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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5:46:24

제3차 여요전쟁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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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
2.1. 친조하거나 강동 6주를 내놓으라는 거란2.2. 동해안 여진족 해적의 침략과 지진2.3. 1차 국지전: 거란의 앞잡이가 된 여진2.4. 2차 국지전: 흥화진에 또 가로막힌 거란2.5. 3차 국지전: 고려의 반란 소식에 쳐들어온 거란2.6. 4차 국지전: 여진과 함께 침략한 거란2.7. 5차 국지전: 통주/압록강에서 큰 피해를 입은 고려2.8. 6차 국지전: 곽주에서 큰 피해를 입은 고려2.9. 가뭄과 황충으로 대대적인 난민 발생2.10. 7차 국지전: 거란의 본격적인 침공 전야
3. 전개
3.1. 12월 초, 삼교천에서의 수공3.2. 12월 말, 서경 일대에서의 유격전3.3. 1월 초, 금교역에서의 야습3.4. 1월 말, 청천강에서의 타격전3.5. 2월 초, 귀주 대첩
4. 결과
4.1. 거란의 전후 처리4.2. 고려의 전후 처리4.3. 양국의 관계 복구4.4. 고려와 대륙 국가들과의 교류 증가4.5. 고려와 동여진 해적과의 긴장 지속
5. 논의
5.1. 소배압이 직도전략을 짠 이유5.2. 고려가 이겼는데 왜 관계가 안 바뀌었나?
6. 대중매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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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第三次 麗遼戰爭/Third Goryeo-Khitan Wars

거란(요나라)이 고려를 침공한 세 차례의 대규모 침공인 여요전쟁 중 세번째 전쟁으로 1018년에 일어났다.

2. 배경

2.1. 친조하거나 강동 6주를 내놓으라는 거란

2.2. 동해안 여진족 해적의 침략과 지진


하필 이 시기에 약탈이 잦았던 동해안에 지진도 잦아서 민심이 흉흉하였다.[8]

2.3. 1차 국지전: 거란의 앞잡이가 된 여진

2.4. 2차 국지전: 흥화진에 또 가로막힌 거란

2.5. 3차 국지전: 고려의 반란 소식에 쳐들어온 거란

2.6. 4차 국지전: 여진과 함께 침략한 거란

2.7. 5차 국지전: 통주/압록강에서 큰 피해를 입은 고려

2.8. 6차 국지전: 곽주에서 큰 피해를 입은 고려

2.9. 가뭄과 황충으로 대대적인 난민 발생

1016년~1018년 동안 거란에서 고려로 내투(來投, 귀화)가 많이 일어났다.
이는 대대적인 동아시아의 가뭄과 벌레 피해에 의한 식량난 때문이 유력하다.

2.10. 7차 국지전: 거란의 본격적인 침공 전야

3. 전개

파일:강동6주_지도v3.png
강동 6주 일대 지도 [34][35]
고려 서북면 행영 군단
상원수(上元帥)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강감찬
원수(副元帥)
대장군(大將軍) 강민첨
판관(判官)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종검 병부낭중(兵部郞中) 유참
기타 지휘관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 시랑(侍郞) 조원
휘하 장병
208,300명

3.1. 12월 초, 삼교천에서의 수공

파일:삼교천전투.png
삼교천 전투 포진 추정도 [36]

3.2. 12월 말, 서경 일대에서의 유격전

3.3. 1월 초, 금교역에서의 야습

파일:금교역전투.png
금교역 전투 포진 추정도 [47][48]

3.4. 1월 말, 청천강에서의 타격전

3.5. 2월 초, 귀주 대첩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귀주 대첩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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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과

4.1. 거란의 전후 처리

거란의 군주가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소배압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네가 적을 가볍게 보고 깊이 들어감으로써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볼 것인가? 짐이 마땅히 너의 낯가죽을 벗겨낸 이후에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권3 - 1019년 2월 #}}}
조서를 내려 소배압(蕭排押)이 고려를 토벌할 때의 죄를 지적하고 풀어주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요사》 권115 열전45 - 1019년 미상 #}}}

4.2. 고려의 전후 처리

파일:강감찬에게 금꽃을 꽃아 주는 현종.jpg
영파역에 누각을 짓고
강감찬에게 금꽃을 꽂아주는 현종
삼군(三軍)이 승리하고 돌아와 노획물을 바치니, 왕이 친히 영파역(迎波驛)에서 맞이하고, 채붕(綵棚)을 엮고 음악을 준비하여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금으로 만든 꽃 8가지를 친히 강감찬(姜邯贊)의 머리에 꽂아준 후 오른손에는 금으로 된 술잔을, 왼손에는 강감찬의 손을 잡고서 위로하고 찬탄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강감찬이 절을 올려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몸 둘 바를 몰라 하였다. 이어서 영파를 흥의(興義)로 바꾸고 역리(驛吏)들에게 공복(冠帶)을 하사하여 주현(州縣)의 아전들과 동등하게 해주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권3 #}}}
명복전(明福殿)에서 장수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아울러 삼군(三軍)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권3 #}}}

4.3. 양국의 관계 복구

4.4. 고려와 대륙 국가들과의 교류 증가

파일:eastasia1019.png
1019년, 여요전쟁 직후의 동북아

전쟁 이후 고려와 거란 외의 주변국들과의 교류가 크게 늘었다. 그 중 1019~1021년[72]의 기록들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5. 고려와 동여진 해적과의 긴장 지속

5. 논의

5.1. 소배압이 직도전략을 짠 이유

거점을 무시하고 곧장 수도로 돌격하는 것은 예로부터 많이 애용된 군사 작전이다. 특히 기동력이 좋은 기마 유목민족이 좋아하고 즐겨쓰는 전법이었다. 몽골이 그랬고, 당장 거란이 이 방법으로 발해멸망시켰다. 병자호란 때도 청군은 후방에 약간의 병력만 배치하고서 본대는 수도인 한양으로 진격했다. 기마민족 외에도 제당전쟁, 여수전쟁, 여당전쟁, 견훤서라벌 기습, 임진왜란과 근대 나폴레옹러시아 원정, 러우전 초반의 키이우 전투, 현대의 나치 독일이 사용했다 전해지는 전격전도 다르지 않다.

장단점이 공존하는 전략이다. 성공하면 빠른 시간에 적국의 항복을 받아 비교적 적은 피해로 승리할 수 있지만, 사전에 발각되는 등 계획이 실패하면 오히려 주력군이 적진 한복판에서 포위되어 섬멸당해 버린다. 이러면 피해는 입을대로 입고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제3차 여요전쟁의 경우 고려 현종이 직도 전략이 취할 수 있는 '장점'을 최소화, '단점'을 최대화하는 식으로 준비했기에 거란의 피해가 커진 것이다.

2024년 1월 9일, 임용한 박사는 소배압이 직도전략이란 무리수를 둔 이유가 국지전들로 교훈을 쌓으며 거란군이 진화했기 때문으로 추정했다.[84] 각 국지전들도 거란군의 규모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휘부가 '도통'급인 이상 보급까지 총 숫자가 15만 가량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

5.2. 고려가 이겼는데 왜 관계가 안 바뀌었나?

양국 간의 군사적 갈등이 고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고 해도, 그 승리란 침략해 오는 대국인 황제국을 수비적으로 제어, 축출한 것이지, 고려가 거란에 비해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달리 말해, 고려와 거란의 위상이 대등해지거나 혹은 뒤바꿔지지 않음을 뜻한다. 만약 고려가 이 승리에 취해 대외적으로 칭제건원을 표방했다면, 이를 거두어들일 때까지 거란 측의 끊임없는 군사적 침공을 피할 길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10여 년의 갈등 기간 동안 고려는 ‘소국’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양국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다. 또한 대승 이후에조차 고려는 대소국이 상호 공존하는 관계로 복귀하는 데 꺼리는 바가 없었다. 즉 종전 이후 거란 측의 유화적인 조치에 화답하여, 고려는 표문을 보내 종전대로 칭번(稱藩)하고 납공(納貢)하겠다며 요청했고, 거란은 이를 수용했다. 더 나아가 종전 후 관계 회복을 위한 양국의 노력은 그동안 미루어 왔던 거란 측의 현종에 대한 책봉과 이에 화답한 고려 측의 거란 연호 사용의 재개로 귀결되었다.
최종석 동덕여대 교수,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 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2015, #
그런데 고려의 대승에 취해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 승리로 인해 고려와 거란의 위상이 대등해지거나 혹은 뒤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후 양국 사이에 평화가 정착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있어 관건적인 대목이다.

(중략...) 양국 간 평화 정착의 첫 단계는 동년 12월 고려 국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할 수 있도록 요청하고 거란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를 허락하는 절차를 통해서였다. 전쟁을 거치면서 파탄난 조공국의 위상을 해당 절차를 통해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거란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고는 하지만, 양국 간에 대국은 거란이고 소국은 고려였으며 관계가 회복된다고 할 때 양국은 군신 관계로 맺어져야 했기에, 고려는 표문 형식의 국서를 통해 조공국 위상의 회복을 거란 측에 요청하고 거란이 이를 수용하는 예적 절차는, 전쟁 후 양국 관계 회복의 첫 단추로써 필요했던 것이다.

(중략...) 다행히 고려의 의도대로 거란 황제는 사신을 보내 고려 국왕의 죄를 용서해주고 고려의 요청을 수용했다. 그런데 거란 황제가 사신을 보내 고려 국왕의 죄를 용서해주고 고려의 청을 허락한 대목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을 수 있다. 고려가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의 성격은 소국으로서 침략해 온 대국을 방어하는 식인 데다가 그 침략국의 조공국으로서의 위상을 다시금 확보하고자 한 것인 데서 이러한 절차가 있었을 것이다.

(중략...) 요컨대, 사실 관계의 측면에서는 거란이 침략을 단행했다가 대패를 당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거란은 고려의 사죄를 받는 것을 전제로 하여 조공국으로서의 위상을 회복시켜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최종석 동덕여대 교수, <현종대 고려-거란 관계와 외교 의례>, 2016 #

제3차 여요전쟁은 방어전쟁으로 격퇴한 것일 뿐, 힘의 우위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관계를 회복할 때, (현대 외교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겠으나) 전근대에는 강국-약국은 군-신 관계(계서적 階序的 질서)로 맺는 것이 동서양 막론 일반적이었기에, 이렇게 관계를 다시 복구한 것이다.[85]

하지만 고려의 위상이 변화하고 상승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거란은 친조나 강동 6주 반환 등의 요구를 영구히 포기했다. 북송에서는 고려를 더는 냉대하지 않고 캐스팅보트로 삼으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북방의 부족들은 거란과 별개로 고려와도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전근대 외교관계 및 그 사례들은 조공, 친조 등의 문서 참고.

6. 대중매체

파일:흥화진 전투 전황도.png
2009년 KBS 역사스페셜이 묘사한 삼교천 전투 전황도

7. 관련 문서


[1] 제2차 여요전쟁이 3월에 마쳤으니 불과 1달 만이다.[2] 얼마되지 않은 1014년 5월에 자연사한 것으로 보아 노회한 인물이며, 외교문서를 잘 작성하고 형부시랑-이부시랑 등을 역임한 바 있는 것을 보아 노련한 인물을 사신으로 보낸 것이다.[3] 출처: 요사 성종 본기 #, 고려사절요 #[4] 현종 즉위 초, 제2차 여요전쟁도 전의 일로, 실권자 강조가 명령한 일이다. 강조는 미뤄온 개혁을 밀어붙였으므로, 이전부터 동여진 해적이 날뛰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 하지만 동여진과의 전투 직후인 1012년 6월 감찰어사 이인택이 탄핵 상소를 올렸고, 현종이 오히려 이인택을 면직시킨 일이 발생했다. 따라서 무언가 문제를 일으키긴 했음을 알 수 있다.[6] 호족들을 감찰하여 상벌을 내리고, 민생의 어려움과 형옥을 살피며, 조세를 거둬들이고, 군사적 업무 등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김은부의 개혁안에 따라 새로 생긴 직책으로, 이 해적 대응과정에서 개혁안이 다듬어져, 1012년 1월 5도 양계로 공식 발표된다.[7] 하지만 여진족은 해안 약탈이 어려워지자, 이듬해부터는 거란 쪽에 붙어 육상 노략의 앞길을 열며 분쟁을 만들어 여요전쟁을 재개시켰다.[8] 하필 전쟁 직후 1011-1012년에 홍수와 가뭄이 있어 식량난도 닥치긴 했으나, 1012년 여름에 동북지방에 풍년이 들어 단숨에 식량난 해결을 넘어 쌀값이 너무 떨어지기도 했다.[9] 출처: 고려사절요 #. 이로서 2년 2개월만에 여요전쟁이 공식 재개된 것이다.[10] 출처: 요사 # - 요사의 날짜는 실제와 1년까지 다를 수 있다.[11] 출처: 요사 # - 요사의 날짜는 실제와 1년까지 다를 수 있다.[12] 다만 기록상 해당 시기에 억류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모두 제2차 여요전쟁 당시 사신으로서 거란에 갔던 이들이었던 것으로 봐선 그 때 거란에 억류된 것으로 보인다.[13] 6월에 출병 명령할 때의 병력 규모는 150,000명으로 추산되나, 압록강을 도하해 실제 고려를 침공한 병력의 수는 알 수 없다.[14] 22일 전투 직전인 20~21일으로 추정.[15] 앞서 1014년 6월, 거란 성종이 "압록강에 부교를 놓고, 보주(保州)·선의주(宣義州)·정원주(定遠州)에 전진기지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요사> 다만 요사의 날짜는 실제와 1년까지 다를 수 있다.[16] 강조의 정변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제2차 여요전쟁의 판박이다. 다만 이번엔 고려군이 통주 앞 평원에 나와 싸우지 않고 각 성에 틀어박히기만 하자, 거란군이 성 밖만 약탈하고 돌아갔을 것으로 보인다.[17] 앞서 1014년 6월 거란 성종이 해안길을 열어놓으라는 명을 따른 것이다. 하지만 1014년 중에 고려 현종이 용주성을 증축해 놔서 주민들은 무사히 대피하고 거란군은 성 밖만 약탈하다 돌아갔을 것이 추측된다.[18] 1012년 5월 해적침략에 이어 2년 10개월만이다. 현종/김훈/최질 등 고려 주력이 서북면에 가서 동북면이 소홀해졌을 것으로 판단했을 수 있다.[19] 여요전쟁이 다 끝나고 1020년에야 돌려주었다. 고려 측의 대거란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고려가 내부도 혼란스럽고 거란/여진 양면으로 충돌까지 있었으니 강동 6주를 이번만큼은 내놓지 않을까 하고 온 것으로 보이나, 외부와의 전쟁은 물론 내부의 혼란도 진압한 고려는 무례한 사신 따위는 억류한 것.[20] 앞서 거란 성종이 야율세량, 소굴렬에게 고려 정벌을 명하였다. 유성의 군대도 오기로 했으나 약속기일을 지키지 못 해 제외되었다. # 요사는 5월에 명령했다고 기록하나 요사의 일자는 크게 정확하지 않다.[21] 보주(의주군)에서 삭주로 돌아갔다가 귀주로 내려오는 제2내륙길을 봉쇄하려 한 것이다.[22] 날짜 미상이나 1월 5일 전투 직전인 12월 말로 추정[23] 앞서 1014년 6월 거란 성종이 보주(의주군) 주변에 압록강 다리를 지킬 전진기지로 건설하라던 선의주(宣義州)·정원주(定遠州)를 일컫는 것으로 추정된다.[24] 출처: 고려사 #, 요사 #[25] 평지 전투는 역시 거란군을 아직은 이길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 규모로만 볼때는 통주 전투 그 이상의 패배라 볼 수 있다.[26] 중서문하성을 이끌게 한 것으로, 현대의 대통령비서실의 수석비서관이 된 것이다.[27] 출처: 고려사 # 고려사절요 #[28] 출처: 고려사 #[29] 직전의 김훈·최질의 난에 문제가 된 문-무관의 예우와 호봉의 정리 및 조율을 맡았을 것이 추측된다.[30] 직전 7월 5일 송나라가 토산물을 바쳤기에 답방 형태다. 양측 다 공식적인 '사신'은 아닌 비공식 형태로 외교를 주고받은 것.[31] 요사는 날짜가 정확치 않으므로 고려사 기준 날짜. # 요사에는 1017년 2월에 명령#, 5월에 추가명령#, 9월에 철군#으로 기록했다.[32] 이는 왕명 출납 및 의복, 수레와 말 등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즉 이듬해 대활약한 검차중갑기병대를 꾸리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33] 1013년 6월 이후 고려가 5년 4개월만에 거란에 보내는 사신이다. 즉 양측의 피할 수 없는 전란의 분위기가 고조된 것이다.[34] 제3차 여요전쟁에서 거란군이 흥화진-삼교천 길로 내려가려 했던 이유는, 고려 현종이 해안길의 용주성/철주성, 내륙길의 안의진을 대대적으로 증축한 데다, 제2내륙길엔 운림진까지 신설했기 때문이다. 삼교천 전투 이후 거란군은 제1/제2내륙길로 나누어 남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5] 이후 거란군이 북상해 돌아올 때는, 안주에 고려군 본대가 있으므로 연주-위주 방면으로 청천강을 건넜다. 그 뒤 내려올 때처럼 제1/제2내륙길로 나누어 퇴각하려 했으나, 귀주성 앞 평원에서 고려 본대와 조우하게 되었다.[36] 삼교천이 저지대가 매우 넓으며, 삼교천까지 내려오는 길목 또한 매복하기에 매우 적합한 것을 알 수 있다.[37] 출처: 고려사 #, 고려사절요 #[38] 거란태종 야율요골이 정의롭고 어진 자들만을 모아 만든 군대인 어장친군(御帳親軍) 소속의 정예병이었다. 즉 황제 직속 부대.[39] 흥화진 자체가 삼교천이 동/서/남쪽을 둘러싼 천혜의 요새다. 흥화진 앞에 진을 치려면 우선 삼교천을 건넌다. 거란군이 여태 고려와 수없이 싸우며 삼교천은 일단 건너서 흥화진 앞에 가서 진을 쳐 왔으므로, 삼교천에서 이런 대규모 공격을 당하리라곤 생각하지 못 했을 것이다.[40] 잘못된 역사정보가 많아서, 삼교천 전투귀주대첩이라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다.[41] 수공이 사람을 수장시킬만큼이라고 잘못 아는 사람들도 많다. 그건 현대의 토목공학으로도 불가능하다. 수공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용도다. 한겨울 저지대 모래밭이 갑자기 발목까지만 차오르는 급류가 몰아쳐도 병사들은 동요하며 진형이 흐트러지기 쉬우며, 도강 속도가 늦어지며 도강완료/도강중/도강직전 병력들이 분단되어 취약해진다.[42] 도하가 군을 취약하게 하므로 도하 측의 정찰/척후는 꼼꼼히 이뤄지며, 양측의 방어도 꼼꼼히 이뤄진다. 따라서 상당히 상류에, 그것도 은밀히 건설되었을 것이며, 도하할때 상류로 신속히 연락하여 터뜨리게 하고, 고려 기병이 정밀하게 기습하고 빠지는 등 상당한 공을 들였을 것이다.[43] 강동 6주에서 개경이 15-20일 거리임을 생각하면 약 5일 뒤인 12월 15일 가량으로 추정.[44] 이 곳은 기습이 어려운 순수한 평야지대이므로, 도하 과정에 유격했을 것이 추측된다.[45] 앞서 제2차 여요전쟁 때도 전쟁 직전에 똑같이 부아산 향림사로 태조의 관을 옮겼다가 1016년에 현릉으로 되돌린 바 있다. 이는 황제가 조상이자 창업주의 묘를 파서 안전하게 후방으로 옮김으로서 항전의 강력한 의지를 표시하며 신하들의 후퇴/항복 여론을 권위로 눌러버리는 행위다. 태조의 관(재궁)은 제3차 여요전쟁이 끝나고 11월에 다시 현릉에 안장한다.[46] 개경은 평시 수도로 기능하기에는 좋지만, 평야지대라 수성에 좋지 않아, 고려시대 전쟁이 일어나면 서경에서 최대한 막거나 강화도천도하는 일이 많았다. 평야성인 개경성을 수성에 쓰려 마음먹은 것은 큰 결심이다. 2차 전쟁 때 개경이 불탔는데 이번에도 본인이 수도를 비우면 고려의 기세가 꺾인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다만 이번에는 송악산에 산성을 구축하고 나성(외성)을 수리하는 등의 채비를 갖췄다.[47] 개경 밖 100리의 거란군 선발대가 금교역 일대에 매복했으나, 개경에서 나온 고려군이 이를 격파했다.[48] 금교역(金郊驛)은 강음현(江陰縣) 오조천(吾助川) 일대로 기록되므로, 현 금천군 금천역 위치로 추정한다. 영파역(迎波驛)은 우봉(牛峯) 일대로 기록되므로, 현 금천군 우봉면 위치로 추정한다. 현대 토목공학의 큰 다리들이 놓이기 전 북서쪽 평주(平州, 평산군)로 가기 위해선 예성강이 얕은 곳으로 건넜을텐데 그럼 우봉면에 이르른다.[49] 출처: 고려사절요 #[50] 이 두 부대는 1월 4일 금교역 전투 시점까지는 개경에 이르지 못했다.[51] 출처: 고려사 #, 고려사절요 #[52] 리(단위)에 따르면 대략 40km다. 하지만 신계군은 개경에서 100리가 넘는다. 따라서 본대는 신은현에, 선발대는 100리 밖(금교~영파 일대)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53] 한반도 북쪽에서 개경으로 가는 길은 금교역(금천군)의 협곡 외길 뿐이다. 따라서 남하하는 군대는 그 앞에 우선 정지하여 이 협곡을 통과해도 되는지 살펴야만 한다.[54] 군사를 돌리겠다는 말에 개경의 수비가 허술해지면 잠입해 성문을 열기 위함이었다.[55] 임용한 박사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67부에서 "이것도 영화에 나오면 기가 막힌 건데, 개경에 방어 병력이 없었어요. 군사를 다 긁어 서북면에 보냈으니까. 게다가 평야성이야.", "여기서 현종이 대단한 결단을 내립니다. 두 번 도망은 없다" 등을 말했다.[56] 상식적으로 개경의 병력이 충분함을 보이려면 더 병력을 보냈어야 했을 것이나, 이는 개경의 수비병력이 적었음을 은유한다. 이 100기가 거란군에게 당하거나 호각이었다면 소배압도 승산이 있다고 여겨 무리한 개경 공성을 택할 수도 있었기에, 현종으로선 엄청난 도박수를 건 것이다. 따라서 이 100명을 고려군, 현종의 최정예 근위대로 보기도 한다.[57] 거란군의 정황을 시시각각 포착 및 예측한 고려군의 정탐-척후 능력과, 이를 대담하고 용기있고 빠르게 전략에 반영한 현종도 고평가를 줄 수 있다.[58] 영락없이 살수대첩의 재판이다. 그만큼 모범적인 청야전술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쳤지만, 청군의 진격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빨라서 청야전술의 실패와 기동 야전군 집결 실패 등의 각종 병크가 겹쳐져 조선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앞서 언급했듯 거란군은 전방의 고려 거점들을 모두 무시하고, 목표인 개성 점령을 위해 무리하다시피 남진했다. 따라서 개성을 재빨리 함락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2차 전쟁 때 양규 등에게 당했듯이 후방 보급로가 무사할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퇴각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괜히 고려의 청야전술이 완벽했다는 평가를 받는 게 아니다.[59] 청천강까지 약 15일 거리이므로, 1월 8일 무렵까지도 고민하다가 퇴각했을 수 있다.[60] 출처: 고려사절요 #[61] 성종이 이런 소리를 한 이유는 거란족이 흉노족으로 부터 갈라져 나온 별부였기 때문이다. 흉노족의 주요 관습 중 하나가 적장이거나 반란 혹은 죽을 죄를 지은 자의 머리 가죽을 벗겨 손수건으로 만든 후, 말의 고삐에 걸거나 안장의 가죽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벗겨서 남은 두개골은 소가죽이나 금박을 덧입혀 술잔 즉, 음기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여러 흉노 관련 기록에 두루 나타난다. 실제로 흉노족의 족장이 월지 왕의 머리로 음기(술잔)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요성종이 이런 극언을 한 연유도, 흉노가 멸망한 이후 몇 백년 가까이 지나며 부족이 갈라지고 갈라지면서도 일부 관습이 잔존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물론 소배압은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고 상경으로 갔으며, 실제 죽임은 없었으며 파직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는데, 이는 소배압이 요성종의 모후인 승천태후 소작의 조카 즉, 성종의 외사촌 형님이자 성종의 위국공주의 남편이었고, 또한 딸인 소귀비가 성종의 후궁이 되는 등 성종과 여러모로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62] 거란 황제 직속 피실군은 남/북/좌/우가 있다.[63] 나무로 단을 만들고 오색 비단 장막을 늘어뜨린 장식 무대. 팔관회의 양식이다. '누각'이라 하기도 한다.[64]관.[65] 만월대와 수창궁에서 자꾸 이상한 일이 일어나서 현종이 거처/집무실로 옮긴 궁궐.[66] 명예 태위, 중서문하성 차관, 천수현 남작을 받은 것이다.[67] 양국이 '거란 동경'을 통해 간접소통한다. 임진왜란 전 대마도주가 국교가 단절되어 있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외교를 대행했던 것과 유사하다.[68] 보다시피 <요사>가 엄청나게 여러 번 기록한다. 구겨진 자존심이 펴진 것이 티가 난다. 하지만 제3차 여요전쟁도 일으킨 거란의 요구사항이었던 "고려 왕의 친조", "강동 6주의 반환"은 이제 두 번 다시 꺼내지 못 하게 되었다.[69] 거란은 이걸 고려 현종의 죽음으로 잘못 기록한다. 본기, 열전 어쩌면 명과 조선 사이의 종계변무처럼 일부러 잘못 기록하고 수정을 실랑이하는 외교 지렛대 삼으려던 행위일 수도 있었겠으나, 고려가 그냥 쿨하게 넘어갔다.[70] 진짜 고려 사신단이 거란에서 외교결례를 한 것일 수도 있고, 거란의 왜곡기록에 항의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국교회복의 협상과정이었으므로 고려가 삐진 거란에게 져 주고자 유배한 것일 수 있다.[71] 즉 양국이 국교를 복구한 것이다. 거란은 송나라와 서하의 사신도 불러, 이런 관계정립을 각 나라들에 알렸다. #[72] 고려가 거란과의 관계를 공식 복원하기 전까지.[73] 거리순 정렬.[74] 구 발해 땅의 여진-말갈족이 일제히 거란을 통하지 않고 고려와 직접 수교했다. 이 자체로 거란은 상당한 위협과 불쾌감을 느꼈을 수 있다.[75] 함경남도, 함경북도, 양강도 위치 추정.[76] 자강도, 퉁화시 일대 추정.[77] 블라디보스토크, 한카호 일대 추정.[78] 하얼빈시 일대 추정.[79] 하바롭스크 일대 추정.[80] 철리국(말갈)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고려에게 축하를 했으며, 나아가 표문을 지으며 고려로 귀부를 요청하기까지 해, 고려로선 매우 흡족한 곳이다. 물론 엄청난 거리로 실제 귀부는 불가능했을 것이다.[81] 고려가 북방으로 사신을 한 번만 보냈지만, 철리국은 가장 멀리 있다. 따라서 가는 길에 자연히 북방의 서여진, 동여진, 불내국, 흑수말갈을 두루 거쳐 가면서 "거란과 고려는 앞으로 어떤 외교관계를 맺을 것이다" 구상을 두루 알렸을 것으로 추정된다.[82] 2010년 창원대 구산우 교수는 이 행사가 정치-종교-외교적 의미를 띈 국가 행사였으며, 전쟁을 이긴 고려가 누린 국제 위상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 쉽게 비유하면 미국을 물리친 대한민국이 UN총회를 뉴욕이 아닌 서울에서 개최한 셈.[83] 실제 진압이 이뤄지진 않았으며, 이윽고 흥료국이 세워져 여진족이 거기로 모여들자, 곽원은 오히려 이를 도우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홧병으로 죽게 되었다.[84] 이는 마치 부산포 해전에서 칠천량 해전까지 일본 수군이 진화한 것과 마찬가지다.[85] 현대로 굳이 비교하자면 베트남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를 완전히 박살내 축출시켰음에도 국력 자체는 프랑스가 여전히 더 위라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침략국이었던 프랑스가 주도하는 국제기구인 프랑코포니에 가입한 부분도 어찌 보면 조공관계와 결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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