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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아돌프스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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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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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허버트 아돌프스 밀러
Herbert Adolphus Miller
파일:허버트 아돌프 밀러.jpg
출생 1875년 6월 5일
미국 뉴햄프셔 캐롤카운티 터프턴버러
사망 1951년 5월 6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블랙 마운틴
학력 (졸업)
약력 브린 모어 대학 교수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3. 한국 독립운동 지원

1. 개요

미국의 사회학자. 195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허버트 아돌프스 밀러는 1875년 6월 5일 미국 뉴햄프셔 캐롤카운티 터프턴버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9년 다트머스 대학을 철학과 1등으로 졸업했고, 다트머스 대학교에 재학하는 동한 미국 최초의 사회학 교수 중 한 명인 데이비드 콜린스 웰스와 함께 인종학 및 사회학 수업을 받았다. 졸업 후, 밀러는 피스크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여 그리스어와 체육을 가르쳤다. 몇년 후, 그는 피스크 대학의 이사로 부임했다.

피스크 대학에서 3년간 활동한 후, 그는 인종 문제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 접근법을 형성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으로 진학하여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R.M.예크스 교수의 제안으로 남부의 흑인과 백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련의 지능 검사를 실시했다. 또한 그는 햄프턴 교육기관과 칼리스 인디언 스쿨에서 수백명의 인디언들을 대상으로 이 시험을 실시했다.

1905년 '정신물리학과 인정문제' 논문으로 하버드 대학교 박사학위를 받은 밀러는 미시간주 올리베트 대학에 진학하여 10년간 철학과 사회학을 가르쳤다. 1911년 그는 W.I. 토마스 교수를 만나 인종에 관한 토마스의 관점이 자신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고 여기고 여름과 가을 학기 동안 토마스 교수가 재직하고 있던 시카고 대학에 진학했다. 이때 그는 체코 출신 이민자들과 알게되고 그들의 배경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품었다.

1912년 여름, 밀러는 체코 소콜(Sokol) 체조 대표단과 함께 보헤미아를 방문했다. 그는 즉시 프라하의 찰스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떤 존 마사릭 교수를 만났고, 폴란드, 러시아, 핀란드를 잇달아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미국 사회학회에 논문을 게재했는데, 이 논문에서 유럽 전역에 걸쳐 민족주의가 팽배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조만간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예언했다. 1914년 사회학을 가르치기 위해 오벌린 대학 교수로 부임한 그는 1915년 러셀 세이지 재단의 요청을 받고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학교들을 조사하여 '학교와 이민자'에 관한 보고서를 집필해 1916년에 출판했다.

1917년, 밀러는 카네기 회사로부터 이민자들을 미국화시키기 위한 방법에 대한 연구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따라 그는 연구에 참여했고, 그 결과 '구세계적 특성 이식'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이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밀러는 오하이오주 칠리코테의 셔먼 캠프로 불려가 미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국적 단체 회원인 수천 명의 "적"들의 처분에 대해 사령관에게 조언했다. 그는 1918년 필라델피아에서 중유럽연합을 설립하고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선언서 집필을 돕기도 했다. 또한 폴란드 초대 수상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와 교류하기도 했다.

1924년, 밀러는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저서 '인종, 국가, 계급'을 발표했다. 그는 이 책에서 소수 집단에 적용되는 수직적, 수평적 집단과 억압적 정신병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 후 오하이오 주립대학에 재직하는 동안, 그는 인도에 가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관찰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유색 인종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고 오하이오주 윌버포스 대학을 방문하는 동안 유색인종 학생들과 춤을 춘 것이 물의를 샀고,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는 1931년 밀러를 해임하고 몇 년 동안 그의 저서를 검열 대상에 올렸다.

밀러는 오하이오 주립대를 떠난 후 2년 간 여행을 하고 강의를 하며 '내일의 시작'을 썼다. 이 작품은 1933년에 출판되었다. 그 해에 그는 브린 모어 칼리지에서 교수로 부임하여 1940년 은퇴할 때까지 역임했다. 이어 템플대,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벨로이트대에서 다양한 학기를 가르쳤다. 1943년 1월, 그는 1947년 9월까지 블랙 마운틴 칼리지에 다녔고, 따라서 밀러 교수는 정년 퇴직 후 7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1940년~1943년 여름, 밀러는 미국 친구 서비스 위원회의 주최로 "난민 학자들을 위한 미국 세미나"를 지휘했다. 그는 갓 도착한 수백 명의 유럽 학자들이 뉴햄프셔에 있는 캠프에 머무를 때 그들과 대화하면서 처음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실제적인 인상을 받았으며, 또한 학자들이 말하는 영어의 기초도 함께 받았다. 밀러는 종종 이 시기가 그의 전 생애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기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후 여생을 조용히 보내며 2차 세계대전을 진단하는 내용이 담긴 회고록을 집필했지만 미출간되었고, 1951년 5월 6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블랙 마운틴에서 사망했다.

3. 한국 독립운동 지원

밀러는 1919년 4월 14~16일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의회에 참석하여 첫째날 오전에 연설자로 나서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한국의 3.1 운동을 지지하고, 한국인들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자유를 위해서 싸우겠다고 한 것에 감동하였다. 그리고 독립이라는 한국인의 이상과 목적 실현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세계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 남녀가 협력해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1919년 5월 16일 필라델피아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를 결성할 때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는 회장 톰킨스 목사와 함께 5월 23일 필라델피아 음악아카데미에서 한국친우회 행사를 개최하고, 한국의 평화로운 3.1 운동을 지지하였다. 또한 일제의 탄압 정책을 강력히 규탄하며,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 근거한 미국 정부의 우호적인 거중조정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이를 미국 대통령과 상원에 전달하였다.

1920년 3월 1일과 1921년 3월 1일, 1922년 3월 1일 오벌린대학 한국인 유학생들이 주최한 독립선언기념식에 참석한 밀러는 선언서를 낭독하고, 학생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다. 1923년에는 태평양 연안에 사는 모든 민족의 평화와 행복을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범태평양회의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1929년 8월 27일 신간회 경성지회 주최로 서울 천도교기념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세계 평화의 화인(禍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일본 경관이 강연장을 둘러싸자 “나는 이때껏 경관에게 포위되어 강연한 일이 없다”고 강연을 중단하고 “이 사실을 미국신문에 게재하겠다”고 분개했다.

1940년 브린모어대학(Bryn Mawr College)에서 은퇴하였다. 1942년 1월 1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미국의 유력 인물들로 조직된 한미협회 전국위원회 위원 및 이사로 활동했다. 여기서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활동을 지지하고 이를 미국 정부에 촉구하는 등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1950년 허버트 아돌프스 밀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