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78년 10월 8일 |
충청도 연산현 두마면 (현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 | |
사망 | 1932년 2월 1일 (향년 53세) |
중화민국 봉천성 관전현 (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만주족자치현) | |
본관 | 남원 양씨(南原 梁氏)[2] |
이명 | 임창주(林昌周), 양인원(梁仁元) |
호 | 하산(荷山)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1호 |
상훈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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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독립군을 이끈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78년 10월 8일 충청도 연산현 두마면(현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에서 태어났다.대한제국 말 공주군수를 지내는 등 관리를 지내다 1910년 국권침탈이 벌어지자 관직을 버리고 서간도로 망명한다. 양기하가 망명한 곳에는 의병장이었던 유인석이 동료들을 이끌고 망명해 있었고,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의병 및 독립군 양성에 노력한다.
1915년에 유인석이 죽자 양기하는 남은 의병세력을 이끈다. 1919년 3월, 3.1 운동이 벌어지고 이 기회를 토대로 의병세력들을 모아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여 무장 항일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3.1 운동의 여파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양기하는 임시정부 관할의 남만주 독립군 단체들을 모아 광복군사령부를 결성하고 선전부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면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3] 결성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양기하는 이승만의 노선과 맞지 않아 갈등을 벌였고, 불신임안까지 제기하는 일까지 벌어져 만주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거기서 참의부 교육위원장을 지내고 국민부,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을 결성하며 만주의 무장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항일운동에 앞장선다. 1932년 1월 19일 신빈 사건(新賓事件)[4]이 발생해 무장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부가 와해될 위기에 처하자 양기하는 강경론을 펼쳐 다시 한 번 지도부를 모아 단체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같은 해 2월 1일에 펑톈성 관전현(寬甸縣)[5]에서 만주군 및 일본 제국 경찰대와 총격전이 벌어졌고, 교전 끝에 수십명의 동지들과 함께 전사 순국했다.
그 후 1995년 6월 22일 중국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봉환해와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하였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115~116p