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현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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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여담 |
1. 개요
현종의 여담을 다룬 문서.2. 슈퍼 을
요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현종 때부터 고려의 국제적인 위상은 하루가 멀게 상승하여 비록 북송에 표면적인 사대를 행하고는 있었지만 오히려 당시 송나라 황제가 고려의 눈치를 살피며 현종 개인에게 많은 선물을 주기도 하는 등 소위 슈퍼 을의 입지를 지니게 된다. 북송이나 요나라나 서로를 견제하려면 고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고려는 승자의 여유를 바탕으로 유연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그러한 상황을 잘 이용했던 것.대중상부(大中祥符) 8년(1015) 그 해에 (고려가) 다시 어사민관시랑(御事民官侍郎) 곽원(郭元)을 보내 와서 조공하였다. 9년(1016)에 (곽원이) 인사를 하고 (고려로) 돌아가니, (고려 왕) 왕순(王詢, 현종)에게 조서(詔書)가 들어있는 7개의 함(函)과 습의(襲衣), 금대(金帶), 그릇과 비단, 안장을 갖춘 말 그리고 유교경전과 역사책, 역법에 대한 책, 《성혜방》(聖惠方) 등을 내려주었다. 곽원이 다시 《국조등과기》(國朝登科記)와 (황제가) 내려준 시[御詩]를 베껴서 돌아가겠다고 요청하니 허락하였다.
《송사》 전문 中
《송사》 전문 中
건흥(乾興) 원년(1022) 2월에 한조(韓祚) 등이 인사하고 고려로 돌아가니, (고려 왕) 왕순(王詢, 현종)에게 예전과 같이 (물품을) 하사하였다. 마침 진종(真宗)이 붕어하자 또 (진종의) 유물을 싸서 왕순에게 내려주었다.
《송사》 전문 中
《송사》 전문 中
3. 신라계 중용?
현종이 서경을 좋아한 목종이 시해당한 후 보위를 이었다는 것과 신라계를 외척으로 가진 왕욱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신라계를 중용했다는 일부의 견해도 있다.하지만 목종 재위기에 관직에 나선 인물들이 현종 재위기에도 중용되었다는 기록을 종종 찾아볼 수 있고, 아버지 외가보다 더 가까운 현종 본인의 외가는 고구려계 패서 호족 황주 황보씨였다. 사촌 형이자 외삼촌인 성종의 딸들과 혼인을 맺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오히려 현종은 이들 세력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목종은 서경을 옛 서주 왕조의 수도인 호경으로 개칭하고 남달리 여겼는데 그 호경에 목종 폐위를 주도한 강조가 서북면(西北面) 도순검사(都巡檢使)로 있었다. 결과적으로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키기는 했지만, 어쨌든 강조 역시 목종의 최측근이었다는 것만은 자명한 사실이다. 목종은 김치양 일파가 득세하여 황권을 위협하자 현종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 최우선으로 보호하려고 했고, 현종 역시 김치양 일파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 서신을 보내 위급을 알리고 보호를 요청하기도 했다. 즉 목종 폐위와 현종 즉위는 목종 지지 세력과 현종 지지 세력이라는 2개의 정치 세력이 충돌하여 빚어낸 결과가 아니라, 목종 지지 세력이라는 하나의 정치 집단이 자기들끼리 정치적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결과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실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종, 김치양, 유행간을 포함해서 7~8명에 지나지 않았고 귀양을 간 사람도 30여명에 불과했다.
현종은 서경 장락궁에 성용전을 지어 태조를 숭배하는 신전을 지었을 뿐더러 개경 황성을 지을 때 서경 황성도 같이 짓는 등 꾸준히 서경을 우대해줬다. 서경에 있는 동명왕묘와 목멱사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던 임금도 현종이며, 현종이 세 아들 중 장남인 덕종은 '연경군'에 봉해졌지만, 이후 둘째 정종은 '평양군', 셋째 문종은 '낙랑군'으로 봉했는데, '평양'은 말하 것도 없고, '낙랑'은 옛 평양 일대에 있었던 군 혹은 국가였다. 여기에 더해 현종이 중용한 이자림, 유소, 최충은 모두 서경 및 북방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인물들이었다. 이를 봐도 현종이 서경파보다 신라파를 우대했다고 보긴 힘들다.
신라의 옛 수도인 동경(東京)을 폐지하고, 경주로 격하한 임금도 바로 현종이었다. 당시 현종은 수도의 행정구역인 개성부(開城府)도 폐지시키고, 상서성에서 총괄시킬 정도로 수도제 개혁에 열을 올렸는데, 개경과 서경만 남기고 개성부와 동경을 격하해 없애버린다. 이 행정구역 정리만 봐도 현종이 신라계에 치우쳐졌다는 평은 옳다고 보기 힘들다.[1] 그리고 현종 3년에 동경에서 격하된 경주는 후 5년에 '안동대도호부'로 바뀌고, 풍수지리에 좋다는 조언에 따라 현종 21년 동경으로 다시 승격된다.
현종이 그렇다고 고구려만 일방적으로 우대하고, 신라 측을 핍박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고려 초기에 벼락을 맞아 훼손되어 한동안 그 상태로 있었던 경주시의 황룡사 9층 목탑을 고쳐 지은 것이 현종이다. 수도 개경에 있는 사찰보다 높은 황룡사의 9층 목탑을 복구하는 것은 상당한 국가예산이 들었을 것이며, 고려시대 여러 문인들의 경주 답사기를 보면 옛 왕도의 상징으로서 계속 등장한다. 현종 본인의 혈통도 그렇듯 구 삼국 중 어느 한 나라에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는 시각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한참 뒤 인물인 김부식이 나중에 《삼국사기》를 지으며 현종이 '경순왕 김부의 음덕을 받아 제위에 올랐다.'면서 칭송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김부식이 옛 신라 쪽 혈통이라 자기 가문을 띄우려고 그랬던 것 정도에 불과하다. 김부식을 경주 김씨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강릉 김씨, 통천 김씨 등 다른 김씨일 가능성도 있다. 이들 역시 신라 김씨 왕실의 혈통을 이었기 때문. 즉, 신라계가 현종을 띄워주었던 것이지 현종이 신라계를 띄운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
4. 많은 부인과 자식
목종이 충주로 유배를 가던 도중 적성현에서 강조에 의해 시해당했고, 훗날 현종이 적성현에서 공격당할만큼 목종의 죽음과 현종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있었다. 또한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정변이 거란 제2차 침공의 명분이었으며, 강조는 후세의 꽤 우호적인 평가와는 달리 엄연히 《고려사》 <반역 열전>에 실린 인물이다. 즉 강조가 즉위시키고 그가 섭정까지 한 현종이 목종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이었던 것. 현종 역시 즉위 초에는 기반이 미약했고, 이를 강화하기 위해 중앙 귀족, 지방 호족들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해야 했다.예를 들어 현종은 제2차 여요전쟁 당시 나주 지역과 공주 지역으로 몽진하면서 이 지역 호족들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나주로 몽진한 이유에는 여러 해석이 있는데, 가장 설득력있는 설은 그의 조부인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배후지였던 나주를 무력으로 접수하면서 본격적으로 권력에 다가가기 시작했고, 그의 2비이자 제2대 대왕 혜종의 모후인 장화왕후 오씨의 고향 역시 나주였던 것으로 인해 고려 황실에 있어서 근거지와도 같은 곳이었기에 그 곳으로 향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현종의 수행원은 50여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몽진 당시 전주의 조영겸의 반란을 겪은 1011년 8월, 형부(刑部)가 조용겸 일당이 현종의 피난 행렬을 놀라게 한 죄를 지었으므로 귀양을 보내라는 건의를 하자 현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이는 기록이 있다.
현종은 나주에 머물다가 다시 바로 전주를 거쳐 공주로 이동하는데 현종은 전주에 머무르는 7일 동안 무력으로 조용겸 일당을 진압하고 체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진압 과정에는 몽진 과정에서 떨어져나간 현종의 친위세력보다는 현종이 머물던 호남 일대의 군사력이 뒷받침되었을 것이다. 나주로부터 왕의 위엄에 걸맞은 군사적 보호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조용겸의 소행에 대한 추측은 지나치게 과장된 듯 하다. 조용겸이 군사를 일으켜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고, 무례를 범한 조용겸 일당을 당일 하룻밤만에 불러들여 굴복시켰다는 기록이 있을 뿐으로 죄목 또한 임금의 행차를 놀라게 한 죄이다.
그리하여 현종의 후비는 7명의 왕비와 6명의 후궁이라는 태조 이외의 국왕으로선 초월적 숫자를 자랑한다. 확인된 숫자 기준으로 혜종이 1왕비 3후궁, 정종이 2왕비, 광종이 1왕비 2후궁, 경종이 4왕비 1후궁, 성종이 2왕비 1후궁, 목종이 1왕비 1후궁이다. 이는 현종의 기반이 약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저 7명의 왕비 중에서 2명이 성종의 딸[2]이고, 3명은 현종이 피난갔던 공주 절도사 김은부의 딸이다. 위에서 언급된 경주 김씨와 호남 세력의 공집합이 바로 이 김은부이다. 현종은 친가가 신라계의 핏줄을 받았고, 외가가 고구려계 패서 호족인 황주 황보씨이면서 처가가 백제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