잡혀 일본군에 넘겨진 것과는 달리 본인은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고 하니 어느 쪽이든 인망은 있던 모양이다.[5] 선무공신이 못된건 의병장 모두가 그랬다.[6] 애초에 전시에 반역을 획책하는 것은 평시에 반역죄를 넘어서는 죄로 수장은 물론 가담자들까지도 죄다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엄청난 중죄다. 그렇다고 임해군과 순화군도 강도, 강간, 살인을 자행해서 범죄 행위 또한 아무리 왕자라도 즉각 참해도 될 죄였다. 이는 현재에도 형법보다 군법이 훨씬 무겁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쟁시 형벌은 그것보다 높아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할 말이 없다.[7] 이 때 이이첨, 류희분이 목숨을 잃었고 박승종은 처벌 직전에 자결했으며 유몽인과 기자헌은 광해군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반정 정권에 출사 하기를 거부 했기 때문에 유몽인은 광해군의 복위를 꾀한다는 무고를 받아 아들 유약과 함께 처형 당했고 기자헌은 이괄의 난때 내통의 우려가 있다며 37명의 북인 정치범들과 함께 처형 당했다 임취정 박홍구는 광해군을 왕으로 복위시키거나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모시고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시려 했다는 게 발각이 되어서 처형되었다.[8] 정문부 문과방목·정문부 조부 정언각 문과방목·정문부 5대조 정침 문과방목 등을 통해 고증할 수 있다. 조선 시대 문과방목에는 필히 과거 급제자의 四祖(부·조부·증조부·외조부)를 기록하게끔 되어 있었다.[9] 정언각의 셋째 아들인 정신이 정문부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