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 |
출생 | 1886년 2월 18일 |
평안남도 강서군 | |
사망 | 1934년 8월 24일 (향년 48세) |
일본통치시대의 조선 |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그는 어릴 때 가정에서 공부를 하다가 1901년 증산군의 공립소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1905년 진남포에서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하와이로 이주한 후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을 하면서도 윤병구, 정원명 등과 함께 친목회를 조직했다. 친목회는 처음에 어려운 한인동포들의 환난상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국권회복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1907년 5월에 『친목회보(親睦會報)』를 간행하였다.
또한 1906년에는 윤병구, 이태수, 강영소 등과 호놀룰루에서 공진회라는 국권회복운동 단체를 결성하였고, 1910년 국민회가 대동보국회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였을 때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총무를 맡아 활동하다가, 미본토로 이주하여 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서기, 1914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대의원·학무원 등을 각각 역임하였다.
1912년 3월에는 신한민보사 사무원으로 있었고 1913년 센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와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흥사단을 조직했다. 1914~1915년 북미지방총회 총무를 맡았으며, 1916년과 1920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독립운동의 연락과 일치된 행동방침을 마련하기 위해 강영소와 황사용(黃思溶)을 하와이에 특파하였다. 이들은 1919년 6월 4일 하와이에 도착하여, 하와이지방총회와 대조선독립단의 합동에 노력하여 그 해 7월 18일 합동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그 후 강영소는 1922년 신한민보사 편집장과 독립신문사 하와이 지국장을 맡았고, 1930년 2월 시카고 대한인공동회 재무, 1930년 11월에는 신한민보사 시카고 지국장을 지냈다. 이후 그는 시카고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꾸준히 전개하다 1934년 8월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