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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고려)/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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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대/후대의 평가2. 후계자 교육3. 인사관리(용인술)4. 비판론 관련5. 총평6. 관련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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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대/후대의 평가

신은 천지가 생겨난 이래 성명(聖明)하신 임금으로는 오직 요임금(唐堯)과 순임금(虞舜) 뿐이라고 들었습니다. 요임금께서는 지극한 어짊으로써 천하를 다스리셨고, 순임금께서는 크신 효성으로써 나라를 교화하셨기 때문에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지고 역사책에 빛나고 계십니다.

이후에 중하주(中夏主)[1]는 물론 여러 후왕(侯王) 등 모든 임금 자리에 오른 사람들로서 누가 요임금과 순임금의 자취를 잇고 유풍을 떨쳐서 백성을 교화하고 나라를 다스리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어짊을 닦되 어짊이 지극함에 이르지 못하였고, 효성을 행하되 효성이 온전하지 못하여서 백성을 이끌고 나라를 일으킴에 있어 처음과 끝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고서 대부분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이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다스림이 심오하여서 계승하기 어렵고, 어짊과 효성의 도가 광대하여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도를 본받으며 중간에 그침이 없었던 것은 우리 성군(聖君) 뿐이십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작과 마침이 한결 같은 것은 오직 성인뿐일 것"이라고 하시었으니 우리 임금님의 높은 공과 빼어난 덕은 고금(옛날과 지금)에 다시 없을 것입니다.
《현화사비문》 내용 중

근친간 불륜, 사생아, 고아라는 출생의 멍에를 짊어진 채 태어났다. 태어난 지 1년 후 제1차 여요전쟁이 시작되었는데, 고려 왕실에서 보호받고 교육받지 못했으며 진관사라는 절에서 스님이 되어 지낼 정도로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소년이 되었을 때는 이모였던 천추태후로부터 암살의 위협까지 받았으며, 가까스로 생존하여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강조의 정변으로 갑작스럽게 즉위했기에 제대로 된 준비 과정을 거치지 못했고 어리고 배경없이 즉위한 것이라 군주로서의 입지가 불안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지 불과 1년 후에는 또 다시 제2차 여요전쟁이 발발하여 수도를 버리고 몽진까지 나서는 등 개인의 고난이 이어졌고, 외부적으로는 국가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가지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한국 역사상 가장 극적이라 할법한 자수성가를 이루어냈으며, 위기의 고려 왕조를 지켜낸 군주로서 여요전쟁의 승리를 통해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적 관계를 형성함에 따라 이후 오랜 기간 동안 고려는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2]

현종은 고려 왕조가 끝날 때까지 역대 모든 제왕과 문•무백관, 그리고 백성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었고, 고려 왕조가 끝나고 들어선 조선 왕조에서도 계속 존경받았다. 또한 예술가, 문학가적인 면모도 보이는데, 몇 수 전해지는 시나 친필 어필에 대해서도 당대 신하들의 평가를 보면 뛰어난 명필 혹은 예술가로도 평가받았던 듯하며, 오늘날에도 11~12세기의 명필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요나라의 역사서인 《요사》에 따르면 요나라의 명장들 사이에서도 현종은 꾀가 많고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워 상대하기 버겁다고 높이 평가한 기록이 남아 있고[3], 송나라의 역사서인 《송사》에도 송나라의 황제가 요나라의 대항마로 고려를 앞세우기 위해 현종 개인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을 만큼 주변 강대국의 지도자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안긴 군주였다. 당시 송나라의 황제들은 함평-경력지치, 즉 불야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북송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진종인종이었으며, 심지어 요성종은 거란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군으로 앞의 두 황제가 무력에 있어서는 대단하지 못했던 반면 군사적으로도 탁월한 업적을 거둔 인물이었다. 절대 고려가 어중이 떠중이 상대로 거저먹은 승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해동공자로 유명한 최충은 봉선 홍경사 갈기비의 비문을 지으며, 선대의 좋은 일을 계승하는 데 있어서는 역사를 통틀어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표현했고, 현종의 치세를 주나라성강지치, 한나라문경지치라고 불리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평가했다. 현화사비의 내용을 보면 채충순을 비롯한 당시 고려의 중신들은 현종을 요순의 재림 혹은 부처미륵에 비유했으며, 과장 좀 보태서 하늘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온 이었다고 평가했다.[4]

고려 왕실에서 제16대 예종과 제31대 공민왕 때 각각 편찬된 《태묘 악장》을 살펴보면 공민왕 때 편찬된 책에는 고려 전기의 임금으로 찬양받는 인물이 태조, 혜종, 현종 3명뿐이다. 태조가 고려 왕조의 창업군주인 것을 생각해 보면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현종은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종 때 편찬된 책에는 현종을 '열조'(烈祖), '성조'(聖祖)[5]라 칭했다. '열조'는 공로와 업적이 있는 조상에게 쓰이는 선시로 촉한의 건국자 소열제 유비가 받은 묘호가 바로 이것이었다. '성조'는 이를 넘어서 거의 신격화 수준이라고 할 만한 묘호인데 태조, 고조, 태종, 세조와 동격이거나 그 이상의 묘호였으며, 실제로 동북아시아에서 재위한 역대 군주 중에서 이 묘호를 받은 사람은 고려 이후 후대에 가서야 등장하는 청나라강희제 뿐이었다. 물론 한국사의 '성조'는 공식적인 묘호는 아니라는 점에서 강희제와는 완벽한 비교가 되긴 어렵지만.

조선 시대에서도 태조 왕건과 함께 숭의전 제사에서 제외된 적이 없는 두 명의 군주 중 한 명이었다. 김종서현종문종을 고려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평가했으며, 양성지세조에게 현종을 본받아야 한다고 권했고, 성종 때의 학자 서거정은 현종이 총명하고 덕이 있으며 성실하고 학문이 뛰어났다고 기록했다.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선조에게 현종을 예로 들며 선위 파동을 억제했고, 세종 역시 백성들에게 공과 덕이 있는 군주는 제사를 그대로 지내라고 교지를 내린 4명의 임금[6] 중 한 명으로 현종을 지목한 만큼 후대에도 업적과 공덕을 칭송받은 군주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세종의 이러한 교지는 약 200년 후 고려 현종과 동일한 묘호를 쓴 조선 현종 때까지도 계속 그 뜻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종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는 오늘날 현대에서도 긍정적인 편으로, 시기적으로 고대냐 중세냐 혹은 유형적으로 정복이냐 포용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왕조의 최전성기를 열고 장기간의 평화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만 하다.

2. 후계자 교육

현종의 아들들은 그를 닮아 하나같이 능력이 출중했고 인품이 있었으며 효성스러웠다. 형제들 간의 우애도 좋아 아들 중 셋이 평화적으로 왕이 되었는데, 덕종, 정종, 문종이 이들이다.[7] 문종은 37년을 재위하고, 65세까지 살았지만 덕종과 정종은 각각 3년 재위 19세 사망, 12년 재위 29세에 사망했다. 현종의 셋째 아들이었던 문종 대에 이르러 고려는 국력의 최정점을 찍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16대 예종을 거쳐 몇몇 정치적인 면을 제외하면 17대 인종 시대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리게 된다.
현종(顯宗)·덕종(德宗)·정종(靖宗)·문종(文宗)께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혹은 형이 동생에게 왕위를 잇게 함으로써 근 80년 동안 국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문종은 근면과 검약을 실천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했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가능한 한 관대한 형벌을 부과했고, 학문을 숭상하며 노인을 공경했다. 자격없는 자에게 관직[名器]을 맡기지 않았으며, 자신과 친한 사람이라고[近昵] 실권을 주지 않았다. 아무리 가까운 인친일지라도 공로가 없으면 상을 주지 않았고, 측근의 아끼는 신하라도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내렸다. 환관과 급사의 수가 10여 명에 불과하고 내시(內侍)는 반드시 공로와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 임명했는데 이 또한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쓸모없는 관리가 줄어 일이 간편해졌으며,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해졌다. 나라의 창고에는 해마다 곡식이 계속 쌓이고 모든 백성들이 풍요를 누리니, 당시 사람들이 태평성대라고 찬양했다.
송나라에서는 매번 왕을 칭상하는 조서를 보내 왔으며, 요나라에서는 해마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을 보내곤 했다. 심지어 동쪽의 왜국에서도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으며, 북쪽의 오랑캐들도 자발적으로 투항해 와 우리 국적을 얻고 거주지까지 받았다[受廛].
이제현 현종의 3남 문종에 대한 평가 중

이렇듯 현종의 아들들이 권력 다툼에 휘말리지 않고 서로 우애 좋게 보위를 넘겨받으며 고려를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는 점은 유교 문화권 국가의 모든 역사를 펼쳐봐도 굉장히 드문 경우로써 현종의 후계자 교육 업적에 고평가를 줄 수 있다. 문종 시절 평양공을 옹립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며 몇몇이 처벌받은 사례가 있긴 한데, 이것은 평양공이 죽은 지 2년 후의 일이었다. 어쨌든 현종의 세 아들은 형제 상속을 통해 자리를 이어 받아 차례대로 명군이 되었던 거의 몇 없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3. 인사관리(용인술)

현종 통치기에는 현종의 통치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 풀이 넓었는데, 그 인물들을 나열해 보면 귀주대첩을 이끈 강감찬을 비롯하여 목숨을 바치며 국민을 구출한 양규, 현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하공진, 가혹한 몽진길을 끝까지 호종했던 채충순, 황보유의, 장연우, 호위무사 지채문, 위악자 강조, 김숙흥, 강민첨, 왕가도, 유소, 김종현, 최항, 김은부, 대도수, 정성, 김심언, 최사위, 위수여, 유진, 해동공자 최충, 황주량, 이자연, 서눌, 최현민, 박충숙, 주저, 곽원, 이주헌, 주덕명, 진함조, 김맹, 양진, 이공, 정충절, 이단, 장영, 이수화, 손몽주, 노전, 윤징고, 김작빈, 김승위, 전보인, 유징필, 이인택, 최보성, 박종검, 김계부, 이응보, 이원, 이작인, 이주좌, 황보영, 김충찬, 김영기, 진현석, 임유간, 한조, 최제안, 안소광, 고영기, 박성걸, 왕총지, 조자기 등이 있고, 이들 외에 유방, 김훈, 최질 등도 군인으로서 유능한 자들이었다. 유방은 그 유명한 고려통일전쟁의 영웅이자 창업공신이었던 유금필의 손자인데다가 대도수와 함께 안융진에서 소손녕의 거란군을 막아냄으로써, 제1차 전쟁을 끝낸 서희의 담판을 이끌어 내는 알짜베기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심지어 고려사 최초의 무신정변이라 할 수 있는 김훈·최질의 난을 일으켰던 그 김훈최질조차 반란을 일으켜서 그렇지, 거란의 침략 당시에는 열심히 싸운 훌륭한 무장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현종 사후에도 활약했으며 특히 황보유의 등은 후대 임금들을 보필하며 나라를 이끌었다. 물론 인재가 아무리 많아도 이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인 만큼, 그들을 적재적소에 잘 배치한 현종의 능력도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또한 현종은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국가 재건의 과정에서, 광종(제4대) 왕소나 조선 태종 이방원 같은 철혈 군주들처럼 강압적이고 공포스러운 분위기의 복종이 아닌 청나라 성조 강희제처럼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인성을 바탕으로 문•무 관료들과 긴밀한 교류를 통해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한 이후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냈다. 그 예시로써 현종의 뼈아픈 실책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김훈·최질의 난에서조차 정작 주모자들은 현종을 폐위시키려 하지 않았음은 물론 어떠한 감시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4. 비판론 관련

간혹 미숙한 외교로 하지 않아도 될 전쟁을 하게 만든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으나, 현종 즉위년이 1009년이고 거란이 고려를 쳐들어온 때가 1010년이다. 사실상 갑자기 보위에 올라 정권의 기반이 매우 취약했던 어린 임금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적절한 비판으로 볼 수 없다. 당시 고려의 실권은 강조에게 있었으며 거란의 2차 침공은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변을 핑계 삼아 쳐들어온 것이었으나 실제 목표는 1차 침공 이후 요새화된 강동 6주의 탈환이었다. 즉 당시로서는 항복 또는 항전 외에 달리 선택지가 없었던 셈인데, 일신의 편의보단 국가의 존립을 먼저 생각했던 현종은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항복이 아닌 항전을 선택했고 이러한 선택은 강조가 패배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8] 강조 또한 스스로가 고려의 실권자이긴 했으나, 이러한 명분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요성종과 맞서기 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장렬히 통주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고려의 무장으로서 최후를 맞이한다.

2차 침입 때의 몽진을 가지고 현종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는데, 맥락은 위와 같다. 선조 문서에서도 누누이 언급되지만 전근대 사회에서의 전쟁시 패색이 짙은 국가의 군주에게는 항복이나 몽진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시간적으로 충분한 여유가 있었던 선조와 달리 현종은 즉위 1년 만에 갑자기 커다란 국난을 맞아 군주로서 대비할 수 있는 시간조차 전혀 없었다.[9] 다시 말하면 왕조 국가에서 군주가 잡혀 죽는다는 것은 곧 나라가 망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몽진은 현대의 인식과는 달리 도망이 아닌 항전 의지 표방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며 동시에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로써 소위 전장의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었다. 게다가 이때 몽진을 주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강감찬이었으니, 다른 신하들은 항복을 주장했는데 강감찬만 끝까지 싸워야 한다며 몽진을 주장했고 현종도 이를 따른 것이다.

조선선조가 비판받는 부분은 상황을 수습하고 항전하려는 의지를 버린 채 요동이나 명나라로 도망부터 가려고 한 한심스러운 모습 때문이지, 그 전의 몽진 자체가 비판받는 것은 아니다. 군주가 잡히면 국가적인 혼란만 가중될 뿐 당장 동서고금의 여러 제왕들도 외적이 쳐들어오면 수도를 버리고 산성으로 들어가 주둔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했다.

때문에 현종의 몽진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으며, 그러한 용기있는 선택이 인복을 불러와 요성종이 추격해 들어온 와중에도 양규, 김숙흥 등 영웅들의 활약과 함께 전쟁을 비교적 잘 마무리 짓는다. 그리고 거란의 3차 침공 때는 이를 발판으로 철저히 대비하여 요나라에게 쓰디쓴 패배를 안겨 주었다. 즉, 현종이 몽진을 하지 않았다면 고려의 신민들도 항전의 의지를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몽진을 하지 않아 임금이 붙잡히게 되면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 해도 항전 의지가 꺾여버릴 수밖에 없기에 몽진을 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은 절망적일지 몰라도 그래도 우리의 황제께서 잡히지 않았으니 아직 진 것은 아니다."라고 각오를 다지게 만들 수 있다. 물론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의 이오시프 스탈린처럼 항복도 몽진도 하지 않고 수도에 남아서 결사항전 끝에 승리한 경우도 있긴 했다.[10] 실제 3차 침략 땐 현종도 그런 결사항전을 택했고.

게다가 몽진이라는 것이 현종 본인에게는 편한 선택도 아니었다. 이 당시 상황에 대해 현종(고려)/생애 및 업적 문서와 제2차 여요전쟁 문서에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만 당시 고려 사회는 지방 권세가와 호족들의 입김이 매우 강했다. 이들은 몽진 길에서 현종을 반기기는커녕 오히려 거만을 떨고 심지어 무력으로 협박까지 했으니 현종 입장에서는 절대로 순탄한 도망살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전심을 다해 호위했던 지채문, 목숨을 바치며 거란군의 선발대를 지연시키고 볼모로 갔던 하공진 같은 이들이 없었더라면 거란이 아니라 고려 호족에게 볼모로 붙잡힐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다만, 거란과의 2차 전쟁 이후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던 중에 일어난 원조 무신정변으로 일컬어지는 김훈·최질의 난은 현종의 가장 큰 실책이라 보는 시각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무관 즉, 경군의 영업전을 뺏어서 문관들의 녹봉을 충당하려고 했던 중추원의 일직 황보유의와 중추원사 장연우[11] 등 문관들의 주청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해도 결과적으로 문제있는 정책을 택했고, 무신들의 영업전을 죄다 문신들의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행태를 4년 동안이나 관망한 현종 본인의 실책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12]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여러 논쟁들 또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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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무리 나라가 어렵다지만 목숨을 바쳐 싸운 무관들의 재산만 빼앗은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

우선 영업전의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영업전은 국가에서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 즉 세금을 수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 수조권의 행사는 면조 (세금 면제) 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원래라면 무관도 고려의 백성인 이상 세금을 내야 했으나 직역의 대가로 수조권을 받아 그에 해당하는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큰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나라 안의 살림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자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 토지들의 조사를 실시하여 면조를 해제한 것이 바로 영업전의 환수이다.[13] 개혁의 대상에는 영업전 뿐만 아니라 30결 이상의 양반전과 궁원전이 포함됐으며, 이로 보건대 재정의 부족분을 문무양반과 왕실이 모두 나누어 부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감찬 등으로 대표되는 문관들 역시 이 개혁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가지 간과된 부분이 존재한다. 영업전의 박탈이라고 표현했지만 토지 그 자체를 빼앗기보다는 영업전의 소출을 문신들의 녹봉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백관의 녹봉은 民田에서 거두는데, 경술년(1010, 현종 1)에 거란의 침입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군비가 증액되어 녹봉이 부족해졌으니 경군의 영업전으로 충당하자는 것이 황보유의의 의견이었다. 영업전이 民田과 동일한 국가수조지였다면 녹봉으로 사용해도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영업전은 군인에게 복무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 토지였다. 따라서 영업전을 백관의 녹봉을 위한 재원으로 사용하게 되면 군인의 보수가 박탈당하게 되고 영업전이 군인들의 생계와 직결되는 중요한 경제적 기반임을 생각해보자면 이는 군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는 행동이었다.[14] 무엇보다 무신들을 제외한 문신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녹봉을 무신들의 영업전을 빼앗아서 충당하였기 때문에 무신들과 문신들이 공평하게 고통을 분담한것도 아니었다.[15] 심지어 영업전의 박탈은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측면 또한 컸었는데 무기와 군량, 기타 군수품 등을 모두 영업전을 통해서 개인이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구조상 영업전의 박탈은 국방력의 약화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즉, 황보유의가 단행한 무신들의 영업전 박탈 조치는 오히려 군액 증가가 아닌 군액 축소 조치로 해석[16] 될 수 있다라는 것이다.


(2) '영업전을 강탈해 가면 생계를 장담할 수 없는데 무관들은 전부 굶어 죽으라는 말이냐'라는 주장

영업전의 회수가 전쟁을 직접 수행하고 있는 군인층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사안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무관들의 경제적 파산상태를 뜻한다고 보는 것은 매우 심각한 과장이다. -고려전기의 무반과 군반 (The Military Nobility and Gunban(軍班) of the Early Goryeo Period)- 연구에 따르면, 고려 전기 사회에서 무반 (경군・내군) 은 양반 관료의 일원으로서 국가와 정권의 존립을 보장하는 무력적 기반이었다. 이에 국가에서는 무반들에게 직역의 대가로 전시과와 녹봉을 지급하였는데 무반에게 지급된 전시과는 전체 토지의 83%에 달하였고, 또 무반에게 지급된 녹봉은 전체 녹봉의 80%에 달하였다. 개혁의 조치로 일부 영업전을 회수했다 하여 무관들이 생계유지 불능상태에 놓인다는 것도 난센스일뿐더러, 원래 경군영업전의 성격 자체가 오직 직역을 승계할 때만 상속이 가능했던 토지로서 직역자가 사망하면 상속분을 국가에서 환수 조치하여 직역을 승계한 아들에게 다시 분급해 주는 시스템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무반들의 불만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영업전을 기타 토지와 더불어 개혁 대상에 포함시킨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제도가 기존에는 상당히 문란하게 운용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국가 입장에서는 추후 조처에 대한 마련과 별도로 당장 국난의 극복을 위해 특정 집단이 일종의 특혜처럼 영유했던 면세지를 정리하여 재정에 충당해야 할 당위가 있었다.

하지만 황보유의 등이 단행한 영업전의 박탈조치는 회수가 아닌 엄연한 녹봉 박탈이었다. 영업전(전시과)은 국가에서 관직과 직역에 복무하는 사람에게 그 대가로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였다. 토지를 매개로 한 관직과 직역의 수행이 지속되도록 운영하는 것이 특징으로 관직과 직역이 계속 수행되고 있고 또한 직역을 승계하였다면 영업전을 승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였다.[17] 하지만 황보유의 등은 직역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던 현직 무신들의 영업전(더 정확히는 영업전의 소출)을 아무 대책도 없이 모두 박탈하였다. 심지어 그렇게 박탈한 무신들의 영업전을 백관(문관)들의 녹봉으로 충당하는 짓을 저질렀다. 즉, 무신들의 영업전을 합당한 이유없이 자신(문관)들의 녹봉으로 빼앗아간 것이다.

또한 무신들에게 지급된 전시과와 녹봉이 과연 80% 이상에 달하는 만큼 과대하였는지도 논란이 크다.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고려시대 4만 5천 명에 달하는 중앙군의 군인전만해도 무려 90만 결이나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고려시대 전국의 농경지 총면적은 약 80만 결에 불과했으며[18] 또한 이런 기록들에 따르면 고려시대 군인들은 병종에 따라 20결∼25결을 차등있게 지급받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만약 이 규정대로 군인들이 군인전을 지급받았다면 고려의 군인들은 매우 윤택한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군인전은 어느 경우에서나 적어도 20결 이상이었는데, 이 액수는 중앙의 하급 문무관료들의 전시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다액의 전지가 군인들에게 모두 지급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만일 규정된 전결수를 그대로 지급할 경우, 고려의 경군 조직인 2군 6위의 45領을 기준으로, 그 전체 병력은 4만 5천 명이 되므로, 군인에게만 100만 결 정도의 토지가 지급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고려 초기 전국의 총 전결수와 비등한 면적이 된다. 따라서 이렇게 막대한 양의 토지가 군인들에게 모두 지급되었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이러한 점은 전시과의 군인전 지급 규정에 의문을 품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군인전 지급 규정 자체는 인정하지만 국가가 군인들에게 지급하기로 한 규정상의 액수는 급전액(給田額)의 상한선을 나타낸 것이거나 혹은 규정은 있으되 실시하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군인들은 규정액에 훨씬 미달되는 전토만을 보유하여 빈궁한 생활을 면치 못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19]


(3) '어찌 됐든 무관들의 불만을 다스리지 못해 반란이 일어났으니 현종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주장

현재 다수의 연구자들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근본적인 배경에 대하여 무관들이 문관직을 겸대하려는 욕구의 실현을 위해 이계 관료들과 정치경제적 지분을 놓고 벌인 주도권 다툼으로 이해하고 있다.[20] 그러나 현종을 옹립하고, 호종하고, 혁신을 이끌어 나가던 이계 관료들의 입장에서 무관들의 문관 겸대를 허용하게 될 경우, 이들의 정치적 입지는 절대적으로 위축될뿐더러 그간 착수해오던 개혁 작업 역시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무관 세력의 성장은 곧 진급 상의 직접적인 불이익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현종 대의 여러 업적은 바로 이계 관료가 주축이 되는 근왕적 관료정치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한 이계 관료 대부분은 토착 기반이 비교적 미약하고 중앙 관직을 통해 진출하였으므로 관직 복무에 따른 경제 급부인 녹봉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문무관의 겸대 차단이나 녹봉 확보의 문제는 이계 관료들에게 있어 보다 절실한 현실적 문제였으며, 나아가 관료제 국가에서 백관에게 지급할 녹봉이 부족해졌다는 것은 곧 국가 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위태로운 실태에 우선하여 현종은 그 자신이 강조의 군사 쿠데타로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용맹하게 싸운 군인에 대해 관직을 매개 삼아 충분한 보상을 하였다. 당장 최질만 하더라도 전장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단 몇 년 사이에 중랑장에서 상장군으로 승진하였고 김훈의 경우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못했고, 결국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하지만 다수의 연구자들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근본적인 배경에 대하여 단순히 무관들이 문관직을 겸대하려는 욕구의 실현이라고만 보는 것은 아니다. 많은 학자들이 분명히 영업전 박탈이라는 경제적 요인 또한 정변의 가장 중요한 원인들중 하나였음을 지적[21]하고 있으며 당시 무관들의 문관직 겸대 요구 또한 막상 현종 이전까지 무관들이 문관직을 겸임하던게 관행[22]이었으며 오히려 이계 관료들이 무신들을 정책적으로 강하게 견제(억무정책)하면서 무신들의 처우가 그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더 열악해진것이 정변의 주요 발생 이유라고 지적[23]하고 있다. 즉, 반란이 일어나 직접적인 원인은 전체적으로 봤을때 군인들에 대한 대우 문제였다라는 것이다.[24]

애초에 관료제 국가에서 백관에게 지급할 녹봉이 부족해졌다는 것이 곧 국가 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라면 역으로 언제 거란이 다시 침공해올지 모르는 전시상황에서 군인들에게 줄 녹봉(영업전)을 모두 빼앗아간것 또한 국가 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계(吏系) 관료들인 장연우와 황보유의 그리고 고위직 무신들인 김훈과 최질은 모두 현종이 직접 임명하고 중용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인물들끼리 서로 무력으로 충돌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었다는것은 현종이 그들을 임명하고 중용한 최고국정운영자인 이상 현종에게 분명 책임이 존재한다라는 뜻이다. 그 당시 최고임명권자인 현종은 훗날의 고려의 고종처럼 아무런 실권이 전혀 없는 허수아비나 꼭두각시 군주가 아니었으므로 그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라는 주장은 오히려 여러 측면에서 봤을때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사건에서 현종의 책임이 아예 전무하다라는 주장은 그 당시의 실체적 사실 관계와는 다소 동떨어진 주관적 해석에 기인한 것으로, 어쨌든 반란이 일어난것에 대한 최고인사권자인 현종의 실책은 분명 존재한다고 보여진다. 다만, 사료와 논문을 토대로 자세한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리 건성건성 간단하게 묻고 갈 만한 사안이 결코 아님을 또한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현종이 이 사태를 빠르게 수습했다는 측면에서 그의 사후대처 능력이 분명 뛰어났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원작자인 길승수 작가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김훈·최질의 난을 두고 '김훈과 최질이 떼를 썼으며, 떼를 과하게 쓰다가 결국 자신들의 몸을 망치게 된 것이다'라고 코멘트 하였다.#

한편 이자림[25]의 계책을 따라서 무신들을 모두 서경장락궁에 초청해서 연회를 베푼 사이 반란 주동자인 김훈, 최질 등 술에 취한 장군들 19명을 모조리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항복시키는 방식으로 반란 세력들을 단기간에 제압하고 이후 무신들의 처우도 다시 조절하면서 비교적 단기간에 안정적인 정국을 되찾았다는 점은 사태의 빠른 수습을 했다는 면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이는 이후 군사반란을 당한 군주들과 비교하면 명확히 대비되는 부분인 게 현종처럼 무신정변을 당한 고려 의종은 반격에 실패하여 폐위된 후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조선의 인조는 이괄의 난을 진압하기는 했으나 도성이 함락되고 반란 세력이 새로운 국왕을 옹립하는 등 난이 성공할 뻔했으며, 그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 패배한 이괄의 잔당들이 후금으로 투항해서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조선의 고종 때 일어난 임오군란은 중앙군이 대부분 반란에 가담하는 바람에 외세였던 청나라를 끌어들여 반란을 진압해야 했고 결국 청나라에 간섭을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즉 군사반란을 깔끔하게 수습한 건 현종이 유일하다. 더 자세한 건 김훈·최질의 난 문서를 참조.

동국통감》에서는 농토를 절간에 바친 것이 신라의 문무왕만 못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불교에 비판적인 시각이었던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서거정이 작성한 기록이어서 당시 숭유억불의 시대상을 놓고 생각해 보면 일종의 내로남불로 볼 수 있다. 비록 창업지주였던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에서 사원의 무분별한 확장을 경계하라고 했지만 근본적으로 고려는 불교 국가였다. 또 천추태후로부터 본인의 생명을 구해준 승려가 진관이었기에 현종 입장에선 불교를 더욱 숭상할 만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동국통감》에서의 비판은 시대적 한계라는 기득권적인 맥락을 고려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5. 총평

건국 이후 고려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나라의 전성기를 연 업적으로 역사학계에서는 고려 왕조의 중흥 군주이자 동아시아의 평화와 균형을 가져온 성군으로 평가받는다. 고려의 국력 신장을 이끌어 태평성대의 기반을 닦은 고려 왕실의 중시조로, 그 업적 외에도 목종 대에서 사실상 끊길 뻔한 직계 혈통을 이어받고 후대 제왕들의 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고려의 사직에서도 태조 왕건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삶 자체가 드라마틱하게 파란만장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평가가 가능한데, 왕족의 신분이었지만 사생아 출신으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암살 위협까지 받을 정도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야 했으며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반란과 외침이라는 국내외적 시련을 겪어야 했다.

20대 후반까지 고된 일만 가득했지만, 그는 자신에게 매우 엄격했던 반면 백성들과 신하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웠다. 거란의 침입 이후 굶어 죽는 자들이 속출하자 “짐 혼자만 호의호식할 수 없다.”라며 화려한 밥상을 거절했다. 매년 억울한 누명을 쓴 백성들을 직접 조사하여 풀어주는 일을 실시했으며 일부 특권층의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기 위해 각 도의 기술자들을 귀농시키기도 했다.

왕족의 피를 물려주었지만 결과적으로 고통의 원인이 된 안종헌정왕후[26]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현화사현화사비를 세워 부모를 높이려 했을 만큼 효심이 지극했다. 이러한 현종의 효심은 이후 자식들의 치세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본인을 박해하고 살해하려고 했던 이모 천추태후를 용서하고 말년에는 개경으로 모셔와 1029년에 사망할 때까지 숭덕궁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관용까지 보여주었다.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내적으로 허술했던 고려의 행정망을 탄탄히 정비하는 동시에 호족 세력을 규합하여 고려의 군현제를 완성시켰으며, 외적으로는 발해멸망시킨 당대 최강국이었던 거란과의 전쟁을 실질적인 승리로 이끌어냄으로써 고려에 100여 년에 걸친 위대한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 세계의 판도가 새롭게 짜여졌고 고려-거란-북송 세 나라의 팽팽한 힘의 균형이 이루어졌는데, 2019년 JTBC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를 '평화전쟁 1019'이라 일컫기도 했다.

명군이라고 평가되는 다른 군주들도 실책이나 비판점이 있기도 하지만, 현종은 특별히 비판점을 찾기 힘든 한국사에서도 몇 안 되는 성군으로 평가된다. 후세의 많은 이들이 고구려광개토대왕-장수왕, 백제근초고왕, 신라진흥왕, 조선세종대왕-문종을 각 왕조의 전성기를 열고 명군의 계보로 이어나갔다고 평가하는 것처럼 고려에는 현종과 그 아들인 덕종-정종-문종 등이 고려의 전성기를 열고 명군 계보를 유지했다. 다만 여러 매체를 통해 자주 조명된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등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교육과정에서 많이 조명되는 조선의 경우, 국왕의 순서를 태조 이성계부터 달달 외우는 사람이 흔하지만, 고려 역대 국왕들 중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 왕권을 강화시킨 광종 그리고 흔히 최승로의《시무 28조》로 인해 기억되는 성종, 고려 말기 반원정책과 조선이 세워지는 기틀이 되는 신진사대부 등용 및 노국대장공주와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한 공민왕 정도를 빼면 고려의 왕들은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으로는 일단 고려가 조선보다 훨씬 과거에 존속한 국가이고, 고려 왕조의 수도였던 개성이 현재 북한 치하에 있으므로 고려사에 관한 활발한 연구가 불가능하다는 점도 한 몫하고 있다.

6. 관련 어록

야율요질(耶律瑤質). 자는 발리근(拔里堇)이며 적경궁(積慶宮) 사람이다. 아버지는 야율후고(耶律侯古)이며, 실위부절도사(室韋部節度使)였다. 야율요질은 학문에 독실하고 청렴하며 강개하여 세상을 경륜할 뜻이 있었다. … 황제가 고려를 정벌하여 강조(康肇)의 군대를 동주(銅州)에서 격파할 때 야율요질의 힘이 컸다. 왕순(王詢, 현종)이 항복을 청하자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야율요질은 말하기를, 왕순은 처음에는 한번 싸워보더니, 패하자 갑자기 항복을 받아줄 것[納款]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속이는 것이옵니다. 만약 이를 받아준다면 그들의 간사한 꾀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그들의 기세가 궁하여지고 힘이 꺾일 때를 기다려서 받아들여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왕순은 과연 도망가버리고 청야(淸野) 전술을 써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그 무리들은 험한 지세를 의지하여 진을 치고 공격하여도 항복하지 않았다. 야율요질이 계책으로 항복시켰다. 발탁하여 사번부상온(四蕃部詳穩)으로 임명했다.
요사》권88 <열전> 제18 - 야율요질 -
거란이 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니 이 여진을 이끌고 군사를 합하여 막았다. 거란이 크게 패하여 장족(귀족을 지칭)과 병졸, 수레도 돌아온 것이 드물었다. (거란의) 관속들도 태반이나 전몰했으므로 유계에 영을 내려 벼슬을 구하던 자와 조금이나마 글을 아는 자를 뽑아 그 결원을 보충했다.
《속자치통감장편》, 권 74 대중상부 3년(1010년) 11월
왕은 천성이 총명하고 인자하며, 학문에 힘쓰고 문장에 능하였다.
서거정의 《동국통감》 전문 중

존호(尊號)를 더 올리는 조목입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중니(仲尼, 공자)가 말하기를,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은 달효(達孝)일 것이다.’ 하였으니, 두 성인(聖人)을 '달효'(達孝)라 일컫는 것은 무왕(武王)은 천명(天命)을 받았으며, 주공(周公)은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덕을 성취시켜 명당(明堂)에 종사(宗祀)하여 하늘에 배향(配享)시키고, 또 태왕(太王)과 왕계(王季)를 추존(追尊)하여 왕(王)으로 삼았으므로, 이른바 모두가 '달효'(達孝)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殿下)께서 친히 상제(上帝)를 남교(南郊)에 제사지내고 태조(太祖)를 배향(配享)하였으니, 곧 무왕(武王)·주공(周公)의 '달효'(達孝)와 같습니다. 지금 번잡한 의식을 거행하여 성대히 존호(尊號)를 받았으니,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큰 경사(慶事)를 감내하지 못합니다. 원컨대 하향(夏享)에 친히 태묘(太廟)에 강신제(降神祭)를 지내고, 조성(祖聖)의 존시(尊諡)를 더 올려서 효도(孝道)의 도리를 넓히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거의 전대(前代) 성인(聖人)의 효도에 진실로 합할 것입니다. 신(臣)이 전조(前朝)를 살펴보건대, 현종(顯宗)은 영명(英明)한 군주인데 역대(歷代)의 존시(尊諡)를 더 올리고 중외(中外) 산천(山川)의 신기(神祇)에게도 또한 미호(美號)를 가(加)했으니, 곧 이런 뜻입니다."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 3월 15일 무인 3번째 기사 -판서운관사 양성지가 전적·사직·존호·경연 등의 일에 대해 상언 전문- 中

어제 성교(聖敎)를 받들건대 되풀이함이 간절하신지라, 신들이 받들어 읽고는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대저 비상한 이변과 우연한 재앙은 천지나 일월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잠시 기울었다 해서 그 운행을 그만두지 않고 땅은 잠시 터졌다 해서 그 두터움을 그만두지 않으며, 일월(日月)은 박식(薄蝕)하였다 하여 그 밝음을 그만두지 않고 그 때를 지나면 항시 정상을 회복하거니와, 사람의 일에서 찾아보아도 이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예전 일을 논할 것이 없이 우리 나라의 일로 말하더라도, 고려 현종(顯宗)이 거란(契丹)의 화(禍)를 당하여 나주(羅州)로 파천하였는데, 사책(史冊)에 이르기를 ‘경도(京都)의 공사(公私)의 집이 탕연(蕩然)히 모두 비었다.’ 하였으니, 그 화가 오늘날의 왜적의 화보다 못하지 않았으나 현종은 마침내 난을 다스리고 정도(正道)로 복귀하여 구적(寇賊)을 몰아 내고 구물(舊物)을 회복하여 당대에 태평을 이루어 고려의 성주(盛主)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한 번 변란을 겪은 것으로 심하게 꺾여서 다시는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지나치게 자비(自卑)하고는 물러나 한가하게 지내려는 생각을 하고 나라의 일을 어찌할 수 없다는 지경에 두었다면, 그 어려움이 어떻게 종식되었겠으며 그 일이 어떻게 성취되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교에서 이른바 하루라도 물러나지 않으면 하루의 치욕이 있고 이틀을 물러나지 않으면 이틀의 치욕이 있다는 말씀은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참으로 모를 일입니다.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29일 기유 5번째 기사 -영의정 유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선위의 불가함을 아뢰는 전문- 中[27]

현종이 중흥의 공을 이룬 덕분에 종묘와 사직이 안정을 되찾았으며 문종태평성대의 통치를 펼치니 백성과 만물이 모두 화락하게 되었습니다.
김종서고려사》 전문 中,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9권, 문종 1년 8월 25일 경인 1번 기사 전문 中

고려 때의 태조(太祖)·현종(顯宗)·문종(文宗)·충경왕(忠敬王)은 백성에게 공덕이 있어서 제사 문헌에 실려 있으니 종전대로 제사를 모시라.
세종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9월 17일 계축 2번 기사 전문
태조 왕건고려를 건국하고 삼한을 통일했으며, 원종은 원세조 쿠빌라이 칸에게 역베팅하여 몽골 제국으로부터 고려를 보전했다. 문종은 현종의 3남으로써 고려 전성기의 절정을 찍었으니 세종의 교지는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원종이 조금 뜬금없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앞선 3명의 왕에 비하면 애매하긴 한데,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무신정권이 끝난 시기인 원종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세종의 교지 이전 숭의전에서는 고려 태조 이하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후 태종 이방원이 태조•혜종•성종•현종•문종•원종•충렬왕•공민왕을 모시라는 교지를 내렸고, 후에 세종이 위 4명의 군주로 종결지었다.
예조 낭관을 송도(松都)에 보내 여조(麗朝)의 제능(諸陵)을 살펴보게 하고 100보(步)로 한계를 정해 그 안에서는 경작과 장례를 금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 태조(太祖)의 능은 선조(先祖) 때 정한 제도를 써서 100보를 더 늘려 한계로 잡고, 현종(顯宗)·문종(文宗)·충경왕(忠敬王)의 3개 능은 50보를 더 늘려 잡았는데, 이 세 임금의 공덕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송도 경내에 사는 왕씨(王氏) 자손으로 하여금 금호(禁護)하는 일을 전적으로 관장케 하였는데, 금법을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관에 고발하여 죄를 매길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현종실록》 6권, 현종 3년 10월 7일 정미 2번째 기사 -고려시대의 왕릉 주변에서 경작과 장례를 금하게 하다-

현종이 반정(反正)한 후, 거란과 화친을 맺어 평화를 되찾고 문치가 이루어졌으며, 조세와 부역을 경감해주고 뛰어난 인재를 등용했다.

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려 국민을 안정시키고 화합을 이루니 온 나라가 평안해지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현종의 치세야말로 주나라성왕(成王), 강왕(康王)한나라문제, 경제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최충
성왕과 강왕 두 군주의 치세는 주나라(서주)의 전성기로 '성강지치'(成康之治)라고 불렸으며, 전한의 문제와 경제의 치세는 한나라의 전성기로 '문경지치'라고 불렸다. 한무제의 대흉노 토벌도 이 시절의 국력 축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즉 고려 현종의 치세를 그 최전성기에 비유한 것이다.
최충(崔冲)의 말은 세상에서 이른바 '천명'(天命)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월나라 임금 구천(句踐)은 와신상담(臥薪嘗膽)함으로써 회계(會稽)에서 당한 치욕을 씻었으나, 소백(小白)은 거(莒, 현 중국 산둥성 거현(莒縣)) 지역에서 겪은 고난을 잊었기 때문에 제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참화를 입게 했다.

임금이 천명만 믿고 제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법도를 어기면 비록 천명을 얻었을지라도 반드시 잃게 되는 법이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태평성대에도 늘 위기와 환란을 걱정해 시종여일 근신하는 마음으로 하늘의 복록(天休)을 기다리는 법이다.

현종과 같은 임금은 공자가 말한 것과 같이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군주라 할 것이다.
이제현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업(業)의 쌓임으로 인하여 사람들 중의 왕으로 태어나고, 국토를 거느리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人王)이라고 부른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 하늘의 신들이 수호하며 혹은 먼저 수호를 받고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간다. 비록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사람들의 왕(人王)으로 태어난 것이다’는 말이 있으니, 이로 보건대 우리의 지금의 성상께서는 하늘의 신(天神)들이 수호하여 사람들의 왕으로 태어나셨으니 청방(靑方)[28]를 다스리면서 그윽한 덕을 품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임금께선) 만승(萬乘)[29]의 높은 위치에 계시면서 사총(四聰)을 타고 나셨으니 3교(三敎)의 지극한 가르침을 한 마음에 밝게 비추고 계십니다.

어짊을 베풀어 도덕이 빛나고 효성으로 다스려 교화가 이루어지니 백성들이 기꺼이 모시고 8방(八方, 천하)의 사람들이 즐거이 섬기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면서 밖으로는 유교의 가르침으로 교화하여 안과 밖이 모두 조화를 이루고 옛날과 지금을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다.

이른 바 신령스러운 앎이 선왕과 부처님들의 가르침에 부합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지금의 임금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현화사비문》 전문 중


[1] '중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천자국을 이르는 말이다. 굳이 중하의 황제라 칭하지 않고 '중하주'라고 낮추어 표현했다.[2] 유교 문화권에서 성군으로 평가받는 대부분의 군주들은 어릴 때부터 제왕학 같은 교육을 받거나, 든든한 후견인이 있어서 성인이 되거나 친정할 때까지 교육을 받고 보호받으며 성장한 경우가 많지만, 현종은 군주가 될 때까지 제왕학 같은 교육은 물론 제대로 보호받지도 못하며 성장했기에 더욱 고평가를 받을 만하다.[3] 현종에 대해서 면밀히 살펴보면 군사적인 능력도 상당한데, 직접 지휘한 금교역 전투에서 승리하여 제3차 여요전쟁의 최종적인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수도 개경을 호위하기 위해 왔던 김종현을 강감찬 곁으로 파병하여 귀주 대전의 승리에도 기여했으며, 영일만 일대에 강민첨을 파견해서 최소한의 인력으로 여진족을 방어하며, 대거란 전쟁 준비에 국가적인 역량을 집중시켜 결국에는 승리했을 만큼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보여줬다. 충분히 훌륭한 전략가로 평가받아야 한다.[4] 조선세종 역시 당대에 해동요순 또는 천종지성이란 유사한 평가를 받은 바 있다.[5] 최사위의 묘지명에서도 성조(聖祖)라고 표현했다.[6] 태조, 현종, 문종, 원종[7] 넷째인 평양공 기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다.[8] 현종 입장에서야 거란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머리를 조아려 복종한다면 오히려 일평생 군주로서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만리장성을 뺏긴 한족 왕조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항전은 국가 보전의 차원에서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었다.[9] 여기에 조금 덧붙이자면 현종은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역대급으로 덜컥 보위에 오른 케이스이다.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아버지의 유배지인 사수현에서 살았고, 그 후에는 신혈사에서 중으로 살면서 허구한 날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였던 것이다. 현종처럼 급하게 임금이 된 경우는 한국사 전체를 뒤져봐도 굉장히 드문 케이스이다.[10] 하지만 이건 소련이니까, 그리고 적이 나치 독일이니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1] 참고로 장연우는 거란의 2차 침공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도망을 치고 있었을 때 왕을 호종하던 신하들이 대부분 도망치던 와중에도 몇 명 안되게 현종의 곁을 끝까지 지킨 인물이었다.[12] 다만 관련 기록이 실린 고려사 원문을 어찌 해석하느냐에 따라 4년 전부터 벌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나, 4년 뒤에 재정 문제가 발생하자 난이 일어난 시기에 장연우와 황보유의가 주장한 것으로 볼 가능성도 있다. 특히 관련 기록에도 언급되었듯 이미 무신의 관직 상승 제한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최질 등과 같은 이들이 전쟁 직후라 상황이 안 좋았다고 해도 정책이 주장된 해에 반발을 했으면 모를까 문신들의 저런 움직임을 4년간 놔두었을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는 것도 있다.[13] 전시과의 운영과 그 성격[14] 오치훈 (2018) 『고려 전시과의 운영과 영업전·구분전』[15] 군인들은 일반 관리의 녹봉분을 채우기 위하여 참전의 대가로 지급받고 있는 경제급부를 빼앗아가는 상황에 대해 크게 분개하였다. 그리고 난의 주동자들은 이 문제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군인세력을 규합하고 반란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김두향: 고려 현종대 정치와 이계(吏系) 관료, 한국역사연구회)』)[16] 11세기 고려의 대외관계와 정국운영론의 추이, 박종기, 역사와현실 제30권, 148 - 172 (25page)[17] 고려 전시과의 성격 ―분급토지와 분급대상을 중심으로― , 오치훈, 역사와 담론, 5 - 33 (29page)[18] 신편 한국사 고려 시대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Ⅲ. 군사조직 1. 경군 3) 중앙군의 인적 구성에 관한 제설 (2) 군반씨족제설[19] 신편 한국사 고려 시대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Ⅰ. 전시과 체제 4. 사전의 여러 유형 6) 군인전[20] 오영선, 김당택, 김두향, 김보광 등[21] 김두향, 오치훈, 박종기 등[22] 김두향, 김당택 등[23] 김당택, 김두향 등[24] 고려 성종 · 현종대 太祖配享功臣의 선정 과정과 의미, 김보광, 사학연구, 43 - 81 (39page)[25] 이때 계책을 세운 공으로 왕씨를 사성받아 왕가도로 개명했다. 참고로 이자림덕종의 2비 경목현비와 문종 때 일어난 쿠데타 모의 사건 때 처벌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인 왕무숭의 아버지이기도 했다.[26] 헌정왕후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산욕으로 인해 생을 마감했고, 안종 또한 5세 즈음에 사망하고 말았다.[27] 상소문을 보면 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바로 임진왜란이다. 당시 한양을 두고 파천한 선조의 위신이 땅끝으로 추락하고 오히려 분조의 광해군에게 백성들의 민심이 모이자 선조는 왜란 당시 총 7번의 선위쇼를 일으켰는데 윤 11월 벌어진이 선위파동은 마지막 선위 파동인 7차 선위파동이다.[28] '청'(靑)은 동쪽을 가리키므로 '청방'은 동쪽 나라 즉 우리나라를 가리킨다.[29] 승(乘)은 수레를 의미한다. 고대 중국은 천자가 10,000개의 수레를 끌 수 있고 제후는 1,000개의 수레를 끌 수 있었다. 그래서 이후 만승, 즉 10,000개의 수레는 천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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