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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20:57:39

정성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1. 개요

鄭成

생몰년도 미상

고려 제8대 현종때의 인물.

2. 생애

강조의 정변(1009년)이 일어난 다음해인 1010년거란(요나라)의 제6대 황제인 성종 야율융서가 고려를 공격해 제2차 여요전쟁이 일어났다. 무려 400,000명에 달하는 거란 제국의 대군이 내원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청천강까지 행군하고 요충지인 흥화진을 공격하자(1010년 흥화진 전투), 흥화진사 호부낭중으로서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와 흥화진부사 장작주부 이수화, 판관 늠희령 장호와 함께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켜 거란군에게 저항했다.

이후 거란군 200,000명이 통주 전투에서 강조 휘하의 고려군 주력 300,000명을 대파하고 수도인 개경이 불타면서 고려 조정에서는 국왕인 현종까지 남부 지방까지 피난하는 최악의 사태까지 일어났다가 양규와 김숙흥 등의 맹렬한 기습 공격으로 거란군의 후방이 위협당해 결국 요성종 휘하의 거란군이 퇴각하게 되었다.

양규와 김숙흥이 거란군을 여러 번 추격하면서 고려인 포로를 구출하고 거란군에게 큰 타격을 주다가 애전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벗어나려 하자 정성이 거란군의 후위를 공격했다. 이때 거란군에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고려사에 전해지지 않는다. 이후로도 거란과의 전쟁이 지속되는 와중에 흥화진도 여러 번 공격받았으나 이때 참전했다는 기록도 없고 특별히 전사했다거나 이후 승진이나 포상을 받았다는 기록도 없다. 2차 침입이 끝난 후 머지 않아 병사했을 수도 있고 고려시대 사람들은 개명을 자주 했던 사례가 많이 발견되기에 어쩌면 동시대의 강감찬이나 후대의 박서처럼 이름을 바꿔서 다른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1]

3. 대중매체


[1] 특히 일부 역사 동호인들이 성도 같고, 활약한 장소도 같은 정신용과 동일인물 아니냐는 견해도 내비치는 경우도 있는데 현재로썬 근거도 없고 이렇게 해석할 만한 사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